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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치카와 사오 원작, 신유청 연출, 〈헌치백〉: 자기 부정과 자기 수용의 피드백 놀이
    REVIEW/Theater 2026. 6. 11. 21:46

    이치카와 사오 원작, 신유청 연출, 김도영/김진숙 윤색 ,〈헌치백〉[사진 제공=국립극장](이하 상동),

    〈헌치백〉은 이치카와 사오의 동명 원작 소설 속 주인공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의 문장들은 여러 명의 배우에 의해 나뉘어 전개된다. 희귀 근육질환인 선천성 근세관성 근병증으로 인해 인공호흡기와 전동휠체어의 지지 아래 살아가는 샤카의 경험은 작가 자신에게서 온 것이다. 샤카는 사회적 금제의 경계를 시험하는 자신의 욕망을 문학으로써 수행하는데, 이는 극의 시작과 함께 펼쳐지는, 그가 동명의 필명으로 기고하는 노골적인 성적 묘사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 아닌, 그의 기입되지 않는 일기의 형식에 가까우며, 이 일기는 그의 자의식이 구성하는 세계 그 자체다. 

    그의 작가적 의식은 그의 삶의 반영이자 삶의 부수물들로, 그의 바깥에 있는 사회에 대한 조망과 횡단의 시선을 경유한 대자적 관계의 구성 아래, 기존 사회의 공고한 획일적 시스템에 반기를 드는 것이며, 욕망의 불가능성으로서 특성과 불가능한 욕망이라는 심급의 경계를 명시하는 것이며, 그 자신의 예외자성을 주체의 위상으로 등록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사회로부터 온 자신의 격차는 명백한 인식의 부분이라면, 반대로 자신이 횡단하는 사회의 어떤 다른 가능성은 그것을 저항하고 부정하며 파쇄하는 이형적 신체성으로서 발화 행위로부터 온다. 곧 그것은 정상 규범을 뒤틀고 풍자하며 그 정상 규범을 납작하게 만들고 또 구멍을 낸다. 

    이 벗어나고 뒤틀린 욕망, 임신과 중절의 절차를 모두 완수하려는 의지에 따라, 자신의 연약한 몸이 지탱할 수 있는 일반인 남자로 자신의 간병인 다나카와의 섹스를 거액의 돈을 제안해 현실화하려는 시도로 이어지는 이 욕망은, 펠라치오의 과정에서 폐로 넘어간 정액으로 생사의 경지에 이르는데, 결과적으로 죽음으로써 살아가야 하는 자신의 삶에 대한 묘사를 증명한다.

    곧 그가 꾸는 꿈, 일반적 여성의 삶에 대한 소원, 그리고 여성에게(만) 부여된 낙태에 대한 죄의식적 책임과 장애를 가진 아이를 소거하는 일반적인 행동 양식에 대한 비판이 교차하는 지점, 곧 전자의 차원에서 미끄러지며 후자의 차원에서 부정되며 지워지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는 일종의 사회적 등록 절차이자 표현의 층위는, 다소 허무하고도 아이러니한 결말을 맞는다. 

    〈헌치백〉의 샤카를 중심으로 한 그의 분배된, 분산된 역할들은, 그리고 개선문 같은 무대 세트의 상단에 투사되는 현재를 비추는 영상, 스크롤되어 올라가는 실시간 문학적 반영으로서 발화의 매개 모두는 샤카의 자유로운 이동 불가능성에 대한 대응으로서 그의 모바일상의 기입이 온라인 공간으로 확장되는 것과 같이, 그를 유비쿼터스적 신체로 확장하고 연결하는 장치들로서 총체적 공간을 구성한다―전자가 시간의 동시성에 입각을 둔다면, 후자는 공간의 편재성을 보여준다. 

    그 결과, 샤카를 연기하는 주요한 두 배우, 먼저 전동휠체어를 탄 차윤슬의 정박된 위치가 그 주변으로 확장 가능한 요소들을 가지기 때문에 안정적이고도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면, 황은후의 경우, 고정된 위치 없음, 나아가 비물리적 차원의 발화가 유영하는 장소를 체현하는 신체로서 탈장소적 공간을 구성하는데, 이는 정면을 향하며 직접적 화자의 위치를 벗어나서 발화가 지닌 운동적 차원 자체를 강조하거나 뒤돌아서 현재를 바라보며 말에 대한 육체의 자리를 빈 공간으로 대리하게 되는 것과 같이 다양한 스펙트럼에서 나타난다. 

    차윤슬이 장애 당사자의 위치에서 샤카의 자리를 물리적인 차원으로써 윤리적으로 재현한다면, 황은후는 샤카의 또 다른 자아, 문학적 차원의 여러 심급의 자유로운 탈신체성을 구성하며, 욕망의 신체 없음의 견지 아래 놓인다. 이는 샤카로 묻어나는 여타의 다른 인물들과 같이 샤카에 대한 일종의 사라지는 매개자와도 같다. 그리고 이는 결국 샤카에 대한 비주체적 접속을 통한 윤리의 절차적 수행의 성격을 보여주는 한편, 샤카의 1인칭 시점으로부터 파생된 그의 자의식의 연장선상에서의 세계, 곧 그의 자의식으로 잠식되는 세계 속 여러 인물들의 희미한 주체성을 드러낸다. 

    전자의 차원은 인물들의 다양성을 재현의 풍부함으로 전이시키기도 하지만, 또한 입체적인 무대 공간의 경로를 구성하기도 하지만, 물리적으로 신체성을 경유하는 연극의 매체적 특성의 변환 과정에서, 곧 1인극에 가까운 극의 예측되는 강도를 줄이기 위해, 일종의 차윤슬을 중심으로 두되 재현의 효율을 기하는 시도로서도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소설의 충실한 재현, 곧 샤카의 자의식성에 기초를 둔 전개 방식을 그대로 따른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일종의 대화적 전개 방식으로서 희곡의 일반적 특성을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샤카에게 유일하게, 예외적으로 타자성을 띤 인물은 다나카로, 샤카의 의식은 그의 대응에 대한 반향적 차원으로만 드러나는데, 곧 다나카의 반응을 샤카는 미루어 짐작할 수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정면으로 서서 그에게 펠라치오를 시도하는 샤카의 뒷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마치 그는 세계의 중심에서 샤카의 삶을 장악하고 있는 느낌을 주는데, 인셀로 구분되는 다나카는 예측되기 어려운 성질의 인간, 새로운 인식 주관에 의해 파악되어야 하는 인간으로서 샤카의 관찰 대상이 된다. 

    다나카는 샤카를 시험하고 또 적잖이 당황스러움과 모욕을 안겨주지만, 그의 뒤틀린 말들은 샤카가 세계에 갖는 원한감정의 결정―이는 거꾸로 다나카 자신의 것(“르상티망”)으로 기입된다.―을 부정하지 않는 차원에서 수용될 수 있으며, 예외적인 차원에서의 흥미를 돋운다. 이는 다나카의 세계가 개인적 차원의 성격으로만 소급되지 않기 때문이며, 샤카는 사회를 향해 사회에 대한 발화를 하며, 이는 사회에 대한 관찰과 파악을 기초로 하는, 그의 연구 결과가 삽입되는 것과 같이, 사회적 관계의 차원에서 사유되는 자신의 관점으로부터 연장되(며 운동성을 띠)는 것이기 때문이다. 

    샤카의 여러 자아들, 세계를 비틀어 바라보는 일상의 자신으로서 샤카(釋華), 문학에 심어둔 성적 방종을 지향하는 인물을 그리는 작가로서 샤캬(紗花)는 다른 이름이지만, 음독으로 하면 같은 샤카가 되는데, 후자에서 마지막 샤카(紗花)의 자기 삶의 기술은 그 전의 삶과는 분리된 삶으로서 그 앞의 삶을 포괄하는 것인지, 곧 그것을 허구로서 거두는 유일한 현실인 것인지, 아님 가장 처음 장면처럼 문학적인 인용의 차원에서, 샤카(釋華) 자신의 문학의 일부가 펼쳐지는/재현되는 것인지 모호하다.

    이는 ‘샤카’라는 동음이의어로서 이름들이 가진 차연적 속성, 어느 하나의 신체-장소로 등록되지 않는 이름의 특징이 보여주는 일종의 불교적 세계관이, 또 다른 샤카로서, 석가모니(釋迦牟尼, 샤카무니의 음차)를 떠올리게 하는 암시적 차원에서 새롭게 의미화될 수 있는 것과 같이, 또는 ‘샤카’의 이분적 기의 아래 현실과 가상이라는 이분법적 세계로 연장되는 대신 ‘샤카’라는 기표가 꿰는 여러 기의들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헌치백〉의 또 다른 전언, 혹은 암묵적인 상징 코드가 앞선 세상과 나의 경계로서 구성되는 물리적인 커다란 문으로부터 은밀하고도 신비로운 세계로 진입하(며 닫히)는 것으로 암시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헌치백〉의 결론, 세계의 또 다른 출구는, 그 안의 변용된 몸은 사회에 대한 자의식적 탐침의 차원을 훌쩍 건너뛴, 연기론적 차원에서 자아라는 허상을 물리치면서 동시에 탈주체화되는, 다른 몸을 선택함으로써 정치적 장소로서 ‘지금 여기’로부터 탈주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이는 처음에는 자아의 모험, 또 다른 자아의 다양한 선택지를 가능하게 하는 문학이라는 현실에서의 효과가, 그 모험을 떠난 자아가 완전히 화자-주체―샤카의 ‘현실의’ 자의식적 서술 역시 문학의 서술이다.―를 벗어나 새로운 문학의 장을 기술함으로써 한편으로는 그 문학에 영구히 내속되며 닫힘을 의미한다. 샤카(釋華)로부터 추정되는 또는 방사되는 사캬(紗花)는 이제 그 샤카(釋華)의 손을 벗어나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곧, 샤카(釋華)-샤캬(紗花)의 연결은 단절된다.

    이는 일종의 환상문학적 귀결일까. 아님 욕망의 현동화로서 작가는 자신의 자기 보존으로서 신체를 긍정하고 수용해야 한다는 편견을 비웃으며 그 다양성의 몸으로 끊임없이 이전되는 의식상의 사이보그적 육체를 문학 안에서 꿈꾸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일까, 기계 장치와 연결된 현재의 샤카의 몸이 오히려 기계 없는 자립의 몸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의 방향, 곧 온전한 하나의 기계로서 몸으로 전이되는 양상을 상상할 수 있는 것과 같이. 그러니까 그 문학은 문학상의 결론이 아니라 (여전한) 문학으로서의 수행인 것일까. 문학(의 현실의 초과됨)은 현실의 탈주일까, 그 현실로부터의 도피일까. 

    창녀가 된 마지막 샤카의 모습은 펠라치오를 하던 몸의 불편함, 극단적인 위험으로부터 벗어나, 유일한/예외적 인물의 다나카라는 존재를 벗어나, 그 스스로가 적극적 행위자로서 잉태의 가능성을 추구하고 그 행위의 선택지를 넓힐 수 있는 가능성의 조건 아래 있음으로 볼 수 있다. 그가 낳고 지우려고 하는 아이는 결국 자기 부정의 기호이자 자기 극복의 표상이다. 따라서 그는 일시적으로 장애로부터 유예됨(을 문학적으로 확정지음)으로써 그 장애를 가진 아이로서 자신을 출산하려 한다. 자신을 갱신하고 다시 자신에게 되돌아오고자 한다―그가 버릴 아기의 생산 행위는 이질적인 가치의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기 부정을 수용한다. 이는 사실 자기를 물화해서 극복하는 자기 분열적 행위인 것이다. 

    소급해서 그의 출산과 낙태는 그 자신을 지우고 다시 만드는, 샤카 스스로를 다시 쓰는 놀이적 행위이며, 이는 그 문학의 실체이다. 곧 문학을 통한 끊임없는 반복으로써 그의 바뀔 수 없는 신체로부터 그는 자기 부정과 자기 수용의 원환을 완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학적 놀이 안에서 자아는 현실과 현실 바깥에서 선택 가능한 것인데―그것은 ‘현실’로부터 경계화되지 않는다, 거꾸로 ‘현실’을 하나의 경계로 만든다(따라서 마지막 장면은 현실과 환상으로 대립하지 않는다).―, 그중 ‘선택된’ 하나의 자아로서, 앞선 그의 현실에 대한 냉소적 태도의 비판적 의식 역시 사회에 대한 원한감정에 고착되는 대신에, 사회 구조로부터, 닫힌 자아로부터 탈주를 꿈꾸는 문학의 본질에 이르는 다른 경로이기도 함을 드러낸다. 결국, 샤카는 무력한 자신으로부터 도피하며 완전히 새로운 종착지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무력한 자신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으로 되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문학이 샤카라는 이름을 통해 여러 몸을 소환하듯, 〈헌치백〉은 여러 다른 실제의 몸, 배우들을 동원해 샤카의 세계를 편재되고 분산된 이행으로 연결한다. 통시적 차원에서 여러 몸들의 차이는 공간적 차원에서, 곧 공시적 차원에서 가시화된다. 아마도 이 연극으로서 발화되며 생기는 가장 현격한 차이는 장애를 가진 몸과 그렇지 않은 몸을 한데 기입하는 것으로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문학적 전이 양상의 차별 없음, 무경계가 오히려 더 명확해지는데, 가령 외설의 문학은 스크린 위에 띄워지며 별도의 몸에 달라붙지 않음으로써 ‘문학’임으로 무대에서 구분될 수 있게 된다. 
    그럼에도 문학으로서 자유로움과 이행, 경계의 횡단의 가능성은 그러한 구분의 몸을 필연적으로 요청하는 건 아니다. 문학과 몸의 심급을 구분하는 것 역시 아니다. 따라서 〈헌치백〉은 (또 다른) 어떠한 몸들이 필요했을까. 문학은 어떻게 발화되어야 그 스스로를 실체로 만들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언급할 만한 부분은 샤카가 수행성의 한 현실로 접속하는 지점에서 그것이 샤카로 다시 되돌아오는 부분이다. 샤카는 연구자의 관점에서 1974년에 도쿄 국립박물관에서 일어난 ‘모나리자 스프레이 사건‘을 재현하고, 자의식적으로 이를 굴절시키는데, 〈모나리자〉 그림이 전시될 때 관객의 범주에 장애인과 유아 동반자를 제외한 부분에 대해 요네즈 토모코가 〈모나리자〉에 스프레이를 뿌려 항의의 퍼포먼스를 펼친 이 사건에서, 샤카는 “나는 모나리자는 될 수 없다.”라는 말로, 제도 차원의 비판적 대상을 욕망의 기호로서 전이시킨 것이다. 곧 요네즈가 〈모나리자〉를 찢음으로써 그것을 볼 수 있는 주체로 자신을 등록하고자 한다면, 샤카는 〈모나리자〉로부터 찢김으로써 그것이 될 수 없는 주체의 불완전성을 드러낸다. 

     

    김민관 편집장

     

    2025.06.12 ~2025.06.15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자세히)

    공연 시간 90분

     

    원작 이치카와 사오 김치백(문예춘추)

     

    연출 신유청

    윤색 김도영 김진숙

    드라마투르그 김지혜

    안무 허윤경

    무대 이엄지

    조명 강지혜

    영상 고동욱

    음향 지미 세르

    의상 홍문기

    분장 장경숙

    소품 최혜진

    무대감독 김지은

    출연 김별 우범진 원훈 차윤슬 황은후

    수어 김홍남 유민지

    통역 이수현 정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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