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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경, 〈늦게 온 보살〉에 대한 주석: 이미 온 미래를 부인하며 마주하는 법REVIEW/Visual arts 2026. 5. 20. 13:15

박찬경, 〈늦게 온 보살〉(2019, 단채널 영상, 흑백/컬러, 사운드, 55분.)[사진 제공=국립현대미술관](이하 상동). 빅찬경의 〈늦게 온 보살〉(2019, 단채널 영상, 흑백/컬러, 사운드, 55분.)은 곽씨상부(槨示雙趺) 서사를 미래의 재난을 경유해 불러오는데, 이는 내러티브의 설명으로 시작된 작품은 제의의 차원에 다다르는 수미쌍관의 형식을 이룬다. 석가모니가 열반에 들었을 때 관에 불이 붙지 않다가 가섭존자의 도착 이후에 부처의 양발이 관 밖으로 나오고 비로소 다비식이 가능해졌다는 기존의 서사에서, ‘늦게 온 보살’은 등산 차림으로 산을 배회하던 여자의 모습으로 옮겨지는데, 이때 그에 대응하는 ‘석가모니’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은 그 여성의 행위가 시종일관 그 발에 대한 클로즈업의 순간을 위해 유예되었음에 조응한다. 곧 여성의 서사 안에서의 무목적적인 방랑은 전사의 부재, 상실에 대한 산만한 방어로서만 기능한다.
그 직전, 이 영상의 결정적인 형식, 곧 방사능 오염도를 측정하는 오토래디오그래피의 외피를 전유해서 흑백 네거티브 형식으로 시종일관 펼쳐지던 영상이, 관을 둘러싼 사람들의 얼굴이 교차 클로즈업되는 장면에서 급작스럽게 실사 영화로 전환되면서 그 보살‘들’의 후보군이 추려지는 부분에서, ‘늦게 온 보살’은 석가모니의 부재를 진정으로 대체하려는 듯 보인다. 그리고 이 신의 실체적 현전으로의 환원을 메우는 틈새가 제의적인 것으로 확장하는 듯 보인다.
현재의 시점 역시 불확실한데, 그리하여 진정 동시대적이다. 최후의 망명지를 묻는 말이 두 번 반복―이 반복은 기원의 신화가 다시 쓰이는 형식적 차원에서 초래된다.―되는 파국의 서사로부터, 소위 정감록의 십승지라는 안정적 피난처가 배후의 맥락으로 자리하게 되는데, 더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맥락은 이 영상 작업과 ㄱ자 축으로 대응하는, 오토래디오그래피의 행위에 대한 실제적 결과물들을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피폭된 사물이라는 공통점으로 꿰어지는 유형학적 아카이브 작업, 또는 원전 사고 지역 아래의 지정학적 좌표들로서 방사능 수치의 검출 과정을 통해 비로소 그것에 내입되는 사물들의 아카이브를 건조하게 병치시켜 나가는 영상, 〈후쿠시마, 오토래디오그래피〉에 대한 서사를 원자력에 대한 ‘현대의 신화’에 기대어 반교훈적인 차원으로 검출하는 것에 가깝다.

곧 〈늦게 온 보살〉에서 불쑥 삽입되는, 불사조를 뜻하는 프랑스 원자로 슈퍼피닉스에서 시작해, 불교에서 문수보살을 가리키는 일본의 원자로 ‘몬쥬’, 보현보살을 가리키는 일본의 또 다른 원자로 후겐, 인도의 석가탄신일 핵실험을 성공했을 때 그 핵실험의 암호명이었던 미소 짓는 부처와 같이, 영원한 숭고함의 개념이 그 초인간적인 힘에 대한 관념을 대체했음 자체로부터 이 서사가 파생되었음을 전하는데, 이 원자력에 대응하는 것, 곧 석가모니의 실제적 신체와 조응하는 건 바로 거대 컨테이너다. 그리고 물론 거기에는 얼굴이 없으며, 네모난 상자에서 삐져나오는 발의 파편만이 이 네모난 규격과 관계 맺고 있다.
‘늦게 온 보살’이라는 제목은 곽씨상부 설화를 경유해 진리의 현현과 그 진리를 수여받는 주체의 시차적 관계를 가리킨다. 보살은 항상 늦게 오지만, 그것은 주체의 뒤늦은 인식에 따른다. 보살은 이중적이며 또한 중의적이다. 늦게 온 보살은 늦게 온 보살로서 확인된다. 그러니까 늦게 온 보살은 또 다른 늦게 온 보살에 의해 발각된다. 보살의 죽음은 한 번은 가짜로, 그리고 다음에 진짜로 반복된다. 하지만 그것이 현대의 서사로 반복될 때 누가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가. 진리의 영원함으로서 죽음의 결정이 아니라, 세계 자체의 죽음으로서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때 주체는 단지 그 늦음을 단지 예측하려 하고 믿는 부차적 존재로 급락하는 듯 보인다. 그것은 특수한 정보 자체의 하달로, 탐색으로만 매개되어 온다.
따라서 미래가 사라진 만큼 주체 역시 사라졌다. 〈늦게 온 보살〉이 말하는 바는 결국 페시미즘적인 것, 진리 없음의 차원 아닐까. 그것이 곽씨상부의 서사를 가장한 정감록의 서사인 것처럼 피폭 아래 인류의 미래는 이미 다다른 종국의 지점을 지연된 시점 아래 기입해 가는 과정 아닐까. 곧 방사성 물질 검출 작업이 단지 기도래한 그것을 다시 확인하는 과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것이 곧 영상의 색감이 말하는 바 아닐까. 영상은 우중충하며 또한 실재적이다. 또는 징후적이며 또한 왜상적이다.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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