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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레디메이드의 〈제일 가까운 장애인화장실이 어디죠?〉(연출: 강보름).[사진 제공=프로젝트 레디메이드](이하 상동). 프로젝트 레디메이드의 〈제일 가까운 장애인화장실이 어디죠?〉(연출: 강보름)는 동명의 희곡(작: 천쓰안, 번역: 김우석)을 수행성의 차원에 입각해 전유하는데, 이는 말 그대로 실제를 그대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실제의 자리에 다른 실제를 끼워 넣는 방식에 의해 그러하다. 곧 대학로예술극장의 장소 특정적 연계와 재배치, 그리고 중국 인플루언서 자오홍청(趙紅程)의 실화를 바탕으로 쓴 동명의 희곡을 또 다른 “휠체어인” 조우리 배우가 연기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중국이라는 배경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존재를 고스란히 가져올 수 없는 재현의 간극은 수행성과 경합하는데, 그것은 원작의 ‘완벽한’ 재현이 아니라 현재의 다른 차원을 공진시키며 그 차이를 간극으로 그대로 표시하는 것과 같다. 강연을 앞둔 청즈가 대기실에 도착하기까지 대학로예술극장에 도착하여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 극장에 들어서는 사전 영상이, 우리의 공연 이전의 시간과 동기화된다.
그리고 이 대기실을 하나의 단상으로서 무대로 ‘반전’시키는, 곧 막을 열어 빈 객석으로 이뤄진 극장을 실재의 차원으로 드러내는 마지막 장면은, 단연 공연의 정수라 할 수 있는데, 무대와 객석이 분기되며 새롭게 정초되는 이 장면은, 청즈와 관객에게만 조명이 가해짐으로써 관객이 사라지고 청즈의 내면적 표상이 증대되며, 그의 시선에 입각한 관객의 자리는 부재로 현상됨으로써 관객은 자신의 비가시성이 공백으로 증대됨을 목도하게 된다.
이때 불가능한 시선은 관객이 없는 극장의 환영성을 극장의 실재적 이념으로 승화시킨다. 이때 희곡의 이후는 관객의 비가시성 또는 유령성 자체에 던져지는데, 조우리 배우가 관객과 구별 짓기를 통해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데 반해, 관객은 대상을 상실함으로써 또는 자신을 투사하던 시각적 장이 사라짐으로써 그 스스로가 매개되지 않음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니까 극장이라는 과잉의 이 장소는 극장성을 지우고 소거하고 전유하는 방식의 반대편에서 급작스럽게 출현하며, 극장을 잠재적인 장소로 소급되는 대신 (반대로) 환원시킨다.극장으로 환원되는 비장소(적 장소)성은 이 극장에 도달하던 이전 시간으로부터 연장되던 장소 특정성이 하나의 무대를 공유함으로써 그 수행성이 극대화된 부분이 오히려 극장의 전체성을 봉쇄하고 있었다는 사후적 판단에 이르게 하는데, 그러니까 우리가 진짜 마주하는 건 이 극장의 재분절이 극장의 보편타당성을 잘라낸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매끈한 것으로 환상적으로 봉합된 결과물임을 드러내는 것에 가깝다. 이른바 우리가 함께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객석 대신에 우리를 소거하는 전략적 토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차이에 의해 명시되는 이 같은 극장성의 재기입 전략으로부터 〈제일 가까운 장애인화장실이 어디죠?〉는 제목이 뜻하는 바로 귀환하며, 장애인의 비가시성, 그리고 장애인이 함께하기 위한 물리적 토대의 불가능성의 차원을 가시화하는데, 곧 “가까운”이 가장 먼 것으로 뒤집힐 때, 관점적으로 수용될 때를 아마도 가장 분명하게 현상하는 건 곧 독립된, 외떨어진 조우리의 시선 자체를 보는 것이 될 것이다.
여기서 조우리가 직접 관객을 대면하는, 상상적, 허구적, 경험의 재현적 공간의 이전에 존재하던 열린 시간의 경계가 여전히 그 이후에도 허구를 무마시키며 작동하고 있었던 것과 동시에 우리가 장애인에 대해 갖는 시각과 관계성을 계속 유효한 것으로 조정하고 있었던 반면, 조우리의 시선이 온전히 체현되는 지점, 하지만 그것의 불가능성, 곧 그것을 볼 수는 없는 신체의 전치―강보름의 (다른) 객석을 향한 반전―, 그리고 동시에 (유령적) 맞바꿈을 통해 관객의 시선을 소거하고, 하나의 시선을 무한히 상상적으로 증대시킬 때 ‘우리’는 비로소 다시 쓰이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적대와 불화를 신체 존재로 체현하는 사회 구조의 ‘정상적’ 작동 방식이(라는 이면이)다. 또한 이 장면은 강연의 두 가지 안이 끝가지 결정되지 않은 채로 단상에 오르는 청즈의 고민과 갈등의 상황에서 예기되고 선취되는, 미결정적 차원으로 결정되는 결말으로서, 하나의 불확정성과 불확실성의 강도로 결정된 시간을 무한하게 연장한다. 그것이 주는 메시지는 물론 (미결정되는 식으로만 결정되는) 주체 자체를 보여준다라는 것이다.
그런데 청즈는 어떤 강의 안을 선택을 했어야 하는가. 그 말은 어머니를 포함해 사람들이 기대하는 긍정적이고 귀감이 되는 ‘특별한’ 장애인의 역할 모델로서 답변이 되어야 하는가. 아님 자신이 차마 (어머니에게도) 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불편해할 수 있는, 그것을 증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상징계에서 누락되고 걸러진 말들을 과감하게 선택하는 것이어야 하는가. 전자가 그를 특별하고도 예외적인 인물로 거리를 둘 수 있게 한다면, 후자는 인간의 진정한 곤궁, 욕망, 언어의 잔여와 같은 무엇일 수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보편적인 무엇에 가까워진다.
청즈는 어머니에게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서 인정을 갈망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어머니는 대중의 바깥이 아니라 대중을 재현하고 대표한다. 그런데 그것은 장애로부터 발생하는 부분이지만, 실은 장애라는 재현에 입각해 표상되지 못하거나 표상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니까 역설적으로 본질적이면서 절대적인 건 장애인(에게 소급되는 그)의 내면이 아니라, 장애라는 가시성인 것인데, 장애라는 ‘더 많은’ 가시성이 정상인의 가시성과는 다른 것이라는 것,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를 가정하고, 다른 영혼을 가정한다는 것, 그것이 마치 장애인 스스로에게도 실제적인 영향과 효과를 미친다는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청즈의 발화는 장애를 벗어나서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 장애와 상관없이 상징계를 벗어나는 차원이라는 점에서 발화되기 힘든 공통된 것임을 상정하고 있는데, 이것이 다소 복잡한 건 그것이 ‘우리’에게 비친 장애인에 대한 의식을 반향하기 때문이다. 곧 청즈의 내면과 우리의 내면이 정확히 맞물리는 지점에서 서사는 완성되며 종결된다. 그러니까 청즈의 내면이 우리의 내면으로 뒤집히는 자리에서 서사 너머란 없다.
여기서 관객이 ‘우리’가 되는 건 반강제적인 차원으로, 청즈가 맺는 관계가 절대적으로 대자적인 차원에서 비장애인을 향하기 때문이다―오로지 그의 주변에는 비장애인만이 존재하는 듯 보이고, 그로 인해 장애인이라는 예외적 특수성과 청즈라는 예외적 특별함은 잘 구분되지 않으며, 비가시성으로서 장애인과 그것의 예외적인 위치로서 청즈 역시 그러한데, 청즈는 언제나 비(주)체가 아닌 주체이며, 이를 경유해, 우리의 시선으로 소급시킨다.
이로써 ‘장애’란 없으며, 장애에 대한 편견 어린 시선만이 외부에 있게 되(고 따라서 극복 가능한 것이 되)는데, 이곳은 온전한 내부이며, 그것은 하나의 구분 없는 극장의 재배치로부터 연장된다. 그곳이 그를 과잉 케어하는 진행 요원을 제외한 비워진 공간으로서 제4의 벽이 실은 이 공간 전체에 적용되었다는 인상을 주는데, 그러니까 우리는 말 그대로 (사후적으로 입증되는 사실로서) ‘무대’에 있는 셈으로, 우리와 청즈 사이에 제4의 벽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청즈를 묶는 이 공간의 경계 자체가 제4의 벽이 됨으로써 우리는 청즈를 관음하는 동시에 청즈의 내적 공간 자체로서 체현되는 것이다.
이 제4의 벽을 극장의 무대 막으로 환상적으로 치환하는 장면이 곧 마지막 장면이기도 한데, 그래서 우리는 실재를 듣지 못한 청자가 아니라 이미 그것에 가닿은, 청즈의 내면 아래 어떤 결정됨의 기로에 있는 그 자아로서 연장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부재로서 세상을 체험하며 우리의 몫을 반영된 차원에서 성찰하지만, 실은 청즈의 시선 자체로서 연장되며, 곧 내부의 시선으로서 외부와의 거리를 구성하며, 경계를 흡수하여 평평하게 만드는 역량을 또한 구성한다.
이때 동시에 우리의 시선은 청즈의 시선을 경유하지만, 청즈의 신체 자체를 투과하기도 하는데, 이는 청즈의 신체 자체와 직접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신체에 경계를 두는 상상의 작용, 그리고 그것보다 더 우월하다거나 그것 자체를 경이로운 무언가로 두는 인식으로부터 해방됨을 의미한다.
주체의 차원으로 다시 돌아온다면,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것을 진정 말할 수 없는데, 다만 누설하거나 대치시켜 발화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우리의 말이 솔직하지 않음과는 다르며, 우리의 말이 즉물적이지만은 않고 무언가 의미심장하며 다른 것을 말하고 있고, 실은 어떤 틈과 공백을 안고 있을 가능성이 주어진다는 것 역시 의미한다.
하지만 청즈의 말은 그가 자신의 장애에 대한 세계로부터의 인식 자체가 주는 강압, 억압, 경계의식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에서, 그의 말 너머의 말은 장애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뒤집어야 할 필요성과 함께, 그것의 뒤집힌 판본 자체로서 우리로 소급되게 된다. 그러니까 인식의 교정 가능성을 띤 장애라는 언어의 용례로부터 성립하는 건 진정한 의미에서 ‘장애란 없다!’라는 것이다.
그런데 청즈의 예외성이 특별함이기도 하듯, 곧 그가 “테일러 스위프트(Taylor Alison Swift)”나 “김연경”이나 “곰리(Antony Gormley)”가 아닌데도 만인을 향한 무대 위에 설 수 있겠느냐라고 회의하는 것이 결코 그의 진정한 곤궁함을 반향하는 것이 아님에 유의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그것이 그가 의도하건 아니건 간에 그의 능력주의의 상승곡선의 한 부분에 정류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청즈의 역량이라고 정의되는 것이 보편주의적 정의로써 장애를 규정하는 가운데 장애의 다양성을 외려 감축하거나 기각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곧 ‘나’라는 최선의 결과는 당신이 갖지 못한, 당신이 부러워할 만한 어떤 전형으로 격상된다. 그것이 우리가 아는 성공에 관한 시나리오다. 그러니까 장애인도 섹스를 할 수 있다라는 사실 역시 우리의 리버럴한 존재를 공공연히 입증하는 데 있어 이벤트 차원의 효과를 내며 기꺼이 수용될 수 있게 되는 것과 같이, 다양성의 수사는 더 세련되고 진보된 주체의 차원이라는 의식적 효과와 연동되면서 오히려 모든 문제를 납작하게 처리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연결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그러니까 ‘다양성’이라는 수사는 무언가 미심쩍다.
더 나아가면 청즈에게는 장애로 인한 내부의 고통이 특별히 있지는 않으며, 단지 척추 측만 수술과 다리 교정 수술―장시간 고정된 자세로 인해 받아야 하는 전자와 정상인의 신체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의 차원에서 받는 후자―을 한 번에 받게 될 때만 예외적으로 고통을 겪는 것으로 ‘고통’이 현상되는데, 이는 그 어머니의 관점에 반하는 장애를 받아들이지 못한 결과의 대가로 마치 사후적으로 수용되는 듯 보인다.
그러니까 대체로 그는 공공장소에서의 사람들의 인식과 편견 때문에 단지 ‘불편할’ 뿐이며 고통스러운 건 아니다―따라서 그가 장애를 수용한다면, 오직 바깥의 존재들이 그 장애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만 갖지 않으면 모든 문제는 대체로 해결되는 것으로 상정된다. 오히려 25km의 속도로 주파할 수 있는 성능 좋은 휠체어는 일반인의 체력과 힘을 상회하는데, 여기서 휠체어는 그와 완전히 결부된 보족 장치이거나 일종의 사이보그적 신체를 구성하는 일부로 전제된다. 그런데 이는 장애(인)에 대한 우리의 편견을 전복하고 쇄신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장애를 능력주의 담론 안에서(만) 읽히게 하는 바 있다.
이 지점에서 조우리라는 실재는, 곧 청즈와의 간극으로서 조우리는 청즈를 연기함으로써 조우리를 수행한다. 어쩌면 자신을 대중 앞에서 발화한다고 가정하고 그의 삶을 재정위하는 청즈로부터 조우리는 공통의 토대 위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그와의 차이를 확인하고, 이입과 동시에 그것을 지양하거나 또는 수긍하는 여러 사유의 인지적 과정을 겪게 될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이는 그 공통의 기반이라고 하는 것 때문에 그러하다. 그는 그러한 조건 아래에서 청즈를 이해하기 때문에 (잘) 수행한다기보다는 청즈를 온전히 따르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또는 ‘더’ 이해하기 때문에 청즈를 수행한다.
이는 마찬가지로 청즈가 장애인이기 때문에 결여되어 있고 동시에 과잉되어 있다는 오해를 받고 그것이 어떤 후속적 조처와 태도로서 이어지며, 그것이 청즈에 대한 악의나 부정성을 담보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반대의 차원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청즈에게 곤혹스러움으로 전가되는 것과 같다. 이는 마치 조숙한 어린아이가 어른들의 귀여움과 보살핌을 동시에 받는 가운데, 그를 냉소하고 빈정거리는 투의 속마음으로 그를 내다보는 가운데 전복되는 문학적 서술의 방식을 따른다.
그리고 여기서 어린아이라는 관념 자체가 하나의 편견임이 드러난다. 그런데 조우리는 그가 청즈와 같은 장애인이기 때문에 그가 우리보다 더 청즈와 친연하고 익숙하며 청즈에게 더 친화적이고 더 지지하는 차원에서 수용한다는 편견을, 더 근본적으로는 그가 청즈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지워낼 수 없는 차원에서 청즈를 연기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즈가 되어야 한다.
조우리는 청즈를 충분히 연기할 수 있다. 조우리는 청즈를 연기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라면, 반대로 청즈가 조우리를 연기한다면, 충분하지 않다. 조우리가 장애인 당사자 배우로서 표면적으로는 장애인의 권리를 주창하는 공연에, 접근성의 차원을 증대한 그 공연에 출연하는 것이 상징적 차원에서 그리고 공연의 내재적 윤리의 차원에서 합목적적이라면, 조금 언어의 속도가 더딘, 더 힘주어 말해야 하는 조우리라는 실재를 청즈가 연기하는 데에는 어떤 부족함이 있다. 그것은 존재 차원에서 더 풍부하며 더 밀도가 있는 부분이다.
반대로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일반인의 언어 사용을 담보하기 위해 조우리 자신이 투여해야 할 노력과 힘은 충분히 배가되는 바 있다. 따라서 조우리는 조우리를 수행한다. 조우리는 조우리라는 간극을 상연하면서 조우리 스스로 갖는 청즈와의 간극을 청즈 되기의 헌신 아래 좁혀 나간다. 또는 그러기 위해 조우리가 된다. 이때 조우리는 일종의 들뢰즈식의 청즈-되기의 연장선상에 놓이는 것 아닐까. 그리고 사실 그것은 하나의 투쟁에 가깝지 않을까.
따라서 맨 마지막으로 남는 잔여는 청즈의 상징계적 차원에서의 중차대한 고민보다도 조우리와 청즈 사이에서 조우리라는 우리가 표면적으로 지켜본 그 경계막 아래의 부분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조우리와 청즈 간의 닮음과 수용적 차원이라는 절대적 전제, 그것이 어떤 오해나 착각일 수 있음에 대해 조우리 자신이 말하지 못한 그 부분이다. 청즈가 성공주의 신화 속에서 장애의 차원이 소거될 수 있는 어떤 견지에서 오히려 장애 담론의 부정성을, 편향성을 예기하고 있는 것이라면, 연극인이자 장애인 배우로서 그가 말할 수 있는 장애의 관념성, 승화 가능성 따위는 어떻게 또는 어떤 식으로 비판적 차원으로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일까.
〈제일 가까운 장애인화장실이 어디죠?〉가 진정 성취하는 건 제목과 같이 장애인에 대한 권리 신장의 차원도, 또한 희곡 안에서의 장애의 비가시성도 아닌, 거기서 나아가 연극에서의 장애의 비가시성을 (몫 없는 자의 몫 없음을 가시화함으로써) 보편주의적 극장의 입구로 재정초하는 마법적 효과도 아니라, 존재를 배가하기의 어떤 전략 아래 해소되지 않는 또 다른 간극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극은 청즈의 차원에서 온전히 승화되지만, 조우리의 차원에서는 새로운 시작의 입구를 연다. ‘우리’를 재정초하는 지점에서, 또는 그 ‘우리’와 불화하는 지점에서, 그 B안 역시 들어보고 싶은 것이다, 아니 들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아마도 또 하나의 인상적인 장면은 조우리가 휠체어에서 내려와, 아니 그와 함께 다른 등장인물 일체를 연기하던 박하늘과 박세정 배우가 그를 휠체어에서 내려서 바닥에서 “푸른 바다 속에 가라앉는 것 같”은 느낌을 선사하는 일종의 꿈 장면이 아닐까. 이는 그의 장애가 사라졌다는 것, 그가 장애 이전의 일종의 태반으로 돌아갔다는 것에서 조금 더 나아간다.
그래서 그와 엄격하게 거리를 두던 그의 어머니의 자리가 해소되고 승화되는 데 그치지 않고, 어머니가 아닌 존재들로써 대신함으로써 그러니까 그들이 평평해지면서 평등해진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에 최종적으로 또는 더 방점이 찍히는 듯하다.
그것은 원작에서 한 명이 출연하던 바를 세 명으로 분화시켜 나누고 이를 다시 합산하는, 따라서 엄밀히 다시 세 명(의 분리된 차원)을 경계 없음의 차원에서 한 명으로 ‘재’분절하는, 장애와 비장애가 혼합되는 하나의 몸―그것이 엄격히 하나 내에서, 그리고 상호 간에서 분리할 수 없다는 이념을 설파하는―을 하나의 사회적 토대 안에 재기입할 수 있음의 특수한 효과를 구성해 낸다.
그리하여 다른 두 배우 역시 자칫 주연에 대한 기능적 차원의 인물에 그치는 것처럼 보이는 데서 나아가 그들이 엄격히 조우리의 ‘바깥’에 또는 곁에 머무르고 있었던 외부적인 혹은 보조적인 위치성을 스스로 소거(‘할’ 수 있음을 가시화)하는 것으로써 역할 너머에서 뚜렷한 주체로서 배가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정 짓는다.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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