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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시우, 《비프리 B-FREE》: 비평가에의 풀이
    REVIEW/Visual arts 2026. 5. 17. 19:56

    권시우, 《비프리 B-FREE》 포스터[이미지 제공=숏서킷].

    권시우의 《비프리》에는 권시우 자신의 목소리로 녹음한 하나의 랩 곡이 흘러나오는데―〈안티 비평가〉(2026. 사운드 설치, 8분 15초.), 이는 랩퍼 비프리(B-FREE)의 〈네르갈〉을 배경음으로 전유한 것이다. 음악 매체의 전용을 지시하는 제목은 비프리를 (일차적으로) 겨냥하고 독해하는 대신, 카세트테이프의 B면이 비어져 있음을 지시하는(b-free) ‘비프리’의 또 다른 의미로 이행되고, 이어 포스터 이미지와 실제 전시 조각―〈mixtape〉(2026)―의 오직 B면만이 일곱 개의 트랙으로 채워져 있음을 경유해, 그 부재를 자유의 위치로 바꾼다, 또는 공백으로서 주체의 자유로움을 현상한다.

     

    하지만 이 이미지는 무엇보다 비평가 자신으로 (우선) 돌아옴으로써 어떤 환시로서 오지각을 동반하는 듯 보인다. 비평가의 풀이가 그것인데, 이 전시는 무엇보다 비평가의 하소연, 한풀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곧 비평가라는 실재를 전시장에 던져놓는 기이한 전시로서 《비프리》는 동시에 비평가를 풀이하는 경로를 역으로 제시한다. 이는 미술계의 증상을 (겪어내는, 기실 내속되는 비평가의 증상을 주로) 드러내는데, 가령 〈copy1〉에서 “동시대 미술은 네트워크 폐인들”이라는 부분에서처럼 작품보다, 작품 아래 자리하는 욕망의 자리를 드러낸다.

     

    그러니까 무언가 이 흐름은 작품에 대한 진정한 관계 맺기가 아니라, 그 기저의 존재 자체나 그것이 품고 있는 세계 자체를 향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에 따르면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은 숭고하거나 주요하다기보다 부속적이거나 비루한 것에 가깝다. 곧 누군가처럼 되고 싶다거나 그 누군가의 매혹됨에 사로잡히는 가운데, 비평의 이념은 작품을 향하기보다 차라리 그 욕망의 근저를 헤집거나 탄로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아마도 이러한 시나리오 안에는 폐허로서 세계에 대한 서사가 배가되는데, 이는 지극히 환원론적이며 동시에 낭만적인 것으로 보인다.

     

    랩과 테이프를 제하면 벽면에 부착된 다섯 개의 나무판자 위―〈안티 비평가〉는 공간 중앙에 윗면이 바깥쪽으로 기울여 배치된 판자 위에 부착된 하얀 종이 위에 펜으로 쓰인 예외적 작업으로, 이는 독립적인 글로서가 아니라, 랩이라는 음악 매체에 대한 일종의 거대한 가사지 형식으로 적용된다.―에 위쪽부터 빼곡하게 적어간 다섯 개의 글로써, 전시는 기입된다. 곧 기입되는 이 ‘회화’는 위쪽부터 선형적으로 좌에서 우로 횡단하며 끈기와 인내심을 갖고 읽어낼 것(의 기각)을 요청한다―많은 관객이 그렇게 떠나갔다.

     

    실제 어두운 콘크리트 공간에 별도의 핀 조명이 설치되지 않은/못한 가운데, 그것은 심히 어둡다―관객 자신의 그림자로써 흰색 배경을 어둡게 하며 글자를 짙게 만들어야 좀 더 확실해지는 정도이다―중앙의 〈안티 비평가〉는 예외이다. 이 ‘어두움’이 근본적으로 설치로서 의도된 효과인지 설치의 무능한 결과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것은 그 어둠에 잠겨 있는 비평가의 현존을 가장 뚜렷하게 가시화하는 것임은 틀림없다.

     

    비평가의 진실 안에서 비평의 진리를 드러내는 그의 사고의 흐름은, 삶의 해부로서 서술이 비평으로 연장되는 단계를 보여준다. 비평가의 과잉된 자의식은 한편으로 타자성의 자기 존재에 입각해 있으며, 그것을 처리하는 데 어려움에 처한 비평가의 어떤 상태와 밀접하다. 미술은 작업보다는 작가의 유명세에 의해 규정되며, 그것은 그들이 욕망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절대적이다.

     

    이는 ‘좁은 세상 네트워크 이론’에 의해 그 역시 그 작가들과 연결되어 있는 셈이며, 이때 그는 미술에 대한 진정성을 갖지만, 그들과 비교해 비루한 자신을 자조하면서, 동시에 그에 대한 욕망을 비판적 대상으로 두지 못하고, 자신의 부정성으로 전이하여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그는 죄의식과 함께 글을 쓴다. 그리고 이는 유년시절의 방황으로 침잠해 간다.

     

    “새끼들의 애인들 인스타 연예인들 동시대 미술은 네트워크 폐인들 나는 애인들의 애인이고 미술 앞에서 목이 매인 글쟁이고 메인 아닌 잡도리고 죄인 같은 심정으로 매일 글을 써 글을 써”

     

    〈copy4〉(2026.)에서는 자신의 뇌를 방부 처리 안 된 통조림으로 비유해서 액체 파편들이 주변을 더럽히더라도―그것은 이후 비대한 자기 서사의 점철로 구현되는 듯 보인다. 예컨대 ‘선천적인 머릿속 물혹과 발작’, ‘술과 약, 섹스에 절인 생활’ 같은 이전의 기억들로서 말이다.―, 그것이 담고 있는 “흐물거리”는 기억들을 선명하게 하기 위해 통조림 속 내용물을 꺼내, 조각들을 대조하고 끼워 맞춰 미술에 대한 복기를 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그는 미술에 대한 희미하고 지워져 가는 이미지 보관소이고, 그의 비평 행위는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매개적 역량이며, 순전하게 분리할 수 없는 그 기억에 달라붙는 불순물 같은 것들이 그 복구 작업에 선행됨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가 만든 이미지는 본래의 이미지가 아니라, 자신을 통과하여 “식별”된 것이며 “진열”되면서 전시장 안의 하나의 이미지를 만든다. 그러니까 그 이미지는 원래의 이미지에 대한 ‘덜’ 진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이미지 자체로서 진술되는 것이며, 그것은 독립적인 전시를 이룬다. 그러니까 그는 어떤 전시의 특정 이미지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결정적 이미지로서 그 전시를 번역한다. 그것은 해석이 아니라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미술이 그 자체로 중요하기보다 결국 나의 기억에 남은 파편들의 복구 차원에서 미술이 이야기될 수 있다는 사실만이 자신에게는 중요하다.

     

    미술은 그에게 남아 있고, 미술에 대한 의미는 순수하게 내재적이며, 자기 재건적, 자기에의 표현적 차원에서만 작동한다. 그 재건은 “객관적인 기록”이 되지 못하며, “날조”이거나 어떤 “정황”이다. 미술은 어떤 사정의 산물이며 어떤 상황의 맥락 아래 있다. 하지만 그건 정황으로만 남을 뿐이다. 그런데 그것은 왜 사료로 남지 않을까. 근본적으로 그가 10년간 활동하며 마주한 예술이 임시적이며 일시적인 차원에서 작동하던 사라져간 흔적 같은 것이기 때문은 아닐까.

     

    “우울과 불안은 내재적이다 우리 모두가 버블 이후에 도착했다는 것”, 곧 그의 삶은 ‘계급의식 없이 계급’에 부자연스럽게 속박되어 살아가는 것과 같다.

     

    〈copy3〉(2026.)에서는 그 계급에 대한 태도가 더 구체화된다. 특수한 개인의 층위와 낙인이 찍힘으로써 계급에 대한 표면은 조응하지 않는다. “계급과 젠더 섹슈얼리티 그것만으로 혹은 그것들 사이에서 나를 규명할 수 없다.” 그 사실이 그에게는 중요하다. 어차피 계급이란 전선이 아니며, 수많은 개별의 각기 다른 식별됨으로 분화될 뿐이다. “우리는 잉글랜드에서 태어난 노동자 계급이 아니다.”

    그는 “공동체 불가침 시민 조약이 게워낸 무수하고 잡다한 일인칭이 각자의 욕망으로 경합하는 내러티브 형식”―〈copy2〉(2026.)―을 원한다. 계급이 아닌, 계급을 비켜나는 “너는 허구를 위한 소실점이다.” “너”(와 나)는 그렇게 “역사의 바깥”에 있으며, ‘나와 너’로 상호 식별되는, 상호 연결되는, 어쩌면 거기에 욕망이 투여될 수도 있는, 몸이 없는, 허구적인 이미지일 뿐이다. 그것은 예컨대 “어느 시점부터 멈춘 정방형 피드”, 그러니까 작동된다라는 사실만이 유효한/새로운, 인스타그램 속 이미지인 것이다.

     

    이러한 인스타그램의 피드가 세계 그 자체인 계급으로부터 계급 의식에 대한 이물감과 적대를 소거하고 나면, 비평은 “단어를 개념인 것처럼 말”하는 것과 같다, “나라는 주어를 심문하지 않음으로써”. 나라는 타자성을 벗어남으로써 가능해지는 어쩌면 긴요해지는 비평, 곧 주관적인정황에 대한 복기가 발생한다. 그리고 정황‘들’을 묶는, 의미화하는 격상된, 승화된, 환원된, 추상화된 언어가 그 뒤를 따른다. 그것은 기존의 미학적 용어들을 답습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정황인 이유는 우리가 “버블 이후”라는 공통된 세계의 토대, 그리고 비루한 욕망을 작품 이전에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평은 내재적으로 발생하며, 다만 자신의 외부를 향함으로써 쓰인다. 그런데 작품은 필연적으로 나에게 묻어진 것이며, 비평은 그것을 반향하는 것, 곧 거꾸로 나를 헤집어서 내가 묻어 있는 작품을 다시 쓰는 것이다. 그것은 나를 심문하는, 곧 나로서 식별하는 것이 아니며, 무엇보다 작품은 작품과 연루된 나라는 주관적 의식에서 재구성된 작품임을 필연적으로 전제하며 시작하는 행위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연장이면서 내부에서 나의 외부를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의미”는 미술에 순수 귀속되지 않는다.

     

    그것은 지나간 시간, 나의 경험에 대한 회고나 상기일 수 있으며, 방부 처리 되지 않은, 그래서 더 상하기 전의 나의 존재론적 규명이며, 나의 생존에 대한 보고서, 일기 따위와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는 지점에서 진정성의 차원을 띤다. 곧 《비프리》는 나의 사적 일기가 공적 진술로서 기능할 수 있음을 주장하는, 합리화하는 전시와도 같다. 거기에 어떤 객관적 의미라는 건 없다. 의미는 시대적으로 또 세계상에서 이미 상실되어 있기도 하지만, 적어도 그의 존재가 부정당하거나 기각당할 수는 없다. 그것은 존재의 분투로서 해석, 더 정확히는 ‘의미화’되어야 한다, ‘나’의 타자성과 ‘나’라는 타자성이 혼동되면서(도) 말이다.

     

    적어도 나의 뇌는 남아야 한다, 남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 시간(에 대한 보존의 요청)은 낭만적인 것에 불과하더라도 역사의 외부로서 비정전화되는 문법이더라도, 나는 완전히 타동적으로 끝나기 전에, 그것들을 (타동적으로나마) 복구하고 싶다, 곧 의미화하고 싶다. “내 머릿속에 있는 선천적으로 타고 난 물혹이 씨피유라는 결론 내리고 죽어버리는 것이다 시스템 종료되는 것이다”―〈copy2〉―를 피하고 싶다. “한겨울의 테라스에 나를 묻고 씨피유만 건져서” 전시장이 있던 장소 부근의 “전자 상가 같은 데” 팔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의 단어 아닌 개념의 하나로, “인터페이스”로서 “창문”은 “사용자와 동기화되지 않는 액정의 표면”―〈copy4〉으로서, 곧 사용자를 물리적으로 포함하지 않는, 사용자에 대한 순수한 매개일 뿐이라면, “카페 흡연석에 마주앉은 우리의 잔상 비춘 유리창이 여기인가 여기와 여기 아닌 곳을 가르는 경계인가”―〈copy2〉라는 지점에서 ‘창’은 근본적으로 매개를 넘어 경계로서 작동한다.

     

    그것은 우리를 비추면서 여기에서 물리적으로 묶고, 곧 여기로 한정하고, 저 바깥의 비가시화된 영역 너머에서 우리 너머의 존재를 산출하며 우리와 우리 아닌 것을 구분한다. 반면, ‘우리’라는 것은 추정되는 개념이며, 여기 너머의 다른 곳이 작동한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그것은 나와 너를 어쨌든 반향하고 있다. 나와 너는 마주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평면으로 반향되는 존재이다. 우리는 우리로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우리라고 식별된다.

     

    그런데 이는 공동체라는 이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에서처럼, 허구에 더 초점이 맞춰진 듯 보인다. “허구로 잦아든 사용자의 잔상”으로서 말이다―그러니까 허구라는 차원에서 우리는 우리이다. 그리고 다시 비평은 허구적 관계를 맺는 것과 같아 보인다. “교차성의 논리”―젠더의 차원이 아니라 순수하게 즉자적인 관계에서의―, “그 잡다한 이해관계”에 입각해 비평이 구성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온당한) 비평은 “지연”되고 다만 “지속”될 뿐이다. 이러한 속류 환원주의적 비평은 그것이 “사랑”이면서 기약 없는 미래에 대한 보잘것없는 현실에 대한 인식에 젖줄을 대고 있다―허구는 또한 욕망을 기초로 한다.

     

    타임라인은 끊임없이 계속 쌓이고 있기에 역설적으로 멈춰 있다. 그것은 양적으로 계속 증대되기에 정보는 선별되기 어렵고, 나의 죽음이 누군가에게 수거되길 기대하는 나는 ‘너의 자살’을 그사이에서 헤집어 내려면, 그 세계라고 믿어지는 곳으로부터 빠져나와야 한다. 그런데 이곳은 ‘폐허를 능가하는 무성한 잔해’로서 덮이고, 그러니 “망했다는 사실을 직감할 뿐이다.”이는 〈copy1〉(2026.)에서 연대를 초과하는 서울에 대한 이야기로 연장된다. “서울 특정적 광섬유 네트워크―‘재난문자가 도착하는 대중’(〈copy2〉)―를 가속주의적 연대의 근원인 리비도 차원에서 초월할 수 없다” 곧 ‘연대’에 대한 의도는 그 의도와 상관없이 “익명의 군중”에 파묻힌다.

     

    ‘더 빠른 속도로 서울을 망하고 있고’, 서울은 우리보다 넓기에 “우리는 두 번 다시 마주치지 않을 것이다.” 또는 마주칠 수 없을 것이다. 폐허를 대치하는, 은유하는 어떤 공간들, 그보다 큰 서울이라는 은유는 반대로 서울과 대비되는 “중력이 없”는 “먼지 입자”, 단지 입자로만 구분되는 “픽셀” 같은 존재들로서 우리로 소급된다. 그런데 이러한 아포칼립스적 서사에 침잠된 나의 비평이란 또 다시 무엇인가. 비평을 하는 ‘나’가 내뱉는 말이 결국 낭만주의적 도피이거나 자기 합리화의 기전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반론을 할 것인가.

     

    이미 세계의 끝은 불현듯 앞서 다가와 있기에, ‘나’의 10년은 반추되기보다 회고된다. 그 시간은 어떤 시대가 폐허로서 연장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에, 나는 무력하고, 그 무력함의 가치를 절대화하고 숭고화하고 그것을 미학적 태도로 격상시킨다. 그것은 결국 비평의 언어를 이룬다. 무력감은 진정함의 언어이자 일시적인-절대적인 미학적 토대이다. 그것을 공준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나는 외부를 향한다. “연대”와 “연대”가 필요하다―〈안티 비평가〉.

     

    비평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과의 관계이며, 이들과 관계 맺는 한 방식이다. 하지만 ‘나’는 초라하며, 문제적 인간이며, ‘너’는 그 관계에서 동시적이지 않다. 그러니 적어도 여기서, 권시우에게 비평은 어긋난, 미끄러진, 또한 오도된 비평을 멜랑콜리적 대상으로 위치시키는 행위이다. 그것은 물론 비평을 우회하는데, 어쩌면 비평의 죽음을 애도하며 거기에 자신(의 죽음)을 끼워 넣는, 그리고 ‘이미’ 그것이 당도했다고 여기고 그 비평과 자신―비평가―를 착각하고 혼동하는 걸 뇌까리며, 그 상태를 정체화하고, 그 정체된 상태를 또한 정체화하며, 유예된 상태를 ‘수행’한다.

     

    김민관 편집장

     

    비프리B-FREE

    권시우

     

    2026.3.21. - 4.11. 11:00- 20:00

    숏서킷 (서울 용산구 원효로 187 지하 1층)

    입장료 5,000원

     

    Credit

    작가 권시우  

    랩 권시우  

    비트 비프리 <네르갈>, FREE THE MANE 3

    "FREE THE MANE VS B-FREE"

    사운드 믹싱 김동용  

    디자인 노예주  

    설치 끄고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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