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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리암 나트로슈빌리와 데투 진차라제, 〈So Far〉: 그다지 멀지 않은 역사…
    REVIEW/Visual arts 2026. 6. 11. 21:46

    마리암 나트로슈빌리와 데투 진차라제, 〈So Far〉 포스터[이미지 제공=쉬 shhh]

    마리암 나트로슈빌리와 데투 진차라제의 작업들은 조지아의 역사적 잔여로 남은, 망각과 현재로 뒤덮인 공간을 조명하고 더듬으며 현대사의 기억을 되불러오는데, 이는 그들이 전시장 벽면에 새긴 일종의 그들 고유의 표어이자 전시명으로서 유일한 기입, “So Far”을 경유해, 그 현재와 밀착된 시점과 함께 또한 그로부터 너무 멀리 있는 역사의 진실―지금으로 뒤덮인―을 중의적이고 역설적으로 전달한다. 

    공간에 부착되는 이 작업은 공간에의 새로운 기입―미소한 조처로서 개입―을 통해 또 다른 시간의 지층을 임시적으로나마 더하는데, 이는 (이) 공간이 역사를 기입한 공간이며, 또한 많은 곳이 사라져 흔적들로 기워져 더듬더듬 발화하는 곳임을 드러내며, (이) 공간을 다시/새롭게 특정하기보다 또한 정체화하기보다 그 공간을 다시 반복되(며 소거되)는 역사라는 이념으로서 환원 또한 무화시키는 것에 가깝다―이는 결국 얇은 막으로서 떼어질 글자 자체만을 현상하는 것에 가깝다. 

    그러니까 실질적으로 건물 반경을 돌며 그 공간의 견고함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물리적인 외양으로부터 지지되는 이들의 작업은 동시에 폐허와 잔여로 남은, 흔적들로 비쳐지는 그것의 임시적인 차원을 불안정하게 마주하는 (서사에 절대적으로 기대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해서 공간은 역사의 기억―〈기억의 궁전〉 (Memory Palace, 2024)―으로 재생되거나 미디어의 영향력에 잠식―〈트빌리시 안내서〉 (Tbilisi Guide, 2021)―되어 있거나 전용된 현재―〈해체〉(Dismantled, 2021)―를 보여준다. 

    〈트빌리시 안내서〉는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의 소비에트 연방 정권의 흔적으로 남은 아파트들, 1960년대에 지어지고 1980년대에 증축되어 위로 또 옆으로 그 솔기가 드러나는, 튀어나온 철창 발코니를 만든 이 건축물들을 일종의 무언가를 새겨 넣는 펼침면으로서 “양피지”로 비유하는데, 여기서 철창은 표면이자 외부와 내부의 경계면이기도 하다. 곧 두 개의 체제가 교체되는 가운데 깨어지기 쉬운 물리적 속성을 안고 현실의 위기를 증언하는 한편 안으로 수축하며 닫히는 내부의 공포를 담지한다. 

    전경의 카메라를 수그릴 때 건물과 건물 사이에는 고철들이 눈에 띄는데, 이는 새로운 체제의 혼란스러운 정국 아래 이전의 기계들이 모조리 해체되어 이웃 나라로 수출되었던 과거의 기억이 오버랩되며 그 부재됨을 현상시키면서, 유럽과 미국에 고철로 수출된 중고부품을 살 수 있는 자동차 중고 시장으로서 조지아의 현재로 안착된다―이는 〈해체〉를 통해 본격적으로 탐사된다. 현재의 실재를 비춤으로써 관광 안내서에 나온 조지아의 이미지가 허구이며, 지역의 실재 이미지는 은폐된다는 사실을 드러내며 영상은 끝을 맺는데, 이를 ‘실수를 교정’한다고 표현한다. 

    〈기억의 궁전〉은 공간 내부의 삶, 존재 양식을 비롯해 그 안의 존재들의 역사를 훑어가는데, 처음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서며 1921년 조지아에서 사유재산이 폐지되며 본격적으로 공산제가 시행되며 만들어진 기계적 배분에 따른 코무날카라는 공동주택의 방식은,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해 지어지고 순차적으로 배급되는 과정에서 관료주의의 폐단으로 불평등하게 주어졌던 1961년 흐루쇼프카라는 소형주거단지로 이전되(며 역사에서 소거되)지만, 그 드러나지 않았던―그와 동시에 언급만 되었던, 곧 일종의 역사의 그림자와 같이 단편적으로 스쳐갔던 고정되지 않은 이미지들만의 계열을 거쳐―, 작위적으로 분배된 벽을 두고 나뉘는 일종의 사적인 공동체의 모습은 오히려 마지막에 투쟁하고 항거하는 인민의 형상으로 스며들어 가시화되는 듯 보인다, 부조리하게 집을 잃은 이들로부터 공산주의의 이념으로 다시 거슬러 올라가며. 

    그러니까 흐루쇼프카가 지어지고 배급되던 시점에서 체제의 붕괴와 함께 새로운 정권의 혼란상 속에서 아파트 무상 분배의 민영화 정책을 통해 새롭게 주인을 찾고, 또 압하지와와의 분쟁 속에서 발생한 실향민들의 거처가 됐던 시점을 지나, 2005년의 급진적인 경제 개혁, 곧 철저한 자본주의의 경제 원리에 따라 은행과 대부업 세력의 침투로 터전을 잃기까지 인민의 불안정한 삶은 그 주거 공간의 불확실성으로 체현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들이 출현하며, 곧 공동의 투쟁 장면이 펼쳐지는 좁은 공간의 수많은 몸들로 나타나며, 그 전까지의 역사의 잔존하는 이미지들의 흐름이 비교적 뚜렷한 질감과 시간 안에서 결절된다. 

    먼저 그와 짝패로서 좁은 아파트 문 앞에 선 빽빽한 경찰들이 등장한다. 인민을 무력한 존재로 몰아간 세력을 이어 받아 법으로 그것을 완성 짓는 그들의 행위는, 해머로 그 문을 두드리는 폭력적 절차로 이행되고, 그것들을 흐릿한 형상의 실루엣으로 이어받는 거울상의 반전을 통해 그 안에서 역시 빽빽하게 이곳을 점거한 노숙자의 신세로 몰린 수많은 인민의 단합된 모습이 노출된다. 

    이 시끄러운 안의/닫힌 소요가 절체절명의 순간, 현재 도착한 미래를 조금이라도 유예하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그런데 대신 놀라운 순간이 도착하는데, ‘고리대금업 시스템과 공모’하여 ‘경찰력을 동원’한 정부에 대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라는 한 사람의 목소리, 현장의 중계, 항거가 아닌 체념도 아닌 비평의 지시가 그것이다. 마침내 문이 열리고 역설적으로 환한 빛이 감싸고,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 왜상으로부터 시간을 지연시킨다. 또는 왜상 자체를 유예시킨다. 이는 여자의 목소리―앞선 목소리는 남자였다.―로, 모두를 위한 집이 (상징적으로) 필요하고, 동시에 모두가 일상의 존엄을 되찾을 수 있는 사회적 토대가 마련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그러니까 이 언어의 올바름이 인민의 형상 속에서 전개되기 위해서는 격렬한 투쟁이 아닌 이성의 언어가 필요했고, 역사의 공정한 이념을 향한 절박한 인민의 언어를 적용시키며 사회 변혁의 이상적 꿈이 도식적인 결론으로 공허해지지 않으려면, 먼저 현재를 의식화하는 역사의 어떤 틈이 필요했다. 그것이 곧 해머에 대응한 노래의 공동체적 울림, 그리고 주체의 목소리인 것이다. 

     〈해체〉는 역사의 파고를 지나, 공간에 대한 비평을 거쳐, 일상의 시간으로 안착되는데, 이는 더딘 카메라의 움직임, 그리고 일상의 시간, 존재 자체에 (어쩔 수 없이) 카메라가 묶이게 됨에 따라서다. 곧 카메라는 존재를 비추지만 이는 카메라가 그 존재를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는 현재는 물화되어 있고 동시에 탈이념화되어 있는데, 허물어진 역사(의 부재)는 안정된 일상의 몸으로, 풍경으로 대체된다. 그렇지만 이 현재는 견고한 것인가.

    역사를 가시화하는 국가의 이념이 사라진 자리에서 소시민의 경제적 삶과 활동만이 남은 상황에서, 물화 자체로서 해체의 과정은 해체된 역사에 대한 알레고리를 공허한 것으로 가리킨다. 직접적 해체에 대한 비전 역시 부재하는 듯 보이는데, 이는 35년 자동차 수리를 해 온 한 자동차 수리공의 모습에서 결정적으로 응결된다. 그러니까 해체 이후의 과정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곧 거의 모든 폐자동차를 수리할 수 있는 존재(들)의 전문 기술 대신에, 단지 침수차와 같이 고장난 차의 부품을 해체해서 일차적으로 판매하는 시장만이 활성화되고 있는 현재는, 〈트빌리시 안내서〉가 비추고 언급한 자동차 중고 시장의 불안정한 경제이다. 이는 동시에 역사가 해체되는 순간, 소비에트 정권의 붕괴 이후, 각종 기계 부품들이 모조리 이웃나라로 수출되었던 순간의 영원회귀적 반복이다. 

     

    김민관 편집장 

     

    2025. 7. 25. -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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