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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은길 작/연출, 〈양떼목장의 대혈투〉: 구조의 틈새
    REVIEW/Theater 2026. 6. 12. 00:12

    인간 내부의 분열

    주은길 작/연출, 〈양떼목장의 대혈투〉©국립정동극장(이하 상동).

    〈양떼목장의 대혈투〉는 공연 마지막에 이르러 그 제목이 즉자적으로 구현되는데, 이는 양과 목동 사이에서 벌어지지만, 이는 실제적으로 피를 보지는 않으며, 더 상징적으로 ‘혈투’에 가까운 건 주요 개체들의 구조 내 고립된 고군분투의 양상이다. 또는 극 자체의 차원으로 보면, 그 개체들의 동등함과 난립의 양상 자체이다. 
    곧 동물원을 탈출한 세로와 양떼목장을 탈출한 양, 그리고 양떼에 속해 양들의 이탈을 감시하는 검은양은, 직접적 현실에 대한 은유로서 세로로부터 시작해 하나의 모티브를 공통적으로 체현하며, 각자의 꿈을 경유해 그 꿈이 제각각 좌절되는바, 각각의 독백은 닫힌 세계의 구조적 법칙을 반향한다. 

    결국 모든 걸 종합하는 건 검은양 인간의 무력감과 회의로의 전치로부터인데, 그에 따르면 동물권이 아닌 보통 사람이 현실을 사는 데 대한 자신의 무능과 무기력함의 사안이 더 중차대한 것임을 항변하는, 따라서 동물권이 일종의 피씨주의의 산물일 뿐이라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동물로서 인간의 저하된 위상, 그 동등함 안에서 비인간적 인간의 위치를 자처하게 되며, 그 결과 세계에 대한 일종의 무력감과 회의주의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 된다. 

    그러니까 세로의 탈출이라는 사건은  비주체적 주체의 등장에 대한 매개로서 최종 기능한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것이 결국 실제 사건의 모티브가 사회적 의제가 되는 대신에 그것을 단지 경유하며, 무엇보다 그 경로 자체에 간극을 투여하는 것이 〈양떼목장의 대혈투〉인 것이다. 이러한 정신적 차원의 간극은, 또는 간극으로서 정신은 결국 앞선 세 존재의 독백으로서 발현되며, 각자의 존재론적 반향인 동시에 사유의 상관물로서 그 독백은, 관객과 대면하기라는 지점을 통해 오히려 그 스스로의 존재를 벗어나 관객(의 사유 과정)으로 전도되는 지점을 만드는 부분과 상관된다.  

    구조의 파괴 혹은 외부의 도입

    극의 가장 첫 번째 장면, 1장이 시작되기 전의 인트로는 소파에 앉아 정면성을 갖고, 특정 상표의 감자칩을 먹는 두 친구가 TV에서 세로의 탈출 소식을 접하는 부분이다. 우측의 현수에 비해 좌측의 친구는 아직 ‘미결정된’ 지위를 갖고 있으며, 곧 이름이 기재되지 않지만, 검은양으로 이후 등장한다. 그러니까 그 둘이 각각 인간-검은양과 양으로 분화된다는 사후적 재조립은, 어쩌면 그 둘의 현실적 차원을 잠재적인 것으로, 또는 잠재적인 것으로서 현실을 다시 소환하는 가능성을 부여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 왜냐하면 그 이후의 것들은 거의 꿈의 차원임을 주지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곧 TV라는 채널을 통해 ‘외부’가 삽입되듯이, 세로는 하수의 문짝 자체를 뚫고 등장한다. 그리고 양들이 이어서 등장하고, 세로와 양의 대화가 이어진다. 이 실재의 난입으로 현실이 와해되지만, 현실은 ‘가정된’ 상황(극), 곧 세로의 비가시적 상황을 비춘다면이라는 가정상의 재현으로 휘말려 들어간다. 곧 야생을 향한 그 뚫린 통로의 결말이 현실 그 이상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이, 현실은 오히려 더 공고한 실재로서 자리하는데, 결정적인 건 시종일관 게임을 하며 리얼타임을 유지하는 극과 전혀 상관없이 존립하는, 정체 모를 유동하는 덩어리 신체이다. 

    그러니까 이는 앞선 둘의 또 다른 모습이자 그 둘이 급작스럽게 해체되기 전의 잠재적 형상의 유출이다. 구체적으로 통로 반대편, 상수 뒤쪽에는 사람 키만한 3단으로 쌓은 짚풀 무대가 있으며, 그 위에 뒤돌아서 레트로 게임을 하고 있는 이 존재는, 그 짚단에서 내려와 무대 뒤쪽으로 바닥을 반절쯤 덮고 있는 짚풀-카페트를 통해 양떼목장을 환유하는 무대의 그 시발점에서 가장 ‘상단’을 차지한다.

    이는 실제 후반에 그가 검은양의 아버지로 밝혀지고 난 후, 그가 총을 들어 세로를 견제하면서 자연스럽게 양떼 통제의 목적에서 온 그 장총을 경유해, 동물에 대한 최종 지배자의 권위를 체현하는 것으로 연장된다. 곧, 양의 아버지이자 인간의 아버지로서, 그 모두의 대상으로부터 그는 절대적 권능을 획득한다―그는 고립되었던 것이 아니라 세계를 고립했던 것이다. 

    그가 놀랍게도 게임만 하는 무능력한 청년 세대가 아니라, 실은 세계를 감지하고 파지하고 있던 존재로 드러날 때, 그가 곧 프로이트가 말한 원초적 아버지의 형상으로 판명날 때, 그리고 불쾌하고도 거북한 악당의 모습으로 현상될 때 그는 그 즉시 사살당하는데, 그가 세로 스스로가 자신의 최후를 결정하겠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총은 여전히 세로에게 머물러 있고, 대신 세로의 부모를 포함한 가족들의 영혼이 원격 접속해서 대신 아버지에게 총을 겨누는데, 그것은 공포탄에서 빈총의 울림으로 전이되며, 실은 실체 없는 아우성으로 상정된다. 

    ‘최후의 인간’

    아버지는 마지못해 죽는 연기로써 결말에 접근하는데, 세로의 생사여탈권이 세로로부터 봉쇄됨으로써, 곧 세로가 어떤 제스처도 취하지 못한 채 있음으로써, 그는 (역설적으로) 살아있음의 상태에 고착된다. 그리고 사운드 효과로서 총질은 그를 실질적으로는 죽이지 못하는데, 그것은 그가 죽는다는, 죽었다는 어떤 착각과 혼동이 (끊임없이 실패하며) 일어나는 것을 표현한다. 여기서 그의 죽음에 대한 연기는 이전의 게임을 하는 현실이라는 닫힌 구조가 또한 안정적인 것이었듯, 어쩌면 일종의 CCTV 같은 감시의 뒤집힌 장치였을 수 있는 것처럼, 구조에 대한 권능을 오직 그만이 갖는 것임음을 보여주는 지점에서 역시 뒤집히는 것일 수 있다. 

    이 내부의 차원이 인간과 양의 삶을 결정적으로 구분한다면, 곧 인간이 감자 칩을 먹든 게임을 하든 내부의 닫힌/편안한 삶을 의도적으로 추구한다면, 단지 양은 인간이라는 심급에 의해, 갇힘을 인식하기 전의 삶과 인식하고 난 이후의 삶으로만 크게 나뉘는데, 곧 이들의 자유를 향한 탈출이 그 인식 이후에는 필연적인 것임에 반해―그것이 그들을 주체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아님에 반해, 오히려 인간의 반성적 차원으로 되돌아오는 지점을 만드는 데 반해―, 인간은 오히려 언더커버라는 방식으로 표면적으로는 자유를 저당 잡힌 채 외부로 나가지 않는 삶을 선택하는데―노동 이후 쉼의 삶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 자체가 삶의 도피처가 되는 것이다.―, 이는 진정으로 반주체적인 삶을 선택하는 것, 곧 진정한 삶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 양-되기의 차원에서 흑화된 양, 곧 검은양은 전근대적 차원의 꿈의 예지 능력을 갖춘 양과는 대비되는 꿈을 꿀 수 없는 존재와도 같다. 양이 곧 우리에게 꿈의 직접적인 메타포로 구성되는 것처럼, 그리고 극 내부에서도 그것이 나오지만, 우리가 잠을 자기 위해 머릿속에서 하나씩 양을 배가하는 것이 곧 꿈결의 희미한 의식으로 갈음되는 것과 같이, 양들은 꿈의 전염적 차원의 전파 방식에 입각해, 세로의 탈출 사건을 하나씩 꿈에서 목격하여, 자신들이 갇혀 있었음을 깨닫는 계기가 된다. 이 시작의 전제와 대비하면, 검은양은 후반, 인간으로서 아버지에게 토로할 때와 같이 꿈꿀 수 없는, 꿈에 무능한 존재로서 대비된다. 

    곧 비의식적 차원의 이미지로서 양은 양 스스로의 꿈을 스스로 체현하는 것으로 분화된다. 반면 인간의 꿈은 핍진한 현실의 잔영 자체이다. 구체적으로 검은양은 타임루프의 서사를 써내려 가는데, 여러 직군을 무한하게 체험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실패의 영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 실패한 소시민적 전형들의 나열을 특정한 인격으로 고착하는 셈인데, 공간적 차원으로 비유하면 평행우주에, 시간적 차원으로 비유하면 영원회귀에 해당하는 이 비선형적 이야기의 반복된 구조로부터, 실패하는 건 결국 서사 자체이다. 

    탈이라는 메타포

    〈양떼목장의 대혈투〉는 막과 막 사이에 끊임없이 타격음 혹은 충격음 같은 걸 넣는데, 시작과 끝 역시 그러하다. 곧 문을 부수고 나오는 외부성의 순수한 출현은 인간을 향하는 가없는 총질의 네모난 막의 공간으로, 곧 막 자체의 통과로서 반복된다. 그리고 가장 절절한 토로로서 아버지를 향한 그 고백은, 복면―아마도 감자튀김을 담는 종이봉투―을 쓰고 있는 아버지는 그것을 들어준다는 보장이 없으며, 그 이야기 안에 포로로서 결박되어 있는 형국이다. 그러니까 ‘검은양’이라는 가면이 아버지로 전도된 것이다.  

    그의 전 작 〈초록이가 거짓말을 하면 우린 모두 박수를 치는 거야〉(2025)에서 역시 탈은 세계를 변모시키는 데 절대적인 매체가 되는데, 이는 연극 놀이라는 형식이 실재로 뒤집히는 차원에서, 연극 자체의 메타포를 부각한다[참조: https://www.artscene.co.kr/2014]. 하지만 여기서는 그 탈을 쓴다는 것이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가 말한 ‘최후의 인간’이라는 전적인 부정성의 차원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사실 출구는 세로에게도 검은양에게도 막혀 있다. 그리고 아버지는 무관심하며 비열하거나 경박하다. 

    그렇다면, 〈양떼목장의 대혈투〉의 진정한 결말은 무엇일까.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연기와 세로의 완벽한 무기력증 사이에서 결정할 수 있는 건 무엇인가. 아버지의 연기는 도피로서 기믹이 아니라 오히려 기믹 자체의 실재를 이야기하는 지점에서, 연극의 자기 지시성이라는 균열을 가져온다. 애초에 그의 본래의 모습을 경유한 일상이라는 실재는 그 바깥의 세계를 연극으로 반전시키고 있었다. 

    〈초록이가 거짓말을 하면 우린 모두 박수를 치는 거야〉(2025)에서 역시 탈은, 그리고 연기는 세계를 그럴 듯한 전화시키고 있었다. 이 역할 놀이의 차원으로 세계를 소급시킬 수 있다면, 관객은 그 모든 것이 연기 혹은 연극이었다라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역할을 자임하는 것 역시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 따라서 어떤 아버지라는 틈새는 그 마지막 희망으로의 틈과 같은 것으로 뒤집힌다. 

    김민관 편집장

    CAST
    세로ㅣ정나무
    1장의 양, 태리ㅣ박수빈
    2장의 양, 현수ㅣ이승훈
    3장의 양ㅣ최지현
    늙은 양ㅣ권효은
    검은 양ㅣ이주형
    무플론ㅣ김원태
    보더콜리ㅣ정연종
    목동ㅣ김효영
    아버지ㅣ김민석

    CREATIVE TEAM
    작·연출 주은길
    음악감독 신혜원
    무대디자인 유태희
    조명디자인 윤혜린
    음향감독 전민배
    의상감독 조은실
    분장감독 장경숙
    무대감독 손세리(스탭서울)
    기획 노지상(스탭서울)
    조연출 황보영

    작품개발 그린피그
    주최·주관 (재)국립정동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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