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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돌파구, 〈키리에〉(장영 작/전인철 연출): 죽음을 경유한 사랑으로의 도약REVIEW/Theater 2026. 5. 8. 12:53

극단 돌파구, 〈키리에〉(장영 작/전인철 연출)©지경민[사진 제공=극단 돌파구](이하 상동). 〈키리에〉는 자신이 건축한 집이 된 영혼(최희진)을 죽음을 앞두고 찾아온 존재들이 그와의 죽음이라는 공통분모를 안고 어떤 비지각적이고도 무매개적인 접촉 아래, 일종의 고해성사적 독백을 통해 삶을 다시 추스르고 도약하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일종의 영혼의 싸개로서 집은 영혼의 물리적 연장이자 또 다른 신체를 수용하며 그것을 지각하는 신체의 전면화된 재분절로서, 정신이 신체로 이완―탈영토화―되면서 정신-신체라는 반죽의 동일한 밀도를 띠는―재영토화되는―, 그리하여 거대한 하나의 기관, 혹은 기관 없는 신체가 된 집이 된다. 그때 들어오는 영혼들은 역설적으로 비워진 정신의 영역 아래, 정신을 그 확장된 신체에 이완할 수 있는 역량을 부여받는 것과 같다.
〈키리에〉는 이처럼 죽음 ‘이후’와 죽음 ‘직전’을 맞물리게 하는 가운데, 변성의식적 체험을 통해 죽음을 경유해 존재들을 오히려 승화시키는데, 그것은 죽음에 대한 극복이 아니라, 삶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과 같다. 타자를 수용하는 집과 자신의 과거/기억을 수용하는 존재들의 자세가 “자비”라면, 두려움을 감축하는 것은 “사랑”의 한 경로가 된다. 모든 존재는 기본적으로 이자 관계로부터 출발하며, 그것은 서로에 대한 수용적 자세로써 고려된다. 곧 모든 것이 일종의 수용 감각기가 된 집과 같이, 일종의 절대적 배려로부터 모든 것이 새롭게 정초되어지는 근거를 구성하는데, 이는 일종의 경계(liminal)로서 종교적이고도 신성한 차원을 가리킨다.
집은 사실 그 옆의 “검은 숲” 자체인데, 집은 죽음에 감싸여 있다. 그것은 죽음의 완벽한 위장―은폐―이며, 부재와 무의 공간 아래 순수 의식적 차원만이 가로놓인다는 걸 의미한다. 집이 의식화된 것이 아니라, 의식이 집이라는 형체로 임시적으로 구획되어 있다―“집 전체를 의식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극장의 은유로 암전을 육체화한 것이다. 곧 〈키리에〉가 다루는 세 개의 공간, 집 이외에도 극장, 검은 숲은 하나의 덩어리로 구분되지 않으며, 검은 숲을 환유하는 집이 은유하는 극장은 실제 그 집과 신체적으로 따로 구별되지 않는다. 이는 극장의 전매개적 덩어리성의 다른 이름들이다.
이 집에 처음 무작정 쳐들어온 인물 엠마(유은숙)은 온몸이 굳어가는 질환에 걸린 남편을 돌보면서 거기에 자신도 복속되어 있는 존재로서, 오히려 바깥의 그와 같은 (타자로서) 타자들을 수용하고자 여관―“에어비앤비”―으로 이곳을 기재하고, 집(최희진)을 집으로서 매개한다―집(최희진)은 집으로서 그것을 매개한다. 이때 엠마가 자신의 삶을 “이 미친 연극”으로 비유하는 건 의미심장한데, 이는 수동성의 입장을 부여받는 게 아니라, 자신이 그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그 삶이 수여되는 것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검은 숲에 이르는 모든 존재들의 행동은 자기 너머로의 결단을 이행하는 것이며, 그것은 삶을 전적으로 다시 쓰(이)게 한다.
엠마는 남편이 자발적으로 바깥을 향해 이탈한 기적 같은 순간을 마주하고 마침내 남편의 청을 들어주고 자신도 삶을 끝내기로 결정하는데, 그가 목을 매다는 그때 집은 각성하여 자신을 헐어 버린다. 이 죽음을 향한 안간힘이 그의 죽음을 영속화―그는 무대 하수 뒤쪽 벽에 기울여 있는 한스 홀바인 2세의 〈무덤 속 죽은 그리스도의 시신〉의 그림처럼 눕는다(그림은 신체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 신체의 환유이다.).―하며 엠마를 한다. 어쩌면 몇 안 되는 부속되는 이 신체가 ‘예기’하고 있었던 것처럼 집은 죽으며 죽음의 신체로 돌아온다.
이는 스스로가 하나의 육신에 갇혀 있었음을, 그 무게에 눌려 있었음을 공통으로 체현하는 지점에서, 죽음은 ‘교환’된다―엠마에게 남편은 하나의 버릴 수 없는 집 같은 것 아니었는가. 하지만 홀로 가벼워진 이 육신을 다시 온전히 너가 자리할 수 있는 곳으로 위치시키기 위해, 집은 자신을 포기한다. 죽음을 막기 위해 죽는, 이 죽음에 도달하는 사랑, 또는 사랑에 도달한 죽음은 유일하게 일종의 향정신적 물질로서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만든 버섯 초콜릿을 그 자신만이 먹지 않은 것과 같이, 자신을 그 바깥으로 이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전도시키려는 행위에 대응하여 이를 탈환하는, 일종의 버섯 초콜릿 효과를 대신 자신에게 주입한 것과 같다.
이러한 집의 내재적 전복(의 향정신적 마약의 효과로서 은유)의 일환에서, 집의 이 뒤집힘은 집의 축소됨이고, 안과 밖의 교환이고, 닫힌 영혼의 구출(들)이다. 자신을 죽여 타자를 구하고 스스로를 타자의 자리로부터 구원하는 이 전도의 연속 갱신적 계열에서 〈키리에〉는 끝난다. 곧 발화의 터전이 되던 극장이 기각됨을 통해 말들은 자신의 공간을 잃는다. 또는 돌아간다. 무대 바깥, 객석 끝 쪽에서 마이크를 든 건축가의 발화로 여는 〈키리에〉는 극장을 그렇게 빈 자리로서 지시하고 나서 그 용기로서 극장이 완전히 열리게 되는 시점을 상상으로 인계하면서 이 용기 밖의 신체가 획득하는 길의 메타포로 되돌아온다.
집이 전도된 검은 숲은 특정한 영역이 아니라 실은 세계의 중핵이자 실재 같은 것 아닐까. 곧 집이 검은 숲으로 바뀐 것이 아니라 (언제나) 검은 숲이었음을 드러내는 방식의 연장선상에서 집의 의사-죽음이 자리한다. 그 죽음은 집에 대한 국소 차이를 통해 집의 실재를 확정한다. 집으로서 건축가가 엠마에게 그리고 엠마가 그를 의태하며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었던 것처럼, 마치 그것이 삶의 전부가 되었던 것처럼, 몸은 누군가를 만나기 위한 장소이자 물질 것일지 모른다. 그러니 정신은 순수 정신의 현상 안에서 과거의 잠재된 경로를 재획득―관수(백성철)―하거나 자기 자신을 유체이탈의 체험 속에서 맞이함―목련(조어진)과 분재(윤경)―을 통해, 결국 신체로부터의 자유는 (또 다른) 신체의 자유를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애초에 죽음은 마치 정신이 신체를 벗어나는 것으로 전제되고 정신은 신체를 벗어나는 자유로써 재획득되는 〈키리에〉에서 결국 중요한 건 죽음의 극복이 아니라 죽음을 통한 극복으로 보인다, 그것이 결정적 심급으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는 다시 타자를 향한 전적인 수용의 자세로 전이 가능한 지점을 만들고, 실은 타자를 향한 절대적 열림이 죽음임을 암시한다. 그런 점에서 분재의 타자에 대한 신체 공여 행위는 그것을 미리 기입한다.
집의 내화가 엠마이고 엠마의 연장이 집이라면, 그렇게 둘은 공통적이며 죽음을 직시하고 죽음을 꿈꾼다. 건축가는 집에서 벗어나 영면에 들고 싶고, 엠마 역시 남편이라는 육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 그리고 집 자체로서 죽음을 향한 여정의 끝에 도달한 존재들을 수용한다. 반면, 극장은 그 둘의 현재를 벗어나, 공통된 삶의 진실을 투여하는 장소가 된다. 그것은 또한 엠마와 그의 남편의 연극이 삶을 결정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그 둘의 삶이 일종의 연극 안의 역할 놀이와 같음을 드러낸다.
건축가는 무대에서 하데스(엠마의 남편)를 사랑하는 에우리디케라는 전도된 엠마의 역할을 공교롭게도 봤던 기억이 있고, 엠마는 그렇게 비극적 여주인공을 너무 밝게 연기해서 눈총을 받던 시기를 거쳤으며, 그것은 마치 죽음에 가까운 남편의 신체에 묶여 있는 엠마 자신의 현재에 대해서까지도 긍정을 선취했던 것만 같다. 집 근처 극장은 결과적으로 무용수와 관객의 만남이 (‘건축가의’) 기억으로만 상연되는 장소가 되고―둘의 경계를 둔 만남이 영속적인 것임을 (건축가만이 인지하는 것으로) 드러내고―, 엠마의 현재를 결정한 결정적 전사가 출현하는 장소가 된다.
엠마의 남편은 질환에 걸리고 나서 엠마의 온전한 육신을 질투하며 눈이 뱅글뱅글 도는데, 엠마는 그에 조응해 계단에 몸을 굴리는데―현실에서 눈이 먼 엠마가 마주한 ‘그 계단은 마치 나선형 계단일 것만 같다.’―, 이때 엠마의 묘사는 지옥에 대한 원작의 내용을 대체하는 독백의 순수 강도를 가진다. 추락은 남편의 위태로운 시선을 향한 무대 위의 상연이자 그 시선 자체를 연장한 몸짓으로, 그 둘의 뒤섞인 신체, 죽음 위의 신체와 죽음을 향한 신체로서, 죽음과 삶이 배합되는 신체들의 다양한 양태와 연장적 횡단을 이야기한다. 따라서 이야기는 현실적이기보다 잠재적이며, 마치 엠마 자신이 그 죽음의 신체를 수여받게 되었으리라는 결과를 표현한다.
처음 집을 찾은 이는 반려견을 잃고 삶의 의지를 잃은 소설가 관수(백성철)로, 그는 환각 속에서 버섯 초콜릿을 먹고 그의 반려견 원이와 그의 전 여자 친구 선재를 만나게 되는데, 그것은 그의 기억의 나선형 원뿔을 타고 올라오고, 그는 그 위에서 그것들을 내려다본다. 태어나자 마자 그를 주변으로 돌아서 원(圓 둥글 원)인 반려견과 선재는 그 안에서 얽히고설키며 관수-원-선재가 연결-접속된 하나의 계열이 끊임없이 변용되는 공간에 있다. 그것은 현실의 오지각이라기보다 잠재된 과거의 지각적 용출이며 꿈과는 다른 것이다.
이는 뚜렷하고 선명한 지각의 차원과 몸이 형해화되며 세계로 연장되는 용출의 감각적 차원이 배합되는 것 안에 있다. 하지만 거기에 과거라는 실재가 도착한다―과거는 “결핍의 역사”이지만 그렇기에 그 반대편에서는 ‘충만함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는 개는 관수를 경유해 개가 되고, 관수는 그 개와 함께 관수가 되며, 관수-개의 연합을 지각하는 자신이 된다. 관수와 개는 연속되고, 그로부터 선재 역시 연속된다. 관수-개-선재는 이행적, 매개적 대상들로서 뒤섞인다.
그것은 관수의 죽음과 이별로부터 존재를 다시 지각할 수 없음에 대한 자신의 무능을 극복하는 무한한 긍정의 도래이며, 이것은 “불법”임을 그가 확인받음에도 불구하고 무한한 역량이 그를 다시 삶으로 이끌어 낸다. 마치 버섯의 포자가 증식하는 것처럼, 불가능한 횡단이 발생함으로써 말이다. 이때 무대 아래 좌우측 가에 하나씩 놓인 조명기가 그를 비추는데, 그것은 그야말로 그에 대한 ‘집의’ 집중, 곧 주체적인 신체의 행위일 것이다―사실상 무대 바깥에서 시작한 집의 발화는 이 극장 전체를 터전 삼고 있다.
새로 등장한 목련과 분재는 무대 앞쪽에서 좌우 대칭의 이미지로 배치되는데, 이 둘은 함께 왔지만 처음 만난 존재들로, 실은 하나로 배합되기 위해 분화된 존재들과 같다. 그 둘의 머리를 한데 모아 횡 축으로 놓인 두 침대에서 서로를 마주하는 이 배치 아래, 한 명은 발화/토로하고 다른 한 명은 수용/배려하는 연속적 행위가 발생한다. 삶은 전적으로 배려되며 다시 쓰인다. 그는 그렇게 (재)의미화된다. 목련과 분재의 대칭된 이미지로부터 그 둘의 교환적 행위가 일어나고 그 둘의 삶이 재활성화된다.
스스로를 상대의 폭력과 상대방의 잠자리에 몸을 내맡긴 채 살아가던 목련과 자신의 장기를 내어주며 자신에게 의존하던 사람들에게 점점 냉담해지던 분재 모두 공통적으로 자신을 상대에게 공여했었다. 자신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듯, 절대적인 너에게 모든 것이 달려 있다는 듯 목련은 행동한다. 이는 전형적인 히스테리증자의 모습이다. 분재의 차원은 굴절되어 있는데, 그 사랑은 직접 상대를 향하기보다 신의 사랑에 대한 갈구로서 그것을 자신의 몸으로써 예기하고 마치 그것을 실재로서 믿어버린다. 곧 그가 사람들과 멀어지고자 했을 때 그는 미천한 인간들을 버린 일종의 신이 되어 있다.
하지만 신의 은유는 “궁극의 설계자”인 건축가-집의 죽음-무너짐이다. 심지어 그의 죽음은 그 바깥에서 인간의 죽음으로 인식, 유비될 수도 없다. 신에 대한 시나리오가 신은 인간을 설계했다는 것이라면, 건축가는 자신이 설계한 집으로 돌아가며/들어가며 마침내 그 집의 앞당겨진 죽음과 함께 진정한 죽음을 맞는다는 점에서 그 시나리오를 스스로 파기하며 진정한 신의 자리를 모순적 차원으로 완성한다. 그럼에도 두 번째 설계는 그의 의지가 아니며, 타자를 위한 것이지만, 이는 완전한 자기 파괴의 차원을 동반하며, 곧 최초가 아닌 최후만을, 무한대가 아닌 영점만을 설계하는 형국이 된다. 그런데 ‘신은 자신의 최후를 기약할 수 있는가.’ 그런 지점에서 〈키리에〉는 인간이 죽음이라는 한계를 지닌 존재가 아니라, 죽음보다 더한 무엇으로써 삶을 살아내는, 그리하여 죽음을 또 다른 가치로 변모하는 존재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김민관 편집장
[공연 개요]
작가 장영
연출 전인철
드라마투르그 전강희
무대 박상봉
조명 최보윤
의상 김우성
분장 장경숙
안무 지경민
음악 베일리 홍
자막해설 이청
조연출 황성현, 김엄지
제작PD 조유림
주최·주관 (재)국립정동극장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중장기창작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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