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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세영, 〈당신이 날 볼 수 없다는 것만 빼면〉: 두 가지 시각 체제의 기원
    REVIEW/Performance 2026. 5. 18. 20:02

    정세영, 〈당신이 날 볼 수 없다는 것만 빼면〉ⓒ이동웅(김태동스튜디오)[사진 제공=서울시립 서서울미술관](이하 상동).

    “당신이 날 볼 수 없다는 것만 빼면”에서 “당신”은 투명인간으로, 여기서 ‘나’의 자리는 관객에서 유령으로 옮겨진다. 또는 유령을 경유한 관객인 나로 옮겨진다. 따라서 등장인물은 투명인간과 유령인데, 투명인간은 보이지 않으므로, 그것의 움직임을 가시화해줄 장치로서 전동 침대가 대신 자리한다. 반면, 중반 이후부터 등장한 유령은 천으로 쌓여 있고, 스틸트로 불리는 작업용 사다리를 착용해 출입구의 높이를 훌쩍 상회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상단의 얼굴 쪽에 검은 두 눈의 형체가 드러난다.

     

    투명인간이 전동 침대의 기계적 움직임 자체에 접면하며 그것과 경계를 이루는 것으로서 그것에 더해진 어떤 것, 그것으로 지지된 어떤 것으로서, 그것에서 감산된 어떤 것으로서 결정적으로 그것과 혼동되는 것으로서 드러난다면, 유령은 이미 가시화된 것을 덮는 차원으로서 접면하는 천이 있는 셈인데, 그것이 유령이 하얀 천으로 덮인 존재라는 클리셰로서 인식을 구현한 결과로서 그것이 그러하다는 점에서, 전적으로 유령이라는 존재는 그 오인된 또는 불완전한 가시화로서 기존의 경로 의존성을 재현하는 자리로부터 여전히 미지의 차원으로 신비화되고 있는 셈인데,

     

    이는 하얀 천과 비슷한 어떤 흐릿함, 거기에 더해 일종의 인간에 가까운 어떤 느낌이라는 불완전한 지각으로부터의 상응물을 해체하고 절합한 결과물이, 여기서의 ‘유령’인 셈인데, ‘천+인간’이 그것이다. 곧 천의 지지체로서, 그 안의 분명한 스틸트를 장착한 사람이 거꾸로 그 실체를 실재의 차원으로 혼동되게 만드는 지점에서 그러하다. 그것은 여전히 우리가 무언가를 명확하게 보지 못한다는 가시성의 불가능성을 비가시성의 가시화로 연장하며 봉쇄하기 때문이다.

     

    투명인간이 그렇게 보인다는 건 우리가 그것을 볼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더 정확히는 그것이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없다는 점을 볼 수 없다는 점에서, 그 가시화가 감산의 시각 작용으로 환원되는 셈이라면, 하얀 천을 뒤집어 쓴 인간을 하얀 천이라는 불분명한 신체로 소급하는 건 가산의 시각 작용에서 연유하는데, 곧 인간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드러냄의 매체가 비가시화의 차단 막이기도 하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중의 차단으로서 이 천은 첫 번째로, 즉자적으로 그것이 인간임을 가리며, 두 번째로, 은밀한 차원으로 인간이 아닌 무엇(이 인간임)을 가리는 것인데, 천 같은 것이 천으로 드러남으로써 그것은 실체를 연기하고 유예하게 된다. 이로써 서커스라는 장르적 실체에 대한 은폐는 마술이라는 장르적 법칙―그 천을 벗기면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이 되는―으로 이전되는 것만 같은데, 그것은 우리가 진실과 거짓을 구분할 수 없음의 자격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속임을 당하는 입장에서 그럴싸함의 견지만을 우선하게 됨을 의미한다―알면서 속(지 않)는다가 아니라 속음을 앎으로써 속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 천에 비침이 아니라 덧대어진 것으로서 검은 두 눈이야말로 나비 위에 그려진 새의 눈과 같은 위장의 무늬처럼 보이는데, 그것은 신체와 결부된 그러나 떨어진 별개의 막으로서 천이 그 신체에 직접 대응하고 있다는 혼동을 주는 것이다. 곧 그것은 사실 우연하게 자리 잡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실제 그 안의 신체의 눈 위치에 아마도 ‘공교롭게’ 위치하는 것처럼 보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이 인간보다 더 큰 무엇으로 가정되어 있음에도 말이다.

     

    이는 눈의 위치에 대응하기 위해서라기보다 그 눈의 위치가 아닌 지점에 놓았을 때 근원적인 신체의 비틀림을 그 천이 만들어내는 가산 작용이 그 위에서 발생할 것이기 때문 아닐까. 곧 그 천이 천이라는 사실을 드러냄으로써 그 천 안의 비가시화된 것을 실체로 바꿀 수 있는 것처럼, 그 천이 실체의 보족적 차원으로 부가될 때만 이 실체에 대한 놀이가 순전한 차원임을 인정받을 수 있다. 이 놀이의 순수성에 입각한 유령은, 두 개의 검은 반점이라는 색칠로부터 인간의 자리를 드러낸다.

     

    〈당신이 날 볼 수 없다는 것만 빼면〉에서 이처럼 비가시적인 것들은 내레이션의 디에게시스를 통한 지시, 장치와 오브제를 경유한 보이지 않는 오지각의 가시화, 그리고 신체의 개입 정황들로(서) 드러난다. 가령 유령의 경우, 유령이 아님의 근거로서 주어지는 유령적인 것이라는 메타 유령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는 건, 그가 단순히 인간이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를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점 때문인데, 그는 그의 검은 눈의 위치 조정도, 입구를 원활히 찾고 들어올 수 있는 여지도, 관객의 응시에 대한 의식적 방어도 불가능한 그런 존재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유령의 투박하고 밋밋하고 우스꽝스러운 외양은 그가 주체적이지 않다라는 것이 아닌, 그가 비주체적으로만 주체적이라는 것을 말하는데, 그 가시화의 막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도망갈 수 없이 묶인 이 유령의 부자연스러움 그리고 부자유성은, 투명인간의 “심각한 퇴행성 증후군”, 곧 “투명화 증후군”을 겪는, 상이 맺히지 않는 (각)막으로 인해 우리에 대한 응시가 (유령과 같이) 불가능한 따라서 보이지 않음을 적극적으로 보이지 않는 차원으로 만들어야 할 그 자신이 어떤 보호막도 안전하게 가질 수 없는, 그 보호막조차 가시화되지 않는 매우 취약한 상태에 놓이는 것이 희극의 차원으로 반복된 것과 같다.

     

    곧 투명인간에게 막을 씌운다면, 유령이 된다면, 불완전하게나마 안전해지는 셈인데, 물론 이 투명인간 이후, 공교롭게 나타난 유령이라는 존재는 또 다른 장의 유격을 갖지만, 그 둘은 과연 어떻게 관계 맺을 수 있는 것인가, 곧 그 둘이 다른 존재임을 어떻게 반증할 수 있는 것인가. 마치 눈의 위치를 고수해야 하기 때문에 ‘멍하니’ 서 있어야 하는 유령과 전자동 버튼을 외부에서 누른 침대의 움직임으로만 드러나는 투명인간이 말이다.

     

    따라서 투명인간에 간격을 도입해 유령을 만드는 것이 가능한 건 근본적으로 투명인간과 유령이 친연하다는 것뿐만 아니라, 이 비가시성의 존재들이 사회적 약자에 대한 잠재성을 최대치로 밀어붙인다는 점에서 공통된다는 것이 사실상 가장 주요한 본질이라는 것이다. 곧 비가시성의 특이성 혹은 차이는 그것이 어떤 미세한 움직임만 보이는 것이 가능한 인간이라는 것의 스펙트럼 안에서 전적으로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이 가시성 자체의 어려움 혹은 ‘조악함’의 경로 자체를 그것들이 근거로 하기에 그와 같은 식별의 경계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투명인간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 증상이 언어로써 가시화되어야 한다면, 또는 유령이 보일 듯 말 듯한 것이기에 단지 가시화의 방법으로써도 그것이 가시화될 수 있다면, 그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곧 그 둘의 차이가 결과가 아니라 내재적 차원의 원인이라면, 가시화의 전략적 차이라기보다 가시화에 대한 필연성의 경로에서 오는 차이라면, 가시화로부터 근본적으로 그 둘의 차이를 정초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곧, 투명인간이 그것이 결코 의도적인 선택이거나 고도의 테크놀로지의 산물에 대한 특권적 소유가 아닌 가운데, 단지 눈에 띄지 않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가시화해야 하는 것이라면, 유령이 그와는 달리 의도하지 않음에도 그것이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무엇을 나타내기 위해 천이라는 매체로써 지지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곧 시각의 기원이 일종의 상연성을 갖는 것이라면, 그 바깥의 인간에게 달려 있는 것이라면, 인간에게 내재적인 것이라면, 투명인간은 일종의 절대적 타자에 대한 상상적 대리물이며, 유령은 실재의 잔여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투명인간이 슬프다면, 유령은 우스꽝스러운데, 이 둘은 만나는 대신, 각각의 장 안에서 새로운 시각화의 장치를 개발한다는 명목 아래 놓인다. 투명인간의 가시화가 시각 매체를 제외한 다른 매체들의 조응으로써 과장되어 있다면, 그로 인한 동기화의 기제가 타자의 비가시적 차원의 이념을 상상적인 차원으로 내부의 초점에서 가시화한다면―따라서 우리는 그것이 우스꽝스럽더라도 숭고를 맛보게 된다.―, 유령의 가시화는 단지 시각 매체의 어설픔을 통해 또는 엉터리 진술을 통해 유령에 대해 우리의 믿음 자체가 근거하고 있는 가시성 자체의 혼란을 말 그대로 가시화할 때 그것이 어떻게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전락하는지를 가시화한다.

     

    투명인간이 무엇보다 불투명하다면, 유령은 무엇보다 투명한데, 결과적으로 그사이의 이동, 곧 타자의 형상을 감각하는 우리의 내부 메커니즘을 거꾸로 추적하는 경로를 거쳐 고전적인 유머로 방향을 트는 건, 단순히 덜 심각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너무 심각해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식별하지 못하는 것이 타자라면―따라서 환상적으로 그것을 매개한다.―, 우리가 너무 쉽게 소비하는 것은 환상적 이미지이다―따라서 실재적으로 그것을 놓는다. 따라서 그 둘은 절합되어 있고, 하나를 다른 하나로 해소할 수 없다.

     

    결정적으로, 이 두 존재가 분기하는 지점은 그 둘의 차이로 소급되기보다 우리의 시각 체계가 비대칭적으로 또한 국소적으로 치우쳐져 있음을, 따라서 우리가 비틀려 있음을 상기시킨다. 〈당신이 날 볼 수 없다는 것만 빼면〉은 타자의 드라마로부터 우리의 승화 작용을 일으킨 후 급격하게 추락하는 것이 아닌, 타자에 대한 지각과 우리의 환상적 지각을 병합하여 우리의 시각 체계를 진술하는 것이다. “당신이 날 볼 수 없다는 것만 빼면” 나는 한없이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겠는가. 곧 당신이 날 볼 수 있기에 그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본래적인 응시에 기초한 진술이다.

     

    반면, 〈당신이 날 볼 수 없다는 것만 빼면〉은 응시의 공식을 다시 쓴다. 투명인간인 당신은 진짜 나를 볼 수 없다. 따라서 당신을 현상하는 건 그 바깥의 나일 뿐이다. 그리하여 이 가정은 사소한 것으로 취급될 수 없다. 당신이 나를 볼 수 없다는 건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나의 중핵을 차지한다. 다른 한편, 유령인 당신은 나를 기이하게 본다. 그리하여 나는 그 응시의 시선으로부터 붙들려 있지만 그것이 나를 본다라는 것을 분명하게 만드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한편으로 대상화되는 우스꽝스러운 당신의 눈을, 다른 한편으로 조우할 수 없는 의사-눈의 형상(이 천임)을 나타낸다. 그 둘의 차이, 곧 진정성의 서사와 희극의 서사는 징후적으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거리로도 주어진다. 투명인간은 우리의 근처에 (심리적으로) 오지만, 유령은 (물리적으로) 턱에 걸린다.

     

    김민관 편집장

     

    서울시립 서서울미술관 개관 사전프로그램 《퍼포먼스와 미술관》

    정세영 〈당신이 날 볼 수 없다는 것만 빼면〉 2025 *리허설 Jeong Seyoung, 𝘌𝘹𝘤𝘦𝘱𝘵 𝘛𝘩𝘢𝘵 𝘠𝘰𝘶 𝘊𝘢𝘯𝘯𝘰𝘵 𝘚𝘦𝘦 𝘔𝘦, 2025 

     

    2025.12.6.(토), 2025.12.7.(일) 오후 5시 서울시립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전시실 갤러리1

    서울시립 서서울미술관 제작 

    사진 이동웅(김태동스튜디오), 서울시립 서서울미술관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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