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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은경, 〈세게, 쳐주세요〉: 숭고한 역사적 형상을 전도하기*
    REVIEW/Dance 2026. 5. 10. 20:45

    이은경, 〈세게, 쳐주세요〉ⓒSang Hoon Ok[사진 제공=2026 ARKO](이하 상동).

    이은경의 〈세게, 쳐주세요〉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 과정에 부역한 아돌프 아이히만 하면 자동 연상 되는 “악의 진부함(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갖고 아이히만에 접근한다. 이는 익숙한 이야기인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전범 재판에서의 발화를 토대로 도출해 낸 개념으로, 공연의 주요한 전제로 자리 잡는다. 곧 아이히만의 서사의 절편이 아렌트적 진단으로 응결되는 차원에서, 아이히만이라는 인물의 구체성은 축약되거나 소거되는 것 역시 가능한데, 이는 역사적 차원이 수렴하는 지점을 또한 아렌트의 개념적 매개가 완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에 따라 아이히만은 고유한 이미지의 차원보다는 개념에 대한 아이콘에 가까워진다. 

    물론 거기에는 문화적 차원의 번역에 따른 변용과 누락의 차원 역시 따르는데, 결정적으로 banality가 “평범성”으로 옮겨지면서 악은 평범한 존재의 상을 가장하고 있다거나 평범한 존재가 어떤 조건에 의해 악을 행할 수 있다는 식으로 악이 특이한 존재적 차원에 고착되면서 악의 보편적 조건이라는 환원의 효과를 가져오게 되었다―이로써 주객이 전도되는데, 그것은 평범성의 악, 평범한 악에 가까운 것이다. 오히려 악의 어떤 측면을 부각하는 본래적 의미는 악의 진부함 속에, 상투적인 언설 가운데 스스로가 잠식되며 주체의 책임을 면피한다는 것에 가깝다. 

    〈세게, 쳐주세요〉는 이러한 상투적 수사로서 아이히만에 대한 아렌트의 개념을 번역의 오해를 피해 다시 매개하고자 하는데, 이는 중후반 세 명의 등장인물이 각자의 똑같은 말들을 번갈아 두어 엉키며 회전하는 구간 반복에서 선명해진다. 상투성은 픽처레스크의 반숭고적인 차원, 유희적이고 저속하며 말단의 유머와 신체성이 작동하는 교착된 움직임으로써 표현된다. 이는 홀로코스트를 벌인 독일 나치를 다루는 데 있어 충분히 불경죄가 성립한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참혹한 역사에 대한 준엄한 반성 차원으로부터 단죄당함을 진지하게 다루지 않고, 희화화된 아이히만을 경유해 그의 생명을 연장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불경죄는 나치 시절에 대한 독일인의 억압 기제를 건드리는 반동으로서 작용하여 그렇다기보다 그 이전에 반성적 태도와 죄의식을 일종의 숭고함으로 격상하며 응결시키는 그리하여 그사이에 어떤 다른 태도와 말의 차원이 틈입할 수 없게 하는 독일인의 일정한, 일관된 지점에 대한 예외적 차원을 그것이 보여준다는 지점에서 성립되는 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전자의 차원에서 〈세게, 쳐주세요〉는 더 근본적으로 도덕적으로 고착된 태도로서의 윤리를 고수하며 강박적 분리의 차원과 함께 승화되는 단일한 독일인이 아니라 존재 간의 뒤섞임을 통해 모호해지며 착종되는 기이한 존재로의 분화에 초점을 맞춘다. 

    곧 “가해자”, “피해자”, “방관자” 세 명의 구도는 아이히만과 나치가 규정한 열등한 인종, 그리고 현재적 차원의 우리를 상정하며, 이 셋의 차이를 그것들이 뒤섞이며 합성되는 하나의 원환 아래 둔다. 이러한 구도는 홀로코스트 현장을 일임하고 통제하는 아이히만(천종원)의 역사적 재현과 일종의 홀로코스트 박물관에서 투어 가이드를 맡은 해설사(전중근) 사이에, 희생자-관람객(임종경)이 위치하며 균열되는 장면으로부터 확고해지며, 그 해설사의 설명처럼 “원형”이 “가깝게 복원”된 이곳은 곧 원형으로서 아이히만이 체현되면서 또한 재현되는데, 이른바 아이히만이라는 원형적 차원이 현재의 재현의 차원으로 끌어당겨지는 곤궁을 안게 되는, 또는 반대로 원형적 차원에 대한 재현적 차원에서의 자율성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수용소에서 이동을 “빨리빨리”로 종용하는 아이히만과 “천천히” 주의하며 이동할 것을 요청하는 해설사로부터 하나의 존재는 희생자와 관람자로 분기된다. 이는 과거에서 현재로 이동하는 하나의 선형적 시간 축이 하나의 포털의 입구로 전이됨에 따르는데, 희생자의 자리를 관람객이 체현하는 이 형국은 우리가 희생자 자신이면서 그 희생의 형국을 바라보는 자로서 이중의 자리를 확보해야 함을 의미한다. 곧 이러한 수평축에서 교차하며 진동하는 구간을 구성함으로써, 고통을 체험하면서 그 고통과 거리를 두고, 그 고통과의 거리를 다시 고통과의 대면을 통해 해소해야 하는 분열적 주체의 초상을 ‘하나의’ 진리를 담지한 주체의 갈등으로 갈음해 낸다. 

    시간 과거 현재
    장소 홀로코스트 현장

    홀로코스트 박물관
    표현 아이히만의 현전 해설사의 역사적 거리
    두 시간이 교차, 진동하면서 재의미화된 시간 죄의 장면으로 소급 대체로 과거와 거리를 둔 현재의 평온함

     

    곧 양방향의 선택이라는 다성부의 화음 아래 분열될 때, 그것은 아이히만의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무력한 신체와 역사의 재현으로부터 관성화된 무감각한 신체는 분절되지 않고 절합되면서 어느 한 축으로 고착되지 않는, 그 사이에서 방황하는,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역사의 증언과 역사라는 무덤 사이에서 분열하는 존재의 형상이 만들어진다. 그로부터 희생자에 대한 정의는 모호해지는데, 이는 한편으로 희생자를 실재의 차원으로 기입하는 것의 불가능성을 과거의 축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의 재현적 형상을 그대로 이식하는 관성을 현재의 축으로 두는 가운데, 전자에서 희생자의 정의 불가능성을, 후자에서 희생자에 대한 인식의 재고 불가능성을 도출해 내기 때문이다. 

    한편 이 과정에서 오늘날의 희생자는 과거를 떠안고 과거의 아이히만은 현재를 침투한다. 이 양분된, 시간과 존재의 뒤섞음이 곧 이 셋의 껴안기, 상호 넘나들기의 현재성으로 연장되며, 어쩌면 역숭고의 차원에서 결박된 아이히만을 풀어주고, 유희의 범주 안에 재결속시킴으로써 마치 아이히만은 토템적 대상의 흔해 빠진 사물이 된다. 어쩌면 그로부터 사유는 재고될 수 있는데, 앞선 유동하는 축으로부터 얻는 교훈이 역사의 그 결정된 이미지와 사고 차원의 반성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반성의 역사에서 처단된 아이히만과 역사의 교훈을 얻으려는 오늘날의 우리 사이에 놓인 홀로코스트의 형상은 과거와 현재를 횡단하며 영원히 고통받는 존재로 결박된다. 따라서 아이히만의 결박을 풀어주는 것은 마찬가지로 소각되었던 시체 더미를 고통의 처소에서 풀어주는 것은, 마치 우리의 고착된 인식으로부터의 해방을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서로 연결되는 듯 보이는데, 그것은 차라리 적극적으로 시도되고 뒤엉키는 것이다. 마치 아이히만이 언데드인 존재로 부활하며 소각된 시체들을 위무하며 함께 어떤 난장을 벌이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지나친 외설 아닐까. 동시에 그것의 직접적 방관자와 그것으로부터 희미해진 간접적 방관자가 희생과의 결정적 거리를 소거하지 못하고 횡단하며 통합적 기호를 이루는 것 역시 거기에 뒤섞임으로써 생명을 약분하며 마치 하나의 구렁텅이로 침몰하듯 거꾸로 그 구렁텅이에서 기어 올라오는 형국을 만들고 있다. 이들은 각자의 변명 안에 고착된 존재들이라는 점에서 기호망을 이루며 하나의 휩쓸린 이미지로 도매급 처리되는데, 그것은 점점 식별할 수 없는 하나의 물질로 불어나면서 오히려 고유한 존재‘들’의 결착된, 의존적인, 상호 지지체적인 근거로서 경로를 그어 나간다. 

    “너 때문이야”-“죽여 버릴 거야”의 가해자-피해자의 긴밀한 엮임과 그사이의 “나만 아니면 돼”라는 회피가 코러스를 이루는 이 혼란의 광경과 그 앞의 가로축의 분열적 횡단 사이에, 임종경이 안무가―“은경이 누나”―를 부르며 “지금 진짜 해요?”라고 객석 경계를 표지한 이후, 눈을 감은 상태에서 관객에게 “부딪힐 거 같으면 “아” 하고 소리”를 내달라고 하는 부분이 놓인다. 이때 관객의 참여가 가장된 그 자리는 ‘의외로’ 발현되지 않고 넘어간다. 이때 관객이 참여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좌절된 것이 아니라, 망각되었다는 점이 중요한데, 수용소적 공간의 막다름과 막막함, 공포와 두려움이 타자의 형상으로 인계된 채 주체로 전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안무가의 부재하는 자리가 관객의 자리로 이전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로써 방관자의 상상적 자리가 은밀하게 누출되는데, 실제의 수행은 참여의 자리로 평탄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미래의 행동에 대한 필름이 끊기는 시점에서 영속화된 캐릭터의 지연이 발생하며 고착된 역사를, 곧 바뀌지 않은 현재를 승인한다. 이는 관객이 소거된 그 자리로 돌아와 온갖 아날로그 게임을 길게 늘어뜨려 놓는 것으로 동등한 차원의 하강을 실현한다. 이는 역사가 망각된 현재에 대한 우의적 차원의 비판인가, 아님 수행으로써 셋의 선행된 연결을 만드는 반주 구간의 기능적 활용인가. 

    이는 어쩌면 신체 자체를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현시하는 것 자체일 수도 있는데, 곧 369 게임으로 시작해서 온갖 아날로그 게임의 향연을 이루는 이 구간은 정신없이 이어지는데, 이는 무엇보다 신체성의 질적 하락을 동반한다. 곧 숭고한 신체로부터의 결박을 풀어낸다―게임들에서 주로 쥐여주는 단어 키워드는 “아돌프 아이히만”이라는 점에서 그 결박은 아이히만으로부터 오는 것일 수도 있고, 아이히만 자체를 향한 것일 수도 있다. 후반을 향하면서 ‘탕수육 게임’은 탄환을 장전한 총을 상대방에게 겨눈 채 “탕”을 외치는 것으로 변용되어 펼쳐지는데, 여기서 테러는 유희로 전락한다, 그 반대가 아니라. 

    망각된 지점의, 앞의 꽤 긴 반복 구문 역시 문제적인데, 가해자와 피해자 각각의 자리가 혼동되는 것으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곧 가해자의 “너 때문이야”라는 피해자로서 도착된 지점으로서 진짜 피해자의 발화를, 피해자의 “죽여버릴 거야”는 가해자로서 도착된 지점으로서 진짜 가해자의 발화를 의태한다. 전자의 반복적 증폭을 통해 이 모든 것이 시작되는 가운데, 이 셋의 피드백 고리는 결코 끊어낼 수 없는 차원으로 서로를 되불러오고 요청하며 상호 연관적으로 연장된다. 곧 재현적 형상으로 결속되는 타자의 이미지로부터 이 셋은 무한 루프의 시스템 안에 갇힌 형국이 된다. 

    이 셋의 뒤섞임은, 불규칙한 하나의 발화적 공간으로 착종되는 이 뒤엉킨 형상은, 중간의 부정을 매개로 셋의 차이를 마치 ‘블랙홀’ 같은, 누구의 장소도 아닌, 제4의 또 다른 구심점으로 흡착된다. 마찬가지로 서로를 단순하게 겨냥해 게임의 승부로써 처리하는 과정 역시, 이 셋을 동등한 참가자로서 게임의 룰을 이행하는 자로 평준화시킨다. 그리고 실재적 폭력이 시작되는데, 따라서 다종 다기한 게임들은 그에 대한 예방주사 차원일 수 있다. 

    독일 장교의 제복 상의를 걸치고 앞쪽 하수의 책상에서 왼손은 멍키 스패너를 잡고 바닥을 긁으며, 오른손은 스테이플러를 내리치는 방관자는 이제 과거의 가해자의 위치로 조정되어 있는데, 그가 긁고 때릴 때마다 “아”로 다른 둘은 동기화된다. 나치의 서류철의 명단에서 목숨이 하나씩 날아갈 때, 곧 종잇조각으로 목숨값이 이전될 때 “아”는 더 실재적 차원의 몸으로 이행되는 것이다. “아”가 음악적 선율과 화음을 그리게 되고, 둘의 치고받음과 자기 학대로 연장되어 가고 나서는 피해자와 가해자는 애증의 자기 분열적 국면에까지 이르게 된다. 

    피해자와 가해자는 독일 장교가 사라진 테이블을 두고 서로가 한 말을 고스란히 복기하는데, 앞선 행위의 잔향으로서 “땀이 눈 속으로 들어가 따갑겠다.”와 같은 말을 주고받는다. 곧 역할에서 일상의 동료로서 재투여된 존재 간의 정동이 두 사람의 우정과 애정이 뒤섞인 말들로부터 출현하며, 그에 따라,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난 널 좋아해.”와 같은 전도된 관계의 양상이 나타난다. 

    이후, 활달한 민속음악 풍의 허브 알퍼트 & 더 티후아나 브라스(Herb Alpert and the Tijuana Brass)의 〈그리스인 조르바 Zorba The Greek〉에 맞춰 셋의 군무가 첫 출현하는데, 이는 중간 음악이 더뎌지는 구간에서는 슬로우모션 동작이 입혀지면서 활기는 우울로 강등된다. 기본적으로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1964)에 나오는 조르바(앤소니 퀸)와 버질(앨런 베이츠)의 춤이 차용된다. 

    방관자는 처음 무대 위에 모로 놓인 의자 위에 서서 바닥에 멜로디언을 부는데, 호스가 여러 개 연결되어 그의 입에 닿는 이 악기는, 셋의 너저분한 운명 공동체의 모습에 대한 상징적 제스처로 보이는데, 이는 그 전에 그 긴 호스만 입에 물고 목에 칭칭 동여맨 방관자를 중심축으로 그에 달라붙는 나머지 둘의 끈덕거린 엮임에서 이 발화의 표지가 자기 목줄의 차원으로 ‘연장’되는 지점이 비로소 소리로 연결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 관계 양상에서 누구도 (다른 누구에게서) 구원받을 수 없으며, 반대로 서로로부터 지지될 수밖에 없는 역설이 출현한다. 

    끝은 이 셋이 완벽하게 하나로 엉켜 서로를 파고들며 암전되는 장면인데, 구분될 수 없는 지점으로 셋이 서로로 용해되는 순간이 출현한다. 이러한 ‘승화’는 슬랩스틱 코미디로 점철되며 진한 페이소스로 전화하는 작품의 본질적 특성이, 재현 불가능성의 윤리로 기입되는 역사의 형상을 지저분하게 오염시키고 침식시키는 여지를 준다는 것에 맞서, 이를 진지한 의식으로써 봉합하는 차원에서 일차적으로 기능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이 셋이 하나의 분별할 수 없는 존재로 승화된다는 것을 또한 의미한다. 곧 피해자-방관자-가해자의 도식이 진정 무너지며 의미를 상실하는 장면으로서 말이다. 

    이은경의 〈세게, 쳐주세요〉는 그러한 지점에서 진정 문제적인 작업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문화상대주의 차원에서 극단적 자유를 추구하며 숭고한 역사의 형상을 희석하고 침탈하는 결과를 낳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그 역사를 박제된 죽음의 이미지로부터 구원해 그에 자유를 안긴다는 것에 가까워 보이는데, 그렇게 아이히만을 되살리고 홀로코스트 피해자를 되살리고 하면서 

    역사와 현재의 삶을 맞바꾼 “나도 먹고 살아야지.” 하다가 일종의 독일 제국에 봉사했던 이로도 분하는 방관자는, 존재의 층위에서는 조금 더 직접적 가해자의 입장으로 확장되고, 시간의 층위에서는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게 된다. 이는 현재의 관람객과 과거의 홀로코스트 피해자를 오가는 피해자의 확장성과 중첩성의 측면과 또한 조응한다. 그러니까 존재의 잘못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셋의 위치를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특정 존재의 위치로서 스스로 고정시키는 가운데 예외의 자리로서 다른 한 축을 부인하는 결과, 역사와 그 안의 주체는 오히려 하나의 형상으로 고착되어 진정 성찰적 사유에 이르지 못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게, 쳐주세요〉는 그 중간에서 예술적 유연함의 매개를 과도한 형상으로 또는 지저분하고 너저분한 형상으로 함입하고 있다. 

    김민관 편집장

     

    * 몸지4월호에 기고한 글로, 당시 분량상 축약된 버전의 본래 버전인 전문입니다.

     

    [공연 개요]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세게, 쳐주세요

    일시 : 2026. 2. 27(금) - 3. 1(일)
    장소 :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러닝타임 : 60분

     

    안무 이은경
    출연진 천종원, 임종경, 전중근
    음악감독 라예송
    드라마투르그 백석광
    의상 디자인 정호진
    리허설 어시스턴트 박휘연
    프로듀서 부혜영
    매니지먼트 허용
    디자인/홍보 비로소(이현정, 허예정)
    조명감독 배대두
    음향감독 안형록
    무대감독 박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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