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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렁크씨어터프로젝트, 〈김치찌개 웨스턴: 밥주걱과 45구경 권총의 결투〉: 어떤 구멍들이 보여주는 한국 사회에 대한 징후들
    REVIEW/Theater 2026. 5. 7. 16:14

     

    트렁크씨어터프로젝트, 〈김치찌개 웨스턴: 밥주걱과 45구경 권총의 결투〉[사진 제공=트렁크씨어터프로젝트](이하 상동).

    김치찌개 웨스턴: 밥주걱과 45구경 권총의 결투〉(이하 〈김치찌개 웨스턴〉)는 스파게티의 본고장으로 익숙한 이탈리아에서 양산된 서부극을 칭하는 ‘스파게티 웨스턴’을 한국식으로 전유한 “김치찌게 웨스턴”이라는 일종의 장르적 수식 아래, 『흥부전』의 형제 간 갈등의 서사를 덧입힌다. 스페인 배경에 저예산 촬영, 선과 악의 구분이 모호하며 폭력으로 점철된 스파게티 웨스턴의 특징은, 극단의 이름처럼 트렁크에 가지고 다닐 수 있는 정도의 미니어처 무대 위에서 퍼펫과 오브제 등을 통해 연장되며, 토건국가의 개발독재와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와해된 지역 공동체를 배경으로 냉혹한 상속 분쟁의 현실로 분화한다. 

    결국 남매간의 총질이라는 클라이맥스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근대 이후의 발전상과 국민 의식의 전환과 변화가 압축적으로 가정되는데, 거기에는 결정적으로 60~70년대의 대규모 국가 차원의 개발상이 자리하며, 이는 극에서 그 반대급부로 황폐화된 자연을 낳고, 공공재에 대한 재벌 독점으로 인한 폐해로 이전된다. 곧, 간척사업을 통해 늪지대였던 뉴 밀리언 골드타운 전체를 농경지화하는 과정에서 골드리버의 강물이 마르게 되고, 유일하게 남은 에슐리 퀸즈 가의 우물을 에슐리 퀸즈가 높은 가격의 물로 독점 공급하면서 부를 독점하게 되며, 급작스럽게 다시 유산 다툼으로 넘어가 비극으로 치닫게 된다. 

    여기서 물이 마을 전체를 먹여 살릴 수 있는 공공재로서 충분한 것인지 수요에 비해 공급이 딸리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인플레이션될 수밖에 없는 것인지가 모호한 것보다 국가의 기조가 독재 모델에서 극단적인 신자유주의 모델을 따라 국가 개입을 축소, 사실상 철회하는 지점으로 변환되는, 그 사이의 간극이 더 모호하고 또한 기이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서부극에서 전제되는 법의 부재, 곧 국가의 부재 아래 총질로 결정되는 지극히 사적 정의로써 구현되는 세계의 양식으로 물론 환원될 수는 있지만, 그 사이에는 결정적으로 도시와 시골, 개인과 공동체, 문명과 자연과 같은 대립되는 이원적 가치를 조율할 수 없는 불가능성, 역량의 부재가 있다고 보인다. 

     

    그러니까 이러한 간극은 오히려 서부극으로 환원되기보다 거꾸로 서부극으로부터 그 배경적 차원으로 소급되면서 더 주요한 무언가를 드러내는데, 이는 가속화된 사회로서 한국을 설명해내며 정합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양태로써 (잘) 설명할 수 없는 한국과 그 국민의 무의식적 심급을 의도치 않게 누설하는 듯 보인다. 국가의 강제―폭력―와 천박한 재벌주의, 그리고 완전히 무력한 시민 개체들―이는 어머니가 힘겹게 모은 돈으로 물통을 사서 들고 오는 아이에서만 잠깐 가시화된다.―은, 기이할 정도로 거의 다뤄지지 않는데, 이는 총질의 놀이적 질서 안에서 망각되는 것이다, 더 정확히는 은폐되고 망각되는 것으로 가시화되는 것이다. 

    그런데 에슐리 퀸즈가 동생 에드먼드가 본디 다 상속받아야 할 유산을 가로채 누리는 부는, 실은 그가 국가 토건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이륙한 것임이 짧게 언급되는데, 물의 독점 판매로써 이룬 현재 부와 유산상의 부는 실제 구별되지 않으며, 애매하게 유산상의 부가 전부인 양 둘이 다투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왜 남매 중 한 사람에게 돈을 몰아주었던 것인지 역시 미스터리인데, 그리고 그 유언장이 왜 에드먼드에게서 발견되는지, 그것을 에슐리가 정말 모르고(서 동생을 속이고) 있었던 건지 등등 역시 그러한데, 중요한 건 누가 유산을 최종 가져가느냐라는 것보다 돈이 어디서 기원했으며 어떻게 증식했느냐라는 것이다.  

    싸움의 대의는 진정한 것이라기보다 냉소적인 것에 가까워지는데, 싸움의 지향은 단지 돈의 독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에 도달하는 것이다―이는 자본주의적 경쟁이라는 점에서 진정 냉소적인 것이 된다. 실제 자신의 것을 빼앗긴 데다 그것을 속이고 있었다는 것에 복수 의식을 갖는 에드먼드는, 단지 그것을 되찾아오는 것으로써 모든 걸 종식시키고자 하는데, 그에 반해 자신의 재산을 계속 지키고자 하는 에슐리는 총잡이 J.B.에게 살인청부를 맡기는 것으로 이어지며, J.B.가 허무하게 실패함에 따라, 두 사람의 결투가 피치 못하게 발생하게 된다. 곧 결투는 사라지는 매개자에 의해 부속적으로 따라오는 것으로, 이때 부제인 “밥주걱과 45구경 권총의 결투”가 발생한다. 

    에슐리가 밥주걱으로 동생의 아마도 45구경 권총의 총알을 막아내는데, 거의 절묘하게 연속적으로 막아내며, 이는 서부극의 클리셰 중 하나인 탄알의 (연속) 튕겨짐이 (우연한) 상대를 가격하는 장면으로 연장되며, 이미 에슐리에게 죽은 J.B.를 계속 겨냥, 그의 신체를 그때마다 팔딱거리게 만든다. 놀부가 밥을 청하는 동생 흥부를 돌려보낼 때 밥주걱을 썼던 것이 그 모티브가 되는데, 실제 탄알이 아닌, 일종의 소리로 동기화되는 핑퐁 놀이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갈등의 진정한 해소보다는 그 감각적 차원으로 모든 걸 환원시키는 작용을 갖는다. 따라서 부제는 의미심장한데, 실은 풀어야 할 많은 과제를 서부극의 외양을 소재 중심의 차원으로 전유하면서 진정 소거하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전적으로 상실된 것이라기보다 독점 자본주의와 국가의 부재의 부상 속에 그렇게 보이는 것에 가깝다. 공동체는 일종의 공공성의 차원이 작동하지 않음에 따라 사라지며, 공공성의 부재는 공동체의 비가시성으로 대신 드러난다―공동체의 비가시성이 공공성의 부재를 은폐한다. 또한 생태적 차원의 고갈은 자본의 독점에 대한 자리로 모호하게 연장되고 있는데,사실 그냥 공공에 우물을 개방하면 모두가 살 수 있는 환경이 더 맞는다고 보인다, 어느 누구의 사실상 죽음도 또한 떠남도 가시화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말이다. 

    공동체의 상실 혹은 파괴의 측면은 순수하게 물리적 환경 때문으로 보이지만, 또한 자본주의 시스템에 종속된 개인들의 차원이 지닌 부정성과는 크게 상관이 없어 보이는데―농경을 위해 물을 과잉으로 끌어다 써서 물이 사라졌다는 건 사람들의 “욕심” 때문이 아니라, 논리적인 결과이다.―, 단지 자본주의에 내적으로 동화된 건 에슐리 한 명으로 보이며, 그들이 어떤 지각과 사고 방식을 갖고 있는지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에슐리와 에드먼드 간의 대립도 돈이 만능이 된 사회를 일정 정도 표식하고는 있지만, 단지 그것만이 다는 아니다. 

    오히려 에드먼드의 원 상태의 복구는 잃어버린 자연의 본래적 상태를 되찾는 것과 은밀히 내통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에 따르면, 에슐리의 속임은 이 간척 사업을 통한 농경지 구축의 기원이 망각, 은폐된 것과 유사해지는 것이다. 곧 에슐리의 속임은 망각된 개발의 이면과 같이 그 기원을 감추고 있다. 그러니까 유산 상속의 진실 여부가 그 자연의 상실된 기원을 덮고 있는 형국이다. 

    돈에 매몰된 건 J.B.로 그는 상대를 죽이면 줄 돈을 경쟁하여 흥정하는 남매 사이에서 계속 급변하며, 더 많은 액수를 부른 이의 명을 따라 상대에게 총을 겨누길 반복한다. 그에게 정의에 대한 신념 따위란 없다. 그리고 그는 단지 그 사이에서 의미없이 사라지는 매개자에 불과한데, 하나의 의미가 있다면 오직 더 많은 돈을 받기를 원한다는, 절대적 돈의 노예적 상태를 보여준다는 것이며, 그로 인해 흥정의 속도도 더 가열된다는 것이다. 그는 유일하게 둘의 유산을 가져야 할 이유를 다 아는 존재인데, 그에게 더 나은 판단은 오직 돈과 결부된다. 결투는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누구를 죽이는 게 더 이로운지의 차원에서 결정된다. 

    흥정의 셈법에 에드먼드 역시 동화되는 과정에서 목숨은 정의의 차원이 아니라 돈의 가치와 직결되어 무가치해진다. 하지만 J.B.는 결국 에드먼드의 손을 잡는데, 그것은 이전보다 더 큰 낙차로써 매끈한 금액을 부른 이로부터 마침내 경매가 ‘낙찰’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는 보이지 않는, 곧 에슐리의 상의 안에 있던 주걱에 의해 튕겨 나가며 에슐리에게 죽임을 당하는 결과를 가져오는데, 진정 비정하게라면 에슐리가 아닌 모든 돈을 독차지하려는 에드먼드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이 맞지만, 그렇지 않은 탓에, J.B.는 더 하찮은, 허무한 죽음을 맞게 된다. 

    에드먼드의 승리는 그러나 일시적인 것이며, 애초에 본래의 골드리버의 복구를 염원하던 살롱의 잭 솔로가 쏜 총에 의해 숨을 거둔다―아이러니하게도 여기에 투여된 총알 한 발은 J.B.가 자신의 상처를 치료해 준 데 대한 대가로 놓고 간 것이다, 곧 사후적인 J.B.의 복수가 잭 솔로와의 관계에서 예기되어 있던 셈이다. 이로써 골드리버가 다시 전처럼 흐르게 된다는 다소 비약이 따르는  결말을 맞는데, 간척사업을 되돌리는 건 부재하던 국가의 재출현도 자본을 독식하던 에슐리의 부재로 인한 시민의 각성도 아닌, 그냥 자연 자체의 발화 양식에 가깝다. 

    그런데 거기에는 본래의 환경을 잃은 후 공백을 겪는 주체인 잭 솔로가 당긴 방아쇠, 그리고 본래 전설로 알려져 있던, 그러니 어떤 정의의 차원에서 카리스마를 가져갔었을 것으로 기대되던 그리고 그렇게 받은 것을 고스란히 셈해 돌려주었던 차원에서 정의를 수호하던 것으로 보이던 J.B.의 본래적 차원의 정의가 비로소 사후적으로나마 실현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그러니까 그의 치료에 대한 보상으로 준 그 총알은 그의 진짜 상처, 곧 죽음에 대한 보살핌으로서 보답으로 진정 전도(되어 선취)되는 것 아니겠는가. 

    잭 솔로의 총에는 근본적으로 에슐리 퀸즈와 에드몬드와의 혼동이 있었을 것인데, 무엇보다 에드먼드가 안타고니스트로 볼 수는 있지만, 그것은 저항적인 차원으로 선취되지 않는다는, 흥부처럼 착하기만 하다는 점에서 문제적인데, 부로부터 소외된 평범한 인물에서 나아가 다른 세계에 대한 전적으로 다른 가치를 지향함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의 돌연한 죽음은 합목적적화될(?) 수 있는 것이겠다. 그러니까 단지 그가 유산을 되찾는 것을 굳이 정의라면, 그 같은 의지 외에는, 그 돈이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쓰여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은 뒤따라오지 않(게 되)는데, 그것이 치명적 결과로 그에게 되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자연의 진정한 발화가 튀어나오는 지점에서, 인간의 한갓 유산 다툼 같은 건 부차적인 것으로 전락한다. 그런데 이 진정한 자연에 대한 힘은 그 자체가 결말이라기보다 거꾸로 어떻게 그것이 소거되고 차단되었는지로 소급해 들어가야 한다. 그 지점에서 〈김치찌게 웨스턴〉은 무언가 한국 사회의 무의식적 징후들로 가득한데, 그것은 자연의 회복으로 환원되고는 있지만, 거꾸로 상실된 국가, 소거된 시민, 비주체적인 주인공들, 자본주의 체계를 벗어날 수 없는 모든 인물들의 차원에서 자연이 중단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자본가에 대한 테러가 자연의 회복을 가져온다는 도식적 차원의 과정에서, 실제 에슐리가 상징하던 바, 그리고 그 기저에서 실제 작용하던 것들을, 실제 균열의 요소들을 다시 논의할 필요가 있겠다. 

    〈김치찌게 웨스턴〉은 무엇보다 처음 테이블 위에 천을 깔고 그것의 모서리 일부를 들어올려 간척지를 만드는 것을 표시하는 것처럼, 그리고 또한 그 위에 종이박스 조각 위에 그려 만든 집들이 들어서는 것처럼 작은 조각으로써 손쇱게 세계를 환유해 내며, 따라서 매우 풍부하고 잠재적인 차원으로 물질을 변화시키고 또한 물질의 공백을 연기로써 채워 나간다. 눈 앞의 작은 세계와 결부되는 배우들은 J.B.가 등장하고, 남매의 총격이 벌어질 때 비로소 확장되는데, 곧 배우들은 무대 전면에 나서게 되는데, 이는 또 다른 구조물의 등장과 함께 다시 작은 무대가 펼쳐지는 것으로 다시 전환된다. 

    곧 J.B.가 저녁 황야에서 구멍 뚫린 원기둥 모양 철통에 붉은 조명을 켜고, 또 모닥불 그린 종이와 장작 오브제 구성으로써 불을 쬐며 밤을 보낼 때, 그는 한 자리에 다시 고정되는데, 전면에는 붉은 휘장이 그려진 임시 마굿간과 그 사이로 새어나온 구멍으로부터 그의 말 “초코”―얇은 손장갑-손이 나와 있다.―가 있게 된다. 그런데 이 구조물은 다시 양 옆면이 펼쳐지면서 에슐리와 에드먼드 두 남매의 집으로 분화되고, 각각 두 창문 앞에 얼굴을 들이밀면서 다시 경합하는 두 존재의 세계가 대화로써 연속되게 된다. 그리고 J.B.는 자연 그 사이에 있으면서 그 둘의 관계에 끼어든 불청객이자 매개자로 최종 표상된다. 

    무대 위의 무대이자 작은 무대로 소급되는 ‘커다란’ 존재의 무대이기도 한 〈김치찌게 웨스턴〉에서 무대는, 때로는 인형의 것이면서 그와 동시에 인형을 조작하는 이의 것이고, 때로는 그 인형과 공존하면서 교환되는 존재로 다시 돌아온다. 그와 동시에 그 존재는 어떨 때는 이야기 안에 자리하고 또 어떨 때는 그 이야기를 전달하는 내레이터가 되는데, 이는 처음 무대 자체가 좁은 테이블 위에서 펼쳐지며, 거기에 살을 붙여 나가는 언어가 긴요해지는 것과 같이, 자의적이기보다 자유롭게 현실을 운용하고 구사하는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는 부분이다. 여기서 언어는 안을 향한다면, 연기는 그 너머, 바깥을 상정한다. 곧 〈김치찌게 웨스턴〉에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두 가지 방식이, 곧 이야기의 내외를 오가는 방식이 활용되는데, 이는 이 무대 안에 세계를 가설하는 그 개념에서 자연스레 연장되는 것임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김민관 편집장 

     

    [공연 개요]

    4월 25일~5월 3일 토요일(4.25) 19:00 /화~금요일 19:30 / 토~일요일 15:00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창안/연출 | 조예은

    창작/출연 | 권주영 양대은 윤세인 최문혁

    악사 | 백하형기

     

    음악 백하형기 박진호

    조명디자인 김소현

    미술감독 신은혜

    음향감독 정하윤

    무대감독 서지훈

    무대디자인 정승환

    구성도움(초연) 허선혜 신지원

    접근성매니저 박소희

    그래픽디자인 이미지작업장

    기록영상 리인규

    기획 김도훈

     

    제작 | 트렁크씨어터프로젝트

    공동기획/접근성 운영협력 | 아르코•대학로예술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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