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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희천, 《스터디(Studies)》: 이미지의 잔여 혹은 내파된 시각체제
    REVIEW/Visual arts 2026. 6. 20. 09:41

    김희천, 《스터디(Studies)》[사진 제공=김희천 및 에르메스 재단].

    김희천 작가는 늘 뭔가 그럴듯함을 안기는 서사를 직조해 왔는데, 이는 뚜렷한 이념에 대한 정향이 아니라, 현재에 있어 어떤 결정적인 세계관이나 관점의 창조가 거기에 전제되어 있다는 인상을 창출함을 의미한다. 김희천의 개인전 스터디 2채널로 된 하나의 영상 작업에 대한 스크리닝 설치로, 고교 레슬링팀의 선수 실종이라는 미스터리한 상황 아래 놓인 코치의 미묘한 내면의 층위로 수렴하며, 이를 속마음-내레이션으로 표현한다. 여기서 사라지는 존재들은 그제야 존재하는 존재들로, 사라졌음이 고지됨으로써만 인지되는 대상들이다. 사실상 실존하는 이, 배우라는 클리셰의 형상을 경유하는 이는 연습 영상을 재생할 때 코치와 대화를 나누는 이 한 명뿐이다. 아카이브 푸티지 삽입에 따른 등장인물의 소거와 대체 전략은 하나의 (인물의 목)소리라는 실재에 대한 우위를 확보해 낸다

     

    그가 마주하는, 푸티지라는 기록된 것의 현전했던 과거로부터 부상하는 인물들의 잔영은 현재성의 차원에서 이미지적인 점검을 받는 가운데 자리한다. 기록용 영상의 현장성은 모니터 화면으로 재생되며 비어 있음의 현재를 대체하고 지시하면서 다시 공허한 인물의 내면을 점검한다. 코치가 접면하는 현실은 모니터(데이터) 바깥의 편집점을 위한 잉여적 시간 안에만 자리하는 듯 보이며, 실제 인물들 간의 접촉은 부재하는 듯 보인다

     

    따라서 코치가 영상 속으로 기어들어 가는 것 같은 후반 막바지의 이미지는 그 스스로가 실재와 접면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보다 이미지 자체가 됨으로써 떠돌던 목소리를 상실하고 이야기에 편입되는 기이하고 예외적인 지점으로 다가온다. 자신의 아들이 사라졌음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그의 어머니는 그 안에서 절망과 낙담의 정서를 표출하기보다는 어떤 하나의 이야기로 삽입되기 위해 그 대화를 하나의 이야기 자체로 만드는 듯 보인다. 그리고 이는 결정적으로 실제 전시장 속 암전 속에서 소리로만 구현된다

     

    김희천, 《스터디(Studies)》 전시 전경ⓒ김상태[사진 제공=김희천 및 에르메스 재단](이하 상동).

    이제 명확한 것은 무엇인가. 사라진 선수들과 스파링을 했다는 선수들의 영상에는 열화된 이미지의 흔적이 자리한다. 진실은 그들이 환각을 실재로 착각 혹은 오인했다는 것일까. 그러나 흐릿한이미지는 비가시성의 가시화다. 곧 그들의 경험이 맞고, 실재는 이미지적으로 온전하게는 재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그 표현을 위한 재현이 아니라 식별을 위한 재현의 목적으로 둔 CCTV라는 촬영 장치가 국소적인 세부를 지연되거나 불안정하지만 그럼에도 포착한다는 것을 동시에 말해준다

     

    세계가 망가져 있고 오작동하고 있고 우리는 잘못된 프로그래밍으로 결정된 그 세계를 인지하지만 벗어날 수 없다라는 것. 그 비틀린 세계의 이미지, 직접적으로 먼저나타난 인물들의 구겨짐, 형해화된 이미지의 메타포로서 얼굴은 바벨(2015)을 거쳐, 장르적 공포물의 괴이함의 결정적 요소로 용해되어 가고자 하는데, 이때 시지각적 이미지에 대한 변용의 기술은 바벨에서 그것이 차용한 바그너의 음악이 갖는 비극적 정서의 폭발적 힘과 역치를 안고 좌우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무력감, 우울감, 절망감 따위를, 활발하게 구현, 구사함으로써 그 이미지 생성의 무한한 역량과 자율성의 승화를 꾀한다

     

    반면, 이 장르물 안에서는 이 특정 부분의 편집이 그 나머지 세계의 공고함과의 단절로서만 실현되어야 하는데, 장르의 결정적 지점을 이루는 공포의 요소가 현실 안에서의 균열로서 가시화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때 스터디가 보여주는 일종의 CG로서 일부 화면의 변용은 전체의 전면적인 세공을 통해 매끈하게녹아드는 대신에, 비가시화되어야 하는 부분만을 블러 처리와 같이 별개로 세공하여 그 솔기를 남기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그것은 그 자체로 기괴하기 때문에 공포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 자체로 결정되지 않기 때문에, 그리하여 일종의 개입의 손길을 명시하기 때문에 단지 기이할 뿐이다

     

    여기서 이 서사를 해명하는 것은 무의미해 보인다. 실제 그것은 해소되지 않고, 소문의 진상은 풀리지 않으며, 현실은 안정화되지 않는데, 그것은 장르 영화의 공포에 대한 전형적 이미지를 가져오는 걸 기각한 채, 그러니까 그것의 부재를 경유해 원래의 현실로 돌아올 수 있음을 기각한 채, 그것의 불명확함을, 가산으로서 뺄셈을 통한 불완전한 반투명함을 통해 그 이미지에 대해 재고하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가는 공포물의 열화된 이미지에 대한 향수 따위를 옹호하는 것 같은 제스처를 바깥에서 취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마찬가지로 스터디는 공포물에 대한 메타 언술적 차원의 입장에 서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곧 그 이미지의 존재 자체를 기이한 것으로 보는 것에서 공포의 심급은 멈춘다. 그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이며, 동시대의 시각체제를 의심하는 것이다. 공포는 영상 내부의 괴리가 영상과의 괴리로 이전되는 지점에서, 그것이 현실에서의 전사와 그것을 토대로 한 해소에 대한 희망이 무력화되는 지점을 구성한다. 그것은 일종의 닫힌 이미지를 만들며, 그 한계에 직면한 존재의 내면을 형성할 뿐이다. 나아가면 실제 스터디는 이 시각체제의 우스꽝스러운 재현으로부터 완전한 제거가 불가능한 시각성의 역설을 가시화하는 작업이다

     

    김희천, 《스터디(Studies)》[사진 제공=김희천 및 에르메스 재단].

    스터디는 더한 공포를 초래하기 위해 그 시각성을 완전히 거세한 여러 장면을 만드는데, 그것은 곧 청각만의 세계인 것이다. 그것은 일부로 보이지 않음을 통해 볼 수 없음의 차원에 관객을 빠뜨리는 것이지만, 그 청각이 인계하는 현실은 단지 보이지 않는 것일 뿐인 것이다. 그러니까 청각적 세계에서의 변용을 가하지는 못하는데, 온전한 청각은 완벽한 시각성의 존재를 근거 짓는 부속적 차원에서 전적으로 기능적인 것이다―《스터디는 결코 소리에 대한 진정한 실험을 실천하지는 못한다. 이는 결국 덜 이미지의 차원에서 확정되는 부분인데, 예컨대 앞서 사라진 선수의, 보이지 않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소문의 진실이 서사적으로 풀리지 않을 것이며, 단지 서사 차원으로만 분리될 것임을 의미하는 듯 보인다

     

    그것은 화자의 건조한 내면에 기입되는 정보일 뿐이며, 소문이라는 비가시성의 매체적 속성을 재현한 것이며, 비가시화와 불완전한 가시화, 투명성의 가시화의 심급 아래 첫 번째 비가시화의 축출된 대상이 되는 것이다. 사실상 어머니의 그 말에서 공포는 그것이 실제적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일 필요가 없다는 데 있는 듯 보인다. 곧 공포는 어머니의 말에서 공포에 대한 어떤 해명의 단서를 찾아낼 수 없음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말 자체가 그 서사에 대한 어떤 의심도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것은 소문을 소문으로서 단지 확정할 뿐이다

     

    따라서 비가시화의 전략은 감정의 기원을 소거하기 위해, 그 이미지가 감정을 전달하는 데 적합하지 않은 것이기에 아니 적합한 무엇이 될 여지를 제거하기 위해 시도되는 것으로 보인다. 사라진 대상은 그렇게 그것으로부터 연장된 현실을 잘라내는 것으로써 오직 화면상에서만 추적 가능한 것으로 자리 잡고자 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말이 없다. 공포는 오직 시각적인 차원에서만 극한의 결과를 낳아야 한다. 동시에 주인공에게는 두 개의 말이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현실에서의 말과 그의 내면에 반영되는 말이다

     

    그는 공포를 실제 체감하지는 못하는데, 그것은 사라진 것의 귀환이 아니라 그 흔적을 단지 좇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스터디에서 유일한 공포의 이미지는 결국 그 사라짐의 대상이 다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원래 불완전했다는 걸 재확인하는 절차에 불과한데, 그것은 변용의 결과가 아니라 변용의 과정일 뿐이다. 따라서 그의 내면은 완전히 대상을 상실하지 못함으로부터 오는 우울에 가까워 보인다. 부재는 무가 아니라 잔여의 이미지로 나타나며, 그것은 곧 이미지 자체의 잔여이다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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