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음이온, 〈갈대밭의 에듀케이션 葦原のエデュケーション Reed Field Education〉(작/연출: 김상훈): 불가능성의 가능성으로서 커뮤니케이션
    REVIEW/Theater 2026. 5. 6. 15:12

    조합을 위한 모듈 

     

    음이온, 〈갈대밭의 에듀케이션 葦原のエデュケーション Reed Field Education〉(작/연출: 김상훈)ⓒ하준호.[사진 제공=신촌극장](이하 상동).

    〈갈대밭의 에듀케이션〉(이하 〈갈대밭〉)은 두 사람의 대화로 이뤄진 동명의 한 희곡을 영어·일본어·한국어 세 개의 언(어 중 두 개의 다른 언)어를 교차시키고 변형하여 반복하는 구조로 진행된다(Ⓐ). “모듈 구조”로 정의된 이 같은 형식은 일본과 한국의 배우가 섞인 Ⓐ 버전과 한국 배우만으로 이뤄진 Ⓑ 버전으로 나뉘는데, 두 역할에 대한, 다른 둘의 조합이라는 원칙과 다른 언어 간 교환은 일종의 경우의 수를 전제하며―거기에 배가되는 움직임의 유무가 부속된다.―, 이 역할-언어-존재의 차이는 일종의 확률에 따른 자의적 구성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모듈이라는 하나의 원칙으로 수렴한다). 여기서 역할과 언어와 존재는 ‘긴밀하게’ 묶여 있지 않은데, 따라서 더 많은 조합이 가능하다. 

    역할 A        역할 B 실제 사용 언어  
    자막 언어

    이시카와 아사히 김중엽 영어 영어   일어 일어
    전혜인 이시카와 아사히 일어 한국어   한국어 일어
    유이 아야네 김중엽 한국어 일어   일어 한국어
    유이 아야네 전혜인 일어 한국어   영어 영어

     

    그런데 이 조합의 방식은 더 많은 ‘실험’을 가능하게 하지만, 더 나은 이해를 도모하지는 않는데, 통상의 일본어 공연에 한국어 자막이 따라 붙거나 그 반대이거나 하는 방식이 가장 완벽한 이해 방식으로 이해된다면―각자의 언어를 구사하고, 거기에 다른 언어를 자막으로 넣는 방식은 이상적이지만, 그 자체로 형식‘적’으로 비쳐질 것이다.―, 〈갈대밭〉은 그것을 하나의 ‘조합’으로 명시해 낸다. 〈갈대밭〉은 그러니까 언어 자체의 실험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언어의 번역이 아니라 언어의 차이를 드러내는 방식으로서 말이다. 

    앞의 모듈은 뒤의 모듈과 상관적이다, 사실은 하나의 희곡을 다른 언어로 전치시킨 것이라는 점에서. 언어는 아른거리고 다른 언어에 달라붙으며, 파편적 조각들로서 축적되어 간다. 그것은 극의 내용적 차원에서 언어가 갖는 모호한 경계성의 차원, 실재와 주관의 간극이 모든 걸 파편적인 것, 곧 관념적인 것으로 수용하는 것과 조응된다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갈대가 얼마나 있어야 갈대밭이 될까.”라는 초반의 대사는 바로 그러한 언어적 차원의 모호함을 실재로 두는 것과 같다. 

    이는 실제로 갈대밭을 감각하는 것을 수적 차원으로 물화시키고 언어적 이상으로 반향하는 것과 같은데, ‘갈대~밭’의 잠재적 전이 지대―갈대에서 갈대밭으로 변화하는 건 “돌”이 “돌탑”이 되는 것과 같은 일종의 “변신”이기도 하다.―를 표식하는 것, 그것의 지각 불가능성의 역설이 언어에서 유래되는 감각임을 증명한다. 언어는 갈대밭으로부터 갈대를 분리해 내고, 갈대‘들’로써 갈대밭을 만든다. 곧 언어는 도리어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역설의 실재를 가상공간에 구성한다. 이는 동시에 갈대~밭의 잠재화된 용출이 실재임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언어의 가능성을 노정하고자 한다. 

    즉자적으로 상호 교류적 차원의 작업은 일종의 형식 논리 안에서 (다소 기이하게도) 각자의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언어를 전유하는 것으로 이어진다―그러니까 연극은 ‘덜’ 잘하는 방식으로써 실천된다. 먼저 그 장소는 둘의 공통 언어로서 영어를 구사하는 것으로 정초된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공평한 차원이 될 텐데, 거기에 대한 자막은 한국어(/일본어)가 아닌 일본어이다. 영어는 일종의 공통된 (대)타자의 언어인데, 그것은 진정한 상호 교류의 이념(을 위한 희생)일까, 아님 존재와 분리되면서 나아가 존재를 앞지르는 언어의 차원을 진정 실험하기 위한 (희생인) 것일까. 

    곧 후자에서처럼, 존재의 차원에 근접하는, 언어의 차원의 경우의 수를 확장하기 위한 일종의 시도로 볼 수 있다면, 그러니까 다시, 진정 중요한 건 존재보다는 언어인 것 같은데, 그 두 존재가 다른 언어를 구사하며 또 다른 언어를 공통으로 구사할 수 있으며 또 또 다른 언어를 의태한다는 점에서 때로 언어는 존재를 배반하거나 존재를 본래의 차원으로 정체화하지 않으며, 존재를 그에 종속시키고 부리게 되며, 절대의 형식으로 반향된다. 배우의 역할은 엄연히 (역할에 자의적으로 부속되는) 언어이다.

    아마도 “… 그런데 나는 왜 자꾸 변신하는 거지? 나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언제부터 내가 이 역할을 떠맡은 거지?”라는 A의 대사는 그 배우의 딜레마를 현시한다. 따라서 〈갈대밭〉을 일종의 상호 교류 연극의 실험을 빙자한 언어-존재의 절합적 상관관계를 실험하는, 곧 언어를 존재에 부속시키고 진정한 것으로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의 자의성을 모듈 구조 안에서 합리화하는/적시하는, 결과적으로 존재와 언어를 분리하여 존재들로부터 떨어져 나온 동시에 접근해 가는 언어‘들’의 잔재로써, 마치 갈대들이 갈대밭을 어느 순간 이룬다는 듯이 구성하려는, 야심찬 그러나 허덕이는, 충분히 충만하면서도 형해화되는, 반복‘들’―모듈‘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이 지대로서 언어라는 식역

    B와 A에 각각 해당하는, 스틸트를 착용한 김중엽과 이시카와 아사히가 무대 앞쪽과 뒤쪽에 각각 위치하는 가운데, 첫 번째 모듈이 시작된다. 김중엽 아래로 바닥의 이시카와 아사히가 지나가는 것으로 배치의 양상이 크게 한 번 바뀌는데, 이는 김중엽이 가로지르고 아사히가 그것을 통과하며 둘의 위치가 역전되는 것이 그것이다―둘은 처음부터 쫓고 쫓기는 관계이지만, 그것은 적대라는 형식 안에서 가장 친밀한 유대로써 실천된다. 이는 다시 A를 잡으러 온 B에게 A가 잡힘을 (단지 물리적 차원에서만) 선취하고, 비로소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밭의 그 움직임을 또한 선취하는 것과 같다.

    여기서 A의 존재 없음이 B를 ‘그저’ 통과하는 가운데 A는 대조적으로 힘겹게 바닥을 기어나간다는 점에서, 그의 무근거적 삶의 차원이 그의 본원적 존재의 과제로서 현상되는 것이기도 하다―“존재하지 않는 너”. 그리고 이는 두 다른 존재의 차이로써 주어지는 것인데, 그런데 A가 갈대가 없는 이곳을 갈대밭이라고 고백(하면서 부끄러워)한다면, A에 따르면, 그걸 믿어준 건 B로, 그런데 갈대밭은 존재하기보다 바람에 의해 그렇다고 식별되는 것에 가깝다―바람이 멎자 모든 것이 사라진다. 

    그 바람을 갈대밭으로 인지하는 건, 그리고 갈대밭과 A를 잇는 건 근본적으로 B다. 이 ‘믿음’은 A라는 존재를 가시화하고, 또한 B(의 믿음 체계) 안에서 A를 연장하며, 서로의 공통된 토대에서 대화의 조건을 만든다. 갈대밭의 형식, 곧 갈대 없이 갈대밭을 이룬 그 갈대밭이 A에게 근본적인 믿음으로 성립하는 것이라면, 갈대밭 없는 바람의 작용에 의해 성립하는 B의 갈대밭의 매체적 (오지각의) 형식은 A에 대한 B의 존재론적 확인의 차원으로 확장하는 믿음의 구조를 이룬다. 

    곧 (부재하는) 갈대밭이 바람으로써 “보이는” B에게 A는 갈대밭으로써 촉발되면서 또한 갈대밭으로 소급된다―그리고 후자의 지점에서 A의 믿음 체계랑 조응한다. 바람으로부터 갈대밭을 끌어내는 B의 믿음이 A를 결정하고 A와의 만남을 결정적으로 가능하게 한다면, 거꾸로 그 갈대밭이라는 A의 믿음이 존재로 결정화되는 게 A이다. 곧 믿음이 A에게서 A를 또한 B에게서 A를 조각한다―그리고 B의 믿음은 A에게 B와의 관계를 긍정의 차원으로 가능하게 한다.

    애초에 갈대에서 갈대밭으로의 불가능성의 식역은 갈대밭이라는 도래하는 미지의 영역이라는 시간적 차원의 불가능성으로 연장되며 결정되는데, 그런데 그것은 비가시적인 것의 작용에 의한 오지각적 수용이나 다름없고, 이는 다시 존재에 대한 염원 자체를 내포한다. 돌을 쌓아 올려 돌탑을 만들어 가는 노인들―“할머닌가 할아버진가”―은, 하나에 다른 하나를 더한다는 차원에서만 사물의 변신을 이끌어낸다. 
    그런데 그들의 손은 만지는 것들 모두를 흐물거리게 만든다. 이 형해화시키는 작용은 그들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빗대고 어쩌면 비하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모든 것이 완전히 열린 상태로 ‘변신’되었음을, 전이 가능한 구조로 변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완벽한 무의 전제가 변신의 극대화된 가능성으로 치환되는 지점에서, 갈대는 갈대밭으로, 돌은 돌탑으로 이행될 수도 있다. 

    곧 물리적 차원의 형해화라는 이념과 심리적 차원의 물질적 결정으로의 염원은 조응하며 횡단한다. 하지만 실제 돌이 쌓는 즉시 물렁해진다면, 돌탑을 쌓는 건 불가능하며, 그것을 쌓는 행위는 일종의 영원한 형벌에 가까워질 것이다. 그런데 그 부재의 조건은 B의 경우에서처럼 인식론적 차원에서 다시 뒤집힐 수도 있다. 부재는 충만함으로 충만함은 부재로 언제든 역전 가능해진다. 그것은 하나의 계열 안에서 극단인 양 횡단하는 것(들)이다. 

    여기서 돌을 쌓는 것이 아니라 돌을 물렁한 것으로 만드는 “늙은이”의 (따라서 실패하는) 몸짓과 만지는 것마다 돌이 되며 애초에 그 자신이 돌인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따라서 돌을 쌓을 필요가 없는) A라는 존재는 상보적인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역설과 모순을 지시한다. 어쩌면 태어남과 죽음의 시차를 〈갈대밭〉은 그 후자의 A와 전자를 대신해서 온 B의 영속된 추격전과 그 안에서의 가장 긴밀한 교류로써 나타낸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B 역시 불확정적 존재로 보인다. B의 이름은 본래 자신이 알기로는 조안 롱긴인데, 부이 탄 롱, 바바툰데 칼롱고, 야마모토 저스틴 카레라로 타자에게서 그렇게 매번 다르게 ‘식별’된다―그런데 그것은 양자역학적 고양이에 대한 식별과 같지 않은가. 곧 모든 것은 명확하지 않고 환유적 차원에서 이름(의 자의성)이라는 은유만을 생성한다―또는 그 임시적인 이름으로써만 실재를 호명 가능하다. 

    “순록만한 물고기”는 “물고기만한 순록”으로 곧 전이되며, 순록과 물고기의 이 같은 교환 과정에서 본래의 은유는 곧 환유로 전치되는 마법적 효과를 가져온다(강에서 떠내려 온 물고기는 근본적으로 그것이 순록인지 물고기인지 하는 혼동을 불러오며, 그 같은 혼동은 혼동이 아니라 중첩된 대상에 대한 모호하고도 엄격한 판별과 같은데, 이는 모호함의 차원에서 그 혼동으로서 주어지는 인식이 그 두 존재 모두를 ‘성립’시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오직 믿음만이 실재하며, 무언가를 가능하게 하며, 그 가능성의 토대로부터 관계를, 연결을 성립시킨다―그런 지점에서 혼동에는 아마 믿음이 있을 것이다. 돌이 돌탑이 되게 기도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A가 “그때” 생각했던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라면, B에게 그 이야기는 어느 순간 밥상 위의 만두 같은 돌과 돌 같은 만두가 ‘증여’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 돌~만두의 기호의 전이 지대는 어떻게 보면 만두고 다르게 보면 돌인 두 다른 것이 하나의 토대 안에 ‘공존’하고 있는 것과 같다. 

    근데 민물고기 맛 나는 만두 맛 나는 (따라서 만두인) 돌이 아닌, 흙냄새 나는 돌과 같은 만두를 다시 돌―만두인 양―로 빚어 만두처럼 줬을 때 사람들의 입에서 순록 털이 삐져나오는 결과를 맞는다. 물고기와 순록의 교환 작용과 돌과 만두의 교환 작용이 복합적으로 중첩된다. 돌~만두의 전이 지대에 민물고기~돌과 흙~순록의 전이지대가 새롭게 투여되어 확장되며, 물과 흙이 섞이고, 먹을 것과 먹지 못할 것이 섞이고, 생명체와 사물적 자연이 섞이고, 물렁물렁한 것과 단단한 것이 섞인다. 이런 과정은 그야말로 넌센스 문학과 같다. 

    〈갈대밭〉의 모듈은 처음과 끝이 수미쌍관 되는데, 이는 유일하게 등장인물에 대한 표현이 실물화되는 부분인 키가 계속 자라는 B의 특징이 스틸트 장치의 부가로, 그리고 그것을 의태하는 장치 없는 신체의 연기적 기술로 그러하다. 그 중간의 두 모듈이 한국과 일본의 진정한 교류의 이상을 달성하는 양 각자의 언어를 구사할 때 횡 축으로 나란히 의자에 앉아 낭독극과 같은 외양을 띠게 되는 것과 달리, 이 시작과 끝의 각각의 모듈은 무대에 서서, 종축으로, 곧 앞뒤로 서서, 마치 A의 갈대밭을 헤쳐 나가는 모습과 그런 A를 잡으러 온 B의 모습을 표현한다. 

    커뮤니케이션이 아닌 에듀케이션

    그런데 왜 에듀케이션, 곧 교육일까. A와 B 모두 각자의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를 쏟아내면, 그것을 들은 상대방은 그것을 알았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한다. 알게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긍정이 아니라, 그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음을 아쉬워한다. 곧 알지 못했음을 토로하면서 알지 못했음의 사실을 성찰한다. 따라서 이야기의 내용을 통해 교육이 발생한 것이 아니고, 이야기라는 형식을 경유함으로써 교육이 발생한 것이다. 교육은 너의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임을 미처 인지하지 못했음을 깨닫는 것이며, 그러한 커뮤니케이션의 오차는 교육적 차원(에서 결여된 차원)으로 승화된다. 

    그런데 알았다면 무엇이 좋았다는 것일까. 앎이 교육의 목적이자 (긍정적) 결과라면, 여기서 앎은 부정성을 통과하며 도달하는데, 그 부정성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아름다운”에 찍히는가, “이야기”에 찍히는가. 곧 이야기‘의’ 심미성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 자신의 부족한 심미안에 대한 반성인가, 그 심미적인 것으로서 이야기임을 식별하지 못했음에 대한 반성인가. 후자를 따른다면, 그가 그것을 이야기로 전제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야기로서 곧 순수한 심미적 가치의 대상으로서 그것에 대한 온전한 ‘감상’을 하지 못했음에 대한 아쉬움인가. 

    ‘앎’은 이야기가 뒤늦게 발견되거나 식별됨으로써 곧 사후적으로 승인되는 것이며, 그 승인됨에 대한 명명이다. 곧 ‘교육’은 무언가의 발생 이후에 그것을 승화시키는 명명이며, 그로써 그것의 질적인 그리고 시차적인 뒤떨어짐을 재조각한다. 그런데 애초에 두 다른 존재로부터 동시성의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앎’에 대한 또 다른 차원의 계속 반복되는 발화는 A의 ‘말해주기 전에는 알기 어렵다’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앎은 직관 혹은 직감으로 무언가를 단번에 알아내지 못함에 대한 열등하고 사후적인 차원의 인식(을 승인하는 것)과 같다. 

    갈대밭은 갈대 몇 개가 갈대밭이 아닌 것과 같이, 단지 갈대~갈대밭 사이의 모호함으로써 두 양극단의 대상을 자유롭게 횡단하는 것으로써 없음과 있음을 교환―등치―할 수 있었던 것처럼,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판명된다. 그것은 커뮤니케이션의 조건, 곧 토대―맥락―에 대한 공통된 승인으로서 어떤 믿음이 그 세계를 구성하고 있었음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부재하는 것은 잠재하는 어떤 것과의 연합 속에 실체화된다. 가령 A에게서는 “눈물”이 “눈”을 만들고, 눈물을 닦을 “손”을 만든다. 그리고 실체는 잠재적인 것과 연합해 재의미화된다. 가령 B에게서는 “눈”이 있어서 “눈물”이 생성되고, 비로소 손은 그 눈물을 닦을 “손”으로 의미화된다. 눈물이 눈을 만들어낸다면, 눈은 눈물을 만들어내는 것 속에서 눈이 된다. 그런데 이는 더 큰 사실을 말하는데, A의 뒤집힌 판본으로서 B가 성립하며, 그 둘은 서로를 의태하고 있으며, 어쩌면 그것이 교육을 통한 효과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마지막에 이르러 A와 B는 둘의 사이에 매개를 소거하고 연합한다. B가 A를 잡으려는 건 A가 갈대밭을 벗어나기 때문도 아니며, 모두가 존재하지 않는 A를 생각하지 않아서도 아닌 것으로 드러난다. 실은 A는 돌이자 돌탑이 이미 되어 버렸는데, 그 돌탑임을 고백하면 용서받지 못할까 봐 고백하지 않고 도망가고 있는 존재이며, 동시에 돌탑이 되었음을 고백하지 않는 돌로 인해 키가 계속 크는 B는 고백하지 않는 돌이 아니라 실은 그 고백하지 않는 돌인 A를 잡으러 온다. 따라서 서로는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며 직접 연결된 대상이다. 그런데 거기에는 B의 A에 대한 믿음과 그에 대한 A의 고마움이 자리한다. 곧 서로에 대한 감화의 경로 자체가 교육이라면, 그러한 ‘온전한’ 교육이야말로 ‘완전한’ 커뮤니케이션의 이상에 접근해 가는 것 아닐까, 불완전한 커뮤니케이션의 실패로서 주어지는 온전하지 않은 교육이 아니라 말이다. 

    김민관 편집장

     

    신촌극장 2026 라인업
    [ 갈대밭의 에듀케이션 葦原のエデュケーション Reed Field Education X 김상훈, 야마모토 저스틴 카레라 ]
    -
    -
    갈대 없이 흔들려도 갈대밭은 아무 용서도 바라지 않는구나.

    葦なき揺れる葦原は何の許しも求めないのね。

    Even swaying without reeds, the reed field doesn’t ask for any forgiveness. 

    아시 나키 유레루 아시하라와 난노 유루시모 모토메나이노네.
    -
    -
    작연출 _ 김상훈
    협력연출 _ 정인혁
    드라마터그 _ 야마모토 저스틴 카레라
    출연 _ 김도윤, 김보우, 김중엽, 유이 아야네, 이시카와 아사히, 전혜인
    일본어 번역 및 코디네이팅 _ 김은한
    영어 번역 _ 김휘람
    기획 _ 박이분, 전강채
    사진기록 _ 김휘람, 하준호
    영상기록 _ 김동준
    제작 _ #음이온
    협력 _ #DrHolidayLaboratory
    후원 _ 일본국제교류기금 서울문화센터

    作・演出 _ キム・サンフン
    協力演出 _ チョン・インヒョク
    ドラマトゥルク _ 山本ジャスティン伊等
    出演 _ キム・ドユン、キム・ボウ、キム・ジュンヨプ、油井文寧、石川朝日、チョン・ヘイン
    日本語翻訳・コーディネート_ キム・ウナン
    英語翻訳 _ キム・フィラム
    企画 _ パク・イブン、チョン・ガンチェ
    写真記録 _ キム・フィラム、ハ・ジュノ
    映像記録 _ キム・ドンジュン
    製作 _ ummeeeonn
    協力 _ Dr. Holiday Laboratory
    後援 _ 国際交流基金 ソウル日本文化センター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