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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케이댄스, 〈히야〉: 사물-존재-무대의 동시적인 큐
    REVIEW/Dance 2026. 5. 5. 22:02

    리케이댄스, 〈히야〉 ⓒ옥상훈. [사진 제공=서울세계무용축제](이하 상동).

    리케이댄스의 〈히야〉는 입에서 꺼낸 파란 비닐 봉지는 공연 전반을 관통하는 상징이자 모티브가 되는데, 이는 이후 파란색을 걸치고 두른 무용수들의 색면 공간의 확장으로, 미세한 떨림과 소음을 가진 커다란 파란색 비닐봉지의 물질성으로, 무대 좌우의 중첩된 막들과 스크린의 빛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정면을 향한 채 한 남자가 무심하고도 표정 변화 없이 입 안에서 꺼내는 그 비닐은 신체에 들러붙는 접착성과 끈적거림의 기호라기보다는 신체와 독립적인 사물, 신체에 대한 우연한 개입의 산물인 것처럼 수행되는데, 이때 그것은 하나의 색이자 신체로서 독립성을 보장받게 된다. 그러니까 파란 비닐을 하나의 주어로 만드는 공작, 파란 비닐 바깥으로 세계가 구성되는―마치 파란 비닐이 인간의 죽음을 뚫고 새로운 생명 존재로 거듭나는 것처럼―, 파란 비닐 시점의 전도된 세계가 펼쳐지게 되는 것인데, 이에 따라 〈히야〉는 이 부유하며 부스럭거리는 사물이 만드는 변환의 왕국을 향해 달려나간다.

     

    이 파란 비닐의 교환으로서 놀이, 따라붙고 질척거리며 뺏고 뺏기는 행위들은 이 파란 비닐로서 주어, 파란 비닐에 결부되는 임시 주어들의 대상적 지위를 거꾸로 나타낸다. 그것을 빼앗기고 망연자실, 얼떨떨한 남자의 표정, 빼앗아 들고 홀로 최종 승자로 남게 된 남자가 거듭 이를 만지다 입에 넣는 장면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알 수 없는 차원의 무표정은 대상에의 욕망이 대상의 주어화로 쉬이 전도되는 어떤 과정을 보여준다.

     

    이 전도됨은 〈히야〉가 긍정하는 변화의 가치를 드러내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무대 자체의 창발하는 생명력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변화를 함입하는 무대라는 하나의 존재를 전제한다. 그 변화를 수행하는 차원에서 주체의 변이, 주체들 간의 교환, 일종의 매듭과 기능적 실천으로서 역전된 주체의 위상은, 다시 말해 감산되고 흩어지며 탈존하는 주체는 생기론적 사물의 서사를 열어젖힌다―곧 앞선 마지막 남자, 그로부터 꺼내어‘지는’ 비닐은 곧 그가 찢겨 나가며 사라지는 공백의 자리를 보여주면서 새롭게 막 자체를 열어젖히는 것을 제유 차원에서 선취하는 셈이다.

     

    따라서 막은 열리면서 열려 있음을 드러내고, 그렇게 하나의 투명한 경계로서 무대는 살아 움직인다.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 피날레 부분과 프로코피예프의 〈로미오와 줄리엣〉 중 ‘기사들의 춤’의 연이은 삽입은 바로 치닫는 절정에서 요동치는 공간의 파고로의 급격한 변환을 하나의 형식으로 함입한다. 보라색의 막들이 가장자리에 놓이는 가운데, 거기에 파란색의 그림자로 맺히는 무용수들로 색채 대비를 이루는 무대가 후자의 출현과 함께 걷히는데 그 바로 직전, 숨죽인 응축에서 파란 비닐의 공중에서의 뒤적거림으로의 변화가 있다. 그리고 동시에 거기에는 따라붙는 무대 상수·하수 앞쪽의 두 무용수의 조명 조정이 있다. 그것들이 수반되는, 그 뒤의 빛나는 공간의 조명들을 얼룩으로 드러내는 블루 스크린의 천장으로의 수직 상승에 따른 걷힘이 마침내 출현하고, 사물-존재-무대의 동시적인 큐가 구성된다. 빛과 색의 중첩, 존재의 증폭으로서 실루엣과 실루엣 아래에 웅크린 존재가 겹쳐지는 가운데.

     

    이 웅크림은 사물에의 웅크림이기도 한데, 곧 비닐을 쓰는 행위 역시 마찬가지이다. 비닐은 하나의 매개이며, 존재는 그것을 매개한다. 그리하여 그 매개로써 매개된다. 곧 존재는 불투명해지고, 비닐은 생명의 기호, 색으로 부풀어 오르는 가운데, 비닐과 함께 몸 역시 부풀어 오르고, 비닐로부터 웅크린 몸은 그 비닐과 함께 부상한다. 바로 비닐을 벗겨 내는 바깥의 행위에 의해 그것은 최대치를 달성한다.

     

    이름을 부르고 “야”, “히야”와 같이하는 부분에서 존재는 상호적인 관계로부터 추동된다. 비닐이 내는 소리와 같이, 그것은 어쩌면 움직임 자체보다 그 찰랑거리는 소리 자체의 살아 있음을 드러낸다. 라나에로스포의 〈사랑해〉에 맞춰 혼자 사뿐거리는 몸짓이 변화에 대한 긍정이라면, 바텐이 내려오며 커튼이 휘날리는 장면에서 축제의 현장을 만드는 존재는 곧 무대와 현동화된다. 비트 단위의 음악이 들어서면서 전체 군무는 정면성을 갖고 좌우로 움직임을 갖는다, 끈적거리고도 탄력적인 몸짓으로.

     

    〈히야〉의 변화로서 스펙터클, 무대 미학을 향한 존재의 끊임없는 투여는 세계에 대한 잠재성을 긍정하는 것이기도 한데, 이들의 정면 주시는 그 긍정의 이념에 대한 확신과 존재의 절대적인 긍정으로서 증명인데, 이는 한편으로 희망과 꿈에 대한 환상에 대한 주체의 균열과 분열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끊임없는 긍정은 모든 것에 대한 수용, 그것의 잠재성의 영토를 가리키지만, 의식의 차원에서는 순진무구한 것이 된다―따라서 어떻게 보면 필요한 것은 ‘현실’ 그리고 그 위의 정치가 아닐까.

     

    다시 돌아가면, 입에서 나온 비닐봉지는 (다른) 존재가 아닌 그 스스로에게로 귀환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주체와 대상의 교환 또는 합일은 대상의 온전한 자리를 가로질러 또는 비약하여 주체성의 자리에 환상의 영역을 심어 놓는데, 이 부분이 앞선 입의 구멍, 그리고 그로부터 존재의 상태를 (어쩌면 주체의 공백으로) 다시 고찰하게 하는 것이다. 히브리어의 제목과 같이 소생하는 것은 무엇과 연결되어야 하는가. 또는 무엇에 대한 이름인가.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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