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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세덕 원작, 이철희 재창작·연출, 〈삼매경〉: 〈동승〉의 재창작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REVIEW/Theater 2026. 6. 12. 00:11

    〈동승〉의 보존적 이행

    함세덕 원작, 이철희 재창작·연출, 〈삼매경〉[사진 제공=국립극단](이하 상동).

    〈삼매경〉은 일종의 화두의 연극이다. 연기는 수행으로 비유되며, 연극은 해탈을 향한 길이며, 〈동승〉은 그 화두를 제시하고, 또한 그 화두의 형식을 정초하며, 그에 따라 〈삼매경〉은 연극과 불도의 삶을 평행선상에 두고, 연극을 불교의 진리에 대한 담지체로 승화시키고자 한다. 이는 매우 독특한 두 세계의, 그리고 〈동승〉과 〈동승〉의 다시 쓰기의 상호 교착된 세계를 현상한다. 

    〈삼매경〉은 극 중 〈동승〉의 서사를 접합해, 〈동승〉의 실제 서사가 한 축에 있고, 이를 연기했던, 그리고 그 역할을 완전하게 연기할 수 있도록 소원하며 그 과거의 순간을 만나는 배우의 서사가 그 바깥에서 주요한 축을 이루는데, 이는 단순히 〈동승〉이 극 중 극으로 삽입되는 형태로 드러나지 않음을 의미한다. 〈동승〉은 그 극이 갖는 독립성, 자족성, 완결성 안에 스스로 내속적이며, 따라서 그 바깥의 서사로부터 매개되거나 그 경계선상에서 접근하는 것만이 가능하다. 〈동승〉의 어린 도념은 도념으로 ‘고착된’ 지춘성 배우에 의해 현재로 연장되며, 〈동승〉은 극이라는 형식으로 이행된다. 

    상연은 그것을 현재의 연기하기의 몫으로 새롭게 전유하지만, 그 본래의 서사를 바꾸거나 하지는 않는데, 이말인즉슨 그 세계가 현실로 인해 그 세계 자체로 성립한다는 걸 의미한다. 바로 이 부분이 〈삼매경〉이 메타 연극으로 불릴 수 있는 지점인데, 연극을 연극으로써 그 연극으로서 불러오기 때문이다. 또는 연극이 연극 안에서 실재로 보존되기 때문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한 연극의 다른 연극의 인용의 차원보다는 두 개의 세계의 평행우주적 정립으로 드러나며, 지춘성은 그 사이를 여행하는 그 두 세계를 동시에 인지하고 거리를 둘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 나타난다.  

    하나의 대본이 있고, 그 서사를 온전히 구현할 때, 즉물적으로는 대본의 절대적 지침의 속성 아래 대본의 내용을 온전하게 구현하려는 이념으로서 그 현실이 존재할 때, 연극이라는 형식이 실재로 ‘느껴지는’ 만큼 연극의 내용은 어느새 연극의 형식 안에서 주어지는 것임을 망각할 정도의 실재가 된다라는 건, 결국 극 중 극이라는 형식을 가리키기보다는 근본적으로 연극이라는 규칙을, 연극이 인가하는 연극의 실재로서 환상의 성격을 이중으로 쓰는 것이 된다. 

    〈삼매경〉은 여기서 연극에 대한 숭고함, 절대성을 부르짖으며 배우의 현존을 절대적 지위로 상정하려 한다는 점에서, 연극을 대하는 다분히 고전적인 태도와 낭만성에 입각한다는 인상을 안긴다. 이는 〈삼매경〉이 지춘성 배우에게 수여하는, 지춘성으로부터 유래하며 그로부터 자리 매김될 특정한 위치를 전제하고 있음에 상응한다.

    결과적으로, 〈동승〉과 〈동승〉의 바깥, 곧 원 소스 연극과 그 연극과 평행우주를 구가하는 현실로서 연극 사이에서, 그 둘을 포함한, 그 사이를 구상하는 〈삼매경〉이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그 정점에는 물론 지춘성 배우가 있는데, 과거의 〈동승〉과 현재의 〈동승〉 그 모두를 오가면서 그것과 경계를 그릴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조금 더 연극에 대한 〈삼매경〉의 관점을 보여주는 차원에서 접근될 수 있는 부분인데, 〈삼매경〉은 곧 〈동승〉으로부터의 시작과 함께 지춘성이라는 배우로부터 시작되며, 이는 배우의 현존이라는 연극의 이념으로서 〈삼매경〉이 성립함을 의미한다.

    ‘지춘성’이라는 매듭점

     

    자기 지시성을 띤 지춘성은 어린 도념 역의 역할에 함몰되어 있는 도념을 연기하는 배우이면서, 어린 도념의 모성에 대해 희구하던 서사가 침범한 현실의 서사, 곧 저승에서 어머니를 해원하며 어린 도념에서 자라난 현실의 도념이기도 하다. 나아가 〈삼매경〉은 지춘성을 현실의 배우라는 바깥의 고유한 존재로 이 극에 침투하게 하는데, 곧 지춘성이 자신의 현존 자체를 연극에 투여함은 〈동승〉이라는 이데아를 벗어나 실제 〈동승〉에 출연했던 지춘성 배우의 실존을 더하게 된다―배역과 존재의 현실 사이의 혼동을 불러온다. 하지만 그 바깥에서 지춘성은 자기 지시됨을 크게 어긋나는 정도로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그는 지춘성의 고유함을 지춘성에게 환원할 수 있다. 지춘성의 아우라, 배우 됨을 보존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 연극을 다시 기억 속에 헤집어 꺼내어 기억할 수 있는 미래를 관객에게 예고하며 인계하는 장면은 〈삼매경〉을 연극으로서 지시하며, 연극의 표면을 연극의 바깥과 구분(하며 연극의 실재를 전)한다―연극으로부터 ‘연극’을 꺼낸다. 또한 연극 안의 연극, 곧 〈동승〉의 바깥으로 〈삼매경〉을 온전히 추출하는 동시에 그 ‘대등한’ 연극들의 독립된 계열을 설립한다. ‘이것은 (너의 최후의) 연극이다! 그리고 그것은 (새로운) 하나의 정전이다!’ 그 연극이 삶의 일부로서 성립하는, 침투하는 차원에서만 유의미함을, 곧 연극이 삶 바깥에 있지 않음을 전제하는 차원에서 메타 연극은 곧 삶의 경계선상에서 지시되는 연극, 더 정확히는 연극 너머의 연극을 말한다.  

    〈동승〉이라는 삼투압 작용

    〈삼매경〉은 ‘〈동승〉의 재창작’으로 갈음된다. 원작과 재창작 사이에 다른 기호가 놓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여기서 “재창작”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조금 더 적극적인 차원에서 두 작품은 상호 관여되는데, 그것은 주체와 대상의 관계적 양식 아래 있다. 곧 〈동승〉은 대상 차원, 곧 실재의 차원에서 〈삼매경〉이라는 주체의 화두에 가깝고, 그 화두는 구체적으로 존재론적 연기의 양식을, 삶의 본원적인 진리의 차원으로 인계된다. 그러니까 〈동승〉을 〈삼매경〉은 받아쓰기하며 그것을 해석하며 현재의 차원에서 다시 쓴다. 

    현실은 그 세계 바깥에 있지만 그 세계의 서사로부터 성립한다. 〈동승〉을 쓰는 건 그 바깥의 현실 세계이지만, 그 현실 세계가 〈동승〉으로부터 쓰인다―〈동승〉의 쓰임을 〈삼매경〉이 쓴다. 결과적으로 ‘연극의 내용과 연극이라는 형식이 만난다.’ 그리고 ‘연극의 내용이 연극이라는 형식의 내용으로 연장된다.’ 크게 이 두 개의 전제 아래 〈삼매경〉은 진행된다. 처음 어린 도념과 도념의 만남이 시작이다. 이곳은 어린 도념의 세계에서 절이며 수행의 물리적 장소이다. 반면 도념의 세계에서는 어린 도념을 자신의 이전 배역의 자리로서 마주하려는 정념과 그 극복의 일념이 담기는 정신적 도량이 된다. 

    주체는 연극이라는 형식 차원에서 극복하고자 하지만, 그 내용의 형식을 통해 그것은 도달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배우의 실존적 양식이 불자의 수행적 양식과 조응함을 나아가 일치함을 의미하며, 〈삼매경〉은 불교의 연기적 세계관을 역할들로서 배우의 몫, 유동하는 자아들을 담는 텅 빈 그릇으로서 배우의 자리로써 선취한다, 또는 대체한다. 이는 역할 안에서 역할로서 지춘성의 해방을 의미한다. 이러한 “해탈”은 결국 〈삼매경〉이 〈동승〉을 경유해 〈동승〉을 실재론적 차원에서 다시 완성함을 의미한다. 곧 ‘재창작’은 〈동승〉의 내용적 차원에서의 불교에 대한 진리를 〈동승〉을 수행함으로써 연극의 형식으로서 진리로 승화시킴을 말한다. 

    연극이라는 수행의 장치

    불교적 수행의 차원은 어린 도념과 도념이 만나기 직전, 코러스의, 수행자들의 첫 등장에서 현상학적 신체가 공간 전체로 확장된 경험을 전하는 것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드러나는데, 이들의 박수소리는 공간의 울림을 현상하고, “아 아”라는 같은 음조로 감정 없이 같은 소리를 일정한 리듬 단위를 단속적으로 반복해서 내뱉을 때 소리 울림의 효과는 기본적으로 정면성을 이룬 신체 단위들이 약간의 신체 변동을 주는 것에 의해, 가령 다리를 좌우로 한 번씩 트는 동작만으로도 공간 전체의 소리 반향이 급격하게 다른 운동성의 효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는 수행 자체의 존재에 방점이 찍히기보다, 존재와 어쩌면 사물과 관계 맺는 이 공간, 세계, 현실이 어쩌면 공으로 이뤄져 있음을 알리는 데 초점이 있다고 하겠다. 첫 등장 장면이 일종의 공이라는 메시지 자체라면, 그 공으로서 세계의 현상은 역으로 일종의 배우의 현존으로부터 성립하는데, 곧 배우와 세계 사이에는 텅 비어 있으면서도 충만함의 사실을 그로써 전달하는데―배우는 얽매이지 않은 텅 빈 존재이며, 또한 세계의 진리로 가득함을 담는 그릇이다.―, 이는 어린 도념의 말을 경유해, 연극의 지문이라는 시간과 시간의 사이, 비어 있음의 시간, 동시에 관계와 관계의 잠재적 연결 가능성이라는 곧 공(백)이자 충만함이라는 곧 연극이 담지한 진리의 차원으로 결정된다. 

    이어 둘이 다도와 함께 마주하는 장면에서, ‘네가 되지 못했던 것 같다’는 도념의 어린 도념에게 전하는 말은, 처음에는 일종의 화두이며, 결과적으로는 이중적으로 또 복합적으로 읽히는데, 도념이 배역으로서 그것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으며,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12,410일, 곧 34년 동안을 성찰하는 한편, 어린 도념이 구제받지 못하는 숙명의 부정적 차원의 종결이 도념의 삶을 한정 짓는 가운데, 거꾸로 어린 도념도 그 운명의 굴레를 반복하게 됐음을 의미한다. 

    곧 도념의 자기 구제는 연극의 다시 쓰기를 통해 어린 도념이 온전하게 되는 순간,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음을 의미하는데, 역할에 대한 충실함, 온전함, 완성의 차원은 연극‘을’ 다시 쓰기, 곧 반복하기이지 연극‘에 대한’ 다시 쓰기가 아니라는 점, 곧 결말은 그 여전히 충실한 몫이며, 하나의 화두이며, 오히려 그것을 삶에 대한 깨달음으로 진정 수용할 때, 바라볼 수 있을 때 그 연극이 제대로 완성될 수 있음에서 그친다. 

    여기서 연기는 그 순간에 대한 충실함을, 자신에 대한 직시를 의미하는데, 일종의 수행으로서 연기는 그 역할의 내재적, 내용적 차원의 삶을 다시 바라보며 그것을 연극의 진리 차원에서 수용할 수 있도록, 그리하여 그 속의 인물의 삶의 해원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든다. 그것은 결국 연극의 내재적인 차원이 아닌 또 다른 연극의 진리를 산출하는데, 연극은 그것을 바라보는 이―관객―의 몫이라는 것, 그것의 완성은 연극의 내재적 차원에만 있지 않으며, 그것을 바라보는 이의 현재적 완성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승〉을 넘어 〈동승〉이라는 너머로

    〈삼매경〉은 〈동승〉이라는 허구의 세계와 결착되며, 그것의 연장된 세계(관) 아래 이행된다. 연기는 〈동승〉에서의 동시에 〈동승〉과의 연기론적 세계를 푸는 결정적인 형식이며, 그로써 극을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게 하는 연기는 동시에 그 바깥에서 삶을 새롭게 영위할 수 있는 근거로 정립되어진다. 이 같은 메타픽션적 허구에는 〈동승〉 안팎의 인연의 매개 대상이 결정적으로 자리하는데, 이는 (어린) 도념의 어머니로, 도념이 저승으로 가서 삶을 반추하는 데, 그리고 어린 도념의 그리움과 갈망의 실재적 대상―〈동승〉의 역할 그 자체―이자 그것의 빈 자리를 현상하고 채우는 해석적, 현재적 인물이다.  

    이는 〈동승〉에서 도념을 버리고 간 어머니의 환상적 대리물로서 그를 입양하려는 미망인이 결국 도념의 꿈이 어머니에 대한 선물로서 꿈꾸었던 하얀 목도리를 짜기 위한 토끼 여섯 마리의 살생이라는 죄악이 드러남에 따라 그 환상이 실패함에 따라 완수되는 어머니의 부재라는 숙명, 동시에 어머니로서 미망인이라는 존재의 합치, 또는 미망인의 어머니 역할의 완수라는 진리는, 30여 년 전 도념이 성취하지 못한 어린 도념으로서 역할에 대한 위안과 그 고통의 곁에 그 혼자가 아니었음을 알리는 현재의 어머니로 전이되어 충만한 몫으로 돌아오며 〈동승〉의 바깥에서 어린 도념을 동시에 향한다. 그 위로는 어린 도념을 향한 불가능한 위안인 셈이다. 

    이는 저승, 죽음이라는 하나의 차원을 더함으로써 가능한 실재(적 환상)인데, 이는 반대로 〈동승〉의 꿈, 희망 역시 일종의 불가능성의 차원에서만 실천될 수 있음을 함께 성립시킨다. 다시 반복하면, 〈삼매경〉은 〈동승〉을 보존하면서 〈동승〉을 다시 쓴다. 그리고 그 다시 씀을 통해 〈동승〉에 다다른다. 그리고 그 다다르는 이로서 ‘지춘성’이라는 배우의 현존을 집요하게 구가하고 실험한다―아마도 이는 이 극의 현란함과 복잡함을 넘어 무엇보다 관객의 현존에 소구되는 부분일 것이다. ‘어린 도념’의 부산물이자 ‘지춘성’이라는 잉여의 사이에서. 

     

    김민관 편집장 

     

    2025.07.17 ~ 2025.08.03 평일 19시 30분|토·일 15시 (화 공연없음) ※ 7.31.(목) 공연 없음 (무관객 영상화 촬영) ※ 접근성 회차: 7.26.(토)-7.28.(월) / 음성해설, 한국수어통역, 한글자막해설, 사전 대본 열람, 이동지원, 무대 모형 터치투어

    명동예술극장

     

    만드는 사람들

    원작 함세덕
    재창작·연출 이철희

    무대 이태섭 ㅣ 조명 김창기
    의상 오수현 ㅣ 분장 장경숙 ㅣ 소품 정윤정
    음악·음향 이승호 ㅣ 움직임 이경구
    조연출 송은혜 ㅣ 제작진행 이신영

    출연
    지춘성_도념 役
    고용선_노인 외 役
    곽성은_엄마 외 役
    김신효_총각 외 役
    서유덕_초부 외 役
    심완준_연출 외 役
    윤슬기_조연출 외 役
    이강민_경태 외 役
    정주호_과부 외 役
    정홍구_길잡이 외 役
    조성윤_어린 도념 외 役
    조영규_주지 외 役
    조의진_정심 외 役
    홍지인_새댁 외 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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