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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 안전연극제 : 면역력] 《소거된 몸짓: 연극in 미게재 희곡 작가 페스티벌》: 희곡 스스로 한 발 나아간 자리, 그리고 사라진 시간으로부터 발화하기
    REVIEW/Theater 2026. 5. 7. 16:32

    [2026 안전연극제 : 면역력] 《소거된 몸짓: 연극in 미게재 희곡 작가 페스티벌》 포스터.

    《2026 안전연극제: 면역력》은 기획의 하나로, 《연극in》의 희곡 공모에 당선되었지만  《연극in》이 잠정 휴간되며 끝내 미게재된 여섯 편의 희곡을 《소거된 몸짓: 연극in 미게재 희곡 작가 페스티벌》(이하 《소거된 몸짓》)에 ‘싣는다’. 이는 제도가 가져온 2년간의 “기다림”과 “공백”을 작가 스스로 돌이켜보고 발화하며 희곡만이 아닌, 그것과 결부된 주체의 자리를 현상하고, 곧 그들이 가진 제도에서 버려진 자의 당사자성을 토대로 그들 스스로 자신의 희곡을 무대로 확장하고 변주하는 능동적 주체의 자리에 두게 함으로써 제도의 공백에 대한 면역력을 키울 수 있도록 한다. 

    크레디트에는 여섯 명을 “참여작가(미게재 아님)”로 재명명하는데, 이는 곧 게재를 의미하는 동시에 그 전사를 소급한다. 이는 미게재라는 오점과 낙인을 ‘정정’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이 기획이 연극in의 사태를 전유하고 있으며, 그것을 부정하기보다 극복하는 과정을 취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오히려 현장은 《연극in》의 부당한 조처에 대한 성토보다는 그들이 어떻게 2년의 시간을 보냈거나 그들 스스로가 연대의 차원에서 서로에게 묶이고 연결됨을 받아들이게 되었는지에 대한 정동적 차원이 강하게 일었다. 

    아마도 그 결정적 하나의 순간은 《연극in》 사태 관련, 대응 절차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변호사를 만나 그에게 들었던 말을 옮기는 오승은 작가의 격정적인 떨림 같은 것이었는데, 《연극in》의 글들이 그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것도 아니고, 25만 원이라는 원고료가 그렇게 큰 것도 아니(어서 그것이 아마도 그다지 실효가 없다)라는 말에서 그들이 ‘규정’되는 부분이었는데, 이는 부당한 권리의 소거가 갖는 절대적 부정성과 ‘소거된 몸짓’이 갖는 정치적 발화의 상징성을 무력화하며 그 현실에 복무하기를 요청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사건이 만들어낸 실재로서 주체가 비(지원)제도의 민간 영역 안에서 발화함이 그 제도에 궁극적으로 승리하지 못했다, 또는 극복했다라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것이 아니라, 그 ‘소거된 몸짓’ 자체가 가시화되는 자리가 제도의 공백을 보여준다라는 것이다. 이는 따라서 계속 소급된 그 자리에 대한 소리 없는 항변의 제스처를 취하는데, 거기에는 존재를 부정당한 자들의 취약함과 부재성에 대해 스스로 애도하고 연대하는, 사건을 맴도는 주체들의 왜상과 흔적이 감지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소거된 몸짓》은 그 작품이 비로소 실리는 기점을 마련하지만, 그와 동시에 작가들이 작품을 직접 ‘재’위치시킴을 요청하는데, 이때 작가들은 작품을 낭독극 방식으로 그대로 읽는 것과는 다르거나 그 위에 부착된 어떤 장치를 함께 가져가는 것으로써 희곡을 기획했고 수행했다. 첫 번째 오승은의 〈우리는〉과 다음 김유월의 〈입꼬리 읽기〉는 작가 자신의 수행적 행위가 전적으로 투여되면서 작품을 완성시킨다는 지점에서 갖는 몰입감이 컸다.

    〈우리는〉이 희곡을 직접 타이핑하면서 그것이 연결되어 자신의 앞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프로토콜은 일종의 재상연으로서 희곡이 오직 그 방식으로써만 희곡의 기원보다는 원본성을 되찾을 수 있음을 지시하는 것과도 같았다. 곧 단순히 글자들이 기입되는 것에서 그 유격이 극대화되어 증폭되는 순간, 가령 엔터로써 커서가 끊임없이 내려갈 때 그것은 하나의 빈 종이의 띄워짐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빈’ 단위를 점진적으로 더해간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의 임시적 구조로 재결정되는 순간, 가령 다시 앞쪽 페이지로 돌아갈 때의 잉여적으로 따라붙는 이미지―우리는 스크롤되는 흐릿한 이미지들의 역순으로의 전개를 종이로 구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또 글자가 줄어들거나 키우거나 하는 사태, 그 자리를 재구성하는 그 같은 행위는 종이 위에 무언가가 더 적히는 것과는 다른데, 곧 종이에서는 물질의 자리로 배가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이러한 사례들은 마치 이 상연성에 입각해서만 제대로 기입될 수 있는 희곡으로서 자리를 기입하는 부분들이다. 

    〈우리는〉은 결과적으로 종이 위에 적힌 글자가 아니라 글자가 적히는 프레임 자체가 그 글자와 함께 명시되면서 이 장의 역동적 생성의 역량이 신체와의 연결을 통해 구현되는 과정에서 최종 도달하는, 안착하는, 그리고 소거되는 몸짓들을 포함함을 지시한다. 또한, 글자의 크기와 글자체라는 양태는 존재의 다른 현전 자체로 연장되는데, 이는 0과 A라는 두 등장인물이 별도의 신체성을 획득하는 것 없이, 종이 안에서 혹은 화면 안에서 글자 자체로서 그것을 대신한다는 걸 의미한다. 

    작가는 특정한 화자에 해당하는 어떤 부분에서는 ‘독수리 타법’을 구현하는데, 그것은 지문으로 명시되는 부분이겠지만, 그 화자의 태도가 그 글자, 화면 안의 가시성이 아니라 타이핑을 치는 행위로서‘만’ 드러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곧 그의 움츠러들고 주저하는 어떤 목소리는 혹은 신체는 이러한 행위 양식으로 인계된다. 그리고 이러한 감각에 기반해 해서우의 〈친목 없는 클라이밍 동호회〉는 전적으로 쓰인다. 곧 쉬프트(shift) 없이 쓰기는 작가 말에 따르면, 새끼손가락을 다른 손가락들‘로’ 고정시키면서 클라이밍에 집중하는 양태를 닮는다.

    이 ‘~ 없이 쓰기’―2024년 웹진 《연극in》 희곡 공개 모집 글에서는 “엔터 없이 쓰기/인물 없이 쓰기/쉬프트 없이 쓰기/대사 없이 쓰기 스페이스 바 없이 쓰기/지문 없이 쓰기 / + 이 외에 더 낯선 - 없이 쓰기 제안 가능”이라는 조건이 있었다.―는 애초에 《연극in》의 희곡 모집의 단계에서 주어진 전제/미션이었는데, 곧 ‘소거된’이란 말은 애초에 이 이중적/양가적 의미를 띤다. 소거하며 썼어야 했고, 소거당했(으며 소거된 몸짓으로서 가시화된)다. 

    〈우리는〉은  “지문 없이 쓰기”의 조건 아래 쓰이는데, 이는 시간과 장소가 정해지지 않음을 의미하고, 그들의 현존이 역사 속에서 기입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는 0에게는 자신에 대한 의심과 의문, 회의로 연결되는데, A는 “무용하더라도 존재하는 것들”의 유용함, 그 자체로의 정당함을 주장한다. 소거된 존재들의 몫은 묘하게도 제도의 부재, 침묵의 진공적 이 현실의 사태 자체를 은유하게 되고, (그의 반동적 차원에서) 자신을 (재)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어떤 불편함이 더는 없는 차원에서 ‘무용한 존재’들의 플랫폼이 이상화된다.  

    이 과정에서, 작가의 본래 의도는 현실로부터 굴절되어 제도 자체의 위계성의 현실과 포용성의 이상 사이에서 제도의 자리를 (비)규정하면서, 살아남기 힘든, 끊임없이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는 작가/배우의 곤궁에 대한 정동으로 환원되는 듯 보인다. 그 부정적인 감정은 《연극in》 이전의, 《연극in》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자 어떻게 보면 《연극in》을 경유해 더 공고해지는 것과 같다. 
    어떻게 보면 《연극in》의 사태는  《소거된 몸짓》에서처럼 비제도적 자율적 역량의 차원을 오히려 증폭하고 발명하게 하기도 하지만, 제도에 대한 신뢰할 수 없음의 차원을 기반 없음의 대서사로 갈음하게 하기도 하는데, 카프카의  「법 앞에서」와 같이 제도가 가능케 하는 문턱은 일종의 실재의 불가능성을 띠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오지연의 〈밤에는 낮을 기다리고 낮에는 밤을 기다려〉는 그 미게재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으로써 부조리의 상황을 확인시켰는데, 이 게재됨의 순간이 한편으로는 긍정적인 것이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부정성의 사실 아래 가로놓이는 것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선택은 그가 서울연극센터 앞에서 웹진 《연극in》 폐간 반대에 연대하는 1인 시위에 참여했을 당시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일종의 자기 희곡 게재에 대한 태업 행위를 통해 그것을 달성하겠다는 걸 의미한다. 

    그가 대신 굽는 마들렌은 제도가 약속한 희곡이 들어갈 자리이며, 그 약속의 차원이 깨어짐을, 그리고 그 기다림의 영원한 순간을 전제해봄으로써 그 현실의 부정성과 불가능성을 체현해보고자 한다. 실제 공교롭게도 ‘여섯’ 개―여섯 명의 미게재 희곡 작가에 대응한다.―의 마들렌만 구울 수 있고, 나머지는 이미 구워놓은 것들을 제공하여 작가는 관객 모두에게 마들렌이 돌아가게 했는데,  작가의 기다림이 더욱 곡진했던 건 공교롭게 2년 동안 그가 기다린 임신이 희곡 게재의 사실과 병치되면서 그 둘의 실패와 유예의 차원을 합성하며 두꺼운 의미로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여기서 희곡의 게재와 아이를 낳는 것은 ‘하나의’ 기다림 속에 상호 침투하고 있었는데, 가령 출산의 절대적인 축복의 차원으로 성사될 수 있는 기다림의 지점과 무기력을 동반하는 희곡 게재의 기다림은 뚜렷하게 분리되지 않는 가운데 기다림의 양가적인 차원을 현상하면서, 서로로부터 재분절되고 있었다. 기다림은 막연하고도 희망을 갖게 하는 무엇이었다. 기다림은 “이미 온 것”이자 “아직 오지 않은 것”이라는 작가의 기다림에 대한 정의처럼, 희곡은 《연극in》 서울문화재단 담당자에 의하면 이미 게재되었었던 것이고, 그럼에도 아직 게재되지 않은 것이다. 

    희곡의 표현적 가능성을 고취하는 자리와 피켓을 든 시위 사이에서, 그리고 성토라기보다 토로와 발화의 차원에서 진동했던 《소거된 몸짓》은 어쩌면 《연극in》이 이후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을 선취함으로써 제도의 공백을 메우면서도 이미 발생한 것들이 새로운 자리로 이행될 수 있음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소거되었음으로부터 소거된 몸짓의 불가능성의 실재 자체로서 드러남이 아니라, 잠재된 차원으로서 영점의 시작을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우리는〉에서 우리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외침이 소거된 자의 몫 없음과 그것이 정치적 자리로서 부상하는 지점에서 재기입되는 것처럼, 무언가의 소거라는 ‘이전’의 조건은 그 소거가 가져오는 가능성과 부정성을 겹쳐 쓰는 지점에서 실재의 차원으로 연장되고 있었다. 지문이 없기에 자신의 자리가 없다는 0이 상기시키는 혼란의 상황에서 대해 우리가 살아 있고 또 그 안에서 순수 변화하고 이행할 수 있기에 살아 있다는 A의 말은 자기 수용 감각으로부터 도출하는 ‘하나의’ 세계에 대한 믿음을 도출하고 있었다. 소거됨은 부정적인 ‘현실’에 대한 잠재적인 역량의 극복으로 ‘지금’ 재정의되었다. 

    어떻게 희곡은 미래를 선취했던 것일까. 그것이 곧 작품이 지닌 잠재적 역량 아닐까. 그러니까 우리는 현실에 대응해 오히려/오직 작품의 (다시) 읽기만이 중요하다! 그런 지점에서 《소거된 몸짓》은 정치적 차원의 올바름을 넘어, 작품을 작품으로서 해방시킬 기회를 무엇보다 마련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은〉이 지문 없이 쓰였다면, 그리고 사실은 그 안에서 역할들이 세계를 차지하고 작가를 타자를 치는 이로 복속시키고 있었다면, 이와 유사하게도 채윤의 〈가면무도회 준비물 : 상상력〉(이하 〈가면무도회〉) 역시 등장인물들이 작가를 둘러싸고 이야기하는  것으로 둘의 위치를 반전시키는 구도를 취한다. 

    가면을 쓰고 지문을 포함해 각자의 역할을 맡고 읽는 7명의 관객들은 이후 작가가 준비한 몇 가지 질문에 대답하며 그 자신의 고유성을 역할로서 드러내게 된다. 이는 희곡 자체가 현장에서 완성될 수 있는 형태로서만 기획되었음을 드러낸다. “배우 없이”를 전제한 이 희곡이 관객을 통한 낭독극의 형태로 작가에게 주어질 때, 희곡은 정확히 작가를 떠난 지점에서 작가에게 도달한다. 

    이 지점에서, 작가의 자리는 실제의 시간과 뒤섞이고 현장 안에 배가된다. 〈우리는〉이 〈고도를 기다리며〉와 같이 주요한 두 등장인물이 이 세계 자체의 경계를 끊임없이 의문시하고 지시하는 지점에서 존재하며, 그 둘이 절대적 존재로서 스스로를 그 닫힌 무한한 진공적 세계 안에서 마치 작가를 대신해 기입하고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두 인물이 자리하는데, 〈가면무도회〉는 작가의 말을 대신 대독하는 관객의 발화가 작가를 다시 가리킴으로써 희곡이 실재의 자리를 차지하는 전도되는 경계에 자리한다. 

    곧 〈우리는〉이 희곡 안으로 절대적으로 들어가는 경험을 만든다면, 〈가면무도회〉는 희곡 바깥에서만 그 경험을 완성한다. 직접 관객을 참여시키는 또 다른 희곡은 “뇌 몸짓을 소거”하면서 쓴 김유월의 〈입꼬리 읽기〉로, 이는 한 명의 관객 참여자와 작가가 마주하는 구도로 테이블을 두고 앉아 진행하는 일종의 퍼포먼스로 구성되었다. 희곡은 끝없는 지시문, 스코어의 일종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그 빠른 말들의 전환을 따라, 측정 불가능한 미세하고 복잡한 감정과 감각 체계를 동원해야 한다. 

    사실 그건 정밀한 수행의 구현을 염두에 두기보다 문장의 행렬이 어떻게 반복적인 차원에서 연결되고 사실 연결되지 않으며 또한 연결될 수 있는지를 표정에 대한 진술을, 진술적 표정을 구성함을 통해 선보이는 것이다. 얼굴과 사유의 교차 작용 안에서, 얼굴의 주름을 짓고 잣고 기입하는 진술과 그것을 가로지르는 사유가 하나로 얽히는 과정에서, 사유는 얼굴에 대한 것이 되며, 얼굴은 사유의 장소로 분화한다.  사유는 얼굴로부터 추동되고 얼굴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그것은 그야말로 ‘입꼬리를 읽어내는’ 분투의 언어로서 퍼포먼스이다. 

    가령 점은 문자로써 담금질된다. 나의 문자들은 점으로 기입되고, 점은 문자가 담기는 구멍 자체이며, 그 구멍으로서 기입됨으로써 또한 점이 된다. 그렇다면 왜 거울 쌍으로서 관객의 참여가 필요했을까. 김유월은 컴퓨터를 내리떠 보면서 아마도 그 관객을 또한 흐릿하게 본다. 작가의 몸은 가이드가 되고, 또한 거울이 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작가의 몸이 더 안정적이듯이 거울은  ‘덜’ 안정적인 이미지가 된다. 그렇지만 작가의 행위를 지지하는 데는 적어도 그 거울은 더 안정적인 매체가 된다―반대편에서도 행위가, 현전이 가시화된다. 

    임세륜의 〈2024년겨울〉은 “스페이스바 없이/마침표 없이” 쓰는 희곡을 선보이는데, 일본인 화자로 분하며 장광설을 펼치는 퍼포먼스를 하다 정작 희곡은 QR코드로 대신 제공하고 그것을 읽고 난 후 피드백을 적은 포스트잇을 받는 식으로 갈음한다. 장막 희곡으로 발전하는 단계에서 희곡은 이미 초기 작업으로 재위치되었고, 현장은 유용한 희곡에 대한 베타 테스트적 측면을 띠게 되었다. “지금”과 “여기”가 중요하다는 작가에게 이 희곡은 역설적으로 과거만을 현상하고, 그의 퍼포먼스는 희곡을 사물화하며 현재화한다. 

    해서우의 〈친목 없는 클라이밍 동호회〉는 관객이 번갈아 가며 하나의 문장을 차례로 읽는데,초크 가루 주머니를 다음 발화 대상에게 전달 혹은 투척한다. 친목 없이 클라이밍만 하는 동호회는 클라이밍 외에도 별개의 대화를 나누곤 하는데, 이는 친목을 위한 대화의 무용함 혹은 무가치함을 전제로 하고 있다. “단지 믿고 말고 할 사이”가 아닌 “나라는 사람의 안정성을 검증받지 않”을 수 있는 대화 상대가 필요하다는 효의 말과 같이 클라이밍의 홀드에 대한 안정적 고정의 측면은, 불필요한 대화가 주는 불안정함을 소거할 때 아이러니하게 가능한 필요조건으로서 뒤집히며 연장된다. 

    홀드를 잡고 밟고 이행하는 동작들에서 대화는 사적인 사실보다는 그에 대한 성찰과 지각의 차원에서 제시된다. “경험한 적 없으면서 늘어놓는” “타자화된 나”는 분명 ‘너’가 아니다. 이런 온당한 대화의 기술은 친근함을 가장한 압력을 덜어내고, 개최에 대한 존립, 존중을 기초로 하지만, 그것은 그러한 신생 문화에 대한 새로움의 진술이라기보다는 그 반대의 부정적 환경에 대한 우화적 차원으로 기능하는 듯 보인다. 
    그들은 자유롭게 탈퇴한 이의 편지를 라커룸에서 발견하고 새로운 동호회 멤버로 초청받게 되어 이곳에 왔다. 아마도 그 기원은 알 수 없다라는 것이 중요하다. 그 자율적 체제가 누구에게인지 모른 채 무작위로 열려 있고 어떤 사회의 시간을 영속케 한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최대 가입 기간은 6개월로, 동호회 멤버 모두는 임시적 기간을 유지한다. 탈퇴 시에는 “라커룸 가장 왼편 맨 아래 라커”에 편지를 넣으면 된다. 그처럼 ‘고정된’ 위치의 라커룸은 매번 다른 주인에게 편지를 전달한다.

    집단적으로 클라이밍과 대화를 수행하는 현장은 〈친목 없는 클라이밍 동호회〉의 분리된 대화와 클라이밍의 교차됨을, 그 밍밍하고 심심한 말들의 향연을 닮아있다. 이 동호회의 사람들은 그 말로부터 스스로 괴리되는데, 이는 단순히 무엇을 직접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말을 하고 있는 자신을 인지하고 있는 채 말을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등장인물 중 안의 말처럼 ‘말 속의 나’가 분명 나임에도 “내가 아닌 것 같”은 것과 같다. 그들은 말을 하기보다 말을 전달하고, 희곡을 읽는다는 것이야말로 그러하다. 그것은 사적인 것과 나를 분리시키는 가운데 성립하는 말들의 전이로 인한 결과일까.

    《소거된 몸짓》은 《연극in》에서 모집되는 희곡들이 단순히 문학적 실험의 독특하고 예외적인 견지들을 보여준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케 한다. 대표적으로 그 전에 ‘다른손(hands/guests)의 희곡쓰기’라는 희곡 코너가 있었는데, 이는 2020년 팬데믹 이후, 희곡 자체로부터의 상연 가능성을 혹은 잠재적 상연성을 끌어내는 차원에서 모색된 희곡 쓰기라 할 수 있었다. [각주:1]

    희곡은 매체와 장르의 다양한 구현 방식의 가능성들뿐만 아니라, 그것이 구현을 염두에 두고 있는 장르라는 점에서, 그럼에도 그것이 핍진한 재현의 측면과 엄청난 스펙터클의 공세 속에서 이뤄질 필요는 없다는 점에서, 그것이 갖는 수행성의 측면 역시 그 텍스트 자체에 주요하게 내장되어 있다는 점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무대라는 ‘무한한 빈 공간’의 상상력의 견지에서 쓰인다. 따라서 《소거된 몸짓》은 ‘의도치 않게’ 《연극in》의 잃어버린 시간을 끌어오며, 희곡의 잠재적 자리에서 그 희곡들이 한 발 나아간 자리를 만들며, 그 시간을 현재화한다[각주:2].

     

    김민관 편집장 

     

    [공연 개요]

    2026-04-14 ~ 2026-04-15

    화요일 ~ 수요일(19:00)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

    소요시간 3시간

    주최/주관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

    문의 010-9108-4427

    1.  1. 당시 게재된 희곡들을 대상으로 쓴 글을 참조할 수 있다. https://www.sfac.or.kr/theater/WZ020700/webzine_view.do?wtIdx=12683  [본문으로]
    2.  2. 2023년 서울연극센터는 재개관하며 기획 프로그램으로 마련한 《희곡제:침묵과 말대꾸》에서 2020, 2021년 《연극in》의 ‘다른손(hands/guests)의 희곡쓰기’에서 게재된 희곡 47편을 전시하고, 일부 여섯 편을 낭독으로 소개한 바 있다―이는 2022년에는 이름을 조금 바꿔,‘다른 손’, ‘다시 쓰기’, ‘자기만족충만’으로 확장되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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