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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은, 청각이 다양한 세계를 경유하는 방식들
    REVIEW/Visual arts 2026. 5. 5. 20:34

    김영은, 《올해의 작가상 2025》 전시 전경. ⓒ 김영은.

    김영은의 작업들 대부분은 청각의 자리를 시각의 그것보다 앞세우는데, 이는 빈 배경 위에 적히는 자막이 거의 유일한 시각적 기표로 자리함을 의미한다. 사운드는 언어를 명시하는 목소리와 그 밖의 비언어적 소리로 나뉠 수 있는데, 이는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 화면을 대부분 잠식하고 이끌어가며 그것에 대한 단일한 주체의 의지가 투여됨을 의미한다. ‘미래의 청취자들에게’ 시리즈〈미래의 청취자들에게 III〉(2025. 단채널 비디오, HD, 컬러, 사운드(스테레오), 12분.), 〈미래의 청취자들에게 I〉(2022. 단채널 비디오, HD, 컬러, 사운드(스테레오), 8분.)는 다른데, 이는 그것이 내레이션이 주축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사운드 편집 소프트웨어들을 사용해 목표로 한 사운드를 변용시키는 스크린 녹화 영상이 시각의 자리를 차지하며, 소리의 시각적 가시화의 과정을 노출하며 시각의 자리가 전면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시화는 소리를 툴 안의 시각적 반경으로 보여주면서 동시에 소리를 조작하는 과정인데,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변형된 소리로서 재생된다. 곧 소리의 변용을 위한 소리의 가시화는 시각 차원에서 매개되며 접근된다. 이것은 소리를 소리 그 자체로서 다루는 것과는 물론 다르며, 그것의 비수월성까지를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러한 시각적 매개가 소리라는 독특한 감각에 대한 접근을 수월하게 한다는 점에서 대신 청각의 독특한 위치를 전제한다. 곧 소리를 하나의 시계열의 양상 안에 포획하고 분절하지 않는다면, 곧 시각화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떻게 (‘정교하게’) 변형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는 소리를 재감각할 수 있는 것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의미의 변용까지를 수반한다.

     

    그러니까 이 시각장은 목소리로 소급되거나, 목소리로부터 추출되는 내용 전반에서 물러난 2차원의 평평한 기계 화면의 잉여적 시간에 불과하지만, 소리를 말하는 목소리의 권능을 소리의 조작을 매개하는 툴을 다루며 소리를 재생산하는 기술적 역량, 곧 소리에 대한 권능을 합치시키는 차원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시각장이다. 그것은 매체를 사용한 사운드의 조작 과정이 다시 언급하겠지만, 역사의 불합리한 기입을 재기입할 수 있는 차원에서 예술의 권능을, 효과를 확인함을 의미한다.

     

    곧 잉여로 덧붙는 것 같은 이 시각장은 공고한 역사를 물리적 차원에서 그 자체로 전복하는 예외적인 예술의 힘을 보여준다. 동시에 역사의 물리적 다시 쓰기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그러니까 유성 실린더에 녹음된 소리들이 가진 그 자체의 지표성을 바꿀 수는 없다는 점에서, 그것은 상상적 차원에서 역사를 물질화하면서 역사에 대한 전복의 쾌감을 선취한다. 그렇지만 이는 실제가 아닌 실재적인 차원에서 역사의 수정으로, 다만 그것은 예술이라는 상상적 조작과 구성의 차원에서 가능한 것이다.

     

    김영은은 이민 여성의 역사 기술에서 구술 기록의 차원이 더 큰 한계성을 띠고 있음을 주지하는데, 인터뷰 참여자의 여성 비중이 1/3이 되지 않는 것이, 실제 더 많은 여성 이민자의 역사적 현실을 은폐하기 때문이다 〈미래의 청취자들에게 III〉. 하지만 그것은 자료의 실재적 성격에 주목하고 있는 발화―이 말 자체가 ‘문자’ 차원에서 역사 기술이 가진 남성 위주의 편향성이 덜 심각하다는 것의 증거는 되지 않는다.―이며, 이때 작가가 시도하는 소리의 가시화와 재가시화 전략의 차원이 의미화된다. 이민자 역사는 이중으로 왜곡되는데, 먼저 남성 우위의 역사 기록의 산물로서, 그리고 “고용인과 식민지 개척자의 관점”이 반영되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김영은, 〈Go Back To Your〉, 2025, 단채널 비디오, 4K, 컬러, 사운드(스테레오, 앰비소닉), 10분. 작가 제공. ⓒ 김영은.

    아마도 마지막 말은 핵심적인데,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아서 특정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특정되기 않기 위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다’라는 것이다. 하나의 구문을 굴절시키는 과정에서, 두 개의 주체가 소거되어 있는데, 곧 가시성의 비가시화를 산출하는 권력의 주체에서, 비가시화를 선택하는 하위주체의 삶의 양식으로 전환된다. 이는 〈Go Back To Your〉(2025. 단채널 비디오, 4K, 컬러, 사운드(스테레오, 앰비소닉), 10분.)의 전면에 놓이는 주제로, ‘너네 나라로 돌아가라’라는 자민족 중심주의적이자 인종차별적 발상은, 그 반대편에 놓인 아시아 비백인 존재에게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힐난하는 상징적 차원의 어구로서 반복되며 화자를 지속적으로 침입한다.

     

    이를 “주문”으로 명명하는데, 그것은 무엇보다 효과를 상정하는 말이기 때문이겠지만, 폭력의 효과를 언어적 전략으로서 봉쇄하는 차원에서 내재적 차원의 다른 효과까지를 전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곧 나를 향한 주문을 나에 대한 주문으로 소급시키는 것인데, 이러한 전략의 비가시성은 영상 전반을 통해 추정 가능한 부분이다. 나를 멈춰 세움으로써 지연시키는 알튀세르적 호명의 비난은 언어의 간극과 언어 자체의 간극을 동시에 유도하는데, 이는 반 박자 느린 반응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의 폭력에 대처할 수 없는 언어적 공백을 가질 때 언어가 소거된 공간이 만들어진다.

     

    여기에 시각적 장면이 투여되지 않고 청각의 우위를 가져가는 건 탁월한데, 소리는 시각적 지시점을 오직 중앙 자막에 근거해서 오직 그 ‘바깥’으로부터 투여되기 때문이다. 곧 시각적 표지점으로서 자막이 있지만, 소리가 어디서 출현하는지까지는 우리가 미처 확인할 수 없는데, 돌비 시스템을 활용해 머리 뒤쪽에서 울리는 예외적 소리가 있지만, 전반적으로 사운드는 그 위치를 은폐한다, 시각 장면을 소거함으로써. 그리고 이는 시각 우위의 감각 체계에 따른 결과로, 이 감각 체계의 비틀리는 실제의 순간을 출현시키기 위해 거꾸로 시각의 소거는 또한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바다. 이는 취약한 화자를 둘러싼 외부의 공격을, 그 효과를 고스란히 체현한다.

     

    이때 들리는 것의 우위가 발생한다. 말의 상징적 주문으로서 고정됨 아래, 권력 주체의 시각화가 뒤따르고, 그것을 보기보다 듣는 자의, 그 보기의 권역 아래 있는 소거되어야 하는 하위 주체의 수그러든 듣기만이 자리하게 된다. 때로 작가는 그 말의 주문적 강력함을 강조하기 위해 자막을 포기하는데, “Go back to your country”라는 또 다른 주문의 반복은 소리의 생생함으로만 남는다. 팬데믹 이후, 마스크를 쓰고 나서의 기침은 ‘주문’을 새로운 차원으로 가시화하는데, 그것은 양가적이다.

     

    곧 모두가 마스크를 쓰는 것으로 인한 침묵의 언어 지향과 일종의 외모의 평탄화 차원이 ‘주문’의 언어를 감소시킨다고 가정할 수 있다면, 그럼에도 담배를 피울 때 담배를 소거하더라도 담배를 피웠음의 지표적 확장에 의한 추론이 가능한 것과 같이, 여전히 ‘나‘는 지배 문화 바깥으로 식별하는 ‘주문’을 먼저 거는 자의 그 시각 권역에 전적으로 종속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여기에는 또 다른 현실의 맥락, 곧 팬데믹이 중국에서 유래했다는 것에서 증폭된 아시아 혐오로의 환원적 차원 역시 그 “주문”의 주기가 오히려 짧아진 것 또는 보편화되는 것에 대한 원인으로, 언급되지 않지만 전제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시각의 조망적 차원의 분별적 권능을 청각의 직접 타격하는 역량과 구별하면서 후자의 차원에서 ‘나’를 초점화한다. “너는 나를 보듯이 듣고 있잖아 / 마치 나를 듣는 것이 나를 보고 있는 것처럼”은 시각 권능의 지배 주체의 감각 체계와 거기에 전제된 선입견으로서 피지배 주체에 대한 중심적 이미지의 우위가 후자에서 언제나 듣기의 차원을 잠식함을 의미한다. “너”가 “나”를 어떻게 듣는 것인지는 드러나지 않지만―오직 나의 명백한 너의 듣기만으로 일관되지만―, 그것은 고유한 듣기, 있는 그대로의 듣기의 차원을 무력화하는 차별적 차원으로 환원되는 듣기일 것이다. 곧 너의 보기가 너의 듣기를 무력화한다면, 너의 듣기는 너의 보기로부터 유래한 듣기라는 지점에서 후자는 전자의 근거를 위치 짓는다.

     

    김영은, 〈미래의 청취자들에게 III〉, 2025, 단채널 비디오, HD, 컬러, 사운드(스테레오), 12분. 작가 제공. ⓒ 김영은.

    〈미래의 청취자들에게 III〉의 경우, 20세기 초 녹음된 미국 이민자의 노래를 여성 주체의 것으로 바꾼다면, 그보다 바꿀 수 있음을 보여준다면, 그리고 소리는 의미를 매개하는 투명한 지표적 근거로 전제된다면, 〈미래의 청취자들에게 I〉의 경우, 오히려 매체적 변용이 원본을 훼손하는 차원에서 역사적 원형과 과거 매체의 취약함이 극단적으로 결부됨을 보여준다. 곧 매체에 따른 역사에 대한 필연적인 낮은 해상도의 기술로서 역사의 원형을 호출해, 상상적으로 훼손하며 대체함으로써 오히려 역사가 아닌, 매체(와 매체의 변용 툴) 자체로 소급한다.

     

    곧 민족지학적 녹음의 견지에서 왁스 실린더 유성기로 녹음한 원주민의 곡, 그중 한국 전통음악 〈사랑노래 – 아리랑 1〉을 노이즈 리덕션 플러그인을 활용해 소음을 줄여나가며 그 소리를 더 생생한 것으로 감각케 하고자 하는 과정은, 원본을 더 납작하게 깎아나가는 것이 된다. 〈미래의 청취자들에게 III〉가 과거를 비판적으로 인식하며 ‘교정’하는 진취적 태도를 띤다면, 〈미래의 청취자들에게 I〉는 역사의 취약한 보존 매체의 특성을 살피면서 과거의 차원을 현재화하고자 하지만, 곧 과거를 되살리고자 하지만, 그것의 무용함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소리 보존 자체의 전통적 강박의 자세를 연장한다.

     

    〈붉은 소음의 방문〉(2018. 단채널 비디오, 4K, 컬러, 사운드(스테레오, 바이노럴), 12분 14초.)은 붉은색 화면으로 거의 점철되는데, 이는 “왜정 때 주민들 감시하려고 만든” “붉은 망루”에서 기인한다. 그때 친 종은 경고와 지배의 차원에서 기능하는 사이렌과 연속되는 기호를 구성하며, 이는 이후, 해방 후의 사이렌에 이어, 통행금지 사이렌이라는 작업의 주요 소재를 선취한다. 문화인류학적 차원의 발화들은 통행금지 시절과 그것이 풀리고 난 이후의 시점을 증언한다. 그사이에 기관실을 아마도 밑에 둔 선박 위에 탑승해서 KBS 라디오를 듣던 화자의 경험이 삽입되는데, 여기에는 찰나의 무의식적 차원의 선택이 개입되며, 여기에는 두 다른 장소와 이념의 기점과 하나의 필연적 선택이 따른다.

     

    곧 KBS는 처음 그 위치에서 평양방송으로 전이되었다 다시 돌아온 최후 청각적 위치로, 이 라디오 주파수 변경의 회귀는 그 선박의 위치가 북한에 가까웠음의 물리적 증거로 기입되는 동시에 두 다른 이데올로기 중 하나의 강제된 선택을 명시한다. 이는 다소 모호한데, 갑작스럽게 끼어들어서 마저 해소되지 않은 채 중단되는, 그야말로 이중적 차원에서 중간에 ‘정박’된다는 것이다. 이 화자의 특수한 위치는 곧 해명되지 않고 ‘의도적으로’ 그 누락됨의 차원에서 떠오르는 것에 가까운데, 그의 자각할 수 없는 위치성, 동시에 남과 북의 경계로서 표지되는 이데올로기적 차원에서의 위치성을 보여주면서 전자가 후자로 환원됨을 보여준다.

     

    그가 그 자신의 위치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없지만, 이념적 위치성은 분명하게 재고하는 것처럼, 그를 둘러싼 환경은 그의 완전한 종속과 지배, 마치 결박된 채 사이렌의 소리를 견디던 오디세우스의 신화를 떠올리게 하는데, 대신 그는 항거할 수 없는 듣기의 권능으로부터 방어할 해결책을 갖지 못한다. 그 지점에서 라디오는 “덜덜덜 윙 퉁퉁퉁” 하는 자신의 바로 밑의 소음을 방어하는 하나의 전략일 수 있다.

     

    김영은, 〈붉은 소음의 방문〉, 2018, 단채널 비디오, 4K, 컬러, 사운드(스테레오, 바이노럴), 12분 14초.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작가 제공. ⓒ 김영은.

    그는 그 소음과 함께 고립되어 있다. 동시에 소리 안에 온전히 잠겨 있기도 하다, 곧 소리 안에 고립되어 있다. 그것은 의도적으로 선택된 적극적 청취에 따른 고립이다―곧 소음과 소리는 어떤 하나를 완전히 배제하지 않는다는 전제(둘 다 소거할 수 없고 따라서 동시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가정) 아래 다만 주의를 옮겨가는 것으로써 대체될 수 있을 뿐이다. “북으로 가는 공작선에서 KBS를 듣는 기분은 아무도 모른다. 고향이 옆에 있는 것 같았다.”라는 그의 말은, 남북 이데올로기의 시점을 표기하는 가운데, 이 고립된 주의의 증폭된 매체의 힘을 증명한다.

     

    이 고립, 청각적 심상이 고립된 장소에서 증폭되는 장소로서 “고고장”은 이 어색한 절합의 차원을 시각적 표지의 소거 아래, 밀접한 몸의 체현으로 연장한다. 그 결과 선박 안의 존재는 모호함 그 자체로 남게 되는데, 그것을 둘러싼 고고장 안의 존재는 욕망의 차원에서 모호하게 드러난다. 곧 새벽 4시간 동안 고고장에서의 춤은 반동의 직접적 차원이지만, 금제된 욕망의 일차(원)적 해소에 불과해 보인다. 오히려 이는 법, 곧 대타자의 금지에 따른 비가시화된 사회 영역에 대한 관음증적 욕망의 자리를 남겨두는데, 그것은 금지가 욕망을, 환상의 장면을 연출하기 때문이다.

     

    이는 화자가 통행금지가 풀린 날 새벽 2시의 종로의 모습을 그야말로 목격해보고 싶어 새벽 거리를 활보했지만, 막상 어떤 쾌감도 느끼지 못함을 토로하는 허무한 결말로 귀결된다. 이 금제된 욕망의 공허한 해소와 같이 〈붉은 소음의 방문〉은 그 통치 이데올로기를 체현하는 상징적 청각의 지표를 그 이데올로기를 내파하며 가로지른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허무한데, 그것은 전적으로 법이 사라진 자리가 자유로 자리매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 주체의 미약한/가짜의 깨달음은 실재의 자리는 밋밋하고 아무런 매력이 없다라는 것에 머문다.

     

    이데올로기든, 통치자든 그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시대를 관통하는 시점에서, 사회적 차원의 소리 지표로써 기입한 역사를 응결시키는 이 지점은, 대타자의 금지로부터 반대급부로 생겨나는 욕망의 차원을 크게 두 개의 구체적 일화를 통해 일관되게 보여주는 ‘하나’의 서사를 그 통치 서사의 물리적 종결 아래 주체의 서사로 변환해 내지 못하면서, 역사를 그 통치 사운드 안의 반경 안에 가둬 둔다.

    그것은 물론 미시사적 경험들 자체의 재현 차원에서, 그리고 역사를 청각의 차원에서 새롭게 가시화한다는 점에서 흥미롭지만, 이는 소리를 나아가 그것을 경유해 드러나는 역사를 수동적 청취 아래 고정시키는 게 아니라 역사의 다시 쓰기를 위해 소리 자체를 전유해 변환하는 적극적 청취의 〈미래의 청취자들에게 III〉와는 대별되는 것―어쩌면 태도인 것―이다. 물론, 이 둘은 물론 직접적인 비교 대상이 될 수는 없는데, 이 후자의 역량 역시 물론 전자의 직접적 비판으로부터 수립되는 건 아니다.

     

    김영은, 〈듣는 손님〉, 2025, 단채널 비디오, 4K, 컬러, 다채널 사운드, 38분. 작가 제공. ⓒ 김영은.

    여기에는 더 근본적인 분별이 있는데, 전자가 민족지학 차원에서 리서치와 그것의 엮기를 관찰자적 시점에서 개입하지 않으며 시도한다면, 후자는 문헌학적 연구 차원에서 저자의 시점에서 담론 행위, 일종의 비판적 차원에서의 수행을 실천한다는 것이다. 〈듣는 손님〉(2025. 단채널 비디오, 4K, 컬러, 다채널 사운드, 38분.)은 〈Go Back To Your〉에서 이주민의 피지배적 위치를 경유해, 민족지학적 탐문은 이주민을 비롯해 다양한 타자의 형상에 접근하면서, 그것을 취한 작가의 정치적 태도를 보여준다.

     

    전시 안에서 예외적으로 〈듣는 손님〉은 다큐멘터리에 가까운데, 그리고 무엇보다 시각적 차원에서의 주의를 함께 끄는데, 이러한 매체적 초점의 변경은 그들은 일관되게 어떤 소리 자체에 대한 발화를 하고 있지만, 그 직접적 형상이 주는 생생함, 다른 현장의 고유함이 무엇보다 작가 스스로에게도 새롭고 낯설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그것을 정제할 필요가 없기보다 정제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통시적 차원의 시간을 벗어난 필드워크 안에서 펼쳐지는 직접적인 다성부적 발화는 이후 어떤 미래를 향하게 될까는 하나의 의문으로 남는다.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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