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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호 작/연출, 〈화성에서의 나날〉: 영원한 시간으로서 죽음충동에 대하여REVIEW/Theater 2026. 6. 11. 21:47
장소적 차원으로서 무대

윤성호 작/연출, 〈화성에서의 나날〉ⓒFOTOBEE[사진 제공=서울연극협회](이하 상동). 〈화성에서의 나날〉은 화성 편도행 우주선에 탑승했던 환과 욱이 착륙 과정에서 사고로 고장 난 우주선 안에서, 둘이서 온갖 대화와 일지 작성의 시간을 보내며 몇 년 남은 우주 식량에 의존해 시간을 보내는, 곧 일종의 “역할극”과 일지로써 하루하루를 기입하는 일종의 사고 실험적 전제 아래 흘러간다. 일지에 의해 시간 측정은 그야말로 지리멸렬하고 무미건조한 시간성의 단면과 유한한 삶의 이면 모두를 보여주는데, 거기에는 구제 불능의 생존과 희망에 기초한 미래가 혼선되어 있다.
〈화성에서의 나날〉은 무대를 객석으로 전유하는 가운데, 상수와 하수에 위치한, 서로를 마주하는 두 개의 객석 단 사이에 두 명의 배우가 위치하며, 거기에는 의자들이 뒤집혀 있거나 그저 놓여 있을 뿐이다. 이는 대부분 우주선 내부를 그대로 지시하지만, 재현의 차원에서 우주선의 경계가 표지되며 그 바깥의 우주가 그곳에 함입되기도 하지만―그리고 이때 무대의 막, 샤막은 우주를 프로젝션 하며, 거꾸로 전체는 우주에 내포된다.―, 기본적으로 우주선 내부로 상정된 이 무대는, 후반 무대 막이 걷히면서부터 진정한 우주의 위치를 가시화한다.
그러니까 필연적으로 무대를 제한함은 그 나머지 공간의 사용, 곧 무대 확장의 유인을 결정적 차원에서 도입할 것임을 추정케 하는데, 그것은 이 막이 물리적으로 닫혀 있다는 것에서 그러하며, 또한 이 극이 결정적으로 고립으로서 ‘경계’에 대한 이야기이며, 이는 경계 넘기, 곧 환상적 차원으로서 초월에 대한 경계 횡단의 모티브가 전제되고 있음에서 그러하다. 그리고 또한 무대 중앙, 관객의 정면에는 천장에 걸린 커다란 나무 패널이 늘어뜨려져 있는데, 이 대상은 시야를 확보하기보다 제한하고 나아가 억압하는 데 그 역할이 있는 듯 보인다.
곧 이 패널은 결말부에서 내려오며 두 배우를 완전히 고립시킬 때, 그러니까 프로젝션 잠깐의 사용을 제하고는 어떤 용도가 없었던 그 거대한 패널이 마침내 둘을 분기할 때, 우주선을 정확히 반으로 동강 낼 때, 그리하여 둘이 똑같은 말을 동시에 하며 상징적 차원을 띨 때 극은 종료하게 된다. 이 패널은 검은 스프레이류 페인트를 허공에 방사해 맺힌 일종의 미세한 먼지 같은 점과 음영적 착색이 희미하게 이뤄진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의 얇게 도표한 실상 거의 하얀 캔버스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완성된 것으로 본다면 일종의 추상회화에 가깝다.
합성, 분화되는 역할(들)
먼저, 역할(극)에 대한 정의가 필요한데, 이는 두 배우가 일곱 명을 자의적으로 나눠 맡는 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편의상 A(백종승)와 B(강희제)로 역할을 구분한다면, 기본적으로 그 둘은 환과 욱의 관계를 이루지만, 그리고 나머지 다섯 명의 우주선 탐사원들을 역할 극 안에서 표현하기는 하지만, 환과 욱이 서로를 교환하기도 하며, 그야말로 모든 건 역할극의 범주 안에서 작동하며, 곧 희곡 내 지문의 법칙이 인계되는 차원에서 배우는 그야말로 역할로 ‘분화’된다는 점에서, 오히려 역할이 배우를 초과하게 된다, 그 반대가 아니라 말이다.
따라서 환과 욱의 캐릭터는 결코 배우로서 초점화되거나 결정되지 않는다―A-환+B-욱과 A-욱+B-환의 차이가 어떤 합목적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흔들리는 건 역할도 배우도 아닌, 관객의 지각이다. 그리고 그 둘의 뒤바꿈 때문만이 아니라, 그 둘의 뒤엉킴 때문에 누가 환과 욱에 대응되는지에 대한 지각 불가능성에 놓이게 된다.
환의 일지는 ‘번갈아’ 읽어지며, 화자로서 욱의 말 역시 그러하다―그리고 중반에 이르러서는 환의 역할과 욱의 역할이 바뀐다, 정확히는 곧 A와 B가 바뀐다(이는 역할의 불확정성이 아닌, 배우의 가변성을 나타낸다.). 이것은 일종의 ‘그’ 대사를 내가 임시로 지금 한다라는 개념을 드러낸다―이것이 〈화성에서의 나날〉이 일종의 (입체) 낭독극처럼 느껴지는 이유이다. 그럼에도 더 본질적인 건 A를 B가 지켜본다는 것이다, 그 반대가 아니라 말이다.
환이 다시 지구로 귀환하는 장면, 곧 선명한 미래를 꿈꾼다면, 욱은 부정성 자체를 체현하는데, 애초에 삶에 대한 의지가 없이 우주선에 탑승했기 때문이다. 환이 삶 충동을 보여준다면, 욱은 죽음 충동 자체인데, 그것은 화성이라는 지구와 떨어진 곳에서 우주 미아가 되는 불쾌하거나 불길한 그 상상의 추동력을 그가 대리하고 있음과 같다.
따라서 무의미한 시작에 대해 그것을 끊임없이 부인하며 강박적으로 새로움의 활기를 찾는 인물로서 환이 주동인물의 동기를 가져간다면, 그리하여 바라봐진다면, 욱은 그것을 보는 이이며, 이 무한한 우주 공간을 영원한 시간의 차원으로 상기하는 어떤 배경적 차원에 머물러 있는 듯 보인다.
무엇보다 욱은 시선을 외재화, 비현실화하는 진정한 ‘화자’이고―환이 일지를 쓰는 자로서 공식적 저자라면―, 환이 기능적 차원의 두 배우의 나눔이라는 공식을 경유하며 그것을 함께함에도 여전히 화자, 곧 1인칭 관찰자 시점에서의 “나”로서 남는다.―그런데 이 지점 역시 A와 B의 전도 안에서 뒤집힌다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그로 인해 역할에 대한 전제 조건이 반대로 적용됨은 근본적으로 역할의 달라짐이 아니라 단지 고정된 역할에 대한 배우의 달라짐만을 초래할 뿐이다.
죽음과 애도의 기원적 순간
이 둘의 마지막 기계적 고립은 우주선의 ‘숨’이 다해 이들의 죽음이 기계적 균등함 아래 상징적으로 처리됨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내려오기 전, 곧 경계는 명확해지기보다 무한하게 확장하는데, 먼저 샤막 넘어 무대 끝 단 구석은 화성의 표면이 되며, 마침내 화성에 발을 디딘 B가 낯선 생명체에게 말을 거는 장면이 펼쳐진다. 이때 안쪽, 패널 쪽 스피커의 소리는 스피커가 튀는 노이즈와 그 바깥으로의 외부적 차원은 동조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저곳은 불길한 곳이 된다.
곧 소리가 내부―일종의 심리적 차원의 배경음으로 기능하지 않는다.―와 외부를 가르는 것이 아니라, 소리의 물리적 간격 또는 시차가 저곳에서의 소리가 없음을 지각하게 하는 지점에서, 외부는 마치 구렁텅이나 심연의 깊이로 측정된다. 따라서 우주선 바깥의 화성이 환영적이면서도 실재적으로 출현하게 된다. 이는 지구에 마침내 도착하게 되었음에서, 객석으로 옮아간 B, 그리고 비가시화된, 외화면의 A의 음성, 그리고 2층 객석으로 확장되어 등장한 A에서 그것이 다시 꿈이었음을 알리면서 그 둘은 무대로 귀환한다.
폐쇄된 우주선과 열린 지구의 한정된 구역과 확장된 구간의 차이는 비일상의 무대와 일상에서 연장된 객석의 차이로 점화된다. 이때 관객의 대리 현전으로서 비어진 자리들의 현상, 이 텅 빈 지구의 차원으로서 극장은 그 전의 전제에 따르면, 일종의 불길한 농담의 구현, 곧 지구가 충실한 존재들의 숲이 아니라, 폐허와 부재의 늪으로 전도되었음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을 맞이할 이들 자체가 소거된 상황을 즉물적 차원의 농담으로 보여주는 것만 같다. 그 둘의 현전은 더 고립되고 갇힌 세계의 차원으로 부각된다.
그 둘은 지구에 꿈을 경유해 도착되었을 때, 또는 그것을 가정하고 진지하게 혼동하게 되었을 때, 화성에 두고 온 것들을 생각한다. A는 혁이를 떠올린다. 우주선의 운석 충돌로 기체 균열 확인을 위해 우주선 바깥으로 나가게 된 혁은 우주선과 연결된 생명줄에 매달린 채 우주 미아가 된다. 이때 의자 위의 A에게서는 하염없이 절박하게 혁을 마주하는 눈빛의 우주선 내부의 존재와 기약할 수 없이 멀어지며 우주의 미아가 되어 가는 혁의 신체 자체의 부유함이 절합된다.
장면의 흐름을 살펴보면, 먼저 A의 몸에는 환과 욱의 뒤바뀐 역할로부터, 욱이 표현된다. 그리고 혁에게 손을 뻗는 욱(A)과 환의 절박한 몸짓과 혁이의 반향적 몸짓 모두 A에게서 결정된다. A를 투과해 화자로서 남는 B를 벗어나 그 셋을 한데 놓는다. 욱이 혁 쪽으로 몸을 던져 혁이 가까워질 때 욱의 몸짓과 혁의 반대편 신체는 그것 안에 ‘연속적으로’ 있다. 곧 역할(들)의 모호함은 표현의 잠재성을 끌어올린다. 욱은 A로서 손을 뻗고 바로 B로서 혁이 손을 뻗음이 지시될 때, A는 욱에서 혁으로 변환된다. 그때 나는 튕겨나가고(A), 혁은 멀어질 때(B), A는 내재적인 차원에서, 욱의 멀어짐이 혁의 멀어짐으로 변환됨을 간직한다.
그리고 이때 기본적으로 재현 대상의 범주에 있는 혁은 여전히 완전하게 가시화되지는 않는데, 혁이의 평소 티 없는 밝음은 어떤 원한 감정으로도 변하지 않은 채 ‘우리’를 극한의 두려움과 공포를 담고 있기보다는 마치 텅 빈 그리고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는 데 가깝다고 막연하게 추정될 뿐인데, 추정이라 함은 곧 그가 ‘표현’되지 않기 때문이다―그리고 더 결정적일 수 있는 건 그가 ‘다시’ 표현되지 않기 때문에 그는 어떤 순진무구한 상태 그 자체로 동결된다. 동시에 그렇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결정적으로 드러나는 것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이 표현되지 않는 건 결정적으로 그를 정확히 묘사하는 것이 불가능한 그 바깥의 상태에 기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적어도 그의 눈빛이 우리를 향하고 있으리라는 이 추정, 생명줄을 대신하는 상대의 행위에 대한 절대적 의존의 차원에서 자연스러운 이 추정에도 불구하고, 그의 상태가 결코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은 이 부분을 설명할 수 없는 지점에 그들이 존재한다는 것, 곧 그 ‘바깥의’ 신체들 역시 그를 구하지 못하게 될 것에 대한 극한의 상태에 처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절박함의 시선은 반대로 우리의 몫에 더 가까울 수 있고, 실은 우리의 몫이다.
그렇기에 혁의 무정형적 시선, 곧 그의 시선이 마치 우리보다 ‘덜’ 할 것이라고 추정함은, 실은 그의 진정한 상태에 대한 우리의 착각이 아니라 혼란을 말하는 것 아닐까. 곧 우리의 패닉 상태가 사후적으로도 역시 수습할 수 없는 무력함의 상태가 도착된 결과가 아닐까. 그러한 패닉의 결과는 실은 그의 상태를 지정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상태를 다르게 기억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곧 혁의 마지막 시선은 우리의 무의식 아래 봉쇄된다. 동시에 그의 ‘무력함’ 역시 언어화되지 못한다, 될 수 없다.
하지만 반대로 그의 무력함이 보여주는 어떤 시선 아래 갇힌 생각들 역시 그것과 함께 봉쇄될 것이다. 그는 우리와 달리, 죽음 ‘직전’이 아니라, 죽음과 함께 있다. 결과적으로 〈화성에서의 나날〉은 이후, 그 모든 것이 죽음에 대한 애도 불가능성의 차원에 닿아 있다. 그리고 이는 환의 여자 친구와의 헤어짐과 욱의 가족을 잃어버림의 사실로 연장된다. 그러니까 지구로 다시 돌아왔을 때를 가정했을 때 역시 화성에는 영원히 혁이라는 그림자가 남고 소환된다. 지구의 저 너머로서 화성은 불완전한 실재로, 결여로 우리를 침범한다.
현재에 대한 근미래
〈화성에서의 나날〉은 되풀이하는 시작의 무의미성과 필연성으로부터 시작된다. 환과 욱은 역할극의 두 배우가 되고, 그것이 연기라고 하더라도 삶을 이겨내는 하나의 힘이자 의례적 주술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처음, 이 탐사의 배경은 곧 지구에 대한 성찰로서 드러난다. 그들의 역할 놀이 안에서, 이들은 지구에 대한 주석을 다는 데 가장 적합한 역할임을 동시에 드러낸다. 2038년 이후 인구는 90억 명으로 그 전의 계속된 성장세를 멈춘다.
그리고 기온이 상승하고, AI가 발전하여 인류와 적대하며 전쟁이 발생하고, 여러 재난의 씨앗을 함축하며 2068년의 지구는 1968년과 똑같은 인구를 보인다. 그리고 물을 지닌 소행성과의 충돌로 인해, 인류를 위한 이주 차원에서 화성 탐사의 목표가 생겨난다. 여기까지 이야기는 매우 핍진하며 지루하고 어떤 긴장과 충격도 전해지지 않는다. 그것은 지난 역사의 상투적 나열이며, 이 둘의 삶 바깥의 주어진 당연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정작 중요한 건 이 당면한 현실의 불후함의 정도가 아니라, 이 불후한 조건이 당연한 것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상상은 그에 어떻게든 보족될 수 있는 차원이다.
그들의 근미래는 물론 지구로 돌아가는 꿈이며, 이는 마지막 장면으로 구현된다. 그러니까 그것은 7인의 화성 우주선 탑승 멤버 전원이 지구로 돌아가서 각자의 삶을 영위하는 꿈이며, 그것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그들이 화성에서의 죽음에 대한 각자의 무의식적 반동의 결과로 보인다. 곧 마침내 B-욱이 화성에서의 삶을 통해 죽음충동의 실재에 직면한다면, 환/욱-A은 B-욱과 함께 지구로 나아갔다 다시 그것이 꿈이었음을 확인하는 화성 우주선 공간으로 돌아오며, 최종 욱으로 낙착된다.
이때 B-욱은 A-환으로 사후적으로 재조립된다. 그런데 이는 처음으로 B-욱이 결정적인 주체로 현상되는 지점, 곧 ‘마침내’ 화성이라는 무대 경계의 공간에 위치하며 단독적인 주체성을 확보하는 순간 이후에, 계속된 둘의 엎치락뒤치락 하는 교잡의 이행이 벌어지고, 마지막으로는 A와 환의 자연스러운 연결을 전복하는 것, 곧 ‘B-환’으로부터 그 말은 앞선 욱의 존재로 결정되는 것이다―하지만 이 역시 B-욱에서의 연결이다. 곧 환과 욱이 아닌 오직 단독자 욱만이 그 실재적 가상의 시간으로부터 뻗쳐 나오는 것이다.
환과 욱의 상호 침투성
욱의 처음이자 마지막 일지로서 내레이션은 ‘욱이 아닌 환’에 의해 발화된다. 이는 진정한 끝은 환이 아니라 욱에 의한 것임을 바꾸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일 수 있는데, 그동안 환의 일지가 A와 B가 교차하는 식으로, 곧 자의적으로 발화되는 것 같았다면, 욱의 일지는 최종 (B-환을 거쳐) ‘A가 아닌 환’으로 수렴한다. 이 작업이 대개 그렇지만, 일지는 과거의 것이며, 당사자가 아닌 이에 의해 발화될 수 있다. 그래서 그것은 아마도 환이 마지막까지 살아남았음을 보증하는 것이 아닐 것이며, 욱의 마지막 이후의 시간을 암시하는 것 역시 확신할 수는 없는데, 다만 욱의 최종 발화를 그를 떠나, 더 보편적인 차원으로 바꾸는 것은 확실하다.
곧 환을 통해, 객관성의 형식을 담보하며 하루하루 견디기 힘든 지난함과 공포를 오가는 일지는, 마침내 추상성의 어떤 이념, 작품의 주제의식이 발화되는 지점에서, 욱의 내면이 예외적으로 기입되며, 그것을 A가 대신하는 건 그것이 곧 A-욱과의 잦은/우연한 자리바꿈의 일부로 다시 돌아갔음을 의미하기보다 그것을 초과하며, 이 말은 그 마지막 욱이 ‘현재’ 발화할 수 없는 말이며, 그것은 텅 빈 기호로서 A-환(의 재출현)이 B-욱의 이후 지점에서 발화를 대신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그런데 그 마지막 발화는 “왜 살고자 하는 이는 죽고, 죽고자 하는 이는 살아남는 걸까. 어쩌면 죽고자 하는 이가 살고자 하는 이의 꿈을 먹고 살아서일지도 몰라.”로, 이는 전자인 죽은 환과 후자인 살아남은 욱 자신의 이야기를 A(-환)에게 건네줌으로써 환 자신의 죽음을 각성하는 것으로 읽힌다. 그리고 이는 다시 환과 욱의 불가분성을 상정하는 한편, 마치 그것이 욱의 슬픔이나 반성이 아니라 환의 욱에 대한 긍정과 자신에 대한 반성으로 오히려 전도되는 차원에서, 환 역시 욱과 대별되는 존재가 아니라, 마침내 죽음을 수용하는 어떤 결론을 선뜻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김민관 편집장
2026.05.22 ~ 05.31 화~금요일 19:30 / 토~일요일 15:00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연출 윤성호
작가 윤성호
출연 강희제, 백종승
무대 디자인 서지영
조명 디자인 김성구
음형 디자인 임서진
영상 디자인 김성하
의상 디자인 김미나
조연출 지수정
움직임 이윤재
무대감독 이지혜
드라마투르그 성기웅
사진/그래픽 보통현상
기획/홍보 (주)스탭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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