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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권, 〈생각 조종자들〉: 나로서의 너의 현상학

김재권, 〈생각 조종자들〉[사진 제공=김재권](이하 상동). 생각을 조종한다는 건 몸짓을 통해 어떻게 표현 가능한가. 한 남자(박현규)와 여자(고시아), 마네킹이 등장하는 〈생각 조종자들〉에서 한 남자가 부착하는, 한 남자에 부착되는 마네킹 혹은 여자의 표현에서 보면, 그것은 타자가 이전된 형식으로서 ‘나’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곧 몸짓이 나의 의식적 주체성을 상대에게 저당 잡힌 채 발현되는 것이라는 차원에서 무의지적으로 산출될 때 나의 생각이 조종되고 있음이 표현될 수 있다. 그렇다면 생각을 조종당하는 것과 그 반대의 존재가 하나의 짝을 이룰 것인데, 거의 둘씩의 관계에서 생각 조종자’들’은 어떻게 가능한가, 또는 또 다른 누구를 호명하는 것일까.
〈생각 조종자들〉은 인형극의 원리를 차용하고 있는데, 뒷모습으로 등장한 남자(박현규)가 안고 있는 존재는 마네킹이다. 이는 팔이 없는 자리가 빈 통로가 되어 신체를 끼워 이전할 수 있는 오브제이며, 가령 이후 무대가 되는 중앙의 단상을 지지대로 삼아, 남자가 자신의 다리를 거기에 관통시키는 동시에 수그려 얼굴을 지움으로써 자신의 긴 팔을 갖고 정면을 마주한 마네킹이 살아 있음의 상태를 유지하게 하는 것과 같이, 생각(신체)을 조종함은 생각(신체)을 조종당하는 피동성을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외양을 선취하는 결과로 뒤집힌다. 곧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적 관계의 지양을 통해 생각을 조종하는 자와 조종당하는 자의 관계가 분리 불가능한 것으로 이뤄지는 순간, 비로소 생각 조종자‘들’이라는 이름이 기입될 수 있게 될 것이다.
새롭게 등장한 여자로 인해, 마치 예행연습처럼 이뤄진 남자와 마네킹과의 관계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로 갱신되는데, 둔탁한 사물처럼 여자는 거의 패대기쳐지며/패대기쳐짐을 선택하며 남자가 아닌 허공을 응시한다. 그러니까 남자의 ‘폭력’이 존재에게 가해지는 차원이 아님을, 어떤 텅 빈 사물에 가해지는 것임을 이 시선은 증명하면서 동시에 그 무심한 시선이 불러오는 정서적 차원의 환기를 통해 그것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무엇으로 남자의 행위를 그 정서를 일깨우는 것, 존재를 기입하는 것임을 드러낸다.
이 둘의 관계는 마치 학습에 의한 지식의 축적의 한 형식에 속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암전 이후 상황이 전환되는, 장들의 구분에 따라 시간의 경과가 표현되고 관계의 변화가 생겨나는 것이 그러하다. 가령 누워서 단상에 발을 디디고 있는 여자의 모습은 위를 보던 암전 직전의 장면이 전환된 결과이다. 이는 부감 쇼트로 바라보는 것과 같은 감각을 주는 것으로, 이어 전면에 등장한 여자의 팔이 그의 다리가 된 남자의 다리를 만지는 장면을 보여준다.
‘나’의 다리는 실제 너의 것이지만, 너의 것을 나의 것으로 느끼는 것과 나의 것을 너의 것이 아닌 것으로 느끼는 것은 동시에 이뤄지며, 이는 의식적 차원에서 서로를 무관심하게 접촉하는 것의 규약 속에서, 프랑스의 철학자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 Ponty, 1908~1961)가 말한 나의 오른손이 왼손을 만질 때 내가 닿는 것과 나를 닿는 것 사이의 이중적 감각이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양상이 만들어진다.
관절과 관절의 새로운 접합 속에서 혼동과 착시의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가운데, 여자의 눈은 정면을 응시한다. 이는 나의 그리고 너의 신체를 마주하지 않은 채 신체의 나머지가 마치 투명하게 ‘왼손’인 양 그에게 감각되는 상태를 우리가 우리의 왼손인 양 접촉하는 것 같은 상태로 만든다. 곧 그의 투명한 시선이 나의 오른손으로 그녀의 신체 나머지를 왼손으로 만드는 것이다. 응시는 신체를 접합하고 또 절합한다.
응시는 마지막으로 무대 왼쪽에 하이라이트를 받으며 등장한 마네킹으로 즉시 옮겨 간다. 그리하여 정면을 보는 마네킹의 투명한 응시가 이전 그들의 존재를, 그들의 존재였음을 상기시킨다. 그렇다면 생각 조종자‘들’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생각 조종자들〉은 나의 의식적 통제가 아닌, 나의 생경한 감각의 차원으로 발현되는, 사라지는 너로부터의 나의 감각을 이야기한다. 타인의 생각에 기식하는 신체가 나의 신체에 깃드는 신체로 바뀌는 것이다. 곧 조종은 나와 너의 식별할 수 없는 차원과 동일한 차원에서 나의 분화적 양상이다.
윤나영, 〈한낱 작은 존재들〉: 유토피아적 혹은 유아기적
윤나영, 〈한낱 작은 존재들〉 [사진 제공=윤나영](이하 상동). ‘한낱 작은 존재들’은 그것을 마주하는 이성적이고 보편적인 존재를 가정한다. 그것들은 기묘하고도 애잔한 타자성을 함축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해 신체와 조응되는 사과는 그 존재를 함입하고 표현해 낸다. 처음, 사과를 물고 서로를 안고 등장하는 한 쌍의 장면에서 양 옆에서 마찬가지로 사과를 물고 등장하면서 이 넷이 엉키는 것처럼 사과로부터의 교착 상태는 서로 간의 구분할 수 없는 경계를 나타내는 동시에 대상에 대한 애착이 지배하는 원시적이거나 유아적인 상태임을 보여준다.
사과를 두 손에 내려놓고 허공을 응시할 때 사과는 특별한 가치의 대상으로서 제의의 매개체가 되는 듯 보인다. 나아가 주체적이기보다 타동적인 양상의 신체들은 이 제의 안의 정념을 간직하는 듯 보인다. 무릎을 신체 중심을 향해 모으고 어정쩡하게 선다거나 엎드려 수그린 채 네 발로 걷는다거나 할 때 타악의 리듬은 거기에 힘을 실어준다.
사과는 또한 세계를 인식하고 자각하는 탐지체가 된다. 소라에서 나는 소리인 양, 이들은 사과를 귀에 대기도 하고, 그때 바다의 사운드 스케이프가 구현됨으로써 이것은 거의 기정사실화된다. 또 마치 새로운 것인 양 그것을 손 위에 살포시 올린 채 바라보기도 한다. 또 두 손으로 사과를 잡고 그것을 깨물며, 앞선 신체에 부착된 신체로서 감각과는 다른 차원에서, 그것을 새롭게 촉각적인 차원에서 다름으로 인지함을 드러낸다. 또 망원경인 양 한쪽 눈에 대고 세상을 바라봄으로써 그것으로부터 세계를 확장시키기도 한다.
원시적 존재에서 새로운 경계와 마주하며 변화하는 존재의 양상이라는 서사는 ‘한낱 작은 존재들’을 향해 열린 유토피아적 광경을 마주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으로 이끈다. 특히 마지막에 한 명이 엎드리고 그 위에 ‘탑승’해 두 손을 허공에 휘저으며 팔랑대는 유희적 몸짓은, 서로를 마주하는 두 쌍의 모습으로 출현하며, 점점 교대의 순환을 가속한다. 이는 탑승자의 환희와 쾌락을 부각시키는 동시에 그것과 대조되는 지지자의 감내의 모습을 아이러니한 것으로 함께 보여준다―정면이 아닌 측면인 점에서. 그렇지만 이는 지배와 종속의 패러다임이 아닌, 기꺼운 놀이의 변증법적 순환에 가깝다.
우리는 저렇게 순진무구한 모습으로 돌아갈 때 얻는 천국의 자리를 약속받게 되는 것일까. 또는 그 유희의 순연한 몸짓이 우리가 잃어버린 모습임을 각인할 때 비로소 언어가 새겨지기 전의 (이탈리아 철학자 아감벤, Giorgio Agamben, 1942~)가 말한 유아기의 상태에 다다를 수 있게 되는 것일까. 〈한낱 작은 존재들〉은 전 표현 단계의 몸들을 보여주기보다는 우리 삶의 “진동”을 우리의 이전의, 또는 저곳의 어떤 다른 모습으로 보여주는 일종의 사고 실험과도 같다.
박주환, 〈무언의 삼각형〉: 구조의 영점
박주환, 〈무언의 삼각형〉[사진 제공=대한무용협회]. 〈무언의 삼각형〉은 슬랩스틱 (블랙) 코미디에 가까운 전형적인 소극인데, 큐브들을 서로 차지하려고 발버둥치고 고투하는 모습이 빠른 전환의 피드백 고리에 묶여 있다. 여기서 키의 차이가 분별돼 보이는 세 남자 무용수의 출연은 동일자의 반복이 아닌 개별자의 현실적 위치의 동등함을 강조한다. 처음 무대 오른쪽에 위치한 큐브에 다리를 걸치고 않아 있는 남자는 사실 아직 채 등장하지 않은, 다른 남자의 다리가 붙잡고 있는 형국이다. 이 결착된 신체들은 원환의 삼각관계라는 이후를 예고한다.
둘의 경쟁적 얽힘에 중앙의 큐브 뒤쪽에서 다른 한 명이 등장하며 셋이 된 관계의 양상은 큐브에 걸터앉아 회전하며 서로를 발견하는 모습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자리바꿈과 자리다툼은 같은 위상의 개념인데, 끊임없이 자리가 바뀌며 단상에 잠깐 등장하고 다음 타자에게 그 자리를 열어주기 때문이다. 곧 순간의 자기 정립이 타자를 소거한 자리의 일시 점유는 진정한 소유가 아닌 (타자가 차지하는 것에 대한 욕망의 차원에서의) 향유라는 지점을 잘 보여준다. 향유가 소유로 전환되기 이전에 그것은 단지 순간으로만 존재해야 한다.
나는 타자와의 관계성에 의해 정의되며, 그 관계로 인해 살아 있게 된다. 반면 나의 바깥에 그 타자의 향유가 자리하며, 그것을 향해 나는 돌진한다라는 어떤 공식이 〈무언의 삼각형〉을 내내 지배한다. ‘무언의’ 시스템이 이루는 삼각의 대칭적 순환은 급격한 속도의 희곡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재빠른 액션과 구조물들과의 순간적인 재배치의 양상은 마치 야바위 게임의 컵 안에 든 공의 향방을 찾는 것이 기실 (그것이 어차피 속임이라는 가정 아래) 중요하지 않은, 진실이지 않은 차원에서 맹목적으로 시선을 지배하고 있는 모습과도 같다.
김민관 편집장2025.4.27.(일) 19:30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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