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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컴퍼니, 〈씨름〉: 공고한 남성적 영역에 여성의 자리를 도입하기REVIEW/Dance 2026. 6. 12. 00:11

모든컴퍼니, 〈씨름〉 포스터. 모든컴퍼니의 〈씨름〉은 씨름에 대한 역사적, 문화적 이미지를 참조로, 씨름의 역동성과 생명력 등과 결부되는 현장의 정동을 불러일으키고자 하는데, 이 과정은 그 전에 언급되는 공동체적 의식을 달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씨름에 대한 과거의 기억이 현재와의 관계에서 그것의 시차를 드러내기보다는 그것을 마치 연속적인 차원으로 재생하려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시대착오적인 차원에서의 환상이 부여된다.
마지막 2조로 이뤄 대결이 연속되는 씨름판이 가리키는 실재성은 그것이 갖는 순수성, 곧 비양식성으로 인해 오히려 환각적인 어떤 것으로 다가오는데, 무엇보다 씨름 자체의 필연적 결과는 일종의 사건적 효과이기 때문이다. 곧 씨름의 결말을 통상의 제어됨의 연장선상에 있는 2인무의 움직임에 대입했을 때 그러한 유연한 움직임이 제어되지 않는 순간으로 휩쓸려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안무의 틀을 전복하는 것일 수 있다.
결국 씨름적인 무엇을 보는 것을 넘어, 씨름 그 자체를 보고 있다는 것이 주는 기묘함이 거기에 전제되는데, 이는 그 과거를, 씨름을 어떤 하나의 고착된 기호로 오지각한 결과는 아닐까. 〈씨름〉은 《모던코리아》 류의 일종의 근현대사 아카이브 방식을 순수한 취향으로서 긍정하는 것에서 기인하는 듯 보이는데, 김홍도의 《단원 풍속도첩》에 나온 씨름 장면을 풀 쇼트에서 클로즈업으로 부분들로 시점을 옮기는 것―이는 대표적인 국내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 작가의 작업을 상기시킨다.―에서 출발하는, 평행하게 배치된 두 개의 직사각형 패널에서 나오는 영상은, 단순한 배경 화면보다는 그 자체의 시각성을 주창하는 데 가깝다.
이 영상이 지닌 시각적 매끈함과 독립적인 콘텐츠의 질적 차원은 그것이 단순히 자족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는 걸 의미하는데, 곧 이 영상과 실제 무대의 덜그럭거림을, 두 매체의 절합된 양상에서 미스터리가 생겨난다. 후반의 씨름 경기에서 흑백 사진들이 하나씩 허공에서 부유하며 좌에서 우로 약간의 위쪽을 향해 서서히 오르며 사라지는 과정에서, 허공을 채우는 흑백 영상들은 대부분 시위 장면을 보여주는데, 이때 앞서 씨름에 전제된 공동체 의식은 부정적으로 뒤집힌다.
곧 매스게임의 이미지를 시위 이미지와 겹쳐서 계열화할 때, 씨름은 3S 정책의 하나인 스포츠의 대중화를 통한 우민화 전략의 일환이라는 정치적 선동의 언어로 재각색되는 듯 보이는데, 이때 그 정치성을 주체화하는 지점을 현장의 씨름 대회의 형식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 그것은 공고하게 그 게임을 지속한다는 점에서 주체의 자리는 모호해지거나 또는 묘연해진다.
그러니까 비판의 시점을 왜 영상으로만 선취하느냐라는 질문이 거기에 따라오는데, 이는 씨름이라는 어떤 긍정 자체라기보다 환상의 영역으로 주어지는 대상 자체가 드러내는 태도, 곧 경도되고 도취되는 대상, 그리하여 투명한 기원의 신화가 아닌, 현대의 신화성을 가진 것으로 재정위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집단성의 차원이 마을 공동체의 전근대적 질서가 아닌 민주주의적 이념을 향한 시민 혹은 대중의 층위에서 구현될 때 씨름은 어떻게 탈신화적이면서 정치적인 차원으로 우리에게 복권될 수 있을 것인가.
씨름은 무엇을 매개하는가. 또는 매개하지 못하는가. 그러한 매개의 성사를 가늠하는 차원이 씨름에 대한 시대착오적인 환상의 경계를 가리킨다면, 전 대한씨름협회 43대 회장 황경수가 이야기한 단합을 도모하는 씨름판의 공동체 의식과 작은 이가 큰 상대방을 이기는 것이 지닌 서사적 감응의 차원은, 후반 씨름판의 층위를 결정짓는 동시에 그것을 지배하는 하나의 법칙이 되는데, 전자가 손가락 씨름, 팔씨름, 손바닥 씨름으로 이어지는 놀이를 관객석으로 확대하고 떡을 나누는 것과 같이 모두의 감흥이 장벽 없이 자리하는 장을 재현하고자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면, 후자는 여성이 남성을 이기고, 신체가 더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을 이기는 법칙을 재현한다.
결국 흑백 영상의 시위 장면은 역사적 왜상의 차원을 잠재하면서 파편적 이미지의 차원으로 그것을 일시적으로 봉합하고 있는 양상인데, 이때 흐트러진 주체의 자리 위에 집단적 열광의 차원에서 획득되는 정의로운 싸움의 서사는, 그 신체 조건의 불평등함을 전도하는 지점에서 사후적으로 획득되며 평등함을 성취하는바, 이 서사는 현대의 스포츠의 물리적 개체량에 입각한 평등을 오히려 기계적인 것으로 누설하며, 단순히 과거의 씨름에 대한 환상이 아닌, 신적 정의의 차원을 구성한다.
곧 〈씨름〉이 궁극적으로 획득하는 바는, 정치적 이념은, 주체의 자리를 다시 결정함은 일종의 도식적 차원에서 구현되는 이 작은 존재가 큰 존재를 이기는 결과가 주는 감정적 차원에서 확장되는 정의의 실현에 있으며, 거기에 여성 존재가 씨름의 주체로 가시화된다는 어떤 환상, 곧 스포츠 차원에서 시대착오적인 전제의 도입을 통해 역사의 기원을 재조정하는 어떤 환상으로서 서사가 지닌 혁명의 영점이 있다. 이는 이소진이 박상현을 이기는 순간보다는 그 직후 이소진을 민희정이 이기는 순간이 조금 더 극적인 차원을 담보하게 되는데, 그것은 리얼리티의 차원이 서사의 힘으로 환원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곧 상대적으로 키가 큰 이소진이 박상현을 이길 때 리얼리티가 어느 정도 용인될 수 있다면, 민희정이 이소진을 이길 때는 서사의 구조적 힘의 적용이 신체적 현격함(이 주는 리얼리티의 파괴됨)을 상쇄하는 것이다. 이는 작은 이가 큰 이를 이긴다는 서사에 단순히 여성이 남성을 이긴다는 서사를 환원시키는 것이라기보다 민희정이 이소진이 이긴 박상현도 이긴다는 어떤 잠재된 구도를 완성시키는 차원에서 근본적으로 더 작고 약한 존재의 차원이 지닌 상징성을 여성 존재를 통해 기입하는 것에 가깝다. 그러니까 이소진은 민희정이라는 여성의 상징적 지위를 서사적으로 전복하는 지점을 향한, 일종의 뚜렷한, 사라지는 매개자의 양상을 띤다.
반면, 모든 경기가 세 명 이상의 상대를 만나지는 않는다는 전제, 곧 한 번의 승리만 쟁취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결국 모든 이가 한 번 이상씩은 경기를 ‘평등하게’ 치른다는 결론에 도출하는데, 이는 마지막 하나의 경기를 얹지 않음으로써 존재 간의 상성 관계를 보여주는 데 그치는 것으로부터 벗어남을 선택했다고도 볼 수 있는데, 곧 이 원칙의 결과는 처음 패배한 이가 마지막 승리한 이를 이긴다는 결말을 생략함으로써 절대적 기량의 차이를 상대적 차원의 관계―일종의 물고 물리는 관계―로 다시 해제하는 결과를 완성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씨름〉은 처음 울퉁불퉁한 모래 바닥 위에서 민희정을 들었다 놓는 움직임을 집단적으로 확장해 가며 움직임을 고도화한다. 이 바닥이 평평하지 않다는 점, 무게를 일정하게 지지해주지 않는다는 점은 몸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키며 움직임을 결정하는데, 곧 스텝 자체를 근원적으로 우선하여 제어해야 할 기본 전제로 바꾸는 것이다. 이로써 움직임은 씨름의 승부에서처럼 단편적인 차원에서 갈음되는데, 움직임의 연속적 계열이 스텝의 안정적, 투명한 지지의 차원을 담보하지 않는 조건에서 좀처럼 시도되지 않는 것이다. 또는 시도되더라도 고도화되지 않는 것이다.
씨름춤의 고증 또는 재현에서처럼 제기차기처럼 다리를 다른 쪽 골반을 향해 차올리며 공간을 휘젓는 움직임 역시 그것은 스텝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는, 순수 움직임보다는 씨름에 대한 재현적 양태로서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는데, 훈련이나 연습 차원에서 그 움직임이 처음부터 비롯되는 양상을 띤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 처음의 훈련을 전이한 움직임이 무언가 다른 방식으로 조금씩 변화해 가는 지점에서 안무의 고유한 세계가 만들어지는 자리가 후반의 역사-정치-관점의 서사에서 유예되며 소거된다고 하겠다.
곧 제한적 움직임이 제한적 차원이 주는 차이로 분별되는 지점을 특정하게 결정짓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 것인데, 이는 씨름판의 바닥의 차이라는 구조적 특징을 움직임의 내재적 차원으로 연장하지는 못했다는 것으로, 〈씨름〉은 결국 정치적 차원에서 씨름의 의미를 결정하는 데 의미를 두었다고 하겠다. 결과적으로 〈씨름〉은 정치성의 움직임과 씨름이 지닌 탈정치성의 측면이 모호하게 대비를 이루는 가운데, 여성의 자리를 도입함으로써 역사를 새롭게 쓰고자 하는데, 그것이 지닌 운동성의 차원은 표현의 특질보다는 표현의 메시지를 향하고 있다고 하겠다.김민관 편집장
2025.12.26.~2025.12.27. 금요일(19:30), 토요일(15:00)
서강대 메리홀 대극장
안무·연출 김모든
공동창작·출연 김희준, 민희정, 박상현, 박정휘, 이대호, 이소진
드라마투르기 전강희
음악감독 최혜원
미디어아트 이뿌리
무대디자인 정승준
의상디자인 최인숙
조명디자인 이승호
무대감독 조은진
영상 시스템 윌유엔터테인먼트
티저 영상기록 연두픽처스
사진작가 최근우
그래픽디자인 이한수
홍보 양서희
기획·운영 여니스트
행정PD 이보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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