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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구 작, 전윤환 연출, 〈통로〉: 소통의 불가능성 혹은 시차로부터REVIEW/Theater 2026. 6. 5. 21:36
상연으로서 통로

이양구 작, 전윤환 연출, 〈통로〉ⓒ김솔[사진 제공=앤드씨어터](이하 상동). 〈통로〉는 학교 내 담배 피우는 장소를 공론의 합의에 입각해 가설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것이 아니라 어떤 면피의 통로임을 드러내는 지점에서, 〈통로〉는 상징계적 잔여 또는 실재에 다다르는 듯 보인다. “통로”는 학교 개구멍에서 이어지는 담벼락 사이 공간으로, 마을과 바깥의 경계에 있다. 이는 학교의 ‘권’역에 있지만, 마을 주민(다 은)의 개인 부지를 침입한다는 항의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며, 담장의 위치를 다투는 측량의 사태―측량사(변준섭)의 소환―로까지 번진다. 근본적으로 그 두 행위자의 의도는 학생이 담배 피우는 장소를 비가시적인 것으로 두는 것에 있는데, 그것이 그들을 자유롭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학생(최현조)의 흡연 자체에 대한 비판, 곧 부정성을 갖는 게 아니라, 그것이 나에게 혹은 누군가에 가시화되는 것을 꺼려하는 것이다. 이는 거꾸로 ‘담배를 피우는 학생은 분명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사실을 보지 않음으로써 안전하다. 그것은 부인―지젝(Slavoj Žižek, 1949~)은 자본주의와 기후 위기의 연관성 아래, 진실을 알지만 소비하는 현대인의 의식을 페티시즘적 부인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의 상태에 가까운데, 왜냐하면 나는 담배를 피우는 학생을 적어도 보지는 못했(고 따라서 나는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담임(강윤민지)의 입장에서는 숙의 과정을 거쳐 예외를 수용하는 ‘대안’학교의 명목을 민주적으로 체현하는 것이면서 적어도 담배를 무턱대고 권장하지는 않는 사려 깊음의 실질을 이중적으로 취할 수 있는 것이라면, 마을의 입장에서는 학교라는 순수성과 무해함의 상징적 기관으로서의 표상과 현재의 간극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에 가깝다.
이는 마을의 위상을 담보하는 게 학교의 이미지이며, 학교는 궁극적으로 마을의 무결함을 곧 담배 피우지 않음을 ‘상연’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어린 시절 몰래 담배 피우던 시절의 기억을 소환한다. 궁극적으로 ‘감시당하면서 느끼는 기이한 쾌감과 억눌린 의식 속에 그 경험은 은밀한 차원으로만 남아야 한다.’
열린 결말의 틈
학교에서 마을로 나가는 문, 다시 말해, 마을에서 학교로 들어가는 문을 만드는 합의의 과정으로 나아가기 위해 일방향의 통로를 양방향의 통로로 확장하는, 곧 두 번째 개구멍이 대문으로 화하는 상징적 처리의 과정에서 〈통로〉는 닫힌다. 그것은 “총회”를 여는 것인데, 일종의 이 열린 결말은 ‘소통’의 지난한 시간을 예기한다. 개구멍을 확장한 하나의 문이 있지만, 마을로 통하지 않는 통로는 학교 뒤 담장이며, 학교는 마을을 등진 채 일종의 이물감으로 마을을 ‘좀먹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니까 이는 마을이 (대안)학교를 받아들이는 대안이 뒤늦게 진정으로 도래하는 기점임을 의미한다.
〈통로〉는 학생의 담배를 피울 “기본권”을 기꺼이 물리적으로 연장해 주는 것이 진보적 차원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그 이면이 있음을 가정하면서, 매끄럽지 않은 그 과정 자체에 대한 지지, 곧 ‘차이’로서 각 개인의 자율성을 지지하고 보존하며 가시화하는 그 과정 자체가 진정한 것임을, 따라서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진보적인 것임을 이야기한다. 그 ‘이면’은 올바름으로 치환되는 대안을 명목상으로만 받아들이는, 그리하여 실은 면피하는 가운데 그것과 현실의 시차, 간극 따위가 엄연히 발생하게 되며, 그로부터 현실의 존재들이 딜레마 내지 곤궁을 안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통로〉는 일찍이 만들어진 통로 이후 뒤늦게 그것을 되묻는다. 진정한 정의는 도래하지 않았고, 다시 파헤쳐지고 의심되며, 모두의 극장에서 재결정되어져야 한다. 처음 이장(민재원)은 마을 사람을 대표/대리해 학생에게 말을 걸지만, 두 번째 개구멍을 다시 파낼 때는 담임의 입장과 동조되어 (소수의) 학생의 권리를 위해 전적으로 헌신하는 입장에 선다. 따라서 사실 청소년-타자를 맞선 우리의 입장을 여러모로 관철하는 이장의 발화로써 본론은 매우 빠르게 이미 당도했으며, 그것은 논술을 잘하는 세대라는 말로 봉합되고 마는데, 중요한 건 무엇이 올바르냐가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진정한 모두의 합의에 이르느냐의 차원인 것이다.
따라서 이장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곤궁에 그제야 빠지게 되며, 그것이 곧 진정한 시작인 것이다. 마을 주민이 담장의 경계를 논의에 붙일 때 그것은 치졸한 성격의 지연과 장애의 경로가 아니라, 확장된 관계의 차원에서 통로가 필요함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전학으로 인해 새로 온 학부모와의 싸움은 이 통로가 사회적으로 승인받기 위해 또 다른 관문을 넘어야 함을 의미하고, 그것은 긍정의 결과를 절대 예고하지 않는 가운데서 그 자체로 결말을 구성하게 된다.
산 넘어 산, 또는 그 같은 과정 자체의 중요성
이물적으로 들리는 학부모(채 윤)의 발화는 그 자체로 소위 싸함을 만드는데―이를 연기한 배우의 목소리가 톤 다운으로써 마치 세계를 깎아낸다.―, 그 두 번째 개구멍, 마을로의 통로인 그 구멍을 헐어버리는 사건이 그의 자식으로 추정되지만, 그것은 죄의 영역이자 추궁에 이르는 사건으로서보다 오히려 민주주의 질서에서의 통로를 파는 것의 어려움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곧 임시방편으로서 통로는 공교롭게 법적 차원에서, 그리고 그야말로 임시적인 자리라는 차원에서 각각 한 번씩 시험되는데, 이는 공통적으로 법의 절대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법의 틈새를 드러내는 것으로, 법을 물신화하거나 절대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것으로써는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통로〉는 치열한 토론에 바탕을 둔 일종의 법적 연극의 형식을 토대로 하지만, 그것은 명확한 또는 올바른 승자를 가려내기 위함이 아니라, 그 과정 자체의 지난함과 복잡성의 체제 자체를 가시화하기 위한 것이다. 〈통로〉는 없는극장의 건물 외벽 창문을 검은 시트지로 가려놓은 채 시작해서, 막의 전환에 이를 일부 걷는 퍼포먼스를 행하는데, 두 번에 걸쳐 거의 떼어서 열린 공간으로서 의미를 표시한다.
따라서 통로는 무대 내 테이프로 좌우 길게 표시하는 것에 의해 불투명하게 지정하는 것 외에, 절차적 단계 안에서 밝음의 지향으로서 상징화되고, 그 안에 있는 이들이 그 통로 공간 안에 있었음을 자각하는 효과를 의도함으로써 통로의 물질성보다는 통로로서 의미 자체를 현상하려 한다. 아마도 비전형적인 극장의 장소성을 극복하려는 일환의 ‘검은 커튼’을 원래의 위치로 되돌리는 반극장적 조처는, 의사소통의 경로로서 ‘통로’가 그런 무모하고도 직접적인 수행성에 기초함을, 일종의 구멍을 내거나 벽을 허물(어 구멍을 막)거나 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여기서, 전학 온 학생이 저지른 만행(?)은 그 전의 합의 체제를 합의 없이 무너뜨린 비합법적 행위이지만, 그것은 앞서 말했듯 규명되지 않는데, 그로써 학부모의 반감이 학생을 일방적으로 대변하려 한 것인지 아님 직접 경유하여 연장하는 것인지 역시 모호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통로〉는 그것을 미스터리로서 두면서, 기존의 합의 체제의 무너짐이 주는 허무함 대신에 곧장 새로운 합의 절차에 골몰하는데, 곧 이미 합의된 체계에 새로운 등장인물이 관여하기 어려운 상황에 초점을 맞추면서 이를 이미 발생한 사건이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 방식으로써 소거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
사실 우리는 통로에 대한 실질적 합의에 참여할 수는 없는데, 그것은 이미 합의되어 통로가 만들어졌고, 이제 다시 합의를 거쳐 통로에 대한 성사 여부를 결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진정한 개인의 입장이라는 것을 우리는 확인하기 어렵다. 이는 처음 학생과 이장의 대화에서처럼 상대의 진술과 발화 방식에 걸쳐 연관되어 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합의라는 것이 ‘그럴 수밖에 없는’ 어떤 “분위기”에 의해 결정된 것이라는 두어 번의 인물들의 여러 변명이 제시되는데, 어쩌면 이는 시대가 갖는 당위, 확장해 보면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이 토로하는 강제된 분위기와 같은 건 민주주의 안의 어떤 특정한 현상이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사회 체제 자체를 가리키는 것일 수 있는데, 그것은 민주주의의 이상적 차원에서의 합의의 투명성과 합리성 자체가 각 개인의 주체로서의 신화를 거꾸로 전제로 한 (돌고 도는 순환 논증의) 오류일 수 있다는 것이다.
실은 각 개인들은 (예외적이더라도) 합의에 이르는 과정에서 자신의 유별난 예외자의 위치를 가져가고 싶지 않으며, 자신만의 생각에 대한 충분한 논거를 만드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하거나 긴 시간의 피로감에서 벗어나고 싶거나 하는 등등의 여러 이유로 인해 진정하지 않은 차원에서 그 합의의 결과가 합리화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통로〉는 이런 이상적인 합의 과정의 구축으로서 이른바 숙의 민주주의를 농촌에 도입하여, ‘더’ 그것이 불가피하게 어려움과 간극을 가져오는 결과를 실험하고 지켜본다. 담배는 하나의 맥거핀이며, 그러한 상황이 모두에게 담배를 한 대 피우게 만드는 지점에서의 농담에서 비로소 담배는 진정한 것이 된다―현상학적 차원에서 그의 입가로 공간 전체가 흡입된다.
곧 이러한 은유로 현상되는 걸 제한다면, 담배는 일관되게 안건에 대한 소재적 연루에 가깝다. 〈통로〉는 (숙의) 민주주의를 통로로서 비유하며, 통로의 깊이와 기능 및 효과의 불안정성 아래, 경계와 벽의 대비된 심상 사이에서 모호하고도 복합적으로 통로의 의미를 갱신해 나간다(는 지점에서 흥미롭다).
p.s. 앞선 측량사는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의 미완성 소설 『성』(1922~)의 토지 측량사의 역할로 마을에 초대받은 주인공 K(카)를 연상시키는데, 어쩌면 〈통로〉는 현실의 민주주의 정치에 대한 사고 실험적 차원을 띠면서도, 실은 K가 성을 명확하게 경계 짓지 못했던 것처럼 통로라는 모호한 대상을 실재로 접근해 가는 그리고 끝내 그려내지 못하는 일종의 부조리극적 차원을 현상한다. 그리하여 인물들은 명확한 캐릭터성으로 드러나기보다 직접적인 토론의 한 패널이거나 실재를 맞닥뜨린 존재의 곤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희극적 인물로 수렴한다―또는 후반에 등장하는 학부모와 같이, 그 혼란을 가중시키는 미스터리한 인물로 분한다.
김민관 편집장
2026년 5월 29일(금)~31일(일) 평일 4시, 주말 3시없는극장 (강화군 길상면 해안남로627, 1층)
작가 이양구연출 전윤환프로듀서 권근영조명 한원균음악 연리목그래픽, 사진 김솔조연출 조냇물프로듀서보 이유정출연 강윤민지 김진솔 다은 민재원 변준섭 채윤 최현조주최,주관 앤드씨어터후원 인천광역시, 인천문화재단'REVIEW > Theat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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