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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테파니 레이크 컴퍼니 Stephanie Lake Company, 〈콜로서스 Colossus〉: 재현이 아닌 현전이 담보하는 정치적인 것
    REVIEW/Dance 2026. 6. 4. 22:01

    스테파니 레이크 컴퍼니 Stephanie Lake Company, 〈콜로서스 Colossus〉[사진 제공=서울국제공연예술제](이하 상동).

    45명의 무용수가 출현하며 거대한 “파도”나 “홍수”의 흐름과 부피를 창출하는, 스테파니 레이크 컴퍼니의 〈콜로서스〉에서 그 묘사가 지닌 온전한 심미적 형상을 정치성 저편의 움직임으로 괄호 칠 수 있을까. ‘거대한’ 형상, 곧 거대한 것 혹은 거대한 조각상을 가리키는 ‘콜로서스’라는 단어와 결부되는 외피와 함께, 〈콜로서스〉는 군중, 통치, 파시즘, 판옵티콘과 같은 정치에 상응하는 개념들을 첨예화하는데, 이는 종국에는 순수한 형태를 직조하는 데 총력전을 다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거대한 물결이 조직하는 장면을 관통하는 건 또한 해외 안무가와 현지 무용수들의 협업의 과정 아래, 아마추어리즘의 솔기를 적극적으로 노출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또 다른 현장 자체의 정동으로 연결된다. 이러한 시간적인 차원, 존재적인 차원에서의 부정합적인 전제조건이 어떻게 작품을 감싸고 있는지는 〈콜로서스〉를 보는 데 통과해야만 할 부분일 것이다. 

    원형으로 둘러싼 누인 몸들은 ‘거대한 조각상’의 형태이다. 무대가 시작 전부터 사로잡는 이 이미지는 통일된 한 번의 거대한 전환으로 시공간의 변전을 일별하게 한다. 이 덩어리는 그럼에도 다시 반복되거나 연장되지 않는데, 그렇게 존재들은 분화되고 출현하게 된다. 그리고 존재 안의 분기가 구성된다. 몸의 오케스트라로 불릴 만한, 한 명의 직립과 그의 수신호가 갈음하는 몸들의 파도를 타고 이어지는 곧추 세운 상반신과 동기화되는 수신호의 재현은, 일종의 단순한 조종에서 통치의 역학으로 나아간다. 그에 따라 움직임보다는 형태로서의 형식은 규율로서의 내용으로 전환되고, 그 연극성을 가장하게 된다. 

    이따금 괴성을 지르고 얼굴을 찌끄러뜨리며, 비이성적이거나 문명 이전의/바깥의 존재들로 상정되는 이들은 ‘통치’의 충실한 수행자들로 자리하는데, 그렇다면 이 군중과 통치자의 우연하고 급작스러운 분할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그것이 플라톤이 주장한 것과 같이 일종의 타고난 자질과 덕성에 따른 응당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전제를 가정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문자 그대로 실현, 실험하는 것이라면, 동시에 그것은 자신의 폐해를 목도하게 만드는 것일까. 그것의 기계적인 작동과 통제된 광기, 동일한 생산 양식의 차원은 그것의 비민주주의성, 비인간적 통제 시스템, 파시즘적인 또 다른 차원의 광기를 이야기하는 것일까―그렇다면 〈콜로서스〉는 정치의 우화적 형상이자 그 비판을 경유한 변증법적 진술일 것이다. 

    원형의 대열에서 단체 사진 대형으로 층차를 두어 정면을 응시할 때 역시 이들은 제어되고 있는데, 외화면 사운드는 일종의 판옵티콘의 보이지 않는 시선의 이들에 대한 장악으로 연결된다. 이 목소리는 인간 신체의 그것을 변형하거나 그럼으로써 그것을 벗어나는 인공지능의 목소리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에게 방향이나 동작에 관한 짧은 명령어를 대입함으로써 이들을 통제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제어되고 통제되는가. 그 답은 이들이 왜 제어되고 통제되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으로 대체되는데, 곧 그 통제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을 때 이들은 일종의 욕동 덩어리, 비의식적 산출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적절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우스와 같은 외부적 존재의 급작스러운 삽입과 그것으로부터의 장악이 요청된다. 

    반면, 제어의 결과와 그 결과에 합당한 선행 조건을 원인이 아닌, 하나의 명목으로 둔다면 어떨까, 그 근본 조건 자체를 의심해 본다면. 이 거대한 힘의 짝패가 시간을 통한 점화나 주체의 각성이나 그 계기의 제시로 인한 내재적인 수렴과 그 연장선상에서 서사의 지층을 구성하는 것이 아닌, 공간적이고 물리적인 사회 시스템의 외양으로 거둬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콜로서스〉는 거대한 힘, 스펙터클 자체를 독특한 미감이 출현하는 조건으로 둔다. 그 결과의 형상은 물론 미적 체제의 구성과 정치적 해석을 동반한다. 

    아마도 〈콜로서스〉의 새로운 지점은 스펙터클에 경계선을 부여하고 하나의 물리적, 합리적 조직의 형태로 관할함으로써 문명 이전과 문명의 간격을 단지 생동감 있는 현재로 붙잡아 둔다는 것일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그것이 조금 더 정치적으로 첨예화되기 직전에 하나의 형상을 구성하고 그 형상 안에 머무르게 함으로써 그것에 개념을 부여할 어떤 이념으로부터 스스로 물러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힘은 그럼에도 통제되지 않는 영역으로 비집고 나오는데, 이는 각 존재의 개체성과 고유성 이외에도 오히려 이것이 하나의 공연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개인이 분사하는 자의식적 에너지이다. 

    결과적으로 이는 통제된 장면이 아닌, 자의적이고 제어되지 않은 사태이며 현실이다. 여기에 따라 붙는 정동은 어떤 차원에서는 제도권의 무대에 진입한 것에 대한 환호 혹은 경이로움 같은 정서의 표출에서 파생되는 것으로도 보인다. 그리고 여기에는 더 이상 재현을 비롯한 ‘~에 대한’ 무엇을 포집할 수 없다. 집체 움직임의 장면 역시 무력해진다. 따라서 통제라는 개념은 하나의 축으로서 유지되(며 깨어지)기보다 집단적 흐트러짐의 현상을 위한 하나의 준거점 혹은 맥거핀과도 같은 것으로 본다면, 아마추어리즘의 무대화가 주는 제어되지 않음의 차원은 예고된 것이라기보다 차라리 의도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45명의 숫자라는 것, 원래 50명이 넘는 무용수에서 진행 과정에서 줄어든 이 숫자는 프로덕션 과정의 유연함을 증명하기보다는 집단의 형상과 다수의 존재가 어느 정도 임의적으로 결정, 예측되었음을 알려주는 데 가깝다. 나아가 하나의 집단이 개체의 존재를 보장하고 증명함에도 그것은 각 개체를 모두, 온전히 재현하기보다 개체의 고유성‘들’이 드러나는 그 공간에 초점을 두며, 또 하나의 통일적 양상을 이루기 위해 일정 분량을 단지 넘어서야 하는 개체들이, 그 전체에 있어서는 하나의 부속으로 동원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과정상의 결원의 발생은 이 공연의 유연함이 아닌, 허술함과 미끄러짐 곧 실패의 한 측면으로 뒤집힌다. 이 허술한 산술과 예측―자본주의적이고 제도적인 유혹의 힘―은 아마추어리즘의 지지 아래 가능해지며, 따라서 앞선 정동의 이유는 이 공연의 예측할 수 없는 힘이 아니라, 이 공연의 비대한 욕망의 산출 공식에 따른 제도의 분명한 효과이자 그 명확한 결과이다.

    김민관 편집장

     

    2024.10.17.THU. 7:30pm10.18.FRI. 7:30pm

     

    제작진

     

    안무 스테파니 레이크

    작곡 로빈 폭스

    조명디자인 보스코 쇼

    의상디자인 해리엇 옥슬리

    리허설 디렉터 니콜 머스캣, 마르니 그린

    프로듀서 베스 레이우드 크로스

    프로덕션 매니저 에밀리 오브라이언

    테크니컬 매니저 로버트 라슨

    무대 감독 즈수자 게이너 미할리

    스테파니 레이크 컴퍼니는 크리에이티브 빅토리아, 크리에이티브 오스트레일리아, 캐니퀸 재단, 휴머니티 재단, 아트 프로젝트 오스트레일리아 및 개인 후원자들의 지원을 받고 있음

     

    <성균관대학교 무용학과>

    서울 코디네이터·리허설 디렉터·통역 김나이

    무용수 고나영, 고흥열, 권대우, 권도연, 권미래, 권우진, 김다빈, 김리찬, 김명선, 김민재, 김민채, 김소민, 김지민, 김지유, 김채민, 김하은, 김희연, 나윤재, 노은희, 문정연, 박소윤, 박진현, 변가령, 서예원, 서지수, 석이강, 소예진, 신소은, 안예슬, 오현서, 오현석, 오현준, 원다빈, 이다연, 이재정, 이주희, 임상미, 임재윤, 정윤지, 정희윤, 최세민, 최지유, 한여원, 허채연, 현윤

     

    협력 성균관대학교 무용학과, 김나이무브먼트컬렉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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