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유민경, 〈바디 레시피〉: 인류의 영생적 신체와 탈주체적 경로 사이에서
    REVIEW/Dance 2026. 6. 14. 14:55

    유민경 안무가의 〈바디 레시피〉는 인간의 미용, 건강, 성별, 임신 등의 여러 범주에 대한 역능을 극대화하는 산업적 차원의 과학 기술이 일종의 ‘바디 레시피’라는 이름으로 가능해진 미래에 대한 상상력을 가정하는데, 이는 처음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인체 비례〉를 연상시키는 포즈의 실루엣에서 위로 솟아오르며 투명 지퍼백 안의 실험 대상과도 같은 존재로 드러나는 남자의 모습으로 선취된다. 이상적 인체의 이미지가 가진 역사의 그림자가 미래적 차원의 생물학적 공정으로 조명되며 입체화되는 이 순간, 역으로 과거로부터 미래의 욕망을 추출하고 선취하는 이 장면은, 인체 해부를 향한 열정을 섬뜩하고 기이한 차원에서 다시 쓰는 한편, 공연 예술이 가진 무대라는 가능성의 가시화 자체이기도 하다. 

    좌우로 세 개씩 여섯 개의 스크린은 변형된, 파편화된/분절된 인간 신체―플라스틱 통의 비닐에 싸여 뻐끔거리는 붉은 루주를 바른 하나의 고유한 생명력으로 표상되는 입술은 그 대표적인 이미지이다.―, 인체 모형 혹은 예시로서 신체 이미지들을 비현실적 차원의 높은 해상도로써 일종의 광고 형식을 빌려 끊임없이 제시하는데, 그것들이 가진 내용적 차원의 부자연스러움과 어색함이 발신하는 대상과의 간극, 동시에 그 주체(?)와의 간극은 이 다수의 전광판이라는 플랫폼의 형식과 또한 얽혀 있는데, 곧 무대라는 보조적, 기능적 차원의 장치―멀티미디어적 환경을 창출하는―에서 나아가 서사의 코드를 형성하고, 이는 달라진 세계 환경에 대한 미래에 대한 알레고리를 향한다. 

    어쩌면 이 스크린은 그 발신자의 정체를 은폐하는 과잉과 집적의 이미지들이자 무의식을 함축하고 지배하(려)는 광고적 이미지를 비추어 내는 일방향적 채널이라는 점에서, 수동적인 존재들의 양상과 대비를 이루어서 지배-피지배 혹은 포획-복속의 대립하는 기호 항을 만들어 내는 권력의 채널 혹은 장치이다. 그리고 이는 그 배면에서는 사실 한편으로 AI 이미지 생성 프로세스의 수월성에 대한 동시대적 매체 환경에 대한 질서를 가리키고, 이는 결코 미학적 차원이 아니라 그럴싸한 어떤 이미지들의 무한한 생성이라는 코드 자체의 작동적 양상을 보여주는 데 그친다. 

    한편, 이 몸에 대한 지배적 역량, 몸의 예속적 욕망의 구현은 이미지 차원에서는 기괴한 신체의 창조로 나타난다면, 움직임 차원에서는 관능적이고 뇌쇄적인 차원의 몸짓들로 표현된다. 마침내 ‘바디 레시피’가 활성화된(activated) 순간, 신체들은 엄청난 에너지와 생기를 띠고 폭발적인 신체 운용 역량을 가시화하는데, 이는 에어로빅과도 흡사한 빠른 템포와 전진하는 스텝 아래, 과시적인 차원에서 그 몸짓을 구가하며 마지막 매듭의 단위를 결정짓는다. 

    또한 특기할 만한 부분은 이것이 의도적으로 젠더를 모호한 차원으로 부각시킨다는 것이다. 이는 이후 연극적 장면으로 삽입된 현대인들의 대화에서 성별 선택에 대한 선택 가능성이 바디 레시피의 하나로 삽입되어짐에서도 명시되는 부분인데, 젠더가 선택, 변화 가능하다면, 이는 인간의 다양하고도 무한한 변신 가능성의 전제는 퀴어를 비롯한 이질적 존재 양상에 대한 개방적인 사회의 진일보한 측면을 전제하고 있는 것일까, 아님 이는 패션형의 급격한 혁신 가능성, 스펙트럼의 다양성을 드러내기 위한 캐치프레이즈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일까. 

    이들 앞에 나타난, 얼굴에 망사를 쓰고 가슴과 엉덩이에 큰 풍선을 단 여자 샘플은 미의 초과된 형상이 갖는 그로테스크함을 띠는데―이는 류장현과친구들의 〈GRAVITY〉에 등장한 풍선을 의상 안쪽에 끼워 넣은 형상과 비교해 봄 직한데, 집단으로 전이된 이 같은 형상에서 정신분석적 차원의 욕동과의 순수한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면, 여기에서 그 격리된, 이질적 신체의 차원은 우리라는 범주 자체를 고민하게 한다.―, 이는 앞선 생체학적 표본에서 이어진 비주체성의 극단적 예시를 상정한다. 

    반면, 희미한 틈에서, 전자에서 지퍼백을 (여는 게 아니라) 뚫고 탈출하는 남자의 모습이 실재에 던져지며 탄생하는 인간의 주체성의 발로를 드러낸다면, 이 여자는 바디 레시피를 거친 ‘인간’의 변형된 형상인가, 아님 인간의 형상을 한, 인간의 ‘유전자’로부터 연장된 순수한 과학적 조작의 산물인 것인가. 이 말함이 봉쇄된, 말하지 않는 신체를 무어라 정의해야 하는 것인가. 

    “맞춤형 제작 가능”이라는 문구와 같이, 바디 레시피를 경유하면 신체는 트랜스된 존재로, 곧 이전의 신체를, 정신을, 주체성과 정체성을 함께 벗어던질 수 있게 되는 것일까. 이는 완전한 상실인가 잠재성의 실현인가, 곧 주체의 심급을 새롭게 갱신하는 것인가, 아님 아예 소거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성찰에 앞서, 〈바디 레시피〉는 이러한 가능성이 극단적으로 펼쳐지는 미래에 대한 상상력을 과장된 것으로 또는 과잉된 것으로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춘다. 

    바디 레시피의 도입 후, 색색이 물드는 스크린을 기점으로 뒤틀리거나 엉덩이끼리 달라붙은 몸과 같이 특이성의 신체 계열들이 앞뒤로 파생되는데, 그러고 나서 등장한 두 개의 튀어나온 배를 가진 남자의 등장에 포개지는 건, 또는 그를 잠식하는 건 비늘이 군데군데 솟아나고 기다란 파충류의 혀를 지닌 비인간화된 인간의 형상이 비친 스크린들이다. 그는 그것의 머리 아래 위치하며 그 몸의 일부가 되(려 하)는데, 이후 배가 꺼진 여성 집단의 등장은 어쩌면 그 비인간으로의 변형됨이 선취된 이후, 인간을 위한 기능적 대리물로서 존재의 등장 이후에, 결여된 주체의 위상을 표시하는 데 가깝다. 

    ‘무언가가 이미 충족되어 있다.’라는 말은 어떤 것도 충족할 만한 부분을 지시하지 못한다, 언표하지 못한다의 차원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 곧 이들은 몸을 문지르며 초과되거나 튀어나온 몸의 부위가 없음을, 그 밋밋함을, 부재함의 상태를 해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것으로 보인다. 정체성은 온전하기에 또는 대리되었기에 오히려 문제인 상태라는 아이러니에 결박당한다. 기술의 진보와 신체의 퇴화가 급격한 조응의 결과로 나타날 수 있을까. 곧 성의 경계를 허무는 임신의 대리 위임이라는 기능의 이전은 급격하게 인류의 신체를 급격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인가.  

    여기서 젠더가 신체 변형의 한 옵션이 된 시대에서, 곧 패션으로 소비되며 기능적으로 전화 가능한 사회에서, 젠더는 하나의 표면이나 이미지 이상의 것이 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그것이 갖는 사회 체계의 구조 전반과 기존의 인간의 이념과 의제를 급격하게 무력화한다. 반면, 여기에는 자본과 그 선택의 능력에 대한 관계까지는 다뤄지지 않는데, 이러한 시선을 경유한다면, 앞선 결핍된 여성 인류의 초상은 기본적으로 기능을 이전한, 곧 선택한 부르주아 계급과 그것을 갖지 못하기에 괴로워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 사이에서 미결정된 위치를 수여한다고 볼 수 있는가. 

    아님 신체의 자유로운 선택 가능성과 이전 가능성은 기술의 진보가 기존 다른 모든 노동의 영역을 대리, 대체할 수 있음을 이미 전제하며, 그 계급과 신분의 기존 격차를 가로질러 오로지 진정한 개체의 자기 보존의 근거로서 인류의 신체 결정과 변형만이 남은 피폐한 시대상을 가정하는 것일까. 그러니까 무엇보다 이것은 근원적 신체 해방에 따른 인류의 무력함만을 보여주는 디스토피아적 서사의 자연스러운 결말일까, 근원적 해방의 길은 인간의 제한된 신체로부터 가능함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정치적 (불)가능성의 (반)서사 아래 쓰인 부정적 상상력의 일환일까. 

    이에 대한 판단은 다시 그 직전으로 돌아가 ‘여자들’이 공허한 놀음에 천착하고 있던 것이었는지 또는 주체의 변신을 갈급하게 요청하고 있었던 것인지에 대한 결정을 요청한다. 아마도 〈바디 레시피〉는 핍진한 재현에 기초해서 인류의 타락한 면모를 (그 반대의 가능성을 소거한 채) 극대화해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무대 안쪽, 진공 백 안에 들어가서 신체를 앞으로 되돌리려는 또는 동결시키려는 행보를 보이는 처음의 남자와 그를 향하며 무대 앞쪽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몸으로 기어가는 여자의 대립적 초상을 통해, 기술에 의존하고 집착하며, 그것만이 일시적인/영구한 해방의 근거가 되는 탈주체화된 신체, 곧 좀비화된 신체가 잠식한 시대의 결말을 향한다. 

     

    김민관 편집장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