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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요•황예간, 《눈치채길 기다리며》: 감각하거나 해석을 통한 작품의 존재방식을 읽어내기REVIEW/Visual arts 2026. 6. 2. 19:18

이요•황예간, 《눈치채길 기다리며》 전시 전경ⓒ이의록[사진 제공=옐로우 펜 클럽(YPC)](이하 상동). 황예간 작가의 비교적 덜 잘려나간 그래서 읽을 수 있는 글자 동시에 의미가 아닌 읽는 우리의 능력에 단지 대응하며 시각적으로 더 부각되는 기호로서의 글자와 많이 잘려나간 신체 부위들과 그 기능을 온전히 달성하지 못하는 배경 이미지, 그리고 잘려나갔지만 여기서 유일하게 주체가 되는 어떤 존재의 이미지, 그렇지만 특정 언어가 온전히 구성되지 않는 것과 더불어 특정 발화를 결코 완성할 수 없는 이미지가 중심된 위치를 차지하면서 회화를 보는 순서를 어느 정도 결정 짓는 바 있다.
그러니까 회화의 색감은 여기서 다소 부가적이며 오히려 도상의 해독 가능성의 차원에서 이 회화를 선점하기 위한 노력의 과정이 가능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거기에 물론 회화의 색 역시 따라붙는다.
〈찰싹!화들짝!풀썩!〉은 화면 위에 살짝 뜬 “.. 1경기!ㅣ찰싹! 롤 붙이기”라는 표어 이미지로부터 제일 밑에 깔린 이미지는 그 표어처럼 잘려나간 신체의 부분들이 마찬가지로 대응한다. 그 위에는 실루엣 이미지와 그것이 밝혀졌을 대의 집안, 그리고 중앙에 잘려나간, 오른손을 들어 옆으로 안내하는 포즈의 회색빛 만화의 인물이 자리한다. 곧 글자에서 명암으로, 다시 유일하게도 명확하지만 역시 잘려나간 사람의 이미지로 시선은 전이된다, 또는 떠다닌다. 이것은 조감이 불가능한 이미지이며, 탐구와 지시의 차원에서 지루하게 생생한 이미지들의 궤적을 그려나간다.
“세상의 단면들이 축적, 유통되는 소셜미디어 피드, 유튜브, 게임, 웹툰 등 주로 2D 스크린으로부터 건져 올린 이미지를 비스듬한 시선에서 이어붙인 콜라주”라는 설명처럼, 이것은 현실에서 직접 유래한 실재가 아닌 매개된 이미지라는 재현물/매체로서 실재이다. 콜라주이기 때문에 그것은 환유물로서 조각들의 옮겨 다님에 기초한 시선을 탐지한다. 그것은 마찬가지로 그리는 방식에 있어서도 적용되는 부분이다.
〈체형관리-숍〉의 경우, “두상은 둥(글)…”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회색 배경과 그 위의 이미지이자 그 옆 “체형관리 2F”가 새겨진 벽화, 그리고 첫 번째 글자를 일정 정도 덮는 하얀색 기둥들과 그 위에 새겨진 위쪽 화살표 더하기 “1”, 그 옆의 말리면서 위로 향하는 화살표 더하기 “2”의 기호 사이로 가족사진을 들고 있는 한 사람의 두 팔을 향한다. 후자는 애니메이션 이미지이며, 그 옆으로 숍의 기계 장치, 그리고 침대가 자리한다.
“체형관리”와 그 연장된 위의 석벽은 실제 좁쌀 같은 매질을 사용해 우둘투둘한 질감을 구현했다. 이 층위들의 뒤섞임, 아니 끊임없는 앞지름은 그 매질의 성격을 한정 짓지 않는 것과도 기꺼이 상응하게 되어 있다. 동시에 이 매질은 건축적 반영이지만, 그 힘은 글자의 이미지적 뭉개짐에 더해져 드러나지 않는 신체에 대한 무의식적 반영은 아닐까. 그리고 그 신체는 온전히 펼쳐지지 않는 황예간의 환유적 이미지 조각 혹은 퍼즐의 세계에서 툭 튀어나온 존재감을 발휘한다. 이는 가려진 신체와 신체 변형술의 마법적 힘과 불온전함에 대한 담론이 미스터리와 기괴함, 두려움과 같은 심리적 효과와 함께 심층적 코드를 극대화하는 가운데, 그에 대한 방패막이나 차폐막―그것을 가장 앞선 시야에서 내리누른다는 점에서―을 형성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나르시시즘 제어하기〉는 사회적인 차원에서 소재를 찾지 않은 예외적인 회화로 보이는데, “백라(의) 연습용..”과 그 아래의 얼굴은 불안하고 안타까움을 표현하는데, 게다가 말을 할 수 없이 손목시계가 더 빛을 발하는 손으로 가림을 당하고 있다. 그에 대응하는, 연장되는 온전한 손을 완성하는 손가락을 포함한 손의 일부가 상단 위에서 내려오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대비되는 색상의 그 사물의 부재로 인해, 색상의 연함으로 인해 잘 부각되지는 않는다.
이 사람에 대응하는 이미지가 중앙에 세 개의 원에서 연장되고 있는데, 제일 위쪽의 이미지가 그러하다. 한쪽 눈은 노려보고 있는 이미지이며, 그 위의 프레임은 배경이자 누군가의 머리이다. 이것이 진하게 응축되어 있는 파란색이라면, 그 아래 레이어에서 분배되는 어떤 사회적 담론과 연루 작용 속에서 지시되지만, 사회적 담론으로 연장되지는 않는다. 이미지는 사회적 잔여이자 반영물이지만, 특정 사회적 주제를 환기시키지는 않는다. 비의미의 구현, 곧 의미로 집적되지 않는 과정은 매우 철저한 세공의 결과이며, 의도된 바다. 동시에 이는 가려짐과 누출의 대립적 엮임을 통해 비의적 차원의 단서로서 의미를 욕망한다. 회화는 플랫한 이미지들의 궤적 아래, 어떤 희미한 기호와 그 틈새로서 자리한다. 이 둘은 엮이면서 어긋난다.
몇 개의 회화―원-이미지―가 있고, 그것의 크고 작음이 있으며, 이후 형태적 정렬을 통해 가려짐과 나타남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원-이미지는 사실주의적 또는 구상적이어야 한다. 기법 역시 고전적이다. 곧 레이어의 배치 과정, 혹은 복잡한 레이어들의 뒤섞임이라는 구도는 그 기법의 단순함을 방어한다. 또는 기호적 놀이의 차원에서 우선한다, 또는 절대적(인 미감)이다.
그 속에서 사회는 알 수 없는 복잡다단한 것, 무언가의 작은 단서들로 드러난다. 파편적 이미지들의 영원한 끼워 맞춤의 그 순간을 재현한다. 오랜 혹은 여러 것 중의 선택을 거친 복잡한 쌓기의 조립을 통해. 조립은 사회를 재현하는 대신, 그 사회들이 우연적이고 자의적인 이미지의 더미임을 증명한다. 곧 사회는 이미지이며, 그 이미지는 사회적 속성과 판별의 기준을 제시하지 않는, 사회의 독특한 반영이자 실재이다.
이요 작가의 빠르기를 나타내는 단어들로 제목을 이룬 세 개의 작품―〈알레그로(Allegro)〉(2024, 알루미늄 캔버스에 철가루, 45x37.9cm.), 〈아지타토(Agitato)〉(2024, 알루미늄 캔버스에 철가루, 35×27cm.), 〈안단테(Andante)〉(2024, 알루미늄 캔버스에 철가루, 45x37.9cm.)―은 네 개의 스피커를 알루미늄 캔버스 뒤에 분배하고 앞쪽에 철가루를 배치하고 손을 대어 촉각적 반응으로서 응결된 철가루의 무늬를 최종, 응고시킨 작업이라는 점에서 지표적인 회화라 할 수 있다. 형태는 행위의 부산물이며, 부산물일 뿐이다.
전시에서, 세 작업은 명시적으로 나타난 이요의 예외적 작품들이며, 다른 작업은 공간의 희미한 틈새이거나 공간의 오브제로 자리하며, 전시명의, 주체의 은근한 발신의 욕망을 구현한다. 〈태도를 둘러싼 마찰〉(2024, 공명 스피커, MDF 목재, 아두이노, 122×17cm(×4).)의 경우, 관람객은 전시를 보는 정치적 주체로 호명되고, 전시장은 일종의 사회적 공공의 장이 된다. 관람객의 태도는 심미적인 것에 반응하지만 그로 인해 또는 그로부터 가시화되지 않은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정치적 예민함을 오히려 감축하거나 소거하면서 그렇게 한다, 아마도 그렇게 가정된다.
벽의 틈과 같은 장소에 자리한 이 작업들은 하얀색 벽, 그리고 스피커를 숨겨두는 용도이자 장소에 두드러지지 않게 최대한 납작하게 구성되어, 캡션의 인도에 따라 가시화될 수 있다. 사실 그 소리는 미세한 지각을 창출하며, 비지시성의 기호를, 어떤 주파수의 영역을, 관객의 신체를 따르되 그것의 동력과 구성 원리를 적시하지 않으면서 가시화된다.
잘 보이지 않는 것에서 잘 들리지 않는 것으로 나아가는, 그렇지만 잘 들리지 않는 것은 또한 잘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시각적 질서를 산출하는 이 작업은, 어떤 것을 듣는다는 것이 우리가 의심하지 않는 우리의 ‘정상’ 감각에 의존하며 그 정상 감각에 해당하는 주파수대의 명시 정보들이라는 것을, 그 정보들이 또 다른 정상 감각을 지닌 존재들의 발신이며, 따라서 정상 감각은 공통감각임이 의심할 나위 없는 사실을 전제한 채 심미적 기호 과정을 구성한다는 것을 또한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인식의 태도〉(2024, 진동 모터, 천연고무 목재, 아두이노, 30x140x45Cm.)는 벽면이 아닌, 전시장 중앙부의 의자인데, 역시 하얀색이며, 의자임을 눈치 채길 기다리는 무심한 오브제로 자리한다. 〈태도를 둘러싼 마찰〉이 지나가는 관객을 감지한다면, 곧 지나가는 행위 외에 다른 접근 방식과 인터랙티브 작용이 없다면, 〈인식의 태도〉는 앉음으로써 소리를 증폭한다.
인공 와우 이식자인 이요는 무언가를 가청 범위의 소리로 인지한다는 것, 곧 그 바깥의 영역은 존재하지만 들을 수 없거나 정보로 치환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하는 경험을 안고 살아간다. 그 연장선상에서, 이요의 작업들 대부분이 무언가가 어떤 것으로 즉각 대응되는 것이 아닌, 감각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이는 감각의 역량 혹은 역치에서 나아가, 그것을 전제하는 배경, 사회의 공론장이 구성되는 방식 들을 드러낸다.
여기서 심미적 질서는 그것이 잘 보이지 않거나 잘 들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감각의 질서와 태도 자체를 시험한다는 점에서, 미학적인 산출의 경험을 정치적인 것으로 새롭게 구성한다. 또는 정치적인 것과 미학적인 것이 뒤섞여 있는 것임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요의 작업은 황예간의 작업에 따라 붙고, 전시를 메타적인 차원으로 구성한다. 2인전의 형식은 미감의 차원에서 유기적인 차원에서 조합되는 대신에, 전시의 표층과 또 다른 심층의 코드를 작동시키며 평평해진다.
그렇다면 황예간의 ‘눈치 채길 기다리는’ 작업들은 무엇일까. 이는 작품의 내재적 작동 원리이다. 그리고 그 원리는 평면들의 가려진 희미한 틈새를 벌리려는 노력, 그리고 그 평면들의 최종적인 하나의 겹쳐진 형태가 원-이미지를 어떻게 재구성하고 있는지 또 반-서사화하면서 작동하는지를 보는 해석의 질서 자체로 전이될 것이다.
김민관 편집장2024. 12. 5. – 12. 24.
화-일 1pm – 7pm (월요일 휴무 *단 12. 23(월)은 전시오픈)
YPC SPACE(서울시 중구 퇴계로 258 4층)협력 기획: 옐로우 펜 클럽(YPC)
주최: 이요·황예간
그래픽 디자인: 양으뜸
후원: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REVIEW > Visual art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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