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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비존〉: 장소를 나타내기 혹은 장소로서 드러나기
    REVIEW/Dance 2026. 5. 5. 21:48

    〈나비존〉[사진 제공=안애순컴퍼니]. (이하 상동).

    〈나비존〉은 독특하게도 두 명/팀의 안무가가 공동 안무를 전제하는데, 이는 한-이탈리아 수교 140주년을 ‘기념‘한 공동의 이상적 이념을 단순하고 투박하게 취한 형식의 일환으로, 결과적으로는 1부와 2부를 나누어 각각 이탈리아 듀오 FRITZ Company(이하 FRITZ)와 안애순이 맡는 것으로 결정―이는 그 수용의 차원에서 배타적인가 아님 절충적인가―된다. 아무튼 두 부분은 마치 하나인 것처럼 이어지는데, 여기에는 제목에서의 ‘나비가 위치하는 상징적 지점’으로 출현하는 뚜렷한 분리 구간이 그 틈을 초과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 바깥을 전적으로 채우는 다섯 명의 무용수는 창덕궁 낙선재에서 하나의 공통의 매체로서 두 안무가의 상호 영향력까지를 드러내는데, 곧 무용수의 시험 혹은 실험적 차원의 수동성은 오히려 무용수 자체의 절대적 표현의 경계로서 역전되는 것이다. 곧 테스트되는 몸의 특성은 이 틈을 포함해서 공연의 중핵을 차지한다. 그리고 ‘나비존’은 각자의 영역 바깥에 있는 중립 지대로서 이 공연을 유일하게 종합하는 역량을 지닌 미지의 기호가 된다. 그것은 한편으로 신비한 영역으로 남게 되는데, 여기에는 장소가 지닌 특성을 보는 두 다른 관찰자의 위상차의 연루를 전제한다.

     

    안애순에게서 그것이 전통이라면, FRITZ에게서 그것은 아시아성을 포함할 수밖에 없는데, 장소 특정적 기제가 하나의 모티브로서 부상하는 과정에서 타자성에 대한 초점이 달리 맞춰지는 것이다. FRITZ는 일단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의 대상화의 기제를 경계하면서 무용수들을 장소의 차원에서 먼저 지정하고, 그들의 이름과 행위를 지시하는 것으로 타자를 논리적 차원에서 주체의 자리에 놓고자 한다. 또한 ‘나비’의 모티브를 금박지를 비벼대는 것으로 매체적으로 분기시킴으로써 주제에 충실하고자 한다.

     

    반면, 안애순은 조금 더 파괴적이고 분열적으로 전통을 상대하는데, 그것은 잔여 차원의 말들로 나타나거나 대표적으로 이현석의 얼굴을 구겨 넣는 동작으로 드러난다. 이는 즉자적으로 탈이라는 변신의 장치를 뒤집어쓴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무의식적으로는 전통의 단위를 세부로 분해함의 연장선상에서 독특한 강박의 태도가 몸으로 전이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전통에의 탐구는 전통의 외양적 차원을 기입하고 형식으로 인계하는 작업 그 이상이 아닌데, 거기에는 더 이상 전통의 정신과 그때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FRITZ의 환상에 대한 어떤 소망 차원의 나비-되기, 곧 누워서 금박지를 아랫배께 두고 매만지는 앞선 행위는, 2부를 경유하면서는 과잉의 정념으로 되비쳐질 수 있는 것이다.

     

    앞서 초과되는 환상 영역으로서 가채를 쓰고 화려한 한복을 입고 등장하는 여자의 모습은 마당 중앙의 멍석을 기준으로 일종의 하수에 임시로 경량 그라운드시트를 깔고 그 위에서 주로 움직이는 1부와 그것을 걷어낸 확장된 공간의 2부 모두에서 특별히 관객의 지층을 넘어서지 않는다면, 오로지 왕비의 형상을 한 인물만은 서고 걷는 동작만 갖고서 낙선재 건물을 횡단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곧 그가 만드는 건 초과된 기준이며, 그 나머지 영역에서의 실재가 지닌 구체성의 강조와 함께 그것의 환상 차원에서의 고양, 곧 ‘꿈’과의 간극이다.

     

    ‘나비존’은 영어로 나비의 꿈을 가리키며, 피부 관리 차원에서 쓰는 얼굴의 눈가, 광대뼈, 볼을 이은 특정한 부분에 대한 용례를 뜻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쩌면 안애순의 안무에서 구겨진 얼굴은 그 나비존을 허물어뜨리는 것으로도 말할 수 있을 텐데, 그렇다면 매우 공포스러운 유머가 될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안애순의 “분절”은 전통을 형식적으로 인계하는 논리적 방편이 되는 동시에, 절대적 형식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1부에서의 서사의 씨앗을 거둬내는 법과 폭력의 틀로서 작용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FRITZ는 댄스 플로어 위의 무용수들과 그 바깥의 무용수들을 구분하면서 무대를 지정하고, 위-아래-우-뒤 등의 방향 지시어를 통해 이를 국소적인 장소로 분화시키는 한편, 이름-행위의 차원에서 그 존재를 물질적 차원으로 가시화한다―“유정을 소개합니다.”/“나의를 소개합니다.” 등등―. 거기에는 어떤 분열의 심상이 들어오는데, 이는 김지형에게서 결정된다.

     

    무리에서 이탈하며 발열과 들뜬 증상이 동반된 어떤 접신의 상태가 일으키는 헛소리와 접속 불량의 회로처럼 보이는 그의 얼굴에서는, 극단적인 차원에서 선이 굵고 캐릭터성이 강한 그의 얼굴이 차이로 결정되면서, 임유정의 상대적으로 투명한 표정의 얼굴과 대립한다. 곧 그 내용이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죄수와 그 아버지 이야기”의 서사는 이질적인 것을 내부로 불러오는 방어기제적인 (반)작용의 일환으로 보이지만, 그것이 의미로 통과되지 않는 차원에서 과잉으로서 형식을 이루는 데 그치는 듯 보인다.

     

    그의 분열은 무대의 절반을 덮은 시트를 걷어치우고 난, 2부이자 독립적 작품에서, 찡그린 얼굴과 함께 공간의 이탈을 가속화한다. 이때 중앙부에서 임유정은 두 팔을 벌린 채 두 바뀌씩 반복된 회전 동작을 감행하는데, 그것이 시간적으로 가장 길며 또한 인상적인 장면으로 결정되는 건, 어떤 표정 변화도 없이, 태도의 흐트러짐 없이 그것이 구사된다는 것에서 오는데, 이는 다시 오로지 물리적 차원의 테크닉과 연계되는 부분으로, 이러한 표현의 극대화, 강화를 경유해서 안애순은 전통을 하나의 형식 자체로 규정한다―임유정은 일종의 자동 인형에서 로봇을 향하는 계보의 연장선상에 있지 않은가.

     

    2부는 이 같은 회전 동작을 비롯해 분절을 바탕으로 한 동작들을 구사하는, 공간 전체에 산포된 다섯 명의 차이로써 지지되며, 여기서 몸은 장소의 틀, 강박, 방어의 태도를 깨고 투명하고도 어떤 지지 없이 즉자적으로 발화하기 시작한다. 임유정이 한국 무용의 기본을 바탕으로 한 안정된 움직임을 구사한다면, 이현석은 얼굴을 찡그리기 위해 애쓰며, 김나의는 그 극단의 사시에서 제법 덜컹거리는 이음매의 몸짓을 보여준다.

     

    〈나비 존〉은 완성작이라기보다 움직임 리서치의 일환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거기에는 주제적 집약이나 메시지 도출을 포기하고, 단순히 무용수들의 차이를 강화하는 지점에서 그들의 고유성을 실험의 근거로 삼고 있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순전하기보다 제각각의 역량이 시험되는 공간에서의 분투들이라고도 치환할 수 있을 것인데, 물론 이는 비교적 공간 전체를 투명하게 열어 두고 전체를 활용하려 한 안애순의 안무에서 그러하다.

     

    그 과정에서 안정적으로 중심으로서 안무적 수렴을 수행한 임유정과 구겨짐을 수용하기 위해 애쓰는 어떤 상태로서 드러난 김나의가 각인되게 되는데―구겨짐 자체를 훌륭하게 수행하기를 완성하는 이현석과의 그 차이는 명확하다.―, 이에 따라 1부의 포스트모던적 분열의 심상은 결국 어떤 실마리로 연장되지 못한 채 가라앉는다.

     

    따라서 안애순의 무용수를 무용수로서 두기의 안무 방식은 어떻게 보면 대단히 위태로운 기회를 수여하는 것과 같은데, 동시에 이는 무용수의 현존을 가늠하는 관찰자의 시점을 또한 구성한다. 그렇게 무용수는 어떤 살아 있음의 상태로 우리 앞에 출현하게 되는데, 이는 비인간적인 존재―혹은 ‘나비’―이며, 그로부터 그의 지정된 구역―혹은 ‘존’―만이 일시적으로 상정되는 것이다.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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