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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학로극장 쿼드X즉각반응, 〈엔드 월 - 저 벽 너머에는 뭐가 있을까?〉: 문학의 견지에서 타자성을 구성하기
    REVIEW/Theater 2026. 5. 8. 13:10

    대학로극장 쿼드X즉각반응, 〈엔드 월 - 저 벽 너머에는 뭐가 있을까?〉©이강물[사진 제공=대학로극장 쿼드](이하 상동).

    〈엔드 월 - 저 벽 너머에는 뭐가 있을까?〉(이하 〈엔드 월〉)는 한쪽 끝 벽에 깔려 죽은 주인공 아성이, 질문을 통해 이전의 시간으로 반복해서 돌아가며 죽음의 원인이 아닌, 그 상황 속에 자신의 행위에 개입된 자신의 의식을 탐문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죽음 직전의 상황과 친구들과의 추억이 계속해서 소환된다. 자신을 성찰하는, 자신을 화두로 삼는 이 과정은 문장의 빈 공간을 찾고 거기에 들어갈 적합한 말을 찾는 글쓰기에 비유되는데, 곧 아성이 본인의 죽음과 관련한 자신의 서사를 써 내려가는 작가로서 사건과 한 인물에 대한 접근이 이뤄짐은, 한편으로는 애도의 차원 바깥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원한 감정의 차원을 넘어, 한 인물에 대한 서술의 차원이 문학적으로 승화됨을 의미한다.

     

    또 다른 산업재해로 사망한 ‘무명’이라는 인물, 그 자체로 기록되지 않은, 또는 우리가 기억하지 않을 수많은 산업재해 노동자들을 지시하는 이 인물은, 아성이 자신의 기억을 들여다보고 그 기억에 자신을 재투여함으로써 자신의 삶에 대한 통합된 의식을 지닌 주체로 거듭나게끔 하는 데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기억 투쟁의 일환은, 그 자신의 삶에 대한 객관적 관찰은 작가가 산재 피해자의 죽음을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을 그 인물에게 삽입하는 방식의 차원에서 획득되어지는 부분이다. 곧 작가의식의 발로를 당사자에게 옮김으로써, 그 자신의 삶에 대한 전유의 몫을 통해 삶을 복원하게끔 한다.

     

    이는 결과적으로는 애도의 한 변형된 형태로 볼 수 있을 것인데, 일차적으로 당사자를 자처하는 매개의 실천을 경유해 당사자-작가의 지위를 만드는 과정에서 당사자의 지위를 복권함으로써 한 노동자의 죽음을 표피적이고 피상적인 차원에서 다루지 않고, 우연하거나 사소한 사건의 몫에서 벗어나게끔 하는 하나의 방식을 창안하는 것이 그것이다. 다음으로 그러한 당사자의 위치를 재조정하는 과정 아래, 곧 환상의 차원에서의 문학적 공간을 투여하는 과정에서, 당사자 본인이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는 자기 초월적 주체로서 점진적으로 고양되며, 이는 문학적 차원의 일반으로, 곧 나와 내 안의 타자를 가로지르는 자기 성찰적 주체의 보편적 양식의 지점에서 만난다, 또는 아니 만나야만 한다. 곧 작가의 윤리는 이 당사자의 자기 글쓰기의 과정이 얼마만큼 보편타당한 차원에서 소구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는 듯 보인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의식적 차원에서, 내재적 차원에서 그 글쓰기를 경유해 갈 수 있는지를 그 글 안에서 담보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애도의 가능성을 스스로의 실천적 진술 아래 가져올 수 있다.

     

    추정과 짐작을 경유한 발화의 차원은 결국 타자라는 이름 아래 수행된다. 또는 타자의 자리를 위임받음으로써 그것을 수행하는 것이다. 일종의 애도의 방식은 당사자 자신의 내재적 차원에서의 자기완성의 과정으로 관철해 냄을 통해, 그의 죽음으로부터의 (재)승화를 통해 이뤄진다. ‘저 벽 너머에는 뭐가 있을까’라는 컨테이너 바깥의 세계를 볼 수 없었던 아성의 소망을 이야기하는 부분에는, 그의 세계 너머에는 무엇이 있었을까를 질문하는 작가의식이 중첩된다. 그 너머가 타자의 자리임을, 그 너머에 대한 욕망이 윤리로 전환할 수 있음의 견지에서 〈엔드 월〉이 자리한다.

     

    그런데 거꾸로 우리는 타자를 일자로 두는 것, 보편자로 구성하는 것으로써 애초에 아성과 무명으로 대표되는, 세계의 구조 안에서 납작해지고야 마는 평범한 이들에 가해지는 폭력과 죽음에 대한 비판을 우회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그 죽음의 재의미화야말로 그 죽음을 비가시화하고 평범하게 만드는 사회를 소거하는 일시적인 전략 아닌가. 곧 이는 작은/미시사적 개인과 거대한/거시사적 사회의 비대칭화된 구도의 뒤집힌 판본 아닌가.

     

    우리는 타자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 타자의 자리를 감행해야 하는가, 그것은 가능한가. 또한 윤리적인가. 아마 이 지점에서 〈엔드 월〉은 내기를 건다. 도약한다. 또는 너머를 상정한다. 반드시 그 너머를 상정해야만 한다. 컨테이너 바깥에 자연의 찬란한 순간이 있다는 분명한 믿음의 메타포와 연접됨으로써. 믿음이 반드시 긍정의 순간으로, 희망으로 갈음되는 다른 사회가 전개될 것을 전제함으로써 그것은 성립한다. 결국 〈엔드 월〉은 끝에서부터, 그 끝이 어떻게 새로운 시작일 수 있을지를 고민하면서, 시작한다.

     

    타자를 감행함으로써 타자의 자리를 향한 우리의 자리를 애써 벌린다, 또는 빌린다. 타자로부터의 무기력함을 타자에 대한 예의로 치환하는 것보다는 타자를 가져오며 그 타자에의 접근 불가능성으로부터 시작하는 것, 사건에 되감기 버튼을 눌러 일상의 틈을 발굴하는, ‘두껍게’ 기술하는 의사-인류학자의 시선이 자기 기술지라는 문학적 글쓰기의 사적/내밀한 영역으로 재기입될 수 있음을 긍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애도를 향한 에너지를 문학이라는 매체의 이상 그리고 이념을 향해 굴절시키면서 나아간다.

     

    무명은 아성의 자기 기록의 역사를 끌어내는 트리거가 된다. 그는 그 과정에서의 글쓰기 선생 같은 역할을 자임하는데, 그 자신 역시 죽음 전에 풀리지 않는 현실의 빈 공간에 대한 하나의 기억으로 어머니의 문장들 사이에 빠져 있는 문장이 무엇인지를 찾아내고자 한다. 어머니 역시 노동자였고, 그는 어머니의 피곤과 소진으로 인해 비어 있는 육신의 적나라함으로부터, 환대와 행복의 채워지지 않는 빈 자리로부터 노동자의 삶을 감행하게 된다. 이 빈 공간은 탐문하는 글쓰기만이 메울 수 있는 곳으로, 인간의 심연과 일상 너머의 틈이기도 하다. 곧 이를 들여다보고 복구하는 글쓰기의 전개를 통해, 비로소 자기 윤리의 이상을 찾고 타자와의 진정한 관계를 구성할 수 있다.

     

    무명이 타자의 빈 공간을 알고자 한다면, 아성은 자기 안과의 간극 역시 알아내야만 한다. 무명이 타자를 알고자 하는 자신의 욕망을 자신의 글쓰기 공간으로 전이시킨다면, 이 지점이 아성에게는 하나의 입구이자 예시가 되며, 내재적인 차원에서의 주체성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글쓰기는 ‘내 속에 계속해서 남아 있는 어떤 것’, 나의 잔여, 곧 나의 결여, 그리고 타자성을 바라보는 작업이다. 무명은 아성에게 하나의 삶의 방향성과 함께 주체의 계기를 열어주는데, 이는 아성을 보편적 이성과 윤리의 차원에서 접근 가능한 인물로 전환시켜 줌을 의미한다.

     

    무명과 아성의 밀접함, 그러면서도 아성에 대한 무명의 관게만이 성립하는 것처럼, 무명이 어떤 이름을 갖지 않는다는 점은 그가 역사의 빈 자리를 대표한다는 것에서 나아가 그가 근본적으로 아성을 완성시키고 아성의 많은 시간을, 존재의 빈자리를 실제로 대체하고 있음을, 동시에 그 부분이 전치된 그 자리를 특정하지 않으며 비워 둔다는 것과 조응한다. 곧 무명은 사라지는 매개자인 동시에 아성의 한 부분이거나 다른 부분이다.

     

    그는 아성으로 연장될 수 있는, 또는 아성에서 연장될 수 있는 수많은 아성과 같은 존재들의 또 다른 특이성이다. 그는 아성의 바깥으로, 아성의 바깥에서 ‘무명’의 존재로 드러남으로써 아성을 하나의 특이성으로 산정하며, 자신의 특이성을 아성과는 다른 또 다른 가능성으로, 그리고 아성의 또 다른 가능성으로 산출한다. 이 둘은 다른 두 물리적 시간의 지대 안에서 수많은 가능성들을 하나를 향한 두 개의 신체로 구분 짓는다.

     

    아성의 유년시절은 왜 그 자신에게 서먹하고 요동치고 울렁거렸던 것일까. 그는 왜 단지 자신의 죽음만이 아니라 어린시절과의 총체적인 차원에서의 유격을 갖고 있는 것인가. 이는 현재가 앞선 시간들과의 대별 속에서만 작동하는 특별한 순간에 그가 서 있기 때문일까. 이는 마치 타자의 공간이 그만큼 간극을 갖고 우리에게 감각됨을, 그가 그 자신을 향한 글쓰기가 곧 우리가 그를 알고 다가가고자 하는 글쓰기에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의 글쓰기가 그를 향한 우리의 글쓰기라는 사실, 이 작위성으로부터 〈엔드 월〉은 시작한다. 타자에 대한 윤리를 타자에 접근하고자 하는 우리의 윤리로 전환하는 것이 〈엔드 월〉이다. 따라서 그의 삶 전반은 (그 스스로에게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역시) 미스터리이며, 동시에 문학적 비의이다.

     

    〈엔드 월〉은 아성이 우리의 문학적 자아로 응결되는 지점, 곧 우리의 응시가 아성을 통해 발현되는 지점에서 타자를 향한다, 또는 타자와 내가 합치된다. 아성은 우리의 일부가 된다. 그 합치됨은 가상의 작용이며, 윤리로서 문학이라는 메타포의 실천이며, 이는 곧 문학의 방법론의 차원에서 구성되는 귀결, 내 안의 타자성에 대한 보편적 인식으로서의 고양, 그 자각이다. 곧 아성의 문학적 자아와 우리의 문학적 자아가 만나는 지점에서 타자-자아의 전이 지대라는 가상이 만들어진다. 결국 〈엔드 월〉은 타자에 대한 직접 말하기의 어떤 윤곽 속에, 타자성을 ‘우리’ 자신으로부터 검출하는, 보여주는 작업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는 동시에 그토록 반복되는 많은 기계의 적확하고 물리적인 차원의 움직임들의 다른 여타의 인물들 바깥에서 아성의 중심된 시선으로 이 극이 고착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김민관 편집장

     

    [공연 개요]

    작·연출 하수민
    안무 이세승
    드라마투르그 이성곤
    분장 디자인 정지윤
    조연출 정혜리
    무대감독 안지형
    무대 디자인 남경식
    프로덕션 PD 차정훈
    조명 디자인 최보윤
    사진 이강물
    홍보영상 삼인칭시점
    음악·음향디자인 지미 세르
    일러스트 김윤경
    의상 디자인 홍문기
    홍보물 디자인 김정윤
    출연 마광현 홍철희 손성호 장재호 김영선 심민섭 황규환 이창현 이경우 엄태호 윤희지
    제작 서울문화재단 대학로극장 쿼드, 즉각반응
    주최·주관 서울문화재단, 즉각반응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창작주체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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