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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스 판 덴 브룩x김영미댄스프로젝트, 〈휴스턴, 문제가 발생했다.〉: 개체의 권리 혹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을 드러내기
    REVIEW/Dance 2026. 6. 9. 21:48

    한스 판 덴 브룩x김영미댄스프로젝트, 〈휴스턴, 문제가 발생했다.〉ⓒ박상윤[사진 제공=서울세계무용축제](이하 상동).

    SOIT(한스 판 덴 브룩 안무)와 김영미댄스프로젝트의 협업으로 탄생한 〈휴스턴, 문제가 발생했다.〉는 하나의 ‘벽’, 한계 혹은 억압에 대한 이미지를 상정하고, 그로부터 개개인의 서사를 검출하는 방식에서 그것을 괄호 치는 집단이라는 형식의 투명성을 만드는데, 이 원자들의 끊임없는 교환과 엔트로피적 발산의 무작위성이 혼란스럽게 관객을 몰아넣고자 한다. 제목은 1970년 달을 향해 떠난 아폴로 13호의 선장 짐 러블이 우주선 폭발 사건이 발생했음을 휴스턴에 있는 NASA 관제 본부에 알릴 때 쓴 표현으로, 이는 출연자 개개인의 심각한 문제가 공연의 언어로, 발신의 형태로 나타남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문제는 표어로 드러남으로써 개인의 내밀한 차이로 분별되는 대신에, 사회적 구호로, 메시지로 전화한다. 어둠 속에서 “오늘 나는 왼쪽 팔을 잃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공연은 개개인의 독백을 이어 나열하는데, 이는 구어가 아닌 문학적 언술에 가깝다. 그리고 이 같은 형태는 추상적이고 다층적인 세계를 인용의 방식으로, 열린 해석의 차원 아래 한정 없이 끌어올 수 있게 하는데, 수렴되지 않고 확장만 되는 이 방식은 개인의 주체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문학적 화자의 대리적, 위임적 성격을 자처하며 결과적으로 그 개인의 자리를 평등하게 분배하는 것과 같다. 

    밝아지면서 종으로 앉은 이들이 작은 조명 옆에 각자 자신들로부터 온 긴밀한 사물들을 함께 두고 있었음이 공연 이후 전시된 형태로 남아 있어 알 수 있게 되는데, 이는 개인으로서 발화와 개인이 대리할 뿐인 문학의 서술이 개인이 간직하거나 의미를 지닌, 개인의 이야기로 연결될 수 있음을 추정하게 한다. 곧 공연이 초래하는 혼동은 그 이야기들이 어디서 나온 것이며, 그러니까 그 개인의 정체는 무엇이느냐라는 것이며, 도대체 이 이야기들은 왜 어떤 연결성 없이 나열되는 것이며, 나아가 애초에 어떤 주제나 화제 아래 조직된 것으로 볼 수 있느냐라는 것이다. 

    이들이 일렬로 앉은 상태에서 일종의 소리-집단의 형상을 이룰 때, 가의 하수에 있는 전투대원 같은 형상의 남자가 랜턴을 켜고 긴박하게 좌우를 오가며, 개별의 자리를 예외적으로 검수하는 행위가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광경 역시, 단순히 “문제”의 상황을 표현하는 것을 넘어서는데, 진짜 문제는 폭력적 통제의 상황 자체가 아니라―따라서 전쟁의 상황에 대한 재현의 측면에서도 어떤 의미의 연결을 갖지 않는다.―, 그 행위가 집단 안에서 완전히 미끄러지고 있는 감각을 안겨준다는 것으로, 이는 마치 그 집단의 형상 자체가 처음 독백에서 나오는 문구에 거의 유일하게 적용되는 “살아 있으면서도 죽어 있는 자”의 상황인 것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발화 공동체가 뒤의 나무 패널들로 만들어진 벽에 부딪치고 소리 치고 하는 행위로, 우리와 멀어질 때 저 너머에 자신들을 격발하며 그 자극을 관찰하게 될 때, 물리적 타격은 너무 명확하게도 그들이 ‘살아 있음’을 표명한다는 것이다. 저음부의 깎여 나간 음성의 독백, 나를 그곳으로 끊임없이 데려가 달라는 반복되는 가사를 담은 음악은, 어떤 음악에, 그 감성에 젖어 있는, 헤드폰을 쓰고 밖을 차폐한, 개인의 문화적 취향이 구현되는 자신의 그 내면 공간이 하나의 정체성으로 드러나는 것을 보여주는 차원에서 비로소 의미화되는 것은 아닐까. 곧 하나의 주조음으로서 형식이 아니라, 개인의 자유를 동시에 개인으로서 형식을 그 소리 풍경의 속삭임의 형식으로부터 인계받는 것은 아닐까. 

    〈휴스턴, 문제가 발생했다.〉에서 가장 주요한 행위들, 벽과의 응전은 곧 개인의 무한한 자유 너머의 한계로부터 오는 불만족감, 한계에 대한 것이고, 거기에는 어떤 내용도 무제한적으로 수용될 수 있다. 어떤 가치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개인에 일으키는 중대한 의미라는 것, 곧 개인-사회의 대립된 가치 체계의 공통된 차원으로서 하나의 형식일 뿐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개인‘들’은 어떤 하나의 메시지로서도 단일화되지 않고 그 산만함 자체가 하나의 다양성이라는 메시지로 단일화되는, 곧 그 메시지의 내용이 아니라,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체로서 존재가 중요해지며, 그들이 두드리는 벽은 일종의 사회적 저항의 상관물로서보다 그들의 현존 자체를 가시화하는 것으로 상정된다.

    마지막에 정면으로 걸어 나오는 한 명과 거기에 입혀지는 대사가 혜능의 육조단경 구절 일부를 인용하는데, 이는 영화 〈달콤한 인생〉(2005)의 마지막 내레이션의 소릿값을 변형해 삽입한 것처럼 보인다. 선사상의 내면에 고착된 세계에 대한 깨달음이 영화에서 이전까지의 현실이 꿈이었음을 반증하는 대사로 각인되면서 허무함으로 귀결되는 양상으로 받아들여진 상황과는 다르게, 공연에서는 내면에서 부상하고 부유하던 말들이, 저항으로의 전화라는 형식을 경유해 돌아오며, 결국 개인의 차원에서 마무리될 수 있음을, 마무리되어야만 함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 된다. 

    이로써 어떤 내용으로도 수렴되지 않는 극의 형식을 어떤 하나의 주체적 차원으로 결정 짓기 위해 ‘봉합’으로써 모든 출구를 막아야 하는 역설이 가시화된다. 그것은 주체와 세계의 만남으로 인해 달라진 세계의 풍경이 아니라, 그 스스로에게로 재귀하는 주체의 내재적 변경으로, 거기에는 사실 앞선 세계에 대한 어떤 개입도 변화도 인지도 없다는 점에서, 이 같은 결론은 변증법적 갱신이 아닌, 다분히 유아적 세계의 연장으로 보인다. 

    아마도 〈휴스턴, 문제가 발생했다.〉의 개체의 권리 신장을 추동하는, 개개인의 내재성을 강도로써 구성하는 탁월하고도 독특한 지점은 개인의 사적 진실에 대한 승화라는 내러티브적 마감에 따라 용두사미격의 결과를 맞는데, 이 지점에서 ‘문제‘의 해결 혹은 해소가 아니라, 그 문제 자체를 알리고 발화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에 온전한 초점을 맞추었어야 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한 판본을 따르면, ‘벽’의 알레고리는 어떤 해결책 없음의 내러티브로 사후 결정되는 대신에, 개인과 구조의 대립이라는 알레고리를 따라 개인의 생명력 차원에서의 발화로 온전히 응결되었을 것이다. 

     

    김민관 편집장

    2025.09.23

    서강대학교 메리홀 대극장

    공연시간 6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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