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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 롤란트 쉼멜페니히, 연출 김수정, 안트로폴리스2 〈라이오스〉: 전혜진이라는 효과 혹은 물화REVIEW/Theater 2026. 5. 15. 13:32

작 롤란트 쉼멜페니히, 연출 김수정, 안트로폴리스2 〈라이오스〉[사진 제공=국립극단](이하 상동). 안트로폴리스2 〈라이오스〉는 롤란트 쉼멜페니히의 안트로폴리스 5부작의 두 번째 편으로, 신화와 역사에서 기록을 찾을 수 없는, 소포클레스 희곡에서 처음 오이디푸스의 아버지로 언급되는 정도로 거의 등장하지 않는, 라이오스 왕의 이야기를 작가의 상상력을 발휘해 새롭게 구성해 낸 작품이다. 이는 1인극으로 기획되었으며, 라이오스의 이야기를 전하는 동시에 라이오스 자신으로 분하는 역할의 자유자재의 변신이 이뤄진다.
저주의 신탁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게 되는 라이오스와 이오카스테의 이야기가 어떻게 성립하는지에 대한 네 가지 가정이 전제되는 것처럼, 이야기는 그것이 이야기임을 숨기지 않고 더 나은 추측과 더 매끈한 플롯을 궁구하는 저자의 매개적 입장과 그럴듯함을 충족시키는 이야기의 본질적 차원과 이야기에 대한 매혹의 측면을 그 이야기의 불확실한 아니 무모하거나 과감한 판본에 앞세우는데, 이는 저자의 절대적 자유자재함을 보여주거나(= 이야기하기의 무한한 역량의 측면을 드러내거나) 혹은 원본에 대한 합목적적 접근의 차원을 담보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곧 여러 버전의 이야기가 뜻하는 바가 이야기 자체의 본질적으로 자의적인 측면의 일환이라거나 여러 경우의 수를 통해 얻어질 가장 필연적인 이야기에 도달한다거나 하는 그 모두의 해석과 작별하는 지점은, 이러한 가정 자체가 이 특수한 이야기에 내속적이라는 것이다. 곧 신화에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이 불가능하느냐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불가능성으로부터 도망치는 것 역시 불가능하느냐라는 것이다.

안트로폴리스 1부, 〈프롤로그/디오니소스〉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됐듯 신의 뜻에 대한 인간의 숙명은 서사의 영속화, 곧 전달에 대한 강박적 관념과 맞물려 있는데, 이는 그 운명이 항상 예언에 의해 먼저 지시되고 나서 어김없이 실현된다는 것에 조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발화는 마치 미래를 선취하고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신의 말과 그 실현의 시차로써 운명의 변경을 가져온다. 곧 운명보다는 그 운명으로서 관념이 인간에게 해소할 수 없는 효과를 끼친다.
이때 인간의 자유의지보다는 운명을 내가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의 차원에서 주체의 윤리적 태도를 가늠할 수 있는데, 태어났을 때 버려진 라이오스가 자신의 아들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게 될 운명을 만약 받아들였다면, 그는 그 운명을 피할 수 있었을까. 아니 진정 윤리적인 주체가 될 때 그는 운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쉼멜페니히는 이에 대한 근본적인 차원에서의 변경을 가하지 않는데, 곧 그가 가정한 건 이가 빠진 이야기 구간을 채워 넣는 방식에 대한 것인데, 이는 근본적으로 신화의 결말을 바꾸지 않기 위한 것이 아니라, 또는 그 운명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게 인간임을 수용해서가 아니라, 이 비극으로 걸어가는 인물의 양상이 오직 그가 신이 아님을, 신과 구별되는 존재임을 드러내는 서사의 유일한 측면이기 때문이다.

운명은 곧 신의 뜻보다는 인간이 짊어질 담론적 차원의 불가능성의 과제에 가까워지는데, 기정사실화된 미래를 향해 살아가는 존재에게 현재는 불가침의 영역일 수밖에 없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이 운명에 대한 서사적 주석만이, 분석가의 시선만이 주체를 매듭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프롤로그/디오니소스〉에서 아가우에와 카드모스가 운명의 효과를 인지하는 시점에서 주체로 거듭나는 것에서 드러나는 부분이다.
반면, 〈라이오스〉에는 이 같은 반성과 고찰의 계기가 주어지지 않는데, 그것은 카메라-스크린의 매개로 라이오스와 오이디푸스가 서로를 마주하는 장면에서 둘은 그것을 거울의 작용으로 확인했던 시점으로부터 이어지는 마지막 장면, 허공을 바라보는 전혜진을 부감 쇼트로 포착하는 장면에서 카메라의 뒤늦은 시차에 의해 대상 없는 시선, 곧 절망과 비참한 혼자만의 고독한 존재의 현존이 되는데, 거기에는 라이오스-오이디푸스의 비극적 운명이 수여된다. “이해할 수 없는 이 세상”을 만들어 낸 존재를 되묻는 건 신화의 자기 물음이지만 그것이 체현되는 최후의 운명이 주어진 자를 경유해 이 물음은 신화에 대한 비판과 무력한 존재의 공허한 항변이 된다.
〈라이오스〉는 이 둘의 유사성, 조응됨을 통해, 비극적 운명 자체의 쌍생아적 운명을 피드백하는데, 이로써 라이오스가 아닌 라이오스를 진술하던 내레이터의 예외적 차원의 이 마지막 장면은, 그러니까 더 이상 역할 너머에서 너머 직전의 역할로 횡단하는 내레이터는 완전히 라이오스로 탈바꿈됨으로써 진술할 수 없는 비극의 무게를 짊어지게 된다. 이로써 라이오스는 주체화되기보다 비극을 맞은 이의 현존으로 환원한다. 그 전까지의 시시껄렁한 라이오스의 모습이 단절된 차원에 또한 내레이터의 단절이 겹치며, 그것은 거꾸로 라이오스의 죄도, 그의 반성도 가져가는 대신, (〈프롤로그/디오니소스〉에서 디오니소스의 가장 높은 곳 위의 시선과 같은) 신의 자리를 대신한 텅 빈 공간에의 인간의 응시만이 있다.

어쩌면 이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왕의 고립과 몰락, 체념의 순간이 주어지는 것일지 모르는데, 혈통으로 인해 왕의 자리를 곧바로 받은 라이오스를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건희 전 영부인의 자리에 대입하고,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개입했던 최순실의 딸 정유라를 소환하고, 그 이전부터 자신을 야생에서 구해준 펠롭스 왕으로부터 승마나 평생 하고 살라는 충고로부터 정유라의 자리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라이오스에게 가만히 있으면 된다고 하는 테레이시아스의 충고는 세월호 때 선내 방송의 ‘가만히 있으라’라는 멘트를 상기시키며 박근혜 전 정권의 과거와 연접한다.
이는 현실에 대한 비판보다는 오히려 극의 내재적인 차원에서 인간의 자유의지와 신의 전언 사이의 간극을 아니 긴밀함을 조소하고 훼손하는 것에 가깝다. 왜냐하면 신의 명령에 대한 어긋 냄은 실은 신의 어긋남으로서 명령 자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오카스테와 섹스를 하지 않으려고 3년간 절제하던 라이오스라는 네 번째 마지막 순서의 가정은, 오히려 이오카스테와 너는 섹스를 할 수밖에 없으니 그것을 기꺼이 즐겨라라는 신탁을 오히려 듣지 않았던 것이 된다―신의 명령은 너의 죄를 달게 받으라라는 것이 아닐까.
왜 우리의 지난 과거에 대한 비판적 현실은 〈라이오스〉에서 단지 시대착오적인 유머와 부정성의 차원만을 지니게 되었을까. 연출과 각색을 동시에 맡은 김수정은 마치 라이오스가 하나의 외롭고 초라한 인간으로 환원되는 것 같이, 신과 인간의 극명한 대비보다는 인간을 신분적 차원에서 구분하고 분리하는 인간의 관념을 신적 차원의 부조리로 지목하고 거기서 인간을 구출해 내며 동등한 차원에서 하나의 인간 층위를 지향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여기서 김건희-박근혜-정유라의 반대편의 전선을 구성하는 건 일종의 대중으로서 관객이다.

그렇게 본다면 암울한 과거를 지닌 라이오스가 그 반대의 모습과 방탕함과 죄악으로 삶을 일관함을 그의 주체로서 경로에 대한 실패라기보다 그의 인간적 차원에 대한 스펙트럼을 부각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제시한다고 하겠다. 그는 아픔을 겪은 만큼 성숙해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성숙해지지 않았지만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를 가졌다는 것으로 그에 대한 해석이 뒤집히는 것처럼 일단락되는 것이다.
사실상 전혜진의 라이오스의 연기는 일전에 TV 프로그램인 〈〈코미디 빅리그〉〉의 2011년경 한 코너에서 “김꽃두레” 역으로 분한 안영미의 연기와 상당히 흡사한데, 그 씩씩거리는 웃음과 새는 발음과 경박한 말투의 차원은 사실 영화 〈조커〉(2019)의 ‘조커’의 형상에 가깝다. 조커의 어두운 과거와 그의 광기 어린 행동이 파시즘적 대중의 차원에서 숭앙되며 이는 계단 장면에서 우스꽝스러운 숭고로 응결되는 것처럼, 〈라이오스〉 역시 실제 계단이 주요한 무대이며, 그 계단은 마지막 장면을 제하면 삶의 무게가 실리기보다는 경쾌하게 오르내리는 활기의 차원에서 주로 점유되며, 라이오스가 단번에 왕의 자리에 올랐을 때 거기에는 빌보드, 대형 옥외 광고판이 자리해서 그의 자리는 환영인 것처럼 휘발되는 것에 가까워진다.
나아가 그의 어두운 면이 외삽되고 그 광기에 사로잡힌 인물이 될 때 그 전사는 비약 아래 잠식되며, 그 과정에서 귀족적 신분은 경멸의 대상이 되며, 대중의 신분의 격차가 큰 존재에 가하는 공격의 차원 역시 비판을 가로질러 조소의 형태로 직접적으로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곧 김수정은 파시즘적 열광의 모드 안에서 왕의 지위를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각하하고, 역사를 비판의 대상으로 두기보다 희극의 요소로 차용하며, 대중이라는 동등한 신분으로의 존재적 환원을 통해, 라이오스의 비진정성의 차원을, 분열적 차원을 캐릭터의 일부로 즐기고 수용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리하여 비극의 순간은, 그가 숭고한 존재의 차원으로 거듭나는 지점은 다음 장, 오이디푸스의 존재가 도래하는 지점에서부터 유예되며 모호하게 처리된다. 그리하여 라이오스는 일종의 텅 빈 기표가 되고, 곧장 전혜진이라는 배우의 현존으로 전이된다. 곧 전혜진은 라이오스라는 승화된 역할에서 힘겹게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탈승화되는 라이오스의 낙하를 힘겹게 수행한 전혜진이 있었던 것으로 승화된다.
조금 전, 천장에서 내려온 양동이에 담긴 초록 물감을 뒤집어쓴 피곤함이 역력한 배우의 신체가 아우라로 현상되는 지점에서, 대중의 혐오의 반대편에는 숭배가 자리함이 드러나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라이오스〉에서 18명의 역할을 수행하는 1인극이라는 콘셉트는 그것을 기꺼이 해내는 연예인에 대한 찬사로 수렴하는데, 이는 내레이터라는 극에 대한 소외효과의 장치로서 서술의 방식에 대한 강조로 이어지지 않는 효과에 상응한다. 곧 김수정은 현실과의 동조로써 인물의 격하와 동시에 라이오스의 비주체성 그리고 증발을 통해, 또 다른 인물의 부상하는 자리를 아마도 ‘예기치 않게’ 만들어 내는데, 그 결과 관객은 현실과 극의 경계를 혼동하게 되는 한편, 또 다른 현실의 자리, 곧 ‘배우’의 현존을 실재화하는, 그것을 물화하는 또 다른 입장을 ‘의도치 않게’ 가져가게 되었던 것 아닐까.
김민관 편집장
[공연 개요]
2025.11.06 ~ 2025.11.22 평일 19시 30분|토·일 15시 (화 공연없음) ※ 접근성 회차: 11.14.(금)-11.16.(일) / 음성해설, 한국수어통역, 한글자막해설, 이동지원, 무대 모형 터치투어
명동예술극장
만드는 사람들
작 롤란트 쉼멜페니히
각색·연출 김수정
번역 장은수 ㅣ 드라마투르기 박성원 ㅣ 무대미술 임일진
조명 김성구 ㅣ 의상 김지연 ㅣ 분장 백지영
소품 남혜연 ㅣ 음악 이율구 ㅣ 음향 전민배 ㅣ 영상 임정은
조연출 김보경 홍조은 ㅣ 제작진행 김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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