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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İZ 플랫폼, 〈우리〉: 연대로서 서사, 서사로서 몸짓
    REVIEW/Dance 2026. 6. 13. 13:42

    BİZ 플랫폼, 〈우리〉©박상윤[사진 제공=서울세계무용축제](이하 상동).

    BİZ 플랫폼의 〈우리〉는 세 존재의 우정과 연대를 향한 공통의 지반을 만드는 과정으로서 서사를 보여준다. 접촉 즉흥과 같은 느낌을 주는 건 합산과 흩어짐이라는 하나의 열린 공간에 대한 정의, 그리고 그 안의 존재들은 투명한 것으로, 접촉과 반응의 차원이 가능한 것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의 서사로서 이해되는 건 이 셋의 캐릭터가 각각의 존재에서 유래하며, 또한 상호 작용을 통해, 곧 상대방과의 관계의 연장선상에서만 그것이 인식되고 정의되기 때문이다. 구조가 있다면, 그것은 열린 형식이며 생성의 흐름이며, 오직 이 셋의 관계에서만 성립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투명한 서사이며, 그 서사는 매우 극적이다. 

    극적 몰입의 차원에서 부각되는 몸은 투명하고 또한 불투명한데, 감정적 차원에서 직접적으로 발현되는 몸의 언어로서 투명하다면, 그 몸이 분명 어떤 튀르키예의 전통춤의 몸짓, “아나톨리아 지역의 신비주의”의 흔적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불투명하다. 처음 관객석을 경유해 무대에 도착하는 이들은 극장을 텅 빈 것으로, 완전히 열린 것으로 갈음한다. 이는 공연이 열린 서울남산국악당의 위에서 아래로 내리꽂히는 시선이 적용되는 가장 아래쪽에 자리한 기본적인 무대 특성에 조도를 완전히 낮추지 않은 가운데 시종일관 진행되는 공연 방식이 더해지며 완성되는 부분이다. 

    세 명의 외모, 나이가 다양하고 차이가 제법 있다는 점도 특이한데, 이는 그 외양이 아니라, 이 셋의 춤이 하나의 지형을 자연스럽게 구성하고 있다는 점에 의한다. 공통의 연결과 각자의 존재성, 곧 합산과 흩어짐의 시간성 속에서 일정하고 공통된 몸짓이 발현된다. 그러니까 불투명한 춤의 양식이 셋에게 부가되고 그 양식을 통해서만 그 존재의 차원이 발현된다. 이 춤의 틀은 그 존재의 차원을 담는 그릇인 반면, 그 춤의 틀은 그 존재의 차이를 통해 새롭게 경계지어진다. 곧 춤의 일정한 양식은 존재의 매체이자 존재를 차이로써 갈음한다. 가령 묵묵하고 무게감 있는 존재 베디르한 데흐멘(Bedirhan Dehmen)과 거칠고 감정적인 캔버크 일디즈(Canberk Yildiz), 그 사이에는 그 둘을 중재하고 또 그 사이를 파고 들고자 하는 유약한 미흐란 토마시안(Mihran Tomasyan)가 있다. 

    객석, 곧 가장 먼 곳에서부터 이들은 어느새 하나가 된다. 손을 맞대며 결합된 셋은 마치 하나의 몸으로서 어떤 거부감도 없이, 신체를 서로에게 투여해 공통의 의식을 치른다. 더 긴밀한 차원에서의 결합, 곧 맞댄 머리들에는 어떤 틈도 없다. 그것은 끈적이는 피부이다. 서로에 대한 무한한 믿음, 아니 자아의 확장 혹은 망각이다. 가격하는 무게와 힘은 소거된 상태이다. 이 온전한 평형, 삼각 구도의 완성, 진정한 맹목의 관계, 곧 눈을 감고 서로에게 향하여 있는, 서로에게 열려 있는 그럼으로써 자신을 열어젖힐 수 있는 시간은 쉼과 같다. 평안한 안식처와도 같다.

    하지만 이 질서는 영구하지 않은데, 거기에는 어떤 거리도 허락하지 않으며 인간으로서 실존적 고독과 결여, 외로움을 제어하고 해소할 수는 있지만, 완전한 차폐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거꾸로 불완전한 존재로부터 오는 의지의 산물로서 공동의 형식이 만들어진다고 볼 수 있다. 두 손을 허공에서 살랑거리는, 사르르 풀려나가는 손가락들로부터 비로소 각자의 유격, 거리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 흩어짐에도, 흩어짐 이후에도 역시 질서가 따른다. 

    두 팔을 안으로 접고 펴는 동작들은 반복되고, 무아지경의 상태에 이른다. 반복의 형식으로써 그리고 반복됨 안에서 몰입이 얻어진다. 충만하게 바깥을 취하고 되돌려 보내는 신체 전반의 숨의 몸짓은, 의식과 명상의 형태를 띤다. 이는 또한 끊임없이 도는 모습으로 이어지는데, 앞서 그 셋의 취함과 보냄이 다르듯, 다른 세 개의 파형이 형성된다. 그리고 축 늘어뜨려진다. 공동의 영토, 공통의 토대는 그럼에도 이 셋을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규칙이다. 데흐멘은 이 게임이 시작되기 전의 곳으로 허공을, 연결된 세계의 틈을 본다. 

    데흐멘은 일디즈를 진정시키고자 하고, 이 둘의 긴밀한, 과잉된 절합의 관계에서 토마시안은 멀리서 우두커니 지켜본다. 곧 셋이 결합될 수 없는, 힘의 치솟음과 힘으로의 억누름이 공존하는 자리에서 그는 힘의 균형을 본다, 그것이 서서히 가라앉기를 기원하면서. 데흐멘은 일디즈의 팔에 깊숙하게 자신의 팔을 끼고 또는 동시에 그를 포옹해서 반쯤 그를 제어하고 반쯤 그가 방사되도록 만든다. 마침내 일디즈가 엎드리고 무릎 꿇고 정면을 향한 데흐멘의 무릎에 그 얼굴이 살포시 얹혔을 때, 일디즈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 휴지의 순간을 허공 위에 인상적으로 기입해 낸다. 

    일디즈는 균형이 깨어질 수밖에 없는, 그 자신을 제어할 수 없는 그리하여 바깥의 존재로 쉬이 동화될 수 없는, 예외적 존재에 가까운데, 그 안에는 무언가 자신도 알 수 없는 것이 튀어나오며, 주체를 벗어나는 과잉의 것이 자리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기도 하지만, 그 바깥의 차원에서는 책임의 영역이 된다. 동시에 이는 그의, 그가 감지하지 못하는 욕망의 차원을 보여주는데, 그 욕망은 바깥에서만 유효한 것이 된다. 곧 그 바깥에서의 침투 작용은 그의 내부로의 침잠 작용의 결과로 치환된다기보다는, 그러니까 그것이 중요하다기보다는 곧 그것을 의도하는 것 이전에, 그의 외부로부터의 접촉의 욕망, 또는 그 전의 접촉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키는 가운데, 다만 타자에의 윤리의 양식으로 실천된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의 안정 어린 영역 아래에서, 신체의 복구와 공통의 육체로의 도약이 요청된다. 데흐멘과 토마시안은 사선 방향으로 버둥거리는 일디즈를 향해 함께 걸어 나오며 손을 허공에 쓸어내리고 주워담는 듯한, 마치 일디즈의 고꾸라진 영혼을 쓰다듬고 재를 뿌려 그 죽은 신체를 새롭게 소생시키는 듯한 의식의 행위를 반복한다. 일디즈는 그 사이에서 그 둘의 발목을 붙잡고 일어나고자 한다. 마침내 일어난 일디즈와 데흐멘은 앞선 에너지의 반대 방향으로 서로에게 찰싹 붙는다. 강렬한 포옹이 이 둘의 몫으로만 반복되는 가운데, 토마시안은 그 둘 사이에 끼어 들고자 한다. 그리고 힘은 다시 분산되어 평평해진다. 

    가장 얕은 접촉의 발생, 두 팔을 벌린 채 접촉의 순간에서 빠져나가는 동작이 반복된다. 그리고 강한 구심력으로의 흡착됨과 그로부터 비켜나는 원심력으로의 전환은 무대 전반을 가득 채운다. 달려나가고 벗어나는, 가장 커다란 원환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다시 가장 가까워진다. 서로를 쓰다듬고 껴안는 동작은 이제 위로와 토닥임의 실제적 제스처로 결정된다. 원점에서의 행위는 이제 기나긴 시간을 통과해 온 이들의 자기 위안과 서로에 대한 안부를 전하는 상징적 절차로 다시 쓰인다. 이후 정면에서 본 삼각 구도를 형성한, 세 사람은 무릎을 꿇고 가슴에 손을 얹고 현실로 안착한다. 그들은 공연 내내 그들을 휘어잡고 있던, 그들과 함께 구르고 치대던 육화되는 목소리의 음악 안에 있다. 그리고 마침내 어둠이 찾아든다.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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