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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 궈융캉, 연출 이준우, 〈원칙〉: 원칙 너머에서 세계는 어떻게 구성되고 있는가REVIEW/Theater 2026. 6. 14. 14:56
진정한 행위

작 궈융캉(郭永康), 번역 장희재, 각색 강훈구, 연출 이준우, 〈원칙〉ⓒStudio AL(대표 김윤희)[사진 제공=두산아트센터](이하 상동). 〈원칙〉은 새로운 교장이 부임하고 나서 세운 새로운 교칙 이행에 대한 학교 내 여러 반발에서 시작돼 종래 파국을 향하는데, 여기서 ‘원칙’은 교감이 내세우는 융통성―“유두리”―의 관념과 대립하며, 그 둘은 변증법적으로 종합되는 대신, 영원히 평행선상을 그리는 것으로써 그친다. 이러한 종합 혹은 변화는 물론 한 인물에게서도 체현될 수 있는 부분으로, 그것은 마지막 장면에서, 교감이 계속 권하던 배드민턴을 마침내 교장과 교감이 함께하는 것으로써 교장이 달라진 것으로 볼 수 있느냐에서 그 약간의 여지가 있는데, 그것은 명확하지 않고 암시적이면서, 그 말의 그 자체로의 실현을 통한 임시적인 봉합의 차원에 더 가깝다.
아마도 학생회장과의 대화에서 학생회장이 그 대화를 기각하고 떠날 때 교장이 중심을 잃고 의자에 앉는 그 순간, 엄격하게도 어떤 흔들림이 없던 교장이 고독하고 연약한 인간으로 삐거덕거리고 침몰하는 반전의 순간이, 동시에 그를 존재화하고 관계의 차원에서 인물들 간의 새로운 국면을 맞을 것임을 예견하는 순간일 수 있을 텐데, 이를 짐작하고 또 지켜보던 교감이 곧장 그를 방문해 마주하는 건 다시 교감이 지닌 매개의 역량, 융통성의 측면과 조응하는 그 지점에서, 앞선 순간이 교감의 자리로 전치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지막 배드민턴 역시 끝까지 대화를 포기하지 않는 교감의 어떤 태도가 빛을 발하는 장면이며, 실은 원칙과 융통성의 대립은 표면의 가치이자 그 삶의 태도를 가리는 가짜의 보호막이 되는 셈이다. 곧 진정한 행위는 교감이 원칙에 따라 원칙을 어겨 중대한 사고를 발생케 한 교감의 책임을 물어 교감을 전근 보내기로 하고, 이 사실이 학생회장을 필두로 하여 학생들에게 집단적인 반발―수업 거부―로 확산되고 교사들의 집단 반발과 사표 제출로 이어지고, 마침내 학부모들과의 공개 간담회로 응결되었을 때, 교감이 새로운 중학교에서 대신 교장이 되는 선택 대신에, 퇴직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이후 배드민턴을 함께 치는 그 행위 자체에 있다.
어쩌면 교감의 행위는 매개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이행하는 것이며, 그것은 “학교”에 대한 그의 비유가 “사회”와는 다른, 사회에서 할 수 없는, 아마도 약육강식의 그 세계와는 다른 어떤 보호와 존중의 차원을 실현하는 것이며, 이는 결국 사회와 학교에 대한 대비를 통해 학교의 특이성과 예외성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종래 학교와 같은 사회를 만드는 것으로써 연장될 수 있는 것임을 다시 읽어낼 수 있을 것인데, 이 지점에서 그의 교육관은 대립하는 이에 대해서도 존중을 표하며, 그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곳이 곧 학교이며, 그 학교가 연장된 올바른 사회의 자리가 될 것임을, 그는 마지막 장면에서 실천하고 있고, 그것이 곧 진정한 그의 행위 아닐까.
선택의 책임
또한 그는 학교가 그들 각자의 자율적 선택과 책임을 강조하는 지점에서 또한 그것을 존중하고 지켜주는 차원에서 작동하기를 바라는데, 그것은 원칙의 다른 운용, 원칙을 우회하는 편법의 차원 이전에, 그들에게 선택지를 주고, 그 자신의 자율성과 주체적 판단의 영도 아래 행동하는 삶의 태도를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교육은 그로부터 얻는 어떤 궁극적인 자유를 획득하는 과정이며, 사회의 모사가 아니라 진정한 사회로서 자신의 삶을 구가해 갈 수 있는 시험과 학습의 장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의 마지막 행동은 진정한 사회의 이념으로서 사회를 뒤집는 것 아닐까.
학교의 보편성으로서 사회를 정초하는 것 아닐까. 교육은 그가 언제나 격의 없이 학생들을 대했듯 위에서 아래로의 차원이 아닌 한에서―그러니까 그것이 뒤집혀도 어떤 상관이 없는 한에서―, 상호 존중하며 자신을 건네는 것 안에서 촉발됨을 나타내는 것 아닐까. 반면, 교장은 학교는 학생들에게 “사회 대신”의 사회, 곧 사회를 예비하는 것―곧 원칙 수행의 자세를 수호하는 것―을 넘어 사회와 마찬가지로 원칙이 기본적으로 지켜져야 하는 곳임을 천명한다. 그러니까 오직 사회라는 보편성만이 있다.
학교라는 예외성이 사회가 갖지 못한 진정한 이념의 장소로서 보존되어야 하며, 따라서 그것이 사회의 보편성으로 뒤집히는 순간이 곧 ‘진정한 결말’이 될 것임을 교감에서 볼 수 있다면 말이다. 따라서 사후적으로 교감이 5년밖에 남지 않은 정년으로부터 긴급하게 자신의 교직 생활을 청산하는 것은 물론 뼈아프며 한 인간을 극단적인 우울과 분노로 옭아맬 수밖에 없는 중차대한 사건으로 보이지만, 그것이 사회든 학교든 그가 살아나갈 곳은 그의 이념에 따른다면, 동등한 차원의 양상인 것이며, 따라서 그의 마지막 행위는 여전한 밝음으로 학교 밖 사회에서 자신의 철학을 증명하는 셈이 된다.
매개로서 유머
교감은 시종일관 유머로써 모든 대화에 임하는데, 이때 온갖 언어유희가 동원된다. 특히 학생회장이 교장의 말에 분개하고 “개쩐다”라고 외치며 뛰쳐나갈 때, 교감은 그것이 자신의 별명이라고 하며 뒤늦게 상황을 무마해 보고자 하는데, 여기서 욕의 자리에 자신을 귀속시키며 자조적이 되는데, 이는 실은 땀이 많이 나는 자신의 신체적 특징에 대한 친구들의 놀림으로 생겨난 것이며, 그 모종의 내외부로 여러 쾌적하지 않은 상태, 곧 욕과 땀으로 혼종된 불쾌함의 상태라는 언어유희로써 전도하며, 실은 그 배가되는 욕을 기꺼이 ‘끈적하게’ 또는 불유쾌하게도 뒤집어쓰는 셈이다. 그러니까 어떻게 그는 그럴 수 있을까. 자신의 체면과 지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말이다.
이는 로베르토 베니니(Roberto Benigni, 1952~.)의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1997)에서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에게 위험하고 다급한 바깥의 풍경을 이야기의 장면들로 전도하는 행위에 대한 일종의 짝패, 곧 그 이야기들을 적을 향한 것으로 뒤집어놓은 다른 판본임을 보여주는 것과 같지 않은가. 교감은 그야말로 진정한 교육자인 셈인데, 이는 교육이 실은 적대를 처리하여 매개하며 적을 마주하고 관계 맺는 일종의 매개 자체임을 이야기하는 결정적 장면 아닐까. 곧 교장과 학생의 결정적 간극을 메우는, 매개하는 역할을 반복적으로 자임하면서 말이다.
더군다나 그가 굳이 그 사이에 그렇게까지 해서 두 사람 사이에 위치할 이유는 없는데도 말이다―그는 그러한 사이에서만 존립한다. 그리고 이는 그가 다른 이에게 권하고 명시하는 이념이 아니라, 그리고 교육에 빗댈 수 있는 것도. 아니라, 그 자신만의 어떤 삶의 철학에 가까운데,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작품의 진정한 메시지인데, 거기에는 비루함(만)이 아니라 어떤 숭고함이 있다.
이는 결국 앞선 또 한 번의 반복된 장면, 곧 학생회장이 대화를 거부하고 나갈 때 그가 메우는 그 장면, 그리고 마침내 학교를 나와 더는 학생들과 교장 사이를 매개할 수는 없는 상황에서, 교감 너머의 위치에서, 그 전의 약속을 마침내/기어이 실천하며, 그것이 곧 (학교가 아닌 진정한) 사회였음을 다시/사후적으로 확정하고 증명하고 있는 것 아닐까.
보수의 환상
신문부장을 향한, 교장의 전사와 교장이 전하는 이야기는 겹쳐진다. 전자가 자신의 학창 시절, 자신의 행위가 올바른 것이라고 확신하며 자신의 선생의 부정한 행위에 대해 투쟁을 관철하고 나서, 이후 선생이 창문에서 뛰어내렸음의 사실을 매체를 경유해 알게 된 급격한 흐름의 이야기라면, 후자는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 1953~.)의 『정의란 무엇인가』(2009)에 나온 이야기로, 미군이 양치기 소년에 발각된 후, 무고한 민간인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논리에 의해, 그를 살려두었다가 그것을 결정한 이만이 살아남았고 현재는 트라우마를 갖고 살아간다는 내용인데, 이른바 전자의 ‘나’는 원칙을 벗어난 잘못된 행위로 인해, 결국 후자의 최후의 미군의 위치에서처럼 최악의 결과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마이클 샌델의 예시 자체가 결과를 인과적인 차원에 따른 것으로 사후 조종하는 교묘한 기술로서, 이는 교장에게 그대로 전이되어 고착되는데, 교장은 자신이 선생의 말을 따르지 않는 원칙의 파괴로 인해 그 결과를 불러오게 되었다는 전제 아래, 선생으로서의 지위를 그 학생의 소급된 선택의 차원에서 물화한다. 이때 학생 자신이 선생의 말을 듣게 하려는 것은 자신의 올바르지 않은 행위로 소급되는바, 타자의 그것이 아니라,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이러한 도착 증세는 병적이며, 실은 모든 정의를 위한 투쟁 모든 것을 기각하는 극단적 보수주의자의 원칙을 구성한다.
그러한 증상이 교감이 아니라―만약 그랬다면 문제가 (진작) 해결될 수 있었을까.―, 학생에게 도달한 것은 아이러니한데, 어쩌면, 교장에게는 어린 시절의 자신을 떠올리게 하는 어떤 경우, 어른이 아닌 학생인 경우에만 그것이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실은 그러한 행위 자체가 누군가에게 심각한 피해와 고통을 줄 수 있다는 암시가 되는 차원에서, 그 말은 위험하고도 심각한 여지를 갖고 있는 것이다. 교장이 원칙주의자이기 때문에 존중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기실 그 역시 어떤 사건의 차원 아래 연루되고 있기 때문에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 더 타당하며, 그것이 〈원칙〉이 진정한 원칙에 대한 물음이 일종의 명목임을 확인시킨다.
적대적 타자와의 공존
〈원칙〉은 “자유로운 학풍”으로서 본 학교의 기조에 한 명의 이물감 있는 교장으로 인해 학교 분위기가 엉망이 되는 표면의 흐름 아래서, 교장의 변화가 아닌, 교감의 더 융통성 있는 변화를 보여주며, 그것은 격의 없이 마주하던 관계의 차원을 그것이 적용될 수 없는 존재에게도 마찬가지로 동등하게 적용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배드민턴은 혼자 칠 수 없다는 철학을 일깨워주기 위해 실은 교장에게의 교감의 배드민턴 권유가 계속 있었다고 본다면, 실은 배드민턴은 현상학적 체험으로, 상대의 절대성, 나와 너의 분기되지 않음, 상호 매체적 수렴과 같은 어떤 긴밀한 관계를 체현하는데, 이때 관계의 차원은 이념의 차원으로 붙들어 맬 수 없는 더 미묘하고 정의할 수 없는 차원을 은유하게 된다.
곧 〈원칙〉은 어떤 것이 더 맞느냐의 차원에 있지 않으며, 또한 진정한 대비는 올바른 원칙의 수호와 융통성으로 가감된 원칙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원칙이라는 물신과 진정한 소통의 효과 사이에 있으며, 후자는 매개를 통한 관계 맺기의 의지로써 발현된다. 그것은 교장의 의중이 순수하게 원칙주의자의 그것을 수호하는 것인지, 아니면 더 큰 상부의 명령에 따른 정치적 차원인지는 완전히는 알 수 없는 가운데, 사실 그것이 실은 정치성을 띠고 있는 것의 여부를 떠나 살펴볼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교장 스스로가 소통을 하지 않는 문제적 인물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사회를 원리원칙에 귀속될 수 있으며 그럴 때 사회가 온전한 결말에 도달할 것이라는 일종의 서사적 장면에 고착되어 있기 때문에 그가 실은 문제적인 인물이라는 것이 드러나면서부터 말이다. 이는 그를 보수의 정치적 입장으로 만들고, 그와 대비되어 물론 교감을 비롯한 대부분의 인물들은 진보적인 차원으로 거듭나게 되겠지만, 〈원칙〉의 진정한 차원은 교장이 자신의 전사로써 소급되어 트라우마를 그 이야기로써 봉쇄하고 있다는 것이, 그 스스로가 아닌 그 이야기를 들은 학생신문부장 양준에 의해 재결정된다는 것에 있다.
그러니까 반성적 차원은 교장에게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주변 사람에게서 진정 일어나며, 교장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듦으로써 그를 사회 구성원으로 사실상 수용하는 숨은 매개 작용이 일어난다. 이는 학생회장 라엘의 사회적 부조리와 맞서는 격렬하고 강고한 정치적 투쟁의 입장에 대한 물 타기 혹은 약화로도 일견 보이지만, 결국 교감과 교장의 마지막 배드민턴 장면에서 이는 선의와 공동체적 사회에 대한 삶의 지향점으로서 비로서 응결된다. 그리고 그 두 번째 반복에서는 그것은 의심할 바 없이 감동을 일으킨다, 적어도 교감의 행위를 씁쓸한 세계의 현상으로 읽지 않는 한에서는 말이다.
김민관 편집장
2026.05.27 ~ 2026.06.14Space111
기획·제작 두산아트센터, 극단 배다
작 궈융캉(郭永康)
번역 장희재
각색 강훈구
연출 이준우
출연 박현숙 오용 박종태 김현진 김혜령 (목소리 출연 김윤후)
조연출 서진호
프로덕션 매니저 임예지
프로덕션 무대감독 김현세
상주 무대감독 김종민
무대크루 황석원
무대디자인 박상봉
무대디자인 어시스턴트 김윤지
무대제작 애픽(APIC) (대표 전종혁)
기술감독 최세헌
미술팀 이현정 채근주 이주은 구본주 김나은 이율미
제작팀 편운장 최병조 김혜성 유철환 문병주 문창혁
조명디자인 정유석
조명디자인 어시스턴트 김은빈
조명오퍼레이터 유영광
조명크루 고두영 유보민 임혜성 박자연 전준우 김민지 허정현 이준수 박재욱
의상디자인 EK
의상디자인 어시스트 최새봄
의상제작 이케이코스튬(EKCOSTUME)
음악감독 채석진
음향디자인·음향시스템엔지니어 이현석
음향크루 김세영 박산결
음향오퍼레이터 서진호
분장디자인 정지윤
분장작업 ZAMILUN
분장진행 김혜원 한지연
접근성 기획·운영 플랫폼안녕(대표 이청)
자막해설디자이너 이청
자막해설오퍼레이터 이우람
영상기술 이효진 김현회
그래픽디자인 포인터스(Pointers)
사진(프로필·설정·연습·공연) Studio AL(대표 김윤희)
사진(관객과의 대화) 스튜디오1024(대표 이재호)
영상(공연 실황) 헤즈스튜디오(대표 김선우)
SNS콘텐츠(이미지) 팡팡팡그래픽실험실
SNS콘텐츠(영상) 필루미에르(대표 이화승) 캄픽처스(대표 최태연)
인쇄 으뜸프로세스* 본 공연은 2024 ‘제7회 중국희곡 낭독공연’에서 소개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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