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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과 쿠보타 시게코의 〈알란과 앨런의 불평 allan n allen's complaint〉: 비디오 아트의 형식과 정신의 유기적 관계성REVIEW/Visual arts 2026. 6. 13. 13:43

백남준과 쿠보타 시게코의 〈알란과 앨런의 불평 allan n allen's complaint〉[사진 출처=https://allenginsberg.org/2017/09/s-23/](이하 상동). 백남준과 쿠보타 시게코의 〈알란과 앨런의 불평 allan n allen's complaint〉(1982. 28분 33초, 컬러, 사운드.)은 재치 있는 작품이면서 비디오 아트의 특징을 선취하고 있는 작품이다. 퍼포먼스 아티스트 앨란 캐프로와 비트 세대의 시인 앨런 긴즈버그의 이름이 같은 발음이라는 착상은 이 두 사람을 주축으로 하고 있는 이 영상의 제목으로 나타나는바, 영상은 그 두 사람에 대한, 그리고 그 두 사람을 잇는 내용적 전개로 이어진다.
두 다른 인물의 언어 유희적 공명은 프랑스 예술비평가인 피에르 레스타니의 강연으로부터 각기 다른 두 매체와 장르로 변별되는 두 대립되는 인물로 묶임으로써 선취되며 그 근거를 얻는다―그리고 레스타니는 그 역할을 끝마쳤기 때문에 자신의 발화를 더 연장하지 못한 채, 굴절, 왜곡, 변형되면서 우스꽝스럽게 화면에서 사라진다. 그 두 사람의 각각의 불만은 그럼에도 이 제목에서의 우연한 연결로서 삽입되는 각자의 순수한 내용으로 구성된다. 따라서 두 사람의 연결은 이름이라는 우연한 경로를 따르지만, 또한 문학적 혹은 비평적 세계에 의해 선취되지만, 그 둘의 실질적 연결은 그리고 분리는 그리하여 그 우연성을 성취하는 건 ‘불만‘이라는 키워드이다.
먼저 앨런 긴즈버그의 불만은 이와 같다. 후반부에서 앨런 긴즈버그가 자신의 성소수자성을 커밍아웃했을 당시 유대교 학자인 아버지의 반응을 이야기하는 인터뷰 장면―그 옆에 자리한 그의 동반자 피터 올로브스키는 그의 삶 안에서의 일부 조각이자 대항적 모티브로서 아버지의 삽입이라는 현재성의 증거가 된다.―에서 볼 수 있듯 불만은 아버지에 대한 사소한 에피스드에서 그 단서가 지시되며, 이는 초반 아버지와 함께한 연단 위 발화와 이미 죽은 아버지에 대한 상기 사이의 영상 안의 시간적 간격만큼이나 비판적 대응이기보다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한 비평적 분석의 차원과 그 사이의 유머로서 획득되는 차원을 보여준다. 여기서 아버지는 연단에서 계도하는 입장을 청중에 대한 연장의 차원에서 아들에게 선취하고 있다면, 앨란 캐프로의 불만은 그것에 잠식되던 차원을 후반부에 정보의 평등한 양으로, 그리고 피드백의 차원으로 되돌려주고 있는 셈이다.
다음으로 앨란 캐프로의 불만은 앞선 아버지와 아들의 각각의 시간 사이에 물리적으로 자리하며, 물 위에서 걷는 예수의 모습을 영상 편집으로 가능하게 하는 개입으로써 그 불만을 상쇄시켜준다, 또는 우스꽝스러운 이미지로 그를 앉힌다. 그리고 앨런과 앨란, 이 둘의 거리는 그 둘이 떨어진 현재의 물리적 거리로 산정되며, 따라서 그 두 사이를 오가는 ‘n’의 여정은 왜곡과 변형의 이미지로 편집한다.
다시 말해 그 둘의 우연한, 자의적인 연결을 메우는 건 무한하고 산만한 정보의 양이며, 거기에는 그러니까 순수 형식, 0에 가까워지는 내용에는 또한 자유롭고도 자의적인 개입의 최대치 혹은 무한한 값이 가능해진다. 그러니까 이는 마지막 인터뷰 화면에 대응하며 수미쌍관의 구조를 완성하는 처음 피터 올로브스키와 앨런 긴즈버그의 연주 장면이 데칼코마니처럼 갈라지고 병합되는 영상 안의 ‘연주’ 방식으로 거듭나는 것에서 그 둘이 내용적 지층을 뚜렷하게 구성하고 있음, 그러니까 편집의 0으로의 수렴이 불가능해지는 그 실재를 그 불가능성으로써 구현하는 것과는 물론 대조되는 것이다.
먼저 〈알란과 앨런의 불평〉은 비디오의 기제, 되감기의 물리적 차원의 변형이라든가 화면 안의 화면, 화면 위의 화면과 같은 표현적 특질 그 자체를 시연한다. 동시에 푸티지 방식으로써 미디어의 제시 방식 자체를 인용한다. 이미지 안의 이미지는 미디어 안의 미디어이며, 따라서 이미지는 표현 가능하고 또 인용 가능하다. 동시에 이 모든 이미지는 하나의 미디어이다.
전자의 혼합의 양식은 노이즈 차원을 구성하는데, 영상의 굴절, 왜곡, 버퍼링, 색의 감산과 가산, 오버랩 등을 통한다. 후자의 푸티지 접근 방식은 자유롭게 외부로의 열린 질서를 의미한다 또는 가능하게 한다. 순수 형식으로서 (비디오 표현 방식으로서) 내용은 내용으로서 (푸티지, 파편들로서) 형식과 연합하고 연결되며, 각각 배경과 형상으로 결합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는 티브이 채널을 돌리고, 티브이 프로그램의 비연속적, 불연속적 전개 양상을 보는 것과 같이, 그 티브이의 생산 양식 자체를 모방하고 전유하고 체현한다.
거기에는 필시 유머 역시 개입할 수 있다. 몽타주 기법이 선취하는 편집점에 따른 무한한 정서가 가능하고, 무엇보다 제목이 암시하는 유머와 자의성은 자의적인 편집 기법으로 연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알란의 예수가 물 위를 걷는 기적을 연출하는 장면은 음악의 꼬임과 함께 반복 병치되면서 알란의 불만을, 곤란을 ‘병맛’의 해소로, 성취로 찔끔찔끔 성취해낸다, 물이 고체화되고 발이 그 위에 스미듯 일시적으로 안착되는 속임수를 드러내면서.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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