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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니 프로토콜, 〈리모트 서울〉: 서울이라는 상상계적 극장으로부터 ‘개인’으로 소급되기REVIEW/Theater 2026. 5. 10. 21:20

리미니 프로토콜, 〈리모트 서울〉[사진=GS아트센터 제공](이하 상동). 리미니 프로토콜의 〈리모트 서울〉은 서울을 ‘원격’으로 현전하면서 ‘외딴’ 서울에의 고립을 구성하는데, 여기에는 헤드폰의 AI 음성의 가이드가 있다. 이 가이드는 국립현충원에서 GS아트센터를 오가는 서울의 특정 구간‘과’ 조우하게 하며, 서울‘로부터’ 나의 거리를 확보하게 한다. 이때 30명의 관객은 개인이 연장된 집단의 형상을 하는데, 그것은 이 거리로써 접면의 방식에 대한 물리적 지지체 역할을 한다―극장이라는 경계를 지시한다. 이 듣기의 일시적 공동체는 실재를 무대(“stage”)라기보다 화면으로 각색하는데―‘관객은 리모컨으로 TV를 튼다.’―, 이때의 ‘고립’을 집단적 신체의 근거로써 보족하며 연장한다―그것은 고립을 하나의 발화 형식으로 전도한다.
특히 시민과의 ‘대치’와 시민에의 고립을 오가는 상황, 동작역에 진입해서 개찰구를 통과하고 나서 나온 통로 공간에서 첨예해지는 이 상황은, 극장의 시각 체제와 일상이 결합되는 방식 아래 펼쳐지는 것인데, 그것은 더 정확히는 시민이 아니라, 일상을 재분절하는 것에 가깝다. 곧 시민이라는 주체성을 관람 기표의 차원으로 두는 가운데, 일상이 낯설기보다 더 뚜렷해지며 관람성의 범주 안에 포섭되는 지점은, 동시에 극장 너머가 아니라 극장 안의 기술을 ‘더’ 공고히 하게 하며, 관객 스스로의 고립을 ‘안정적으로’ 강화한다.
여기서 느끼는 불편함, 시민을 대상화며 시민의 자기 자리를 소거하는 이 모호한 뒤섞임이 ‘거리’로서 반영되는 이 시점으로부터 관객은 시민에 대한 재분절의 불편함을 경유하는 가운데, 시민의 자리가 아닌, 극장의 질서가 은폐됨을 망각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시민’을 대상화할 때, 시민에 의해 우리 역시 대상화되는데―그 두 지점이 만나는 경우는 드물거나 어렵다.―, 이때 우리는 ‘안’에 있으며, 극장의 관객으로서 시민으로서 배우에 대한 준별을 시민으로서 불편함이라고 오지각한다. 가령 여기서 지나가는 시민들은 배우로서 연출의 방향을 따른다고 이야기된다. 이러한 실재에 대한 ‘뻔뻔한’ 전유는 그 안의 관람 행위가 갖는 정치성의 역학 역시 무력화하는데, 곧 연극성이 현실을 소거하는 기호로서 자리 잡는 것처럼 가장한다.

이 첨예한 정치성의 무대는 시민에서 관객으로 정합되기보다 절합되어 자리하는 지점에서 출현하는데, 이 시민(이라는 관념)이 산출하는 민주주의라는 이념은 이 정체성을 새롭게 준별하고 표지하는 지점에서 연장된다. 이는 언주역을 빠져나와 갑작스러운 집회·시위를 벌이는 가운데, 그 소요 사태의 사운드를 배경에 적시한다. 자신의 상징적 물건을 든 손을 올려 시위자의 행위를 연출할 때, 우리는 현실과의 적대를 축제적 기호로 양식화하는데, 이 짧은 행위의 구간은 우리를 특정 집단으로 갈음하며 (내부적 결속을) 외양화(하는 것으로써 승인)한다. 그런데 이런 혼란은 우리 안에서 초래됨과 그 외부에서의 차원은 다르지 않은가.
곧 시위라는 외양을 만들어내는 방식이 목적을 갖지 않고, 다른 시민을 경유할 때 그것은 대상이 아니라, 즉각적으로 시민 자체를 향한다. 이때 그것은 시대를, 기억을 추상적으로 귀환시키는데, 그것은 일상의 파괴된 질서를 향하기보다 일상의 질서 자체를 ‘교란’한다. 그러니까 앞서와 같이 우리가 뒷짐 지고 안정된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을 침투하면서 일상을 재조직하는 행위에 대한 혼동을 부를 때 이것은 공연에 대한 의구심만을 증대시키는데, 그것은 근본적으로 퍼포머로서 하달받는 지문에 의해 작동하는 관객의 자리를 불신하게 한다, 하지만 그것이 시민의 자리를 근본적으로 재쟁취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는 그 전,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면서 핸드레일을 잡는 대신, 그것에서 착안한 발레 바를 잡는 것으로 옮겨가며, 손을 머리 위로 올려 발레 동작을 하는 장면을 연출하게 되는데, 이때, 우리가 올리는 이 두 손은 외양의 질서 차원이 아닌, 예술적 표현의 차원에서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아닌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 단순한 상상적 차원으로 확장된 이 동작의 ‘빈 구간’에의 채워 넣기가 사실 어떤 특별한 의미 지형의 의도 없이, 단지 너른 의미 자체의 차원으로 환원될 수 있음의 가능성(-한계)을 가져가기 위해 시도된다는 것과 정합된다.
이때 우리의 구별 짓기는 ‘관객’을 보는 게 아니라, 관객에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도덕적 불편함을 지울 수 있다. 따라서 발레 바의 상상과 같이 우리는 도시를 직시하기보다 상상하는 차원에서 그것을 불편하기보다 편안하게 감각하게 하는데, 그 상상에는 실재가 잘 부착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공연은 안락함의 차원으로 그친다). 이때 발레 바와 핸드레일의 합치에서 발레 음악에 따른 현실은 미디어 재현 체제 아래 있는데, 그것은 내가 발레 연습실에 온 것이 아니라, 그 연습실에서 나오는 장면을 볼 때의 그것으로 소급되는 데 가깝다.

곧 거기에 들어간 소음 자체, 나의 실존적 투여 자체가 거기에는 반영되지 않기 때문에, 일종의 배경음악의 표식으로서 나를 (실은 음악 없는) 현장의 배우로서 순수 동기화하게 하는데, 이러한 미디어에 대한 은폐 작용으로서 사운드는 실은 실감 나는 것이 아니라, 재현적/상투적인 사상에 기초한다. 그러니까 사실 더 근본적으로 목소리에 대한 우위가 전제되고, 음악은 거의 대부분 순수 효과로서 그것과 분리된 차원으로 적용되는데, 이 지점에서 〈리모트 서울〉은 청각적이기보다 엄밀히 (관습적 차원에서의) 문자-언어적이다. 그리고 이 언어는 비교적 단순하고 친화적 기조로 일관되는데, 이는 일종의 커뮤니케이션의 언어를 지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것이 던지는 질문은 이 언어와의 결에서 차이를 드러내게 되며 주요한 표지로 자리 잡게 되는데, 이 질문이야말로 인간의 특수성을 고려하기보다 인간에 대한 보편성에 기초한다. 따라서 〈리모트 서울〉에서 어떤 정동적인 것이 발생하느냐의 차원에서 충분히 의구심을 가져볼 수 있을 것인데, 이는 철저히 보편적 주체의 일원화된 지배의 언어를 체현하는 방식으로서 관객을 위치시키기 때문이다―그러니까 아마도 우리는 백인 남성이 아니다.
장소 특정적 오디오 비주얼 공연이 익숙해진 시점에서, 3주 정도의 리서치로써 외국 예술가가 도달할 수 있는 예술적 성과를 굳이/어느 정도 이상의 것으로 기대할 필요가 있을까. 이 3주 정도의 프로토콜로써 가능한 정도의 장소 특정적 공연이 무엇을 어느 정도 새롭게 성취할 수 있느냐의 사실을 그렇게 쉽게 수용할 수 있는 것일까―30여 개국에서‘나’ 했다는 것(한국적 자본주의의 문화적 동력으로 작용한다.)은 수입의 적절한 슬로건으로 작용한다.
그러니까 ‘리미니 프로토콜’이라는 이름을 수입할 때 있어 이 공연이 가진 난점은, 그것이 장소를 다시 반향하고 새롭게 감각하게 하는 데 의미를 두는 것이 중핵인 공연으로서 자기 모순적이라는 전제를 결정적으로 안고 출발하(며 아마도 완성되)고 있다는 것이다―물론 그 주체는 리미니 프로토콜보다 기획을 일차적으로 향한다. 그래서 장소 특정적 이동형 공연에 대한 목표가 있다면 그보다 나은 국내 창작자들이 꽤 많지 않은가에 대한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리모트 서울’이라는 제목 역시 리미니 프로토콜의 브랜드 자체로 소급되는데, 공연은 사실 서울의 국소, 특정 지역을 다루고 있지만, 그 국가의 대표적인/상징적인 도시의 이름으로 환원되(어야 하)는 지점에서, 실은 서울이라는 특수성과 보편성 또는 지배 기표와의 괴리를 노정하는데, ‘서울’은 나아가 한국이라는 비가시적 이름에 대한 국가적 차원에 대한 너른 해석의 모호함과 오해(가 일으키는 불편함) 따위를 거꾸로 은폐하는 기술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는 국내 창작자에 의해 만들어졌다면, 결코 서울이라는 이름으로 쓰이지 않지 않았을까, 또는 더 많은 것들을 거기에 포함시킨다거나 하면서 사용했을 것이다.

국립서울현충원 입구에서 시작해 GS아트센터 옥상으로 옮겨 가는 과정은 무언가 큰 장소적 변화를 동반하고 있는 것인데, 이는 상징적 역사의 차원이 갖는 한국의 보편성에서 자본주의적 도시의 정점으로서 강남 한복판에서의 특정성으로 전환되는 것으로, 이는 도시와 일상의 자연스러움 자체를 근본적으로 재고하거나 의심하는 지점으로서 어떤 균열과 간극의 차원을 노정한다.
반면, 〈리모트 서울〉은 국립서울현충원을 보편-특수의 차원이 아니라 보편-(비)일상의 차원으로 표면 처리함―가령 현충원을 자연과 죽음의 유사성으로 반추하는 발화는 보편적 차원으로 환원시키면서 다시 일상의 차원으로 변증법적으로 돌아오는 승화의 구조를 운용한다.―으로써 이후 다른 장소와의 연결에 대한 합목적성을 봉합하지 않고 일상의 변화된 차원으로 갈음할 수 있게 된다―이는 한편으로 다크 투어리즘의 경로로 빠지지 않으려는 필사적 노력의 차원이다.
근현대 역사의 상흔과 아픔이 국가 이데올로기 차원으로 응결되는 지점으로서 현충원을 사유할 수 있을 것인데, 어떻게 보면 모든 것은 하나의 ‘이색적 관광 장소’의 시선 아래 평범해지고 단순해지며, 그것은 결정적으로 역사적 주체성의 자리를 비켜날 수 있게 만든다. 곧 우리를 타자, 곧 이방인 혹은 관광객으로 만든다. 이 지점에서 서울은 역동적이고 흥미로운 장소로서 표면화되고 단순화되며 납작해진다. 그런데 이런 관광 차원이 비일상적 일탈, 여행 등의 차원으로 수용됨으로써 그 안에서의 이데올로기-자본주의 비판에 대한 은폐와 망각을 사유하지 못하게 하는 지점이 발생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앞서, 시위에 동원된 ‘나’로 소급되는 물건과의 결착으로부터 급작스럽게 시작된 그 시위에서 나는 유격된 존재로 자리한다. 이는 이것이 ‘연극적’(인 것의 정의)임을, 연극이 일상을 조금 다르게 바꾸는, 일상 이상의 정도로 투여되는 행위로서 기입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곧 그것이 발레 동작을 하는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으로 소급되는 지점에서, 정치적 행위는 연극 안의 ‘다양한’ 양식 행위 자체로, 또한 코스프레화된 (근본적으로 이념 없는) 실천의 양식으로 격하된다. 정치성을 만들기보다 소거한다. 이 지점에서 더 흥미로운 건 앞선, 지하철 안에서 시민-배우의 긴장감 어린 독대로, 실제 배우는 시민이 아닌 우리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옥상 테라스에서 60년 뒤의 ‘나’에 대한 상상적 비약 역시 역사에 대한 비약을 포함한다. 곧 지연-재호―레이첼-피터―로 이어지는, 교회에서 바통터치가 아니라 존재 자체의 변용을 겪는―그러면서 젠더의 균형을 맞추면서 거꾸로 젠더에 대한 편견을 불식시키는 ‘너는 지연(/레이첼)을 여자로 생각했냐?’라는 교묘한 질문으로부터 더 드러나는 건 아마도 그것이 인간이 아닌 존재, 인간과 닮은 어떤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지연의 원래 이름, 그 이전의 이름인 레이첼―영문 버전―을 리들리 스콧(1937~) 감독의 영화 〈블레이드 러너〉(1982)에 등장하는 일종의 안드로이드인 레플리칸트를 상기시키는 것으로 본다면, 그가 그를 주조한 타이렐사 회장―나아가 재호의 원래 이름인 피터가 리들리 스콧의 또 다른 영화 〈프로메테우스〉에서 안드로이드를 만든 피터 웨일랜드로 연결된다고 볼 수 있을까.―의 비서로 일하던 것처럼,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관객을 지배하는 발화 주체로서 능동적 여성을 지칭하기보다 일종의 서비스 직종에서 일하는 더 많은 수의 여성에 대한 구조적 차원의 현실과 그에 대한 학습 효과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으로 역비판이 가능하다면, 남성으로의 변용은 적어도 그것을 무마할 수 있는 효과적 전략이 된다.
이 하나로서 두 개의 화자는 AI의 그것을 ‘은유’―그것이 실제 AI가 한 것인지 아닌지가 결정적이지 않다.―한 것이며, 집단으로 묶이는 행동 양식은 일종의 경로 의존성을 상호 지지체적 근거와 결합시켜 용이하게 하는 일종의 수월성의 견지에서 더 명확한 부분인데, 곧 전적인 설계라기보다 수용자 측면에서 구성되는 부분으로 ‘더’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지점을 한데 묶는 부분으로 뚜렷한 건 오히려 시위 연습이라기보다 주황색 도로반사경 안에 모두가 들어오도록 해서 사진 촬영을 종용하는 부분인데, 이때 단체 사진은 앞서 지하철에서 ‘난민’에 가까웠던 무력했던 지위를 승화시키는 것과 같다. 또한 이후 강남 상가 거리 한복판에서 다 같이 가속하는 부분 역시 경쟁 체제보다 일정한 차원의 질서와 배려를 배가시키는 부분이 있었다.

AI-헤드폰과 결착되는 시스템은 전반적으로 개인성에 대한 수렴을 강조한다. 그러니까 이 헤드폰이 바깥을 차폐하면서, 집단적 무리 안에서 어느 정도 안정성을 획득하여 그에 대한 안전성을 보조할 수 있는 것처럼, AI-헤드폰 ‘더’ 개인적일 수 있게 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그럼에도 무엇보다 미지의 개인들, 타자들에 대한 영역은 충분히 추론 가능한 영역으로 남는데, 곧 각각의 음성이 개인 맞춤식이 아니라 동일할 것이라는 것, 그러니까 그 집단성이 동등하기보다 동일한 개인의 차원에서 수용될 수 있기에 발생하는 것이라는 것, 곧 의미적 차원보다 기능적 차원에서 개인이라는 전제 조건이 합목적적으로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요구된다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모두 하나의 조건 아래 각각으로 속한다라는 걸 결론 지을 수 있다.
우리가 들었던 목소리가 하나이면서도 오직 한 명씩에게만 전달될 수 있었던 부분이 바깥을 전유하고, 스쳐 보내며, 우리 삶의 연속선상을 그려내는 것으로써 실존적 차원을 구가하게 될 때, 그러니까 죽음이 역사에서 상상적 미래로 비약하(며 개인의 재승화로 귀결되)게 될 때, 우리에게 남는 건 주체성보다는 개인으로서 감상성(에 대한 주입)에 가깝다.
곧 〈리모트 서울〉이 궁극적으로 달성하는 건, 관광객의 직접적 입장이라기보다 그것이 체현된 이미지 소비자의 인지 체제의 작동방식을 집단적 차원으로 확장시키는 지점이며, 그것이 실은 동시대의 진정한 연극적 수용 양상임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 곧 연극이라 함은 일자의 목소리를 듣는 동시에 개인의 내부 수용적 감각으로 그것을 반복하는, ‘닫힌’ 극장의 피드백 시스템이다. 거기에 진정한 상호 함입과 정치적 자리는, 또한 역사는, 실재는 없다(고 가정된다).
김민관 편집장
[공연 개요]
4.3.금- 5.10.일 (매주 금, 토, 일) 금 16:00 /토 11:00, 16:00 / 일 16:00
서울 강남 일대 | 출발 장소: 국립서울현충원 만남의 집 옆 잔디밭
관람시간 120분
관람연령 7세 이상 (2019년생 포함 이전 출생자) 장소 특정형 공연, 연극 회당 30명
문의 02-2005-0101
제작 리미니 프로토콜
콘셉트, 대본 및 연출: 스테판 카에기
창작 리서치, 대본 및 현지연출: 요르크 카렌바우어 | 사운드 디자인: 니콜라스 니케, 플로리안 불프
주최 GS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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