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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세혁, 〈안티-샤먼 샤먼 클럽〉: 역사적 사건들의 기원의 장소로서 광주 또는 공통의 장소로서 광주가 망라하는 역사적 왜상들
    REVIEW/Performance 2026. 5. 18. 20:01

    오세혁, 〈안티-샤먼 샤먼 클럽〉[사진 제공=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하 상동).

    오세혁의 〈안티-샤먼 샤먼 클럽〉은 클럽을 전유해서 샤먼으로 분한 DJ와 진행자, 퍼포머 등의 인도 아래 춤추고 즐긴다는 개념 아래 진행되는데, 이는 후반 세월호, 이태원, 광주 5.18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그들을 애도하는 시간으로 급격하게 변화한다. 그 중간에는 전 대통령 윤석열의 12.3 비상계엄이라는 상황이 자리하는데, 곧 정치적 위기 상황은 5.18과 직접 연동되면서 그를 무릎 꿇려 비가시화된 또는 영원히 처벌받지 않을 폭군을 대리 처벌하는 데 성공함에 따라, 애도의 문이 열린다고 볼 수 있다. 곧 윤석열로 체현된 샤먼이 무릎 꿇고 고개 숙인 채 우리 눈앞에서 모호한 희생물로 봉헌됨에 따라 5.18은 승리의 기억으로 현동화되면서 오히려 과거의 차원으로 봉쇄될 수 있게 되는데, 일종의 미묘한 기억술의 각색은

     

    2022년 이태원 참사, 2016년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망 사고, 2014년 세월호 참사, 그리고 시간을 훌쩍 건너뛰어 1951년 거창 양민 학살 사건, 1970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 사건, 광주 5.18 민주화운동에 이르는 명명의 여정은 결국 5.18과 12.3의 경험의 직접적 궤적을 형성하기 위한 역사의 배치로, 이는 국가 폭력이나 부조리로 인한 직접적 희생자나 또는 저항을 하다 생을 달리한 존재들의 호명으로써 기원의 좌표로서 광주를 상정하기 위함이다.

     

    그러니까 이는 광주 정신이라고 하는 개념을 역사의 후속적 사건들의 다양성을 포괄할 수 있는 신화적 토대를 새삼 정초하기 위함이고, 그 신화 자체에 대한 근거나 분석을 가하기 위함이 아니다. 이 사건들의 네트워크는 현재의 부정한 것을 몰아내는 가운데, 집단적 애도의 차원을 연대와 화합의 측면으로 승화, 그리고 하나의 전체로서 스스로를 봉쇄하기 위함에 있으며, 이 과정에서 부정의 대상은 공통적 장소에 대한 대립형으로 재설정된다. 그리고 이는 현재의 적을 선취함으로써 과거에 대한 애도의 처소를 분노로써 매개하고 환원시키는 위험을, 따라서 미래를 앞당겨 사건들을 일시에 일망타진함의 비정치함을 감수하는데, 그것은 집단적인 것의 파시즘적 형상의 실천에 대한 명복보다는 정작 정치적인 것이 공통적인 것이라는 차원에 근거를 둔다.

     

    일종의 기능적 대상으로서 우스꽝스러운 악의 몰락을 가정함으로써 우리는 승리했다는 도취 의식을 경유하되 이 역사의 주체로서 지위를 사건으로서 역사의 계보의 끄트머리에 위치시키는 것이 그 목적인 것이다. 곧 우리의 자리를 비워냄으로써, 우리가 정신없이 리미널한 시간을 경험하고 있는 가운데, 역사의 타자를 소환함이 가능했음을 사후적으로, 의도치 않게 인식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역사적 사건들의 고유한 성격의 고찰을 유예함에도, 그것이 하나의 공통된 역사적 기원으로, 타자가 자리하는 주체의 공백으로 공통의 터전을 구성하는 것과 맞바꿈으로써 우리가 떠안은 놀이와 유희의 시간이라는 무대로부터 기꺼이 내려와서 역사로 되돌아갈 수 있게끔 하는 데 어떤 유일한 의도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극장에 다시 아니 처음으로 들어서는 경험으로부터 공연이 완수되는데, 오직 이는 관객이라는 주체로부터만 가능한 것이 된다.

     

    안티-샤먼으로서 윤석열과 샤먼으로서 관객을 맞세우는 건 결국 역사의 왜상을 현재의 승리로 봉합하며 감각 가능한 것으로 소환하기 위한 차원이라는 점에서, 윤석열은 5.18의 폭압과 희생 모두를 재현하지 않고 합리적으로 그것을 재처리하는 매개항이 된다. 우리는 안티-사면이 읽는 계엄령 포고문을 조롱하고 격하하는 역사의 증인이 되고, 그를 무릎 꿇리는 운동의 주체가 되고, 폭력의 자리를 전복하고 동시에 소거하여 과거의 기억을 새롭게 매듭짓는다.

     

    5.18의 정신을 촉발하는 것으로서 비상계엄을 현재화함으로써 광주 이외의 것이 광주를 매개하는 것이 아니라, 광주로부터 매개되는데, 따라서 안티-샤먼으로서 광주의 매개항(으로서 국회의사당)과 광주라는 기원적 장소를 전유하는 샤먼 클럽의 제목에서의 분기는, 샤먼의 이중 명명이 아니라 두 다른 장소의 절합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안티-샤먼 샤먼 클럽〉은 광주를 매개하고 기능하고 촉발하게 하기 위해서 윤석열이라는 사라지는 매개를 활용하는 것인가, 아님 현재의 역사적 사건을 끊임없이 호환하는 방식이 필연적으로 광주라는 역사적 공백의 한 장소에 도달하게 되는 것인가. 광주라는 신화를 만드는 것인가, 아님 광주라는 기원적 장소가 역사의 공백을 소환하는 것일까. 〈안티-샤먼 샤먼 클럽〉은 고유한 역사적 장소들을 섬세하고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음으로써 이에 대한 답을 유예한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가 즐김의 감각과 애도의 감각 모두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전환 가능한 차원으로 수용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것이 이미 과거가 되었기 때문일까. 아님 너무 빨리, 성급하게 피드백되었기 때문에 미처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던 것일까.

     

    2022년부터의 호명에 따라오는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는 클리셰를 역사의 기억으로 인용하기 위해 동원한 것으로, 이는 우리가 그 사건들을 부정할 수 없는 역사의 기억들로 병치 가능한 측면으로 두는 것에 상응한다. 그러니까 이 모든 역사의 이름들은 어쩌면 하나의 클리셰로서‘만’ 소환될 수 있는 것이 된 것은 아닐까. 무엇보다 최근의 시점에서 환기한다면, 2024년 탄핵 촉구 시위에 가장 많이 불렸을 이 노래는, 안티-샤먼에 대한 환기 차원에 직접 소구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2016년 이화여대에서 벌어진 평생교육 단과대 미래라이프대학 설립에 반대하는 학생들이 밤샘 농성을 벌이면서 연행 과정에서 부른 노래로서, 이는 또 다른 운동의 차원을 환기한다. 곧 애도의 차원에 앞서 벌어진 운동의 차원의 잠재적 기원은 바로 이 노래가 담지하고 있는데, 무엇보다 이 운동 차원에서 노래라는 문화적 전유 행위는 샤먼 클럽이라는 쾌락의 장소에 대한 방어이자 합리화의 기제를 제공하는 것이다.

     

    반면, 그것은 크지 않고 조심스럽게 들려온다. 그것은 애써 감흥을 제어하려는 듯 보인다―이 운동과 애도의 차원이 삐거덕거리는 장소로서 그 작음이 수여된다. 그리고 이는 이 클리셰로서 감흥이, 역사적 차원의 기억으로 각색되는 시점에서, 예술은 자리를 얻지만, 대신 그 자신의 자리를 구체적으로 세공하지 않아도 되는 듯 보인다. 곧 과도기적 역사의 왜상으로부터 〈안티-샤먼 샤먼 클럽〉은 아직 어떤 간극을 제대로 벌리지는 못한 것일 것이다. 그것은 너무 빨리 혹은 시대착오적으로 우리를 찾아왔던 것 아닐까.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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