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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태 개인전, 《개울가의 나한들》: 본질적 삶으로 향해 가는 특이한 노동의 형상들(이라는 과도기적 단계)REVIEW/Visual arts 2026. 5. 10. 21:56

박은태, 〈개울가의 나한들〉(2023. 캔버스에 아크릴, 130×194cm.)[이미지 제공=아트포럼리]. 박은태 작가의 개인전, 《개울가의 나한들》에서 가장 첫 번째 자리한 〈노동산수도2〉(2023. 캔버스에 아크릴, 130×194cm.)는 전시에서 가장 인상적이며 또한 예외적인 작업이다. 바로 옆의 〈노동산수도1〉 (2023. 캔버스에 아크릴, 130×194cm.)는 그것보다 원형적이고 기초적인 차원에서 먼저 시작된다고 할 수 있는데, 〈노동산수도2〉는 그것을 더 확장하는 한편, 완성한다.
‘노동산수도’는 과정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초기 시작 단계를 보여주는, 〈개울가의 나한들〉(2024. 캔버스에 아크릴, 130×388cm) 에서처럼 그 에스키스를 같이 보여주고 있지는 않지만, 인물들로 결국 수렴되는 작업임에도, 인물보다 대략적인 풍광의 전체적인 구도를 선의 흐름과 리듬으로 구성했음을 일러주는 단서로서 그 에스키스가 작품의 주요한 전제 조건이 되고 있음을 연장해보는 것은 가능할 것이고, 그렇다면, 무엇보다 풍경을 하나의 입체화된 공간으로 표상하는 〈노동산수도2〉를 그 역시 인물로 초점화됨에도, 여전히 지속되는 잔여적 공간의 힘으로 재초점화를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다.
《개울가의 나한들》은 9점으로 이뤄진 전시이고, 그중 에스키스를 제하면, 회화는 5점에 불과하다. 〈팔보살의 여행〉이나 〈개울가 나한들〉, 〈성사천 다리에서〉는 모두 인물에 초점을 두고 있고, 여기서 배경은 인물에 조응되거나 〈성사천 다리에서〉에서처럼 사라지기도 하는데, 사실상 부차적인 것으로 느껴진다. ‘노동산수도’의 배경이 동굴이라는 물리적 조건이라는 점은 굉장히 중요해 보이는데, 역설적으로 이를 인물로 수렴하는 게 불가능했다는 점에서 이를 본격적으로 상대할 수밖에 없었던 작가의 굴절된 시도, 또는 그 같은 난제가 새로운 작업의 시작으로 나아가는 지점이었음을 여기서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면 과장된 수사일까.
공통적으로 개울 아래 노동자들을 그린 세 개의 대작, 곧 ‘노동산수도’ 2점과 〈개울가의 나한들〉은 구상 회화로서 형상과 배경 모두를 어떻게 치우치지 않고 함께 자리할 수 있을지에 대한 회화의 과제를 풀고자 하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인물을 덜 그리고 환경을 더 그리는 것으로써 해결된다. 인물은 그래픽화되어 가고, 환경을 이루는 사물들은 거대한 스펙터클을 이루며 올록볼록 입체 매스를 이루며 존재화된다. 애초에 ‘함께 자리함’은 그 둘이 조응하거나 어우러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하나가 다른 하나에 완전히 용해되는 걸 말하지 않는다.
바위는 평면으로 압축하지 못한 물질성의 예외적인 덩어리로 부각되는데, 그것은 〈노동산수도2〉에서 우측 상단의 물결의 일환으로 보이거나 〈노동산수도1〉에서 왼쪽 두 개의 연접한 바위가 마치 검푸른 파도의 물결을 고정시킨 것으로 드러나거나 〈개울가의 나한들〉에서 우측 상단의 바위들이 환상적 질감의 터치로 그려져 있는 것 역시 그러하다. 이 셋은 다르지만 모두 개울 자체를 특별하지 않게 처리하는 것의 반동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곧 작가는 중앙의 물을 평면에 가깝게 처리하는데―〈개울가의 나한들〉에서는 특히 그래픽 기호에 가까운데, 단풍색처럼 붉은빛의 노란색 바위와 파란색 개울의 색채적 대비에 의해 그것이 볼록한 표층으로 부상한다.―, 그 무의식적 잔여 아닐까 싶은 것이다. 곧 중심적 오브제인 바위가 대신 물을 기호화한다, 또는 물의 기호를, 발색을 전면화한다.
바위가 가진 홈들이 여기저기 부상하고 있는 와중에 인물이 선분의 윤곽으로 배경에 덧입혀지고 있음은 오히려 충분한 면적이 확보되는 배경이 주요한 대상이 되는 것의 반대급부로 주어진 자연스러운 결과로도 보인다. 여기서 인물은 인부의 옷의 형광 띠로 분쇄되고 사방으로 자리하는데, 이는 고유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하나의 복제된 형상의 변주, 시간의 나눔에 따른 반복에 가깝다. 거대한 바위와 임시적 차원의 노동자의 대비는 세계의 힘으로부터 그에 맞서는 왜소한 노동자들의 시간이 집적되어 가는 노동의 원리와 형상으로 역전된다. 하지만 세계는 잔여의 힘 아래 이들을 종속시킨다.
노동하는 인간과 그가 다루는 세계의 대비 안에서 긴장을 안고 몰두하는 독특한 노동자의 형상으로서 그는 고유하다. 그러니까 고유한 개인은 노동자로서 고유함에 저당잡힌다. 곧 그들은 노동자’로서’ 판별된다. 일차적으로 이들이 각기 다른 옷을 입었음에도 공통되게 안전모와 형광 조끼를 입어서가 아니라, 노동이라는 고유한 힘이 이들을 세계에 대한 방향성과 목적성, 그리고 세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루고 바라보기 위해 존재한다는 차이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박은태는 이번 전시에서 자연을 침투하는 노동자들을 그린다. 그야말로 그들은 불확정적이고 반절의 가시화로써 세계에 투과되어 있다. 그것은 임시적인 형상으로써 비가시화된 주체로서 노동자를 예외적인 것으로 가시화한다. 집적된 시간으로서 노동자들, 또는 편재하며 합산되는 노동자들 중 사이에서 온전한 형상, 그래픽화되지 않은 중심적 인물(들)이 있다―그것은 노동자가 아닐 때도 있다.

박은태, 〈노동산수도2〉(2023. 캔버스에 아크릴, 130×194cm.[이미지 제공=아트포럼리]. 〈노동산수도 1〉의 중앙 위치에서 상의를 다 벗어 위쪽 바위에 올려둔 채 개울가에 발을 담그고 허공을 응시하는 노동자의 형상이 대표적으로 그러하다면, 〈노동산수도 2〉에서는 세로축에서 좌측 하단에 개울가에 담근 발이 자리한, 역시 바위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노동자가 그러하다―이러한 중심인물들로부터 구심점을 지니며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그래픽 선, 곧 그림에서 가장 명백한 인공물로서 화살표들이 사방으로 방사된다. 이는 우측 상단 바위에 걸터앉아 얼굴을 괴고 수심에 잠긴 듯한 또 다른 노동자로 옮겨 간다―다만, 주변으로 그래픽 선들이 없다.
〈개울가의 나한들〉에서는 노동자들과 일반인들이 뒤섞여 있는데, 후자는 노동의 의무로부터 해방되어 있으며, 이들은 세계를 아마도 ‘풍경’으로서 각인한다. 우측 하단의 하얀 재킷을 입은 할머니의 등이 대표적이며, 좌측으로 조금 간 상단의 개울을 바라보는 모자 쓴 남녀가 또한 그러하다. 이들은 특별한 정동을 분출하고 있다. 여기서 나한‘들’의 정의가 필요해지는데, 그들은 노동의 형상에서 벗어나 있는 평범한 소시민에 한정될까, 혹은 민중의 범주에 속한 그 모두를 총칭할까.
예외적으로 노동이 주어진 세계와 풍경으로서 세계가 교차하는 이 그림은 노동자와 세월이라는 노동의 흔적을 지닌 노년의 할머니들의 각기 다른 대상을 통합하는 시도로서 자리한다. 노동과 삶이 같이 있는 이 풍경은 기이하게도 그 둘이 대비되지 않고 따로 또 같이 있다―그러니까 이 그림은 현실적이면서도 현실을 ‘우회’한다. 후자를 “팔보살”로 지칭한 〈팔보살의 여행〉을 참조하면, 나한은 가장 높은 경지에 오른 수행자이지만 보살에 비해서는 낮은 급수다. 여기서 노동은 당면과제에 대한 수행으로 비유되며 일종의 업보의 의미를 띠게 된다.
그런데 이는 결과적으로 노동이라는 당면과제, 곧 노동의 정치성과 분투와 고단함 등의 측면을 희석시키고 삶의 아름다운 풍경으로 승화시키는 것은 아닐까. 물론 그 반대의 차원으로, 곧 그 둘의 이질적인 병치가 자연스러운 것이 됨으로써 노동이 현실로 자연스레 녹아드는 일상 차원의 것임을, 그것이 이상하지 않음을 지시함으로써 사라지고 비가시화되는 노동의 형상을 역설적으로 가시화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노년의 존재들은 최종 반환되며, 단지 노동에 이르는 중간의 매개자로서 기능하는 셈인데, 실제 그들은 세계에 더 몰입하고 예외적으로 그 세계 ‘안’에 있다. 그러니까 비로소 주체로서 세계의 지위를 변경하고 반전시킨다.
따라서 〈개울가의 나한들〉은 노동으로서 죽음과 필연적인 노년의 죽음이 겹쳐지면서 주체의 정동을, 정동을 지닌 주체를 대신/더 부각하게 되고, 따라서 노동은 정치적 수사로서 가능성을, 첨예한 담론상의 위치를 상실하는 것 아닐까. 노동은 삶의 일부이자 당연한 것이 되어버리는 것 아닐까. 따라서 아마도 두 층위의 존재 양식이 절합되는 〈개울가의 나한들〉은 노동의 실재적 의미에서 비유적 의미의 차원으로 향하는, 곧 노동이 존재를 초과함에서 존재가 노동을 함입하는, 노동의 특이성으로서 가시화에서 삶 전체에 대한 주목으로 향하는 과도기적 단계를 증명하고 있는 그림 아닐까.
김민관 편집장
[전시 개요]
전시명 : 개울가의 나한들
작가명: 박은태
전시 기간: 2024.09.09(월) – 2024.10.10(목) *월-토 10:00-18:00 / 일요일 휴관
장소: 경기도 부천시 조마루로 105번길 8-73 대안공간아트포럼리 1F
문의 : artforum.co.kr / artforumrhee@gmail.com T.82(0)32_666_5858
주최/주관 : 대안공간아트포럼리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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