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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파, 《GORE DECO》: 깊이, 구멍, 말을 차폐하는 절편적 기호의 증식REVIEW/Visual arts 2026. 4. 24. 21:03

장파, 《GORE DECO》 전시 전경[사진 제공=국제갤러리](이하 상동). 《GORE DECO》를 통해 새롭게 도입된 가장 눈에 띄는 요소는 타투이다. 실크스크린으로 처리된 이 부분은 그야말로 신체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찍힌 것인데, 이는 역설적으로 핏빛 내장으로서 피부에 또다시 파고들어 녹아든 지표적 흔적으로서가 아니라 그림과 분리되는 순수한 기표들의 놀이로서 회화 ‘위’에 쌓이며 그것을 회화로 (자신을 타투라는 이미지―이는 일종의 접착된 스티커다.―로) 지시한다.
앞서 끊없는 내장의 연결망으로 직조된 작가의 시그니처와도 같은 화면은 작가가 이야기한 “남성적 숭고”, 아마도 팔루스적 신체 기관의 독립된 지위와 그것의 지배성을 부정하고 비판하려는 차원에서 이뤄지는 육체의 절편화, 증식하는 절편들, 절편들의 연결-접속의 체계, 조망되지 않는 세계로서 육체를 가설하는 것으로써 여성적 혹은 퀴어적 비체를 구성하는 것으로, 어떤 운동적 이념을 향하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이 위와 아래가 없는 세계, 배경이 없는 혹은 배경을 초과하는 육체의 세계, 곧 초과된 형상만의 세계, 조망과 판별을 불가능하게 하는 이 신체의 일부에 대한 클로즈업은, 그 세계관을 표명하는 이념형으로서, 그 세계로의 침잠을 ‘거부’케 했는데, 이는 무엇보다 그것들이 하나의 형상을 이룬다기보다는 각각의 형상-배경 자체로서 절편들의 연결-접속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소위 깊이라는 것은 대등한 동시에 다만 그것들이 쌓인 표층으로서 그 피부를 확인하는 것에 가까웠다.
곧 높이의 거부는 깊이의 거부로 이어지는데, 이때 여성 신체의 특이성, 팔루스의 전도된 기호로서 ‘구멍’은 역설적으로 자체의 깊이를, 그러니까 3차원으로서 높이를 수여할 수 있는 예외로서 예민한 과제가 될 수밖에 없다. 곧 피부 없는 내장, 내장으로서 피부라는 신체의 까뒤집음으로써 표층에서, 예외적으로 자리하는 이 구멍은 그 자체의 세계관에 입각해 깊이를 소거하거나 부인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이 어찌 됐든 ‘최소한의’ 깊이를 가진다면, 그 안에는 무엇이 자리 잡는가1.
가령 그건 검은 구멍으로 남는다. 그 속에 또 다른 무엇이 있을까. 숭고의 거부는 모든 것의 표층화로 연장되는데, 이때 비의적으로 남는, 비밀의 차원을 유지하는, 형상과 배경의 분리적 나눔을 수여하는 이 구멍은, 분명한 예외로서 까다로운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사실 그건 어딘가로 들어가는 포털로서 느껴지기도 하는데, 붉은 피부 위에 덧발라진 검은색으로써 그것은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에 그 안으로 들어감을 철회시킨다. 또는 차마 지우지 못한 피부로 남는다―어쩌면 검은색 타투는 이 침잠의 위험과 구멍이 가리키는 저 너머, 바깥 세계에 대한 해석의 위험을 덮기 위한 방어 기제는 아닐까.

[사진 오른쪽=]〈Gore Deco - Flat Hole #1〉 ‘Gore Deco - Flat Hole’ 연작에서 구멍은 두드러지는데, 이는 봉쇄가 된 구멍과 그렇지 않은 구멍으로 구분된다. 전자는 〈Gore Deco - Flat Hole #3〉(2025. Oil, silkscreen on linen 162.2×130.3cm.)과 Gore Deco - Flat Hole #2〉(2025. Oil, silkscreen on linen 162.2×130.3cm.)의 입술인데, 그 안에는 각각 또 다른 입술―독립적이고 대등한 입술들의 쌓임(따라서 엄밀히 ‘안’이 아니라 표층의 지층‘들’일 뿐이다.)―, 그리고 이빨로의 종착지로서 구멍이 하나 있다면, 검은빛 구멍이 전자의 그림에 있고 또 〈Gore Deco - Flat Hole #4〉(2025. Oil, silkscreen on linen 162.2×130.3cm.)에 있는데, 이때 전자가 입술에 대응하는 눈의 위치로부터 검은 눈동자로 체현된다면, 후자는 신체 기관으로 융해되지만 동시에 비재현적 차원에서 회화적인 무엇―‘물감을 펴 바른’―으로 남는다. 그것은 순수한 배경에 가깝다.
연작 2에서 이빨이 구멍을 봉쇄한다면, 연작 3의 눈알-입술의 합성체는 눈알이 구멍을 대체하며 봉쇄한다. 이는 음문이라는 구멍을 입술의 형상으로 갈음하는 것이기도 한데, 그것은 여성의 발화를 신체적인 것으로 고유화하며 그 발화의 자유로운 권능을 또는 획득하려는 의도일 수 있다, 또는 물화된 신체 자체를 메시지화하며 신체라는 슬로건을 내거는 것일 수도 있다―이는 모든 장기와 기관의 동등한 배치로부터 외화되지 않은 자궁을 대치한다고도 보이는데, 그로써 자궁의 용도 폐기와 함께 자유로움을 배가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닐까.

[사진 왼쪽부터=] Torso - The Holy Portal〉, 〈Gore Deco - Flat Hole #2〉, 〈Gore Deco - Flat Hole #3〉, 〈Gore Deco - Flat Hole #4〉. 〈Torso - The Holy Portal〉(2025. Oil, jute, silkscreen, human hair on linen 227.3×181.8cm.)은 구멍을 ‘포털’로 두고 있다. 토르소는 의학 도서의 컬러 그래픽 이미지처럼 파란 배경 안에 부상해 있는데, 거기에는 내장 기관이 기입되고, 음문에는 특이하게도 채색한 삼베로 테두리를 둘렀다. 이 3차원적 콜라주는 디지털적 가상과 대비되지만 미약하게 구현되어 그 대비감을 최소화한다. 이는 여성 신체를 지표적인 것으로 재검출해 내는데, 그것은 생리대와 같은 일상에서 피부에 점착되는 또 다른 표층의 실재감을 경험적으로 체현함으로써 달성된다. 그것은 타투와 달리 그 안쪽의 진정한 깊이를 형성하며 여성의 신체성을 공식화한다. 그것은 이미지가 아니라 두꺼운 표층이다.
다른 한편, 〈Torso - The Holy Portal〉은 텅 빈 배경의 이미지로부터 부상하는 신체의 가상성, 배경과 형상의 구분, 그리고 형상의 재현적 구성 아래, 그 신체는 이미지적인 것, 팝아트적인 것으로 분화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K1과 K2 전시장으로 나뉜 전시에서 K1 2층을 메운 작업들에서 가시화되는데, 그것은 장식적 벽지 안에 떠 있는 형상, 컨페티 같이 흩날리는 장식에 조응하는 신체의 표피적 이미지성이다. 신체는 무거운 기의를 벗고 이미지의 연쇄적 유희 과정으로 수렴한다. 여기서 장식적인 특징은 타투와 달리 전체적인 것으로 부상한다.
수직 이미지를 편재와 하강으로써 동등한 차원으로 만드는 눈알들의 산재함은, 점박이들의 장식적 기표로서 치환되며 세계의 배경을 이루며, 종국에는 배경 이미지로서 회화로 연장된다. 이토록 가벼워진 건 왜일까. 신체를 표층화하면서 전도된 이미지를 만드는, 이념형의 신체가 갖는 깊이의 소거는, 깊이의 상실이라는 차원에서 팝아트의 형식적 차용으로 변화될 수 있는가. 의미에의 거부는 의미의 상실이라는 메시지로 낙착될 수 있는가. 그것은 대중을 향한 더 넓은 차원에서의 구호인가, 아님 회화의 정치적 잠재성이 더 이상 진정함으로 기입될 필요가 없는 시대에 대한 표기일까.
반면, 〈Color Me Lust〉(2025. Oil on canvas, 130.3×130.3cm.)는 형상과 배경이 구분되면서, 그 둘의 횡단적 교차가 흥미롭게 이뤄진다는 점에서 흥미로우며 또한 회화적이다. 그것은 그린다는 것의 유희 자체에서의 즐거움 또는 유쾌함 혹은 유려함이 드러난다. 이는 이 전시에서 예외적이며, 이전 작품들과의 친연성이 두드러진다. 바깥의 물결은 안을 침투하고, 안은 바깥의 밀도보다 얕고 작기 때문에 흐릿하면서 존재 형상의 최소 요건을 갖춘다. 하지만 그것은 ‘덜’ 그려진 것 같은 느낌으로 충만함을 달성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왼쪽 상단의 머리가 대각선 축으로 오른쪽 하단의 몸뚱어리로 이어지는 이 형상은 ‘재현’으로부터 자유롭다.
다른 형상들만의 회화가 그 이질적 형상을 재현한다면, 그리고 동등한 면적을 쌓아 나가는 축적의 강박적 수행에 의존한다면, 곧 이질성을 주창하기 위해 강박적―동일성을 반복해서 추구한다면―이어야 한다면, 〈Color Me Lust〉는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동세의 큰 방향성과 함께 형상과 배경의 전도를 통해, 곧 배경의 밀도와 형상의 쾌적함과 여백이라는 실험을 통해 순전하게 회화에 대한 쾌를 감각할 수 있다. 그야말로 나를 쾌감으로 칠한다.
〈Push and Pull〉(2025. Oil, gauze, gold leaf, jute, human hair on linen 145.5× 112.1cm.)은 신체 형상에 대한 재현으로부터 벗어난 예외적 작업인데, 그것을 거즈-머리털의 연합, 삼베의 콜라주적 기입을 통해 대리적으로 구현된다. 곧 그것이 신체를 갈음하는데, 갈래로 늘어뜨린 머리털 위에 거즈를 붙여 상반부를 장식하는 전자와 하반부에 붙여져 물감에 묻히는 후자는 특색 없는 배경 그 자체로부터 물적 토대로 기입되는 ‘날 것’의 차원을 이룬다. 이는 거즈나 삼베를 생리대와 같은 여성 물품으로 처음 차용함에 있어 어떤 망설임, 과도기적 순간을 환기시킨다. 그것은 너저분한/물질적인/일상적인 여성 신체의 의미 이전에, 일차적으로 다른 매체에 대한 분별적 수용의 순간을 가리킨다.

[사진 오른쪽=]〈Gore Deco - Tattoo, Cigarette, Piercing〉. 〈Gore Deco - Emily #1〉(2025. Oil, fishnet stocking, gauze, jute, silkscreen, human and synthetic hair on linen, 130.3× 193.9cm.)는 이 삼베와 거즈 자체의 물질성, 그것의 투과성 자체의 물리적 특질을 부각하는데, 그것은 거대한 캔버스를 채운 커다란 눈-입술―보지의 대리물―을 생리대라는 물질로 (올바로) 체현한다. 그리고 그 위에 붙인 머리카락은 눈썹―보지 털에 대응한다.―을 표현한다. 이 거대 눈 상반으로 삐죽 솟아 나온 머리카락은 이 홀눈의 구멍과 조응되며 생기론적 사물을 넘어, 꿈틀대는 욕망의 진원지, 그것이 실체로 나타난 것과 같다.
〈Gore Deco - Emily #1〉은 예외적으로 욕동이 아닌 충동을 나타내는 작품인 것 같은데, 이는 의사-생리대와 머리카락이라는 3차원적 지지체의 부착을 통해, 환상을 가설하지 않고 ‘직조’함으로써, 신체의 환상 대신에 신체의 체현으로써 다른 표층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퍼포먼스와도 같고 또한 의고적이다. 〈Gore Deco - Emily #2〉(2025. Oil, silkscreen, human hair on linen, 130.3×193.9cm.)가 그 안의 것을 다시 ‘그림’으로 대체했을 때 그것은 구멍 안쪽의 것이 튀어나온 것이 된다. 곧 깊이가 역전도된 생명체의 움직임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동등한 파편들이라는 원칙을 위반하면서 다만 미스터리함 자체로만 남는다. 눈동자는 왼쪽 상단을 향해 돌아가 있는 것처럼 보이며 이는 유동적이라기보다 불안정하다에 가깝다.
결국, 〈Gore Deco - Emily #1〉의 경우 검은 구멍은 실재의 장소로 갈음된다. 〈Gore Deco - Kitty〉(2025. Oil, oil pastel, human hair, transfer print on linen 162.2×130.3cm.)의 경우, 앞선 검은 구멍은 수직으로 길어지며 막의 경계를 입지 않은 직접적 대상으로서 중앙부에 위치함으로써 전체로부터 툭 튀어나와 두드러지는 이미지가, 하나의 독립된 생명체 단위가 되는데, 이는 〈Gore Deco - Emily #1〉과 조응한다, 실재의 지지체를 더하지 않은 예외적인 회화의 단위로서 말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살아 움직인다.

마지막으로 전시장에서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종이 위의 목탄 드로잉은 조금 더 뚜렷하게, 그리고 명확하게 신체 자체의 이형적 질서를 조망할 수 있게 한다는 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1층 첫 번째 방의 작업들은 그 외에도 에칭, 드라이포인트 등의 요판 인쇄 기법이 사용되었지만, 역시 배경의 종이가 드러난 신체 형상이며 대체로 검은색이다.―, 이는 배경을 남겨둔, 그것은 기형적이지만 식별 가능한 인간의 신체 형상으로, 대체로 눈이 여러 개며 위아래로 배치되어 있다. 이때 신체의 위계-수직적 배분은 분화와 증식의 차원에서 다소 둔화된다. 그것이 눈의 원래 위치를 부정하거나 소거하지 않는 가운데 그러하다는 점에서 말이다.
여기서 작가는 기준점을 남겨둠으로써 전적으로 다른 신체가 아니라, 신체적인 그 무엇의 재현 양식 아래, 배분의 양식이 무한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주로 적당한 위치에 눈을 박아넣기로 구현된다. 그러니까 수직적 상징을 비판하고 전치시키기 위해서는 본래의 기준점이 남아 분열-증식적 구도가 차이를 발생시키고 있음을 확인시켜야 한다. 그런 지점에서 기준점은 여전히 지배적이다.

[사진 우측=]〈Drawing for Gore Deco #1〉. 전적인 맞교환은 불가능할까. 〈Drawing for Gore Deco #1〉(2025. Charcoal on paper, 110×76cm.)은 여러 개의 눈이 쌓여 나가거나 여러 개의 유방으로의 증식 과정의 흔적이 남는데―하나만 유두가 뚜렷하다.―, 가령 눈의 위치에 유방이, 유방의 위치에 눈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눈-유방의 수직 구도 이전에, 얼굴-몸의 수직 구도가 있는데, 작가는 이것을 해체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유방은 풍만한 것으로 더 큰 형상 안에 위치해야 하는 것이다―눈의 크기 또한 이 얼굴의 재현에 입각하며, 〈Drawing for Gore Deco #2〉(2025. Charcoal on paper, 110×76cm.)에서 가장 아래 유방 끄트머리에 ‘적합하게’ 채워진/끼워진 눈은 위쪽 눈의 크기와 거의 대등하다(그러니까 눈의 비율은 일반적인 신체 비율이라는 심미적 질서를 따르며, 그것은 또한 재현적 질서이다.).
눈은 최소의 인지 단위로서 독립적이며 곧 그것이 눈이라는 것이 식별 가능하다―또한 때때로 유사한 계열에서 눈알들은 세포체와 닮아 있어 더 근본적인 생명의 기제로 이해 가능하다(〈Visceral Vision #1〉(2025. Etching with graphite ink, drawing on Hahnemühle paper, 105×76cm.)은 이 눈알-세포체들이 신체 전반을 ‘굴러다닌다.’ 하지만 별도의 눈이 공식화된다.). 눈이 증식함으로써, 본래의 기준점을 벗어남으로써 순수 응시의 신체로 전이되는데, 그것은 말 그대로 우리를 노려본다―좀 더 앞으로 튀어나온다(Z축의 높이를 쌓는다).
〈Drawing for Gore Deco #1〉은 가장 위쪽의 눈이 그 얼굴의 본래 위치에 박혀 있다면, 그리하여 눈이 젖힌 머리에서 정면을 보기 위해 아래로 부러 기울이고 있음으로 드러난다면, 곧 얼굴에 재현적으로 박혀 기능한다면, 다른 눈들은 자유로워진다. 그것은 일부 신체에 융해되어 있지만 점차 그냥 얼굴에 부착된 그리하여 신체의 방향에 상관없이 정면을 보는 눈-이미지가 된다. 그리고 이 눈은 앞서 〈Gore Deco - Emily #1〉의 독립된 눈으로서 공간을 예기한다.
이 눈의 응시는 신체에 대한 관음증적 시선을 무력화하는 한편 신체 자체로서 자신을 지시하는 가운데, 우리를, 그것을 투명하게 위치시킨다. 초과된 눈은 신체 ‘위’에 자리하며, 일종의 눈 이미지의 가면을 쓴 것과도 같은데, 마치 누군가의 얼굴 프린팅 마스크를 쓸 때 그것의 차원이 비틀려 있어 우리가 그것을 완전하게 마주할 수 없는 것 같이, 그 눈은 독립적이며 또한 우리가 거부할 수 없이 우리를 쳐다본다.
눈은 또한 심리적 깊이를 초래하지만 깊이를 방어한다. 그것은 구멍을, 심연을 메우고 있다. 작가에게 구멍은 곤란한 무엇인데, 이는 순수 회화적인 인지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발화의 표지로서 신체의 전적인 재편으로부터, 표층의 철학을 위한 까뒤집어짐으로부터, 그 자체의 내면적 서사를 구성해야 한다는 점에서, 또는 신비한 무엇으로서 심층의 서사를 고안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Gore Deco - Emily #1〉에서처럼 눈은 입술을 대체한 발화 기관이기도 하지만, 거꾸로 입술을 갈음한 눈이라는 순수한 응시의 닫힌 사운드의 장소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그 눈은 어떤 말들을 닫고 있는가, 혹은 담고 있는가.
김민관 편집장
전시기간: 2025년 12월 9일(화)–2026년 2월 15일(일)
전시장소: 국제갤러리 K1, K2
- 1. 〈Gore Deco - Tattoo, Cigarette, Piercing〉(2025. Oil, oil pastel, human hair, metal rivets, imitation pearl, silkscreen, transfer print on linen 162.2×130.3cm.)은 예외적인데, 이빨 사이에 담배를 처박음으로써 구멍의 틈을 팔루스적 높이로 대체하며, 이는 위트로써 구멍을, 그리고 구멍을 막는 담배가 갖는 수직성을 봉쇄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 결과 위트는 담배라는 전형적 상징에 대한 키치적 제스처로 의미화된다―물론 그 과정에서 여성의 해방적 몸짓의 기호도 추출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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