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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북동비둘기, 〈걸리버스 3〉: 불가능한 실재를 매개하는 방식들
    REVIEW/Theater 2026. 5. 6. 14:48

    성북동비둘기, 〈걸리버스 3〉ⓒ김철성. [사진 제공=성북동비둘기](이하 상동).

    성북동비둘기는 조너선 스위프트(1667-1745)의 『걸리버 여행기』 4부작의 하나씩 순서대로 ‘걸리버스’ 연작을 발표해 오고 있는데, 〈걸리버스 3〉는 그 세 번째 작품으로, 천공의 섬 라퓨타를 모티브로 한다. 특정 학문 체계에 몰두하여 현실과 단절되며 매몰된 시각 체제를 갖고 있는 이 하늘에 떠 있는 섬은, 연극 입시의 부정성과 부조리성의 차원에 대한 메타포로 재조각된다. 무대 위 배우가 되고자 소망하는 입시생의 ‘장면’으로부터 부조리한 입시 체제의 현실을 들추어내는 것으로 확장되어 간다. 

    입시 카르텔에 대한 국정감사 현장이라는 현실에 대한 핍진한 묘사와 풍자가 대단원을 이루는 가운데, 〈걸리버스 3〉는 “연극 입시 지정 희곡”으로 알려진 희곡들이 연쇄적으로 병치되는 구조를 갖고 있는데, 이는 일종의 연결-접속/해제 체제로서 하이퍼링크 형식에서 링크가 갖는 특징, 곧 부분이 전체로 순식간에 전도되는 감각을 산출해 내는 것으로써 부분이 전체가 되고, 전체는 부분들의 나열에 불과한 인터넷 세계의 어떤 감각을 동원한다. 

    이는 그 ‘파편들’의 흐름이라는 비선형적이고 분절되는 불안정한 ‘하나의 서사’를 갈음하는 추동력인 동시에, 그 연극 각각의 연기를 ‘지정’하여 수행한다라는 감각을 증대시킨다. 그리고 그것이 파편들의 연결이면서 파편들로의 접속 그 자체의 형식임을 드러낸다―그것은 전체의 부분이 아닌 부분으로서 전체이다. 곧 서사는 일차적으로 일정한 단위로서 편취되며, 일정한 단위로서(만) 작동한다. 

    여기서 파편들이 갖는 시련과 갈등의 부정적 고립성은 물론 각각의 내재적 진실을 수용하지만, 이는 오직 일정한 단위로서의 동등함이 주는 파편들의 자족성 혹은 비연결성이라는 형식 체제 안에서 ‘수용’되는 부분이다. 그러니까 심리적 고립은 형식적 고립 안에서 승화되는데, 그것은 모두가 각각의 모나드로서 고립되어 있다라는 메시지로써 그러하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것이 이루는 거대한 지층, 곧 하나의 서사는 이것이 하나의 연극 체제로써 세워진 비뚤어진, 비대한 비현실적 세계임을 반향한다. 

    여기서 연기 입시의 과정에서 연극을 재현하는 존재자들의 연기는 그 현실을 적극적으로 타개하는 장치로서 기능하는 대신 그 반대로 적용된다는 점에서 고립되며, 바로 그 기점에서 현실의 양면을 이룬다. 어떤 연극이 참조되고 있다는 감각, 곧 하이퍼링크로 연결되고 있다는 감각이 〈걸리버스 3〉를 지탱하는 가운데, 그 연극들은 현실과 괴리되어 있다, 곧 허공 위에 떠 있다. 하지만 그 괴리는 연극이라는 비현실성으로서 은유가 오히려 현실의 구조적 문제로부터 작동되는 것임을 드러냄으로써 〈걸리버스 3〉는 비극으로서 현실과 연극적 실재를 등치시킨다. 

    〈걸리버스 2〉[각주:1]의 마지막 장면을 삽입해 오는 것으로써 〈걸리버스 3〉는 자신을 연작 계열로서 명시하는데,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1984)에 맞춘 부산 야구 구장의 응원 안무의 무한한 반복의 이 잠재적 식역은 ‘부산 갈매기’라는 상징적 기표로부터 체호프(Anton Pavlovich Chekhov, 1860~1904)의 「갈매기」(1896)의 등장인물인 니나가 배우를 꿈꾸던 “전 너무 지쳤어요”라는 대사를 뱉기 위한 소진이다. 

    갈매기로 스스로를 지칭하는, 더 정확히는 갈매기와 자신을 혼동하는 니나에게 ‘갈매기’는 그를 속박하는 부정성의 형상 혹은 무의식의 그림자적 상징물과 같은데, 그 갈매기가 속한 호수가 자연의 생명력을 수여하기보다 닫힌 체제와 죽음을 예기하는 것처럼 이는 어쩌면 〈걸리버스 3〉가 출발된 지점의 현실 배경을 맴돌고 있다. ABBA(1973~)의 〈The Winner Takes It All〉(1980)을 재전유한 〈The Winter Takes It All〉을 미약하고도 구슬프게 부르는 배우의 마지막 무대는, 클라이막스의 국정감사라는 비극 이후의 현실 이후에 그 죽음을 재처리하는 방식에 가까운데, 이는 죽음에 대한 승화 대신에 죽음이 잔여로서 재생되는 것에 가깝다. 

    다시 처음의 독무대로 돌아오는 이 방식은 그 처음과 진정 연결되고 합성된다―어떤 특별한 연극의 소스로 부착되지 않는 이 독립적 노래는 아마 〈걸리버스 4〉의 입구에 들어설 것이다. 곧 배우의 꿈은 미래로 유예되거나 성취되지 않은 방식으로 과거에 이미 자리한다. 이미 충분히 경쟁적 시스템에 놓인 개인의 자조와 탄식의 이 노래는 승자가 아니라 겨울이 모든 걸 가져간다는 국소 차이를 가져감으로써 일종의 구조적 반복이 영원화되는 시점에 갇힌 인물들을 담는 체호프적 세계관, 곧 〈갈매기〉에서는 ‘겨울’ 특유의 이미지로 진동하는, 음울함과 그 세계에 침전되는 인물들의 양상으로 소급된다. 

    〈걸리버스 3〉는 근래의 현실에서 실제 벌어진 비극적인 사건[각주:2]을 향하는데, 이는 책임을 회피하는 국정감사 속 학교 교사의 모습을 통해 사회를 풍자에서 결정적이다. 이는 그 반대편에서 특정 시기의 개인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압력에 놓인 개인의 정동적 차원과 결착될 수 없다(는 점에서 간극이 노정된다). 오히려 후자는 일종의 주인공으로서 서사를 이루면서 독립적인 승화의 여지를 남기는데, 그 지점에서 일종의 현재진행형의 애도적 성격이 발원하면서도 그것이 인지 부조화된 광경으로서 희극적으로 처리됨으로써 해결 불가능한 과제로 남게 되며 최종 낙착된다. 

    곧 마지막 노래 역시 풍자를 향하며, 그 풍자의 형식은 정서적 실질을 기능적으로 산정해 낸다―하지만 그 풍자의 틀 아래에서 정서 역시 ‘보존’된다. 결국 〈걸리버스 3〉는 사회적 배경과 특정한 죽음 사이의 직관적 차원의 합성적 인식이 법적 책임에 대한 명확한 해석 양식으로 합치되지 않는 이 간극으로부터 구성되는 현실 자체의 해결, 해소될 수 없는 ‘침전’된 상황을 그리는 데 머무르고 있다고 하겠다. 그야말로 현실을 불가능한 실재 혹은 모순적인 적대의 차원으로 구성하는 역할로서 〈걸리버스 3〉는 자리하며, 그 부조리한 현실 자체를 공고한 구조로서 오히려 ‘보존’한다. 

    이러한 사회적 틀을 구성하는 행위로서 단편적인 연극들을 활성화함은 실제 〈걸리버스 3〉를 통해 데뷔한 세 명의 신진 배우와 경력직 배우의 대비가 학생과 학교 교사의 대비로 체현되어 ‘사실적’으로 드러나며, 이는 배우의 지향점에 대한 간절함 따위의 정서와 미약한 위치성의 상관관계를 나타내는 가운데, 앞선 니나의 위치를 전제하며, 역할은 마치 실제 배우의 수행성을 갈음하는 것처럼 보인다.

    니나-갈매기의 연기는 그 뒤의 사다리 세 개에 올라가서 그를 현실에서 동정하고 조망하던 세 교사와의 피지배-지배 관계가 퇴장하던 그들 중 한 명이 셰익스피어(1564~1616)의 『로미오와 줄리엣』(1879)에서 줄리엣의 창문을 향한 로미오의 사랑의 대사로 결정되면서 그들 역시 연극의 내재적 차원을 열 때, 무대 한가운데는 새 마임이나 춤과 같은 개별의 파편적 동작들이 병치되며, 일부 대사가 몇 개의 희곡을 암시한다. 매시 업 되는 대사들은 희곡(들)의 내용적 연결이나 전개가 아니라 각각의 희곡 자체를 향한다.

    (노라 대신에) 토르발트라는 이름이 헨릭 입센(1828~1906)의 『인형의 집』(1879)에서 노라를 인형처럼 집에 가두고 억압하는 그 남편의 이름으로서 희곡 전체를 제유한다면, 돈을 빌리고자 하는 말은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을 예기한다. 입시 연기생에게는 보톡스, 위고비, 울쎄라―초음파(Ultrasound)와 치료(Therapy)의 합성어로, 얼굴 리프팅 시술의 한 방식을 의미한다.―와 같은 각종 시술 및 처방이 필요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몸을 각출해서라도 돈을 마련해야 한다는 상관관계, 인과 관계를 만든다. 여기서 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의 넘버 중 하나인 〈행복한 사랑〉을 전유하는데, 가령 1절은 “애석하게도 못 뺄 살들”을 반복하며 위고비를 호출하는 식이다.

    흩어진 배우들은 무대 뒤쪽에서 “T R O P H Y”를 만드는데, O와 H는 각각 둘의 결합으로, 이때 전면 무대에는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동물원』(1944)에서의 영화관에 처박히는 아들 톰에 대한 엄마 아만다의 구박 장면과 대칭되며 합성된다. 이는 영화 시상식의 트로피로써 구겨진 톰의 삶을 재처리하는 방식으로서 상징적 영예와 욕망의 성취의 자리로서 영화라는 잠재적 코드를 상기시키는가. 아님 엄마의 트로피로 전락한 아들의 상황을 풍자하는가.

    다시 아서 밀러(1915~2005)의 『세일즈맨의 죽음』으로 비약해, 외판원을 하는 아버지 윌리와 아들 비프와의 대화를 앞선 ‘영화’라는 키워드를 매체적 배경으로 전유해, 둘의 대화를 펼쳐낸다. 이때 필름이 영사되는 소리와 함께, 그 마주하는 둘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말하는 이의 정면 샷 구도로의 변경은 (영화가 연속의 촬영 단위인 숏들의 구성으로 작동된다는 매체적 조건을 가시화하며) 그들을 원형 대열로 둘러싼 이들이 시계 방향에서 시계 반대 방향으로 끊임없이 집단 이동의 흐름을 변경하면서 필름이 영사되고 있음을 표현한다. 

    두 개의 연극은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과 억압의 차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연동되며 하나의 계열을 이루고, 이때 그것이 재현‘되는’ 구도에서는 배경과 전경 혹은 매체와 이미지 사이라는 일종의 경계 역시 지시되는데, 이는 나아가 실질적인 경계 양식의 표기로서 집이라는 억압적 코드와 결부된다. 『세일즈맨의 죽음』 재현 장면에서, 비프는 선생을 사팔뜨기가 돼서 혀 짧은 말을 하는 존재로 놀리는데, 이때 옆방에서 누군가―선생이 상기되고 동시에 실제로 합성된다.―의 웃음소리를 감지한다. 이는 다시 감시와 지배 구조의 첫 장면으로 소급된다. 

    세 사람의 무대 뒤쪽 횡렬 사다리 배열과 조응하는 세 개의 운동 양식이 집단적으로 동시에 창안, 수행되는데, 하수부터 스미스 머신으로 스쿼트를, 상수에 사이드 레터럴 레이즈 머신 기구로 운동하는 모습을 연출하는 가운데, 『유리동물원』의 앞선 유사 계열이 반복되는데, 이는 학원을 등록하지 않은 톰의 누나 로라와 그것을 따져 묻는 아만다의 대화―아만다가 학원에 가서 사실을 알아볼 때의 상황은 또 다른 학원 교사와의 대화로 재현된다.―로 나타난다. 그리고 로라는 (꿈과 희망이 너로 인해) 다 사라졌음을 외치고, 헬스 대열에 중앙부 런지 동작으로써 합류한다. 

    다시 윌리 러셀의 「리타 길들이기」로 극은 이행되고, 이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1606)을 포함하는데, 이 프랭크와 리타의 대화 속에서, 리타가 보고 온 연극이 〈맥헬스의 비극〉인 것이다. 이는 주체의 의지와 상관없이 끌려가는 비극으로서 운명에 대한 대화로 삽입되고, 비극의 주인공으로서 맥베스가 헬스와 연동되며 맥‘헬스’로 전용되는 가운데, 맥베스를 죽이는 맥더프와의 불가피한 악연의 만남은 맥헬스와 그의 쌓여가는 살을 더 가속할, 맥도날드의 아침 시간에 제공되는 맥모닝과의 만남으로 전유된다. 곧 비극적 운명은 앞서 위고비처럼 극단적인 비만 치료제의 요청과 같이, 그 전의 멈출 수 없는 식탐의 비대한 차원을 기원 삼는다―그리고 이 강박적 헬스에 대한 의존도를 높인다. 

    리타가 저 전철에 있는 대학생들을 호명하면서 전철 안의 상황으로 이행된다.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햄릿」으로 넘어와 계속 (학교를) 다니느냐 마느냐, 곧 “자퇴”를 하느냐의 질문이 현대인의 일상적 풍경 아래에서 그 중요성을 합리적 차원으로 획득한다. 맥베스의 인생을 조정하는 마녀 셋은 세 교사의 자리에 해당하는데, 이들은 여기서 입시 일타 강사가 된다. 『걸리버 여행기』를 쓴 영국인 조너선 스위프트는 연극 입시의 명가로 호명되는데, 이는 “조난당한 스위트한 연극인”으로 재위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세 명의 마녀-교사는 예언에 대한 힘과 같은 초자연적 힘을 너머로부터 요청하는 외양으로써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희곡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과의 연결 고리를 결착한다. 자신의 둘째 남편 ‘안토니오’의 장례를 치루는 과정에서 오는 베르나르다의 슬픔은 “(할렐)루야”를 연신 외치며 “예술님”의 부활과 함께 앤또니오―“종”으로 재분류된다.―의 합격을 축원하는 행위에서 기쁨의 정서로 재위치된다. 여기에는 연기 입시에서 검정 부채가 아닌 (초록) 부채를 아델라가 사용하는 것에 대한 책망의 발화가 실린다―그것은 “안 될 라.”로 잘못 발화되며 그 본래의 이름을 언어 유희로써 들추어 낸다. 

    그리고 “빚사리오 나리”를 찾는 것으로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으로 넘어가는데, 이는 앞선 잘못된 부채 사용의 결과 “무너지리오”라는 종결 어미 “~오”와 라임을 맞춘 언어유희의 큰 법칙 아래에서(‘만’) 연속된다. 그리고 돈을 꾸어주는 각각 바싸니오와 샤일록―“샤이론”으로 전유된다.―의 관계로 연장된다. 그 둘의 사이에는 앤토니오가 있는데, 바싸니오의 사정을 대신 해결하기 위해 그가 샤일록에게 곤경에 처하게 된다. 앤토니오를 전유하는 앤또오니는 바로 앞 장에서 (안토니오를 전유하여) 마녀-교사 한 존재의 종으로서 합격을 기다리는 나름 ‘절박한’ 상황을 이전한 것이다―그 안에서 두 명의 앤또오니는 공통적으로 간접적 언급의 대상으로서만 등장한다. 

    물론 이 언어유희를 통한 중첩됨 속에서는 본래의 희곡들이 희미하게 감각된다. 본래의 기표들에는 대신 현실의 지배적 코드로서 기의가 달라붙는다. 그리고 이러한 연극의 차용은 연극에 대한 전용으로서 이뤄지는 가운데, 연극과 같은 현실이라는 비유, 곧 현실의 차용으로서 연극이라는 의미를 (재)획득한다. 곧 ‘연극을 (그냥 되는 대로) 하기 위해 연극을 (우연적으로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연극스러움을 표현하기 위해 연극을 (‘자의’적인 것으로 구성)한다.’ 그러니까 현실은 극적 장면으로 해소되거나 봉합되기보다 근본적으로 맥락을 잃고 떠돌고 유예되는 파편으로 (재)규정된다. 

    〈걸리버스 3〉의 실제 모티브, 시작된 기원으로 여고생 3명의 동반 투신자살 사건이 국정감사로 연장되는 서사는 후자의 청문회 장면 전에, 전자의 존재들은 소포클레스(기원 전 497년~기원 전 406년)의 희곡 『안티고네』에서 매장을 금지당한 오빠의 시체를 장례 치루는 안티고네와 그에 대립하며 안티고네를 만류하는 그의 여동생 이스메네의 대화를 경유해 “진실의 시체”로서 굴절되어 매개된다. 곧 시체에는 존재를 넘어서, 사후적으로 밝혀내야 하는 부조리가 실린다―“세상 밖으로 옮겨놓”고자 한다. 

    이는 (사후적―청문회에서 비로소―으로 안착되는 학교의 부조리함에 대한 은폐 기제로서) “부적응자”로 그들을 (도리어) 낙인찍는 학교의 행위에 대한 항거의 차원으로 제시된다. 이때 죽음에 공명하는 것에 그치기보다 그 죽음의 진실을 알리려는 시도의 차원은 현실을 풍자하고 비판하는 연극 자체의 본질적 코드와 조응하는데, 그것은 죽음 자체에 대한 매개라기보다 죽음을 둘러싼 세계의 진실을, 불가능한 실재를 상대하는 예술의 효과를 적시한다. 

    그러니까 원작에서 시체의 재처리는 최종적으로 궁극의 애도를 완성하기 위해 사회를 거역하는 것이라면, 그와 달리 여기서는 사회의 부조리 자체를 적시하기 위해, 애도의 기능을 유예, 전치하는 것으로 미묘하게 달라지는데, 이 새롭게 투여되는 내부 고발자로서 위치는 진실 자체를 순수하게 대리하는 매개자의 역량을 새롭게 떠안게 되며, 실제 사건의 범주를 상상적 차원에서 연장하고 우리에게로 소급시킨다. 

    자본주의-자유주의의 개별화된 경쟁 사회와 입시 카르텔의 사회 구조의 지배적인 물적 토대 외에도 그 초자아적 목소리의 지배 양상과 직결되(며 그 둘은 연결되고 또한 혼동되)는데, 그것은 현대인의 신체에 대한 강박 차원이라는 접점으로 드러난다. 곧 이러한 강박은 고통을 쾌락으로 바꾸는 것과 같으며, 우리를 내재적으로 기꺼이 속박의 단계로 미뤄 넣는다. 현실의 죽음이라는 실재를 불가능한 대상을 대하는 주체의 차원으로 매개하(며 유예시킬 수밖에 없)는 안티고네로서 전략이 블랙코미디로서 청문회를 통과하고 나서는 오히려 진정한 애도의 차원으로 건너간다, 또는 건너갈 수 있는 여지를 가설한다. 

    그러니까 현실에 대한 애도는 굴절되거나 과잉되어 있거나 시차 어린 간극 속에서만 존재한다. 또는 그러한 통과 과정 속에서 반복된 애도 불가능성의 지점으로 자리 잡는다. 곧 1964년에 상연된 천승세(1939~2020)의 희곡 『만선』에서 구포댁이 풍랑 속에 부서떼를 잡으러 배를 몰고 갔던 남편 곰치가 의식을 잃은 채 돌아와 옆에 있고―이는 앞선 청문회장에서 실신을 연장한 것으로, 여기서 신체는 두 장의 접점을 환유로써 구성한다.―, 구포댁의 충격과 슬픔은 유예되고 상상적인 것으로 굴절되는 가운데 잠재적인 것으로 있다.

    뒤늦은 사실에 대한 인지와 그 충격은 애도 불가능성의 사태를 만들고, 그것은 실제의 사건을 당사자의 입장에서 철회하지 않는 영속된 과거로 결정하며, 그 안에 있던 구포댁의 딸 슬슬이는 〈The Winter Takes It All〉을 부르기 시작하며 〈걸리버스 3〉은 막을 내린다. 그러니까죽음의 구조적 차원을 드러내면서도 한편으로는 순서의 변경 혹은 뒤틂을 통해 죽음을 불가능성의 실재 혹은 공백으로 처리함으로써 우리가 실재의 충격을 구조에서 기인하는 효과로 다 되돌리지는 않게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연극’이라는 대리된 형식 안에 먼저 둠으로써 매개된 대상으로 대신 향유하게 한다. 곧 〈걸리버스 3〉는 이 실재를 상대하는, 실재에 대응하는 예술의 어떤 방식들을 보여준다.

     

    김민관 편집장 

    1.  1. 〈걸리버스 2〉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할 수 있다. https://www.artscene.co.kr/2062  [본문으로]
    2.  2. 부산 한 아파트에서 2학년 여고생 3명의 동반 투신 자살 사건(2025.06.21)은 그 이후, 해당 학교 교장의 기자회견(2025.07.08), 그리고 본격적으로 그 배경에 학교의 카르텔이 있었음을 추적한 MBC 방송 〈〈PD수첩〉〉에서 방영된 〈P예고생 3명 사망 사건〉(2025.07.22), 그리고 부산시교육청의 ○○예술 중ㅈ고 특별감사 결과 발표(2025.08.27), 경남 창원 경남교육청에서 열린 부산시교육청 국정감사(2025.10.23) 등으로 이어지며 그 비극적 사건에 대한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나는 가운데, 비판과 자성을 부르짖는 목소리로 확장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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