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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회화》: 동시대의 회화성은 어떻게 이행되는가의 질문REVIEW/Visual arts 2026. 5. 13. 20:13
큐레토리얼: 회화의 동시대성을 외부에서 바라보기

《봄 회화》(전시 기획: 서동욱, 양지윤, 이선미) 포스터[사진 제공=대안공간 루프]. “봄 회화”라는 전시명은 크게 작품과 상관되지 않아 보이는데, 이는 그 전의 《겨울 회화》(2024~2025, 대안공간 루프.)에 이은 계열적 차원에서의 기획으로, 봄이라는 시간 특정적 차원의 계절을 수식어 차원으로 차용함으로써 회화라는 매체를 탐색하고 성찰하기 위한 본래의 목적을 봉합한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회화들을 추가적으로 따라붙는 어떤 내용과 이념에 직접 복무시키는 대신, 실재적 대상으로 두고 다루기 위함으로, 회화 자체가 동시대에 갖는 의미를 지시하는 차원에서 큐레이토리얼 실천을 상정한다.
그에 따르면, 회화를 바라보는 외부―“제도와 시장”―의 맥락은 회화가 성립하고 변화하는 어떤 조건과는 독립적이며, 마찬가지로 회화의 내재적 조건 역시 디지털 문명의 차원과 상관되기보다 독립적으로 자리한다. 곧 회화의 ‘원근법으로부터의 이탈’이라는 일종의 ‘동시대적’ 조건은 “매끄러운 디지털 화면”과 조응하기보다 그것에 이질적인 것으로 제시되는데, 양지윤 큐레이터는 이를 저항적이거나 대안적인 무엇으로 두지 않음으로써 거꾸로 회화를 시대로부터 고립시킨다. 또한 회화의 “느린 시간성” 역시 디지털의 “픽셀의 세계”와는 다른 예외적인 것으로 제시된다.
따라서 회화 작가는 시간을 거스르거나 퇴보하여 무언가를 생산하고 있는 특수한 존재가 되는 듯 보이는데, “편집과 수정이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디지털이 재매개된 차원에서 오히려 회화가 이미지의 자의성이나 파편적 이미지들의 집성 방식을 꾀하거나 하는 부분은 디지털 문화의 무의식적 차원과 결부지어 충분히 살펴볼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 또한 양지윤은 회화의 ‘지난’ 시대의 영역으로 지시되는 원근법을 “붓질과 물감이 엉겨 있는 평면 체제”라는 일종의 추상회화적 기법과 (내재적인 차원에서) 대립시키는데, 그것을 다시 디지털적 평면과 (외부적 조건의 차원에서) 대립시키면서 회화가 지닌 예외적 특수성으로서의 동시대성으로 갈음한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자연스레 디지털적 평면은 원근법을 실천하는 것으로 갈음된다. 여기서 디지털 비상관적 차원의 디지털 ‘이후’의 회화의 내재적 조건에 대한 탐구라는 영역 자체가 다소 모호하고 징후적이라고 느껴지는 부분인데, 원근법의 소거 혹은 변형의 전략이 디지털 이전으로 소급된다는 것, 그리고 디지털 문명의 차원을 작가들이 적어도 ‘더’ 고민하거나 반향할 수 있는 가능성이 클 수 있다는 것,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것과 변증법적이거나 도전과 응전의 차원에서 그것을 극복하거나 전유하거나 이탈하는 차원에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매개되지 않기 어렵다라는 것 등이 그러하다.
무엇보다 여전히 원근법적 실천은 여전히 대체로 소구되는 전략―양지윤 스스로 원근법을 깨는 차원에서 그 전략이 의미화되는 것이 (‘여전히’) 가능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원근법 자체가 여전히 의미를 갖는 것이다.―이며, 《봄 회화》의 작업들 역시 추상회화적 견지에서 직접 접근할 수 있는 건 문유소, 강종길 정도이다. 따라서 ‘징후’적인 건 디지털 평면으로부터 회화를 고립시키려는 실은 그럼으로써 그것을 보존, 보호하려는 무의식적 차원이 아닐까. 오히려 디지털적 조건과 다른 무언가를 기입하고 있다는 점에서 회화를 절대화하려는 것은 아닐까.
따라서 회화의 고립과 타자성으로서 회화는 연동되면서 전자에서 후자로 승화되고 있다고 보이는데, 거기에 회화의 특별함에 대한 ‘객관’적인 관찰자의 (무의식적/굴절된) 실천이 있는 것이겠다. 아무튼 전시는 유사하다기보다 ‘다른’, 여러 작가의 회화를 모았다는 점에서 동시대성으로 ‘환원’되는 데 가깝다. 그것은 또한 종합이 아닌 개별적 차원의 추출과 취미적 선택에 의해 전시가 갈음될 수 있음을 의미하며―그것은 일견 회화를 편견 없이 또한 의미를 개입시키지 않고 보는 것처럼 보인다.―, 개별 작업을 살펴보는 것으로써 그것을 수용하고자 한다.
문유소, 구성과 지표 사이에서의 색

《봄 회화》 전시 전경[사진 제공=대안공간 루프]. (사진 좌측부터) 〈그 어디도 아닌 곳 6〉 (2025, 캔버스에 유채 , 193.9×130.3cm.), 〈그 어디도 아닌 곳〉 (2024, 캔버스에 유채 , 162.2×260.6cm.), 문유소의 〈그 어디도 아닌 곳〉(2024, 캔버스에 유채, 162.2×260.6cm.)은 전시에서 가장 큰 회화이자 핸드아웃에서 첫 번째로 기입된 작업이다. 곧 큐레이터의 이념을 보여주는 가장 적실한 예시로 자리하는데, 수평으로 더해 나간 일차 층들에 사선으로 다시 그어나간 층들로써 색의 분절적 조합을 규범적으로 실천해 나간다. 반면, 색과 질감은 일종의 얼룩으로 자의적이거나 복잡한, 비예측적이거나 불가해한 차원으로 상승해 가는데, 이는 보색적 차원의 대비로 부각되는 색상들의 섞임이 배가되는 방식에서 결정되는 부분이다.
그것은 대체로 노랑-(연한) 남색-빨강-청색-빨강-노랑-남색과 같이 중앙의 빨강이 희미하게 개입함에 따라, 엄격한 연속을 보이지는 않지만, 대체로 보색 대비적 활용이며, 고명도의 상단 노란색이 가장 먼저 들어오고, 그 밑으로 내려가면서 대체로 어두워지는데, 이는 중앙의 하얀 수직 층을 기준으로 좌측 1/3 지점 정도까지 해당되며, 나머지 우측은 오히려 그 반대로 적용된다는 인상을 준다. 노랑과 빨강은 하나의 깊은 층 ‘위’에서 그것을 교란하면서 산란되는 인상을 주며, 그에 반해 보라색은 두꺼운 층위로서 안정감, 순일함 같은 환상―깊이의 환영성―을 가져오지만, 실은 그 역시 상대적인 차원이며, 그렇게 두껍게 모든 것들은 그려지지 않은 데 가깝다.
〈그 어디도 아닌 곳 6〉(2025, 캔버스에 유채, 193.9×130.3cm.)은 더 밝고 마치 실크스크린 인쇄물이나 피륙 같다는 인상을 주는데, 회화는 일종의 수직과 수평으로 색을 그저 그 자체로 그어 나가며 캔버스의 질감 자체를 전유하는 실험으로 보이며, 그것이 고명도 색들에 의해 더 두드러져 보이기 때문이다.
강종길, 리듬과 시간의 선

강종길, 〈 날아간 공 〉 (2024, 캔버스에 유채 , 90.6×65.1cm.) 강종길의 〈날아간 공〉(2024, 캔버스에 유채, 90.6×65.1cm.)은 문유소에게서 결정적으로 두드러지는 사선의 틀을 이전하는 관점에서, 그 옆에 전시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하나의 톤으로 조정되며, 질감을 드러내지 않는 투명하고 매끈한 선분들로써 구축된다. 따라서 회화에 얽히지 않으면서 그 투명한 형상으로서 회화를 들여다볼 수 있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이 사선의 선분들이 자의적으로 축적되는 것 같다가, 우측 하단에 이르러서는 하나의 원, 곧 “공”으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강종길은 즉물적인 사건에 대한 대응, 반향으로서 무언가를 그리는데, 이는 곡선을 그리는 사선에서 휘말리며 원으로 결정되는 결과로써 이전의, 나머지의 것들을 모두 운동의 효과로 뒤바꾼다. 좌측 상단에서 내려오던 그림은 우측 하단에 이르러서 다시 우측 상단의 사선으로 이어지며 커다란 원의 반경을 구성하는 데 이른다.
이는 다시 소품인 〈구음풍경 [어기야 어야]〉(2025, 캔버스에 유채, 22.7×15.8cm.)에서는 결정되지 않는 사선의 선분들로 대체되는데, 그것은 사선의 방향성 아래, 순수한 색의 대비로 점철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제목과 같이 그것은 일종의 시간 차원으로 적층되는 소리의 차이들을 결정짓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는 거리를 두고 설치된, 네 개의 작업 중에서, 〈구음풍경 [어기야 어야〉(2025, 캔버스에 유채, 22.7×15.8cm.)와 가장 상관된다. 반면, 후자는 조금 더 모호하고 흐릿하게 경계 지어진다.

《봄 회화》 전시 전경[사진 제공=대안공간 루프](이하 상동). (사진 왼쪽부터) 〈구음풍경 [둥둥두루]〉(2026, 캔버스에 유채, 90.9×60.6cm.), 〈구음풍경 [삐드득]〉(2025, 캔버스에 유채, 90.6×60.6cm.), 〈구멍뚫린, 구부러진, 구겨진 풍경〉(2024, 캔버스에 유채, 162.2×112.1cm.) 색의 혼합적 지층은 〈구음풍경 [둥둥두루]〉(2026, 캔버스에 유채, 90.9×60.6cm.)와 〈구음풍경 [삐드득]〉(2025, 캔버스에 유채, 90.6×60.6cm.)에서 색의 결정들로 변화하는데, 그것은 그야말로 색의 혼합 대신, 명확한 개별 지층들의 대비로서 드러나며, 여기서 소리는 그 같은 색의 대비와 분명한 선분으로써 더 선명해지는 특히 노란색과 파란색의 대비보다 흰색과 파란색의 대비―배경색으로 침전되는 노란색 위에서의―가 명쾌하고 생기롭게 제시되는데, 그러한 단순한 역동적 동세로써 음악적 힘에 접근하고자 하는 것이다.
반면, 〈구멍뚫린, 구부러진, 구겨진 풍경〉(2024, 캔버스에 유채, 162.2×112.1cm.)은 일정한 저채도의 색조라는 지점에서 〈날아간 공〉과 상관되는데, 또한 하단에 원형의 결정이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풍경”은 시적 차원에서 공통성으로 추출되는 은유들에 의해 수식되는데, 그 문학적 공간이 열어내는 것처럼 다양한 형식들이 그 수 이상으로 공존하며, 복잡해지고 덜 명확해진다.
약간 우측으로 치우친 중앙의 초록색 올가미가 위아래로 놓이는 것, 중앙을 기준으로 위쪽으로 2/3쯤 되며 좌측에 수평으로 연이어 놓인 ㅅ자 비슷한 기호들이 얕은 심도를 통해 즉자적으로 식별되는 구멍을 지시하는 듯 보인다면, “구부러진”은 사선과 상대되는 차원으로 원형으로 비틀어진 선분들을 지정하는 듯 보인다. 반면, “구겨진”은 차원적인 것으로, 배경 층과 그 위에 나타난 형상 층 사이의 어떤 깊이가 전자로써 가려지고 왜곡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듯 보인다―그리고 그로 인해 결정적으로 회화는 모호해진다.
이즈코, 원근법 위에 달라붙는 대상들

(사진 오른쪽부터) 〈J-D 북구 죽장면-하옥계곡-선녀탕 #A〉(2025, 캔버스에 유채, 181.8×227.3cm.), 〈J-D 죽장면 상옥계곡·마을 맨 끝-나무 대문으로 #A〉(2024, 캔버스에 유채, 181.8×227.3cm.). 이코즈의 작업은 〈J-D 북구 죽장면-하옥계곡-선녀탕 #A〉(2025, 캔버스에 유채, 181.8×227.3cm.)를 기준으로 좌우로 동명의 회화와 그 바탕이 된 드로잉이 놓인다. 각각 〈J-D 죽장면 상옥계곡·마을 맨 끝-나무 대문으로 #A〉(2024, 캔버스에 유채, 181.8×227.3cm.)와 〈J-D 죽장면 상옥계곡-마을 맨 끝-나무 대문으로〉(2024, 종이에 연필, 14.7×19.5cm.) / 44.5×35.5cm.)로, 드로잉은 다양한 버전으로 재번안될 수 있음을 제목 끝에 붙은 수식이 드러낸다.
〈J-D 죽장면 상옥계곡·마을 맨 끝-나무 대문으로 #A〉는 일종의 추상화된 위상 공간 아래, 다층위의 레이어와 사물, 존재 등이 주어지며, 이는 포토샵상의 펜툴이나 올가미툴로 특정 곡선의 휘어짐으로 재영역화, 재분절되는 레이어의 변경적 차원을 상기시킨다. 중앙을 기점으로 좁아지는 사선들과 작아지는 형상으로 인해 투시도를 함입하고 있으며, 또한 이는 가의 존재와 맞물려서 시선의 깊이로 이전된다. 깊이를 지닌 3차원의 평면과 개별적 층위의 다름으로서 2차원의 평면들이 혼합되는 이 같은 위상 공간은, 일정한 사선의 틀 아래 부속됨으로써 명료해지는 〈J-D 북구 죽장면-하옥계곡-선녀탕 #A〉에 비해 복잡하고 해소되지 않는 긴장을 안고 있다.
반면, 〈J-D 북구 죽장면-하옥계곡-선녀탕 #A〉은 색면 공간의 레이어들로 뚜렷하게 분절되며 자리잡는 가운데, 일종의 문양들의 합성으로서 이미지화된다. 반면, 입체감을 얻게 되는 건 앞을 사선이나 옆으로 보는 얼굴들이며, 특히 우측 상단의 옆얼굴은 전체 이미지를 하나의 배경으로 조작한다.

〈J-D 죽장면 상옥계곡-마을 맨 끝-나무 대문으로〉(2024, 종이에 연필, 14.7×19.5cm.) / 44.5×35.5cm.) 그럼에도 이때 대각선을 기준으로 위쪽은 뭉친 무늬로 인해 ‘무겁고’ 아래쪽은 ‘불안정한’ 느낌을 주는데, 상단 오른쪽으로 그 무늬가 내려오며 얼굴을 침투하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 그 아래쪽 하단의 정면을 보는 얼굴은 그 비어진 배경으로부터 자율성보다 특별함을 획득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실존적 의미와 배경 차원의 물질적 토대로서 구체성을 맞세운 것이면서 동시에 그 앞선 침투의 색과 동일한 색의 얼굴을 그 옆에 둠으로써 정면성의 얼굴은 불순한 것의 침투를 실재적 의미로 변용하는 동시에 소급적 교환을 통해 앞선 옆얼굴의 형상을 재정의한다.
그리고 그것은 최종 중앙 아래쪽으로 대각선과 맞물려 구성된 작은 삼각형 안의 또 다른 정면성의 얼굴로 결정된다. 이 변증법적 절차 혹은 시차적 경로를 따라, 충만함과 비워짐의 두 대립된 도식의 불균형성이 마무리된다. 그런데 이 정면의 주체는 〈J-D 죽장면 상옥계곡·마을 맨끝-나무 대문으로 #A〉과 매우 유사하다. 곧 위치는 달라졌지만 좌측 모서리 부근의 얼굴이 중앙부를 향한 곧 원근법적 대상을 최종 승인하는 결정적 주체의 응시를 조직한다면, 우측 모서리의 반쯤 가려진 얼굴은 타자성의 형상을 띤 정면의 응시로서 원근법의 매개 없이 직접 제시된다―그것은 모호하고도 알 수 없는 일종의 타대상과도 같다.
김민조, 실재에의 유혹

《봄 회화》 전시 전경[사진 제공=대안공간 루프]. 김민조는 불가능성의 사실임 직함 같은 걸 그리는데, 〈곡예 비행〉(2023, 캔버스에 유채, 130×162cm.)은 사실 두 대의 뒤집힌 비행기가 하나로 연결된 기이한 순간을 현상한다. 곧 오른쪽 비행기의 앞쪽 날개인 에일러론이 왼쪽 비행기의 꼬리 날개인 엘리베이터를 뚫고 간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이는 두 비행기 모두 오른쪽 엘리베이터가 보이지 않는 각도로 평행하게 배열되는 가운데, 오른쪽 비행기의 왼편 앞쪽 날개와 왼쪽 비행기의 왼편 꼬리 날개로 이어지면서 동시에 오른쪽 비행기의 왼편 꼬리 날개와 수평으로 놓이고, 또한 두 비행기의 러너 두 개가 거의 연이어 수직으로 놓이는 가운데 왼편의 러너가 오른편의 몸체로 ‘흡수’되면서 두 비행기는 분간이 힘든 정도로 이미지상으로 맞물리게 된다.
그런데 그림에 어떤 과잉적 보족물이 침투하면서 이 혼동에 대한 부분을 실재의 연결로서 갈음한다. 곧 두 개의 러너는 하나의 얇은 끈으로 칭칭 둘렀으며, 그것은 그 둘을 종속시키지 않고 딱 그 만큼의 거리만을 기이하게도 ‘보존’한다.
또 다른 작업 〈과녁의 당신〉(2025, 캔버스에 유채, 색연필, 130×130cm.)은 그것이 위치상으로 마주하는 〈모래성〉(2025, 캔버스에 유채, 색연필, 97×145cm.)과 내통하는데, 대형 안테나 타워의 파라볼라 안테나와 철골 구조가 배가되고 마치 증식된 것처럼 보이는 〈과녁의 당신〉은 그 안테나를 “과녁”으로 비유한다. 또한 그것이 연장된 차원에서 “당신”으로서 비유함으로써 복잡한 철골 구조와 전깃줄이 일종의 분열적이고 혼란스러운 정신의 차원으로 또는 비대한 신체의 심리적 과잉 상태로 치환되는 듯 보인다.

김민조, 〈과녁의 당신〉 (2025, 캔버스에 유채 , 색연필 , 130×130cm. 〈모래성〉은 앙각의 시점으로 중앙부 위쪽의 다각형의 상단 지지대와 그 위의 철제 발판을 거쳐 상단에만 소수의 안테나를 향하는 조형적으로도 시점적으로도 ‘치우친’ 형상을 보여주는데, 이는 분명하고 단단한 구조와 대비되는 “모래성”으로 명명되면서, 비가시화된 하단부와 함께 문명 자체에 대한 비판적이거나 회의적인 차원의 은유가 작동한다고 보인다. 〈우는 배〉(2021, 캔버스에 유채, 91×117cm.)는 앞선 원형의 과녁이 외부의 표지이자 내부의 구멍으로 이중 기입되며 역시 사물에 심리적 제스처를 부여한다.
곧 한가운데 놓인 거대한 U자형 플로팅 독의 네 개의 구멍에서 가장 상단과 하단으로 새어나오는 물은 제목에 따르면, ‘눈물’로, 우측에 그보다 크고 상대적으로 아주 얇은 일종의 부표 기능을 하는 원형 구조물들이 옆으로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이는 곧 외부의 원형 과녁이 독립적으로 외재화된 형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보다 더 특이한 실재는 구멍들 옆으로 플로팅 독의 U자로 튀어나온 두 모서리에서 아래로 갈수록 좁아지는 구멍에서 특히 오른쪽 그 구멍이 마치 양의 얼굴 같은 재현적 형상의 얼룩으로 묻어 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또) 다른 구멍일 뿐이지만, 원형을 벗어나면서 기이하게도 얼굴로 보이며, 눈물에 대한 존재의 위치를 봉합하는 환상물로 보인다―이는 시선이 마지막으로 도착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문주혜, 환상성의 프레임

《봄 회화》 전시 전경[사진 제공=대안공간 루프]. (사진 상단부터) 〈Angelica〉(2026, 장지에 채색, 40×10×2cm.), 〈호수〉(2026, 카펫, 160×160cm.). 문주혜의 작업들은 환상성이 두드러지는데, 그것은 구상적 층위이기는 하지만 유기적인 세계에 대한 재현으로서 기능하는 대신에, 일종의 장식적 차원으로 부가되는 이미지 파편들(의 배치)로(써 구획되면)서 일정한 종교적 의미에서의 의례적 차원을 확보하는 것으로 보인다. 〈호수〉(2026, 카펫, 160×160cm.)와 〈Angelica〉(2026, 장지에 채색, 40×10×2cm.)는 연속적으로 설치되며 하나의 작업을 이룬다.
〈호수〉가 호수로서 이미지를 카펫의 장식으로 치환하는 가운데, 모서리의 네 꼭지점에 몸을 만 세 개의 토끼와 하나의 다람쥐 문양, 그리고 붉은색 배경과 검은색 무늬로 된, 날아가는 새의 반복된 도상들의 한 모서리와 하나로 이어진 식물의 줄기의 한 모서리가 각각 자신을 마주하며 네 개의 옆면으로 배가되는, 그 가운데에 호수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그것은 얼핏 옆면의 2차원 이미지와의 대비를 통해 이미지의 인공성 대신에 더 깊이를 가진 대상으로 신비화되는 면모가 있다.
반면, 〈잠든 곳〉(2026, 장지에 채색, 33×53cm.)은 수직 낙하하는 새의 ‘장식’―도상―들이 고명도로 인해 왼쪽 절반을 가로채는데, 실은 그 바깥으로 가의 삼면을 잇는 음영을 가진 노란색(황금색) 무늬들은 2/3 이상의 검은 바탕의 심도 없음과 대응해 공간의 깊이를 수여한다. 그리고 바탕의 1/3인 상단은 이 두 장식/무늬에 대응하는 노란색~빨간색~검은색의 점진적 변용 상태 안에 있다. 그리고 후자의 바탕 위에서는 빨간색 무늬 역시 공간감을 획득하고 있다.
실질적으로 이상하지 않은 공간은 검은색 바탕-노란색 장식과 노란색~빨간색 바탕-빨간색 장식, 빨간색~검은색 바탕-노란색 장식이 겹쳐지는 부분이다. 그 외에는 무늬는 그 위에 떠 있다. 곧 무늬/장식의 환상성은 실제의 영향 관계 없이 실재화되는 지점들에서 기인하며, 3차원의 배경에 2차원의 이미지를 부착함으로써 그 환상성을 ‘경계’의 차원에서 작동시킨다. 그럼으로써 그 환상성에 사로잡히게 된다.
〈Morning Coffee〉(2024, 장지에 채색, 145.5×89.4cm.)와 〈Night bow〉(2024, 장지에 채색, 145.5×89.4cm.)는 프레임적 실험을 한다는 점에서 앞선 〈호수〉와 유사한데, 각종 도상들은 상상적 풍경을 구성하는 가운데 얽히고설켜 환상성을 만든다, 동시에 불가능한 현실을 만들면서 자율적 유희의 차원에서 각각의 개체로 수렴한다. 도상은 현실 가치를 띠지만, 그것이 합성되는 이미지의 차원에서 그것은 하나의 화면에 투여되고 ‘증여’된다. 그러니까 이미지들의 제단화로서 두 그림은 격상되는데, 그것은 일종의 이미지들이 제의적인 차원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액자 틀 안에 중하단으로 좌측과 우측으로 두 사슴이 서로를 향해 있고, 그 위에 초를 담은 쇠사슬 손잡이가 연결된 쇠 촛대가 하나씩 있으며, 중앙부 위, 아래로 커피가 담긴 커피 잔, 복숭아가 놓인다. 특히 문제로 불거지는 건 커피 잔인데, 회색 땅 위에 사슴이 놓인다면, 그 너머에 바다, 그 위에 석양이 있고, 그 석양 위에 커피 잔이 ‘부착’됨으로써 또는 튀어나옴으로써 이미지 질서가 이지러진다. 그것은 다시 아래 복숭아와 대응하고, 그 중앙에 빨간색 테두리의 노란색 별 도상을 지지해 내면서 각축된 도상들의 자율성으로 연장된다.
여기에 사슴-촛대 한 쌍을 ‘덮는’ 구불구불한 포장 끈의 공중 위의 역동적 펼쳐짐이 있는데, 이는 파란색으로 바다의 색감과 유사성을 획득하면서 당위를 얻는다. 이 포장 끈 위에 앞선 별 도상이 부착됨으로써, 이미지들을 하나의 포장지로 수렴시킨다. 그러니까 이 별 스티커는 비현실적인 이미지들이 실은 일종의 디지털 화면의 여러 이미지를 일정한 배치의 질서 아래 자의적으로 합성한 그 ‘하나의’ 화면의 이미지들임을 지시하면서, 그 이미지 ‘위에’ 부착됨으로써 그 ‘속’의 이미지를 하나의 포장지로서 출력해 내며 독립적인 최종 기표로 전도된다.
그 외에 좌우 가의 틀에는 각각 위로부터 세 개의 원형 틀이 부착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각기 다른 화면이 자리한다. 이는 틀의 경계에 자리함으로써 틀의 안쪽으로 연장해 가는 전체 그림에서 반절쯤 잘려 나가며 눈에 띄게 존재감을 상실하는데, 이는 그것들이 독립적인 이미지로서 자리하는 데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이는 프레임 안의 도상들이 복잡하고 정신분열증적으로 산란됨에도 실은 하나의 질서 안에 자리 잡는다는 걸 더 또렷하게 보여주는 초점의 근거로 기능한다.
물론 그건 임시적이고 일시적인 ‘강제’로, 그 옆의 별 스티커와 경합한다. 무엇이 최종으로 위치하는가, 곧 최종적인 승자인가 하면, 별은 불완전한데, 그건 안쪽 공간 안에서 그것이 그 여분의 것들을 이미지로 만드는 가운데 그 스스로 거기에 얽히기 때문이다. 곧 안쪽 공간 안에 그것 역시 속하며, 따라서 여섯 개의 바깥쪽 패널은 이 프레임 바깥의 보이지 않는 현실의 실재와‘같이’ 놓이는 대상으로, 그 프레임 안쪽의 환영감을 ‘바깥에서’ 즐기는 별도의 주체를 은밀하게 잠재한다.
박시원, 눈-존재의 어떤 정동

박시원의 작업들은 대개 눈-(비)인간의 여러 변주이며, 이는 여러 크기의 주로 종이, 그리고 캔버스에서 실험된다. 가령 〈흔들리는 보리 속에서〉(2022, 캔버스에 유채, 97×145.5cm.)는 벼-인간이며 벼의 낟알 하나하나가 눈알 하나에 해당한다. 그것은 낟알의 자리에 치환된 눈알이자 낟알을 의태하는 혹은 낟알로 위장하는 눈알이다. 이 과잉된 눈알의 존재는 혐오감을 주는데, 그것이 우리를 너무 많은 파편으로 담아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다행히도’ 우에서 좌로 이동 중인데, 오른쪽에서 1/3 지점에서 하나가 정면을 응시함으로써, 그것에 포획된다는 공포나 두려움을 준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 결정될지 알 수 없는데, 분명 우리는 절편이 되며 초과되고 기이하게 굴절되는데, 그것이 그에게는 이상한 것이 아닌 것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이미지를 ‘종합’해낼 것이라 우리는 전제하는데, 실은 어떤 것도 분명하지는 않다. 그것들이 식물이라는 지점은 연한 파란색 혹은 남색의 머리와 결합된 그 초록색 신체 또는 연한 파란색 신체로부터 드러나는 반면, 그 아래 그림의 1/3쯤 되는 지표면은 거무죽죽한 점성을 갖춘 핏빛 형상―붉은 강처럼 보이기도 한다.―이고, 그 위쪽 2/3쯤 되는 대기 역시 빨간색-분홍색의 점진적 단계에 걸쳐져 있다.
따라서 동물적 신체로부터 무언가가 배경으로 추출되었다는 인상을 주는데, 그것은 그들과 대립되면서 그들이 소구하는 것이 또는 그들이 갖지 못한 부분, 곧 ‘피’가 외부적 차원에서 더해졌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니까 그들이 가볍게 밟고 가는 건 동물을 그들이 뛰어넘었다라는 것, 혹은 지배한다라는 것을 의미하는 듯 보이는데, 아무래도 이 ‘무거운’ 땅의 육신이 이질적인 다른 신체들에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한 채 이화되는 것이다.
이 벼-인간은 〈우리 같이 행복을 나누자〉(2023, 종이에 채색, 24.3×33.5cm.)에서는 해바라기-인간과 손잡고 있으며, 〈순간의 두려움〉(2025, 중이에 채색, 24.3×33.5cm.)에서는 오른쪽에서 잘려나간 그들보다 더 큰, 배께에 잎사귀 털이 덮인, 두 발가락의 갈색 신체로부터 쫓기는데 그때 그와 가장 가까운 쪽에 멈춘 한 존재는 머리를 왼쪽으로 기울여 그쪽으로 튼다. 거기에는 공포 혹은 두려움이 있을까. 그렇다면 이 주체는 〈흔들리는 보리 속에서〉에 하나의 대상을 더함으로써 우리의 공포를 다시 안쪽으로 전도시키는 기능을 한다. 하지만 그것은 반쯤 비틀려 있고, 호기심과 친화적 토대를 마련하는 것 같은 모호함 속에 놓인다.
〈너희 나라_날아라〉(2021, 캔버스에 유채, 실, 72×60cm.)에서는 왼쪽부터 포충잎 눈-존재/열매 눈-존재/도마뱀 몸통 눈-존재, 꽃 눈-존재, 나무 눈-존재 등이 자리한다. 제목은 그들은 이질적 존재인 “너희”로 구분 짓는데, “나라”와 “날아라”의 어감이 비슷한 상태의 언어 유희적 문법 아래, “날아라”는 열매 눈-존재에게만 해당되어 적용되는 듯 보이는데, 꽃 눈-존재 역시 잎이 날개처럼 형상화되어 있다. 이런 요청어로서 관념이 부분에만 해당하는 가운데, 식물의 불가능성 너머에서 염원이 투여된다고 보인다.

〈너희 나라_무지개 다리를 건너서〉(2021, 캔버스에 아크릴, 실, 91×117cm.). 〈너희 나라_무지개 다리를 건너서〉(2021, 캔버스에 아크릴, 실, 91×117cm.)는 또 하나의 가장 큰 작품으로, 화면을 사선 방향으로 가로지르며 포물선을 이룬 무지개의 왼쪽 부근에 달린 한 쌍의 눈이 강조된다. 그 아래로 발이 있고, 구름 눈-존재를 밟고 있다. 그것이 일종의 천장 구조물이 되어 그 위에서 핏빛 비를 눈물인 양 쏟아내는 남색 신체의 구름 눈-존재로부터, 초록 연잎 눈-존재를 방석 삼아 앉은 해바라기 눈-존재의 보호막이 되어주고 있다.
무지개 눈-존재는 거의 질감 없이 투여된 진한/짙은 색의 향연―예외적인 아크릴 사용으로 인한 발색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으로 인해 키치하고 유치한 인상을 예외적으로 강화하며 작품 전체의 인상을 결정짓는데, 이는 “무지개 다리”라는 일종의 강조되는 지지체로서 그것이 그것을 건너는 주체에게 어떤 강도를 획득해 내야 하기 때문에 필연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딴딴하고 균열 없기 때문에 지지체 기능을 하지만 도리어 과잉된 차원으로 중심적 위상을 차지하며 주체의 곤궁을 구성(하고, 따라서 어떤 시련과 그것을 이겨냈으면 하는 염원이 또한 발생)한다.
〈달콤한 휴식을 찾아〉(2026, 종이에 채색, 90.5×72.5cm.)는 삼원법을 사용한 동양의 풍경화 같은 인상을 준다는 점에서 독특한 위상을 차지하는데, 산세로 연속되는 나무줄기 눈-뿌리 신체의 존재가 마치 산 자체로 위장하는 형상이라면, 중앙부의 산 사이로 나는 자주색 꽃 눈-곤충은 환상적인 이미지로 분하면서 사방의 그 나무-존재들의 응시의 초점이 된다. 이는 그것이 허공 위에 떠 있지만, 난다기보다 빈 배경에 부착된 느낌이라는 점에서 특이하고 예외적인 위상을 차지하는데, 그리고 낮고 은은한 배색 가운데, 예외적으로 고명도이고 붉은색으로 빛을 뿜어댄다. “달콤한 휴식”은 그 자체의 몫이지만, 실은 다른 것들의 부러움과 위협 가운데 놓인다는 점에서, “찾아”는 완성되지 않은 의미를 띤다.
회화: 디지털적인, 재매개되는, 상상적인
결과적으로, 《봄 회화》는 다섯 명의 회화 작가가 모두 다른 형식과 표현을 구사하며, 그것들은 각기 다른 회화성을 획득한다. 이때 회화의 ‘외부’로 상정되는 디지털적인 것은 회화의 응전의 대상이 되어 도리어 회화의 중핵을 차지하게 되기도 하는데, 그것은 회화가 디지털 환경을 지지체로 삼는 것이 아니라 재현함에 있어서 그것을 불가능한 실재의 차원으로 접근하게 됨을 의미한다. 가령 문주혜가 “종교화”와 “게임”을 뒤섞는 가운데, 풍경의 가상성을 실재의 틀 안으로 수렴시킴으로써 인터페이스로서 화면 자체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디지털적 실재는 회화의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봄 회화》 전시 전경[사진 제공=대안공간 루프]. 극단적 차이로서, 문유소는 추상회화처럼 보이지만, 일종의 2차적 평면 틀과 그 위에서 여러 색상의 피륙을 짜는 구성적 차원의 질서를 향하면서 자의성과 우연성을 틀 안에서 꾀어낸다는 점에서, 그래픽과 유사해지는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매끄러운 디지털 화면 반대편에 있기보다 그 연장선상에서 유사성을 획득할 수 있는 부분 아닐까. 강종길의 작업 역시 추상회화이지만, 그것은 회화적 차원이 형상의 구체성을 획득하는 예외적 지점을 실험하는 차원에서 근본적으로 뒤집히기도 한다. 또한 시간성의 매체를 역시 불가능성의 대상으로 삼음에 따라 회화의 내적 층위의 시간적 질서는 조형적인 3차원의 공간성 안에 조각적인 무엇이 된다.
이즈코의 작업은 원근법을 하나의 형식, 틀로서 가시화하는데, 그것은 원근법 아래 잠겨 있는 사물들이 아니라 원근법으로써 재표식되는 사물들의 배열로서 갈음된다. 그 구획된 이미지들의 층차는 일부 자율적인 드로잉의 실험을 담고 있기도 한데, 그것은 그 경계를 넘지 못하는 질서 아래에서, 과잉의 힘으로 불거진다. 원근법은 과잉의 실재를 도출하는 신경증적 경계로 작용하며, 원근법의 시초가 되는 시선을 가진 존재들은 마치 그것으로부터 짓눌리거나(〈J-D 북구 죽장면-하옥계곡-선녀탕 #A〉) 소실점으로부터 살짝 비틀린 채 있다(〈J-D 죽장면 상옥계곡·마을 맨 끝-나무 대문으로 #A〉). 그러니까 원근법은 어떤 틀로서, 과잉 혹은 초과되는 신체를 산출한다.

김민조, 〈 우는 배 〉 (2021, 캔버스에 유채 , 91×117cm.). 김민조는 현실을 의태하지만, 그 현실이 초과된 것이거나 불완전하거나 불길한 무엇으로 나타나며, 그것은 현실에 대한 주체의 심리적 차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상은 도시 문명의 어떤 부수물들 같은 것들이며, 우리가 다룰 수 없는 거대한 장치나 구조체 같은 것들이다. 결과적으로 작가가 창안하는 현실은 우리를 감싸고 있는 것들이며, 그것이 최종 도착하는 지점은 그 대상들이 실재화될 때 재현의 위기를 초래한다는 것을 드러낸다는 사실이다. 이 기형적 이미지의 창출은 회화의 위기에 대한 소산이 아니라 회화적 위기 자체―더 이상 어떤 대상이든 특이하지 않게 되었을 때―에 대한 회화적 포착과 그 역량을 반증한다.
그것은 철저히 현실로부터 비틀려 있지만, 그 현실의 틈은 디지털적 변형의 세계와의 어떤 틈을 형성해 낸다. 그리고 그 후자의 틈이 다시 회화가 재매개될 수 있는 진정한 가능성이겠다. 끝으로, 박시원의 작업은 가상적 세계관 아래 아상블라주된 그럴 듯한 대상들을 창안하는데, 이러한 세계의 비일상적이고 주변에 대한 기이한, 굴절된 상상력의 일환은, 양지윤의 말을 따른다면, 동시대의 첨예한 현실로부터 “주변화된” 타대상으로, “사회적 맥락과 분리된 낭만적 예술 형식”을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가리키는 듯 보인다.
그러니까 그것의 재매개는, 곧 “동시대 감각과 여러 층위의 사회 조건이 상호작용하는 비평적 매체로서 회화의 가능성”은 어떻게 획득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비인간 존재에 대한 관념 자체의 중요성을 구체적으로 전이하며 실재의 이미지로 구성함으로써 관념에서 벗어나며 실물적 차원을 상기시키는 차원에서 그 가능성을 얻는 것일까. 아니면 반대로 폐쇄적 회화의 동력 자체가 실은 진정한 시대착오적인 차원으로, 마지막 남은 기이한 상상계의 영역을 차지하며 현실의 예외적인 위상으로 반전될 수 있기 때문은 아닐까. 오히려 그 후자의 가능성 차원에서, 회화의 가능성을 추출해 보는 것 역시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부분은, 곧 이 전시의 큐레토리얼이 역설적으로 가시화하는, 그 느슨한/포괄적 종합의 차원에서 쉬이 빠져나가는 회화의 진정한 일면일지도 모르겠다.
김민관 편집장
[전시 개요]
봄 회화 Painting in Spring
참여 작가: 강종길, 김민조, 문유소, 문주혜, 박시원, 이코즈
오프닝: 2026년 4월 4일(토) 오후 5시
전시 기간: 2026년 4월 4일(화) - 2026년 5월 2일(토)
전시 장소: 대안공간 루프 (서울 중구 청계천로 172-1 3층)
전시 기획: 서동욱, 양지윤, 이선미
전시 협력: 노충현, 이강욱, 이제, 정주영
어시스턴트 큐레이터: 김은서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시각예술창작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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