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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차야 아르타맛 Witchaya Artamat, 〈반 쿨트, 무앙 쿨트: 숭배에 관하여 Baan Cult, Muang Cult〉: 숭배를 기호화하기 또한 굴절시키기REVIEW/Theater 2026. 6. 12. 00:11

위차야 아르타맛 Witchaya Artamat, 〈반 쿨트, 무앙 쿨트: 숭배에 관하여 Baan Cult, Muang Cult〉[사진 제공=서울국제공연예술제](이하 상동). 위차야 아르타맛의 〈반 쿨트, 무앙 쿨트: 숭배에 관하여〉(이하 〈반 쿨트〉)는 태국의 평범한 일상의 단면을 마치 해부하듯 보여주는데, 물리적으로 접면하면서 내재적 차원에서 어떤 연결성도 없는 독립된 차원의 두 개의 방―빨간 카펫 위에 두 여자가, 초록 카펫 위에 두 남자가 있다.―이 조응한다는 사실은, 이 둘을 종합하는 대위법적 차원의 초재적 위상을 전제하며, 이 조응의 사실이 하나에서 다른 하나를 비추는 일종의 거울상으로 기능함을 의미한다. 관객은 두 개의 방에서 하나를 더 가깝게 볼 수밖에 없는데, 곧 가까운 곳을 경유해 먼 곳을 봐야 한다. 또는 이 가까운 곳의 나머지만큼 먼 곳을 더욱 불확실하게 보게 되는데, 이는 이 두 현실이 중첩되면서 또렷해지기보다 불투명해지는 결과에 상응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일상들 자체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연출의 의도가 자연히 그 둘의 종합 외에는 없다는 점을 수용해야 한다. 이러한 시선의 (문법적) 종합 혹은 (권력적) 장악은 실재적인 재료들을 근거로 한 (물리적) 편재 혹은 (시간적) 병치의 차원을 오히려 더 단순한 것으로 다시 정의하는데, 형식적 차원에서는 분명한, 하나의 의도만이 있다는 지점에서 실재의 무대적 변환이 허용될 수 있다는 전제를 윤리적 차원에서 통과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종합이 산만함으로서 포집하는 실재의 파편들은 거의 50분에 육박하는 시간 동안 일정하게 무대에 투하되는데, 곧 여러 재료를 손질하고 라면을 끓여 먹는 두 중년 여성과 땅바닥에 얼굴을 처박듯 위치해 장난치고 게임을 하는 두 청소년의 행동을 무심하게 지켜봐야 한다.
만약 그것이 하나의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틀에 의해 ‘구속’되지 않았다면 그러한 사실을 우리는 충분하게 깨닫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하나가 다른 하나의 거울로 ‘축소’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경계 안에 두고 개별 행동의 의미 없음의 의미를 완전히 수용하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들의 행동이 진정 실재적일 수 있는 건 그것의 자연스러움이 문법과 관음증적 시각의 차원에서 획득되기 때문이다. 이는 뒤집힌 관점을 주는데, 곧 우리가 그것을 형식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건 그것이 자연스럽지 않아서가 아니라 실재적이라는 믿음에 근거하게 되는 것이다.
단속적으로 변경되는 라디오 채널의 방송은 이 실재의 조각들보다는 분명한 내용들을 가지지만, 그것은 단지 라디오라는 형식을 충족하는 차원에서 무관심의 효과를 낳는다. 더 정확히 이 무관심은 그 라디오에 접속되지 않는 이 넷의 행보에서 체현된다. 따라서 태국의 군주제, 종교, 국가 등의 절대적 권위에 대한 숭상이 단지 이데올로기적 차원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그러니까 너무나도 익숙해져 무의식의 심연에서 그것이 흘러가고 있음을 더욱 명확하게 가시화하는데, 그들은 더 이상 그 말에 경도될 필요도 신경 쓸 필요도 없을 정도로 그것과 친밀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겪는 건 라디오라는 소외 효과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라디오를 듣고자 하는 우리 자신의 소외이다.
대타자로서 목소리라는 형식과 그것의 무의식적 잔향으로서 비가시화된 내용에서, 우리가 착각할 수 있는 건 그 목소리를 내용으로 상정하는 바로, 그 체현된 이데올로기와 현실의 간극이 비로소 이국인의 어떤 객관적 시선 아래 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수직으로 내려온 문 장식들이 일종의 투명한 벽으로 이들을 구획 짓는다면, 거기에서 가장 높은 곳에 걸린 액자 하나보다 ‘훨씬’ 높은 곳에 위치한 자막은 그것이 위로부터 지배적 효과를 산출하는 내레이션과 동기화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 과잉된 위치의 의미는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수직 상승한 라디오와 현실의 이미지 사이의 물리적 차원에서의 낙차는 이내 라디오로서 내용과 현실이라는 형식의 불가능한 종합의 간극으로 특수하게 옮겨진다, 곧 이국인이라는 신체 자체로.
남자들은 아버지로부터의 감금을 놀이로 풀어낸다. 방에서 나가지 못하게 한 그 존재는 이곳에 없다. 이데올로기가 무의식적 지층에 있듯 이곳을 나가고자 하는 이와 못 나가게 하는 이 사이에서 벌어지는 게임은 이 아버지 없음의 차원에서 아버지라는 금제를 더 명확하게 수행하는 것이 된다. 출구 없음의 공간, 닫힌 공간은 지극히 사적이지만 강압적인 아버지, 초자아격의 아버지의 지배적 서사에 붙들려 있다. 기억의 조각들로 연결되는 아버지와 처음으로 자위를 하다 아버지가 집에 들어옴으로써 황급하게 대처해 보지만 두들겨 맞았던 기억은, 둘의 섹스로써 진정 승화된다.
그러니까 성적 쾌감의 위치에 죄책감의 감정이 중첩되었던 왜상의 자리는 아버지의 언어를 끌어오며 선취함으로써 비로소 섹스의 위치로 소급될 수 있다. 그것은 죄책감을 쾌감으로 전치시키는 것이라기보다 죄책감이 곧 쾌감의 원천임을 드러내는 것으로, 그럼으로써 아버지를 기각하는 대신 체현하는 것이다. 여기서 아버지는 오히려 성적 대상에 가까운데, 이는 둘이 밀고 당기다가 떨어뜨려 놓쳐 버린 불상이 주는 기이한 쾌감, 그것이 반성적 대상이 아니라 단지 딱딱한 결정에서 풀려버린 채 바닥의 흘러내린 불순물로 방치되고 마는 것은, 또 다른 자위행위의 양상과 같다.
그것은 반복된 기호 작용이면서 재상연이다. 아버지의 금제가 쾌락으로, 또는 딱딱한 성기가 흐늘거리는 성기로 전치되는 어떤 순간은 순전히 자의적이고 비의도적이다. 그것의 의도치 않은 상연과 통제되지 않는 성에 대한 곤궁은, 아버지의 위치가 우스꽝스러운 것의 지위로 떨어지게 되는 것, 훼손되는 아버지의 지위로부터 불유쾌한 성의 경험 아래 펼쳐진 한 편의 트라우마적 드라마는 종착의 근거를 얻게 된다. 숭배의 대상으로서 부처는 (정액이 방사된) 미끄러운 것으로, 딱딱하기에 부러질 수 있는 것으로, 되돌릴 수 없는 결정의 전사로 기입되는 순간, 아버지의 자리 역시 상연의 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부처를 끌고 오는, 영화 〈리틀 부처〉에서 부처 역을 맡은 키아누 리브스로부터 섹시함을 느낀 여자아이와 달리, 그는 진짜 불상이 더 섹시하다고 느꼈던바, 불상에다 자위를 했던 경험에서 아버지
반면, 여자들의 관계는 하녀의 계급적, 사회적 지위에 대한 자기 지시적 차원에서 놀이의 양상에서 수행된다. 하녀로서 수상소감을 말하면서 하녀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하녀를 사회적 역할로 제고시키는 건 두 여자 사이의 돌봄의 관계를 통해 지지되는데, 곧 하녀로서 발화하기 위해 ‘하녀’의 실제적 지위를 충당하는 그 둘의 관계는, 실제 그 둘이 하층 계급에 속하며, 따라서 그것이 스스로들을 격하시키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격차를 적극적으로 놀이의 요소로 삼는 가운데, 일시적으로 해방감을 얻는 것임을 드러낸다.
예외적으로 두 독립된 방에서, 한 남자의 가로지름이 발생해 여자들이 조리한 라면을 가져오는 장면은, 일견 처음부터 이곳이 연결되었었다는 오지각을 안기는데, 이러한 횡단은 그 여자들이 그것을 어떤 사건이나 실재의 침입으로 인지하거나 경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곧 마치 비가시적인 것처럼 수용된다는 점에서, 오히려 오로지 각자의 방이 폐쇄된 모나드로 존재함을 강화한다. 그러니까 이 훔쳐오는 라면은 일종의 환상으로서 실재가 아닐까. 갇혀 있음의 환각이 출현시키는 상상의 절대적 쾌감의 차원에서.
어쩌면 이 이상한 착시, 그것이 일어났으나 일어나지 않은 것과 같은 것, 그러니까 여자들의 관점에서 그것이 어떤 의미도 산출하지 않는 건, 우리의 지각 작용과 결속하는 환상의 세계에 대해 무언가를 이미 말하고 있었던 듯 보이는데, 앞선 방송에서, 문의 자리에서 빛을 본 여자의 경험에서, 그 문은 진정 빛으로 대치되었고, 그것은 공식적인 서사 채널에서는 물질적인 것으로서 그 구멍을 어떻게든 메워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는데, 따라서 부재하는, 의심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문의 존재는 여자의 서사를 벗어나서 아나운서에 의해 지속적이고 강박적으로 더듬어지는 것으로 전이된다.
이 외부의 시선에 대한 알레고리적 차원의 라디오 채널의 여러 목소리는 현재에 계몽의 형식으로 외삽되지만, 현재를 실질적으로 보조하거나 변경시키지 못한다. 종교적인 것의 도상들은 청년들에 의해 재배치, 재배열되지만, 그 숭고함은 그로부터가 아닌 성교에의 감각으로부터 온다. 곧 국가적 프로파간다는 헛손질을 할 뿐이며, 종교의 영향력은 전유된 다른 감각으로 옮겨 간다. 심지어 불상이 깨짐은 통제할 수 없는 자위행위의 끝을 선취하는 장면으로서만 유의미하다.
수행의 차원은 연기에 있어서도 적용되는데, 아버지의 대리물이 아버지의 환상물로 전이되는 데에는 게임의 강제적 규칙에 대한 둘의 합의가 있는 것처럼, 하녀 역할의 연기를 수행하는 두 여자 사이에서 공유되는 연기에 대한 진리는 ‘서로 구분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는 것으로, 이것은 현실을 전유하고 쟁취하는 것에서 비로소 실현될 수 있다. 또 다른 역할에 대한 연기 자체를 연기함은 그 연기가 연기로 드러나는 지점에서 ‘그’라는 정체성을 안정시키는데, 이로써 그와 역할이 혼동될 수밖에 없는, 따라서 구분할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하는 듯 보인다는 것이다―그가 맡은 역할에서만 그가 드러나지만, 정작 역할에서 그를 추출하는 건 불가능하다.
곧 〈반 쿨트〉에서 연기는 실재에 대한 재현으로서 2차적인 것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와 가상의 차이가 국소적인 틈새를 나타날 때에 비로소 드러난다. 이는 차라리 그들과 역할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또한 그 둘 사이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남자 쌍과 여자 쌍의 거울 상으로서 대위법, 또 그들을 벗어난 라디오 자체와 일상의 뒤섞음 사이에서 곧 어떤 병치의 차원 자체에서 온다. 여기서 라디오의 위상은 일상에서의 실재적 발화됨을 위해 일상을 물리적인 차원으로 더듬어가는 공정이 필요했던 것에서 의도적으로 과잉되었음―과잉됨의 형식이었음―을 살펴볼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라디오는 그 자체로 이화효과의 대상이며, 그로써 그 바깥의 실재가 성립한다고 여겨지게 되는 것처럼, 역할의 말을 라디오가 빼앗아가는 가운데, 정작 역할들은 안정화되고, 실재와 구분 불가능한 단계에 이르게 된다. 마치 실재가 이미 놓여 있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라디오는 적절한 경계로서 그 ‘실재’로부터의 아우라를 생산한다. 곧 일사이라는 실재를 부추기는 가상의 잔여물은 다시 그 실재에의 효과로 인해 의미화를 요청하는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또 다른 실재로 부상한다.
〈반 쿨트〉는 결국 배치의 연극이다. 음성과 이미지, 마주하는 두 개의 현실, 젠더, 색-공간의 대비는 조응되어 교직된다. 그리고 그것은 이를 통합하는 자의 의식과 무의식을 모두 상정한다. 전자가 이 둘이 가리키는 계급 전선의 공통됨을 추출해 내는 것이라면, 후자는 안온함과 섹슈얼리티, 접촉, 돌봄 등의 관계 양상의 내밀함에 대한 본질적 욕망에 근접하는 듯하다.
숭배는 정치적 선전, 종교적 신념, 초자아적 아버지 혹은 선망의 대상으로서 배우 모두에게서 찾을 수 있는 부분이지만, 그것을 연기하고 수행하며 그것이 가능한 환경을 만드는 건 한 명의 조력자에 의해서이다. 곧 숭배는 관계의 차원에서 한층 더 내밀하고 세부적이며 독자적이고도 독특하며 고유한 하나의 세계를 가설하는 것과 같아 보인다. 곧 이 대비의 차이를 위해 라디오의 망령적 지배는 다수의 양적 반복을 거듭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계급은 전유 가능한 것, 활용 가능한 것의 차원으로 변화한다. 곧 여성 둘의 하녀 연기의 완성은 그들이 하녀와 같은 계급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에 수행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의 차원, 하녀를 수행함으로써 신분의 격차를 가시화하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드러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한 것이다. 이 지점에서 계급은 중요해지며 또한 가능성으로 전복된다. 곧 〈반 쿨트〉가 다다르고자 한 것은 지배 계급에 대해서 또는 억압된 기억에 대해서 어떤 해방의 가능성을 획득하는 것이 아닐까.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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