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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 SPAF] 얀 마르텐스, 〈도그 데이즈, 오버 2.0〉: 몸이라는 착각 혹은 의무
    REVIEW/Visual arts 2026. 5. 18. 19:55

    얀 마르텐스, 〈도그 데이즈, 오버 2.0〉[사진 제공=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이하 상동).

    얀 마르텐스의 〈도그 데이즈, 오버 2.0〉(이하 〈도그 데이즈〉)은 브라 톱과 쇼트 팬츠, 레오타드, 크롭티, 네온 컬러의 레깅스 등의 의상을 입은 채 무릎을 굴신하여 앞뒤로 점프하는 발 구름 동작을 하나의 ‘토대’로 두고 그야말로 공연 전체를 거의 일관되게 관통하는데, 이는 흔들리면서 정확한 몸의 지층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자세는 제자리이면서 그렇지 않은, 나아가지만 다시 소급되는 몸의 정형된 기억을, 고착된 체계 아래 종속되면서 그것의 틈새를 찾아내는 것이 관건인데, 그것은 집단적 대열을 재정비하며 그리하여 유지하는 차원에서, 후반에는 그 틈새 자체로부터 집단을 재배열하는 것으로 나아가면서 그 체계 자체를 전복하게 된다.

     

    따라서 〈도그 데이즈〉은 집단 체계 아래 종속된 개체들의 프로토타입으로서 안무적 실천의 강박적 떠안음이 어떻게 균열을 가져오는지를 질문한다는 점에서, 변증법적 변화와 각성의 서사를 동력으로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반복적인 몸의 행동이, 소진의 순간을 향해 기어코 포착하려는 상부의 압력이 하부구조의 균열과 무너짐을 야기하여 안무되지 않은 초과의 영역을 낳게 됨이 몸의 내재적 차원에서 수렴되는 차원에서, 물론 이는 드라마적 가상의 차원이 아닌 즉물적인 차원으로 구현된다.

     

    이 과잉을 추출하기 위해 우리는 과도함의 단계를 반드시 넘어서야 하는데, 차이와 반복의 더디고 지루한 흐름이 계속 되찾아옴을 겪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필연적인/자연스러운 몸의 소진을 위해 안무의 실천은 더욱 강박적인 것이 되어야 하는데, 자기 한계를 더 적극적으로 추구해야만 뒤늦은 정확한 시점에 서사적 변환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완벽한 집단의 구성원인 듯 보이는 개체들이 마치 미처 의식할 수 없는 순간, 그 움직임을 놓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이탈의 순간, 스스로를 놓아 버리며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선택하는 것 같은 순간, 자신을 엄격하게 제어하지 못하는 그 순간은, 물론 예정된 것이고, 나아가 계획된 것이지만, 이 몸이 뒤바뀌는 지점은 대단히 허무하며 또 우스꽝스러운데, 이 프로토콜을 떨쳐버리는 과정에서 개체는 상징체계의 결여를 증명하는 순간, 오로지 실패한 주체로서 그 오점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비자발적인 이탈은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적 몸부림이며 의지이다. 그리고 이 순간 ‘변화를’ 분명 감지한다. 그것은 상징계적 경로의 결락이 뒤늦게 인지되는 어떤 효과와도 같기 때문이다.

     

    〈도그 데이즈〉은 하나의 몸짓을 거의 공연 내내 반복하다 변화를 주는 구문론적 안무의 차원에서, 아르민 호크미의 〈쉬라즈〉를 떠올리게 하는데, 〈쉬라즈〉가 몸짓의 순전한 완성에 모든 것이 걸려 있다면, 〈도그 데이즈〉는 그 몸짓이 작동하는 원리에 대한 물음, 더 정확히는 분열 아래 그 몸짓을 동원한다. 따라서 우리는 〈쉬라즈〉에서는 달리 어떤 게임의 법칙이 내재적으로 체현되는 것이 아니라,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시험되고 있음을 알고서 이를 본다. 그것은 일종의 진지한 농담과도 같은 것이다.

     

    〈도그 데이즈〉의 대열적 집단은 그 안에서의 미세 조정, 곧 모두가 일관된 점프를 하더라도 어떤 방향적 혹은 형태적 차원에서 대열 안에서 차이를 발생시킬 수 있어야 하는데, 여기서 한 명의 틈이 발생하는데, 이는 규칙을 온전히 지키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가운데서도 하나의 대원칙을 그가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때 그의 실질적 행위 바깥에서 그 원칙이 틈새로 발견되는데, 이는 그가 일종의 시늉으로서 그 원칙을 가져가고 있다는 차원에서 그러하다. 이런 균열은 초기부터 예고되었던 바로, 그 이탈의 거의 최초의 틈은 아마도 뒷열의 한 남자 무용수의 이탈과 보존의 종합을, 집단이 무대 하수 안쪽을 향하는 가운데, 의도적으로 노출하고 있다는 점에 의해, 분명하게 주제를 드러낸다.

     

    〈도그 데이즈〉의 움직임들이 계속해서 1(+)+1(-)+1(-)의 보법(+는 전진, -는 후진의 얕은 점프)을 가져가는 가운데, 변화를 추구한다는 점은 실상 어떤 구조적 토대의 변하지 않음을 역설하는 것에 가깝다는 점에서, 더 큰 변화, 곧 공간 자체의 변화가 요청되기 시작하는데, 이는 처음에 음악의 도입에 의해 온다. 음악은 그들을 직접 타격하기보다 마치 불순물처럼 새어 들어오는데, 이 음악적 틈새는 온전히 이들을 뒤덮으려는 순간 오히려 그들 자신‘의’ 불순물인 것처럼 전도된다. “Ha!” 새어 나오는 소리가 그것으로, 결과적으로 앞선 음악은 이전까지의 그들의 자동반사적 차원의 행위에서 막혀 있던 그 숨을 선취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또는 전체의 휴지 구간으로부터 그 틀을 집단적 전제로 드러내기도 하는데, 이는 규칙의 배제나 예외와는 거리가 먼데, 곧 정면성을 가짐으로써 그들을 온전한 관찰 대상으로 두기 힘든 지점에서 그 규칙의 공고함을 오히려 관객에게 전가한다. 그것은 그렇게 다시 시작되고, 제각각의 분절을 수행하는 것으로 변화하며 복잡해진다기보다 모호해지는데, 이는 하나의 리듬 구문이라는 전제에 종속당하면서 어떤 ‘질서’를 잃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곧 이는 완전한 자율성의 차원보다는 무질서적으로 방기된 개체들에 가깝다.

     

    이 이후부터, 이들은 연이어지는 숫자들을 세며(counting) 움직이기 시작하는 처음의 원칙을 고수하는 것에서 나아가, 자신이 하는 동작 하나하나까지를 지정하며 동시에 전파되는 것으로써, 오히려 처음보다 많은 정보 값을 더하는데, 이는 이미 많은 시간이 흐른 가운데 의식(意識)을 재점화하는 일종의 의식(儀式)으로, 마치 모든 것은 새로운 것으로, 새로운 것은 현재의 순간으로 정의하는 가운데, 몸과 그 몸에 대한 의식을 동시에 재활성화한다. 움직임의 구체성을 언어 단위로 분쇄하는 과정에서 그 스스로 ‘정의’된다. 곧 정의의 항목만이 남는 것이다.

     

    몸은 어떻게 증발할 수 있는가. 이렇게 명확한 현존을 구가하는데 말이다. 그러니까 몸은 강박적 몸의 산출로써 숫자의 알레고리에 기꺼이 지배당했던 것과 같이, 언어에 대한 포섭을 가시화한다. 지배는 수와 언어를 스스로 몸에 새기는 것과 같다. 따라서 〈도그 데이즈〉는 몸이 얼마나 숭고해질 수 있는지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차원, 얼마나 납작해질 수 있는지에서 접근해야 하며, 이 납작함을 끝까지 밀고 나갈 때, 곧 상징계적 언어의 표피를 철저하게 따라갈 때 언어의 잔여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몸은 신비롭거나 언어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공명하며, 그것 안에 있음을 보여준다, 그 바깥의 경계를, 틈을, 실재에의 가능성을 확인시키면서 말이다.

     

    우리가 그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걸 노골적으로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의 대리자로서, 아니 그들의 대리자로서 우리의 자리를 응결시킬 지점을 찾아야 한다는 걸 의미하는 것 아닐까. 그러니까 그들의 응시는 그들에 새겨진 몸의 프로토콜이 그들의 내재적 차원이 아니라 초과적 차원에서 수행됨을 의미한다. 그들은 움직여야 되기 때문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지 않는 자리에 어떤 말도, 사유도, 시간도 셈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 정지의 시간의 연장선상에서 움직인다. 그러니까 움직임의 법칙이 아니라, 움직임에 대한 법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도그 데이즈〉는 철학적이고도 형이상학적 명제를 보여주는 차원에서 온전히 몸을 투여하며, 거기에는 반환점으로서 서사가 있는 것이다. 아울러 실재의 효과가 발생하는 지점에서 진정한 몸의 언어가 있는데, 이는 언어의 실조 현상에서 발생하는 시차로서 몸, 또는 잔여로서 몸이다.

     

    〈도그 데이즈〉는 몇 번의 황홀경이 발생한다. 횡 축으로 일직선의 대열을 만들어 육박하는 신체 양상으로 관객과의 거리를 극단적으로 좁힐 때 선두에 선 여자 무용수가 다른 이들과 달리 입이 살짝 벌어진 상태를 유지―‘그는 진정으로 이 고통을 즐기고 있어!’를 보여준다.―한다거나 집단 대열의 반복된 동작의 끝이 운동화와 바닥의 마찰음을 가장 오른쪽 남자에게서 증폭하며 결정짓게 하는 것이 그것이다―마찬가지로 가쁜 숨을 그 자체로 기호화하기도 한다. 후자에서처럼 어떤 부분은 오로지 소리만 빈 공간에 일정하고 단속적으로 가득 들려오는 풍광을 이루게 되는데, 거기서 몸은 납작하고 일정하며 평범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조명은 얇은 띠처럼 가장 하단에서부터 서서히 그들을 훑고 사라진다. 이러한 효과는 그들을 주목하기보다 일종의 사물적 오브제로, 반주체적 그림자로 치부하는 것과 같다, 물론 거기에는 현시와 사라짐의 시간에 대한 경험이 있다.

     

    김민관 편집장

     

    [공연 개요]

    10.23.Thu. 7:30pm10.24.Fri. 7:30pm 대학로극장 쿼드

    70분

    초연 2025 리옹, 프랑스

     

    제작진

    안무: 얀 마르텐스

    예술 보조: 나오미 깁슨

    예술 보조 / 코칭: 스티븐 미첼, 피에트 데프랑크

    출연진:

    피에르 바스탱, 카밀라 번델, 짐 버스켄스, 조에 청공, 사이먼 르리에브르, 플로렌스 레논, 엘리샤 머셀리나, 댄 머셋, 피에르 아드리앙 투레, 조라 웨스트브룩, 메이지 우드포드, 파올로 야오

    오리지널 출연진:

    피에트 데프랑크, 나오미 깁슨, 넬 헨스, 쥘리앙 조세, 키미 리그트풋, 체리시 멘조, 스티븐 미첼, 로라 밴봄, 모르간 리벤스, 일세 게키에르, 빅토르 뒤몽, 코너 슈마허, 카스파르 놉스, 아메리고 델리 보베, 다니엘 바르칸

    드라마투르기: 르네 코프라익

    의상 스타일링: 소피 듀르네즈

    의상 디자인: 얀 페딩거

    조명 디자인: 얀 레타니, 미셸 스팡, 엘크 베라흐터트, 넬 베레이켄

    투어 기술진: 얀 레타니, 미셸 스팡, 엘크 베라흐터트, 넬 베레이켄

    그래픽 디자인: 닉 마탄

    물리치료 및 정골치료: 포워드 젠트, 잉헤 하야트, 로데 베레이엔

    프로덕션: 그립 (한네 돔스, 안날린 헤르만스, 루디 뮬만스, 클라르체 우어레만스, 제니퍼 피아세키, 실비 스반베르그, 넬 베레이켄)

    국제 배급: 에이 프로픽 / 린 루소, 마리옹 고번

    파트너: (2023-2027) 라 코메디 드 클레르몽-페랑 SN, 메종 드 라 당스 / 유럽 창작 기지, 리옹 비엔날레 지원

    DOG DAYS 2014 공동제작: 프라스카티 프로덕티스, SPRING 공연예술 페스티벌, 당스브라반트, 라 브리케트리 CDC 뒤 발 드 마른, 탄츠하우스 NRW, TAKT 돔멜호프

    DOG DAYS 2025 공동제작: 테아터 로테르담, 드 싱겔, 르 카로 포르바흐 및 모젤 동부 국립극장, 페르포디움

    DOG DAYS 2014 재정 지원: 플랑드르 정부, 네덜란드 공연예술 기금

    DOG DAYS 2025 재정 지원: 플랑드르 정부, 벨기에 연방정부 세제 지원 (크로노스 인베스트 경유)

    DOG DAYS 2014 지원: 워크스페이스 브뤼셀, WP짐머

    DOG DAYS 2014 감사: 당사틀리에, 코니 얀센 단스트, JAN ICK암스테르담

    DOG DAYS 2025 감사: 오페라 발레 플랑드르, 코르소

    지원: 댄스 리플렉션 BY 반클리프 아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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