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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AFE 2026] LINKINART, 〈our time, our space, our energy〉: 오늘날 집단성의 가치 혹은 의미REVIEW/Dance 2026. 6. 13. 13:43

LINKINART, 〈our time, our space, our energy〉ⓒ옥상훈[사진 제공=(사)한국현대무용협회]. 〈our time, our space, our energy〉(이하 〈our time〉)는 집단의 질서와 생명력 사이를 교차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판을 짜는 데 골몰한다. 집단적 물결의 시각적 이미지와 집단적 열기의 신체적 엔트로피는 충돌하기보다 하나의 다른 분화와 같은데, 이는 그들이 ‘우리’라는 공동의 전선으로 묶이면서 그 안에서 어떤 적대나 나아가 위계 등이 소거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곧 안무를 맡은 신창호는 40명의 무용수를 실질적 운용의 차원에서 균형적 배분의 방식을 선택했으며, 이는 평등함과 공정함의 가치가 곧 작품의 주제로까지 격상됨을 의미한다.
문제는 제작 방식의 투명함이 아니라 그것이 작품 내재적으로 어떻게 이행하느냐인데, 그러니까 주제의식의 차원과 어떻게 손잡고 있느냐, 어떻게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있느냐인 것이다. ‘집단에의 고양’이라는 어떤 일관된, 지향적 흐름은 ‘평화로운’ 사회의 환상을 통과하는 근원적인/억압적인 이념의 가상적 실천 같은 것일까. 어떤 갈등이나 다툼은 끝끝내 일어나지 않으며―일종의 배틀 형식의 도입 아래 의사-갈등이 잠시 출현한다.―, 반대로 긴밀한 결합과 상호 부조의 차원에서 무언가를 만들며 변용되기보다는 집합적인 배분 아래 그들은 머물러 있는 데 가깝다.
다시 소급하면, 집단의 투명성은, 곧 각각의 일자들의 개성이 그대로 ‘보존’되는 장소성은, 관계의 차원에서, 주체의 변용적 차원에서 어떤 서사도 갈음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들은 평등한 만큼 밋밋하며, 과잉되는 만큼 하나의 법칙으로 수렴한다. 그러니 누구도 더 돋보이며 특이성을 구성하기보다는 누구도 법칙을 무산하지 않으며, 그럴 수 없다. 모두는 합의되어 있지만, 그것은 누구도 덜 드러나는 걸 원하지 않는다는 차원에서의 최소한의 정의, 평등함에의 구속적 원칙을 따른다.
아마 〈our time〉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군중’의 흥분과 환호로써 집단적 공고함과 견고함으로부터 벗어나 각 개인으로 해체되는 순간일 텐데, 이는 흡사 힙합 신의 집단의 놀이와 유희 형식을 상기시킨다. 아니 거기서 차용한 것일 텐데, 이는 두 사람이 마주한 가운데, 그 바깥에서 그들을 둘러싼 집단의 응원이 반으로 갈려 춤의 난도를 올려갈 때마다 그 환호도가 커지는 풍경이 그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집단적 성격의 재조정이 없었더라면, 작품은 무의미한 배치의 형식‘들’ 자체를 절대화하는 것에 가까웠을 텐데, 거기에는 어떤 존재의 정념이나 정동도 자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our time〉은 막이 걷히고 하수에서 한 남자가 반대편으로 걸어가고, 그 반대편에서 한 여자가 등장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이는 피터 브룩(Peter Brook, 1925~2022.)의 『빈 공간』(1968)의 연극이 성립하는 최소한도의 결정적 장면을 상기시킬 수 있지만, 이는 집단을 이루는 일자의 출현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띠지는 않는다. 오히려 일 대 다의 대비를 이루었을 때가 작품 내에서 어떤 특이점을 달성하는데, 그것은 집단성 자체가 하나의 스펙터클로 결정될 때, 그 바깥에서 전도되는 일자의 차이가 불투명하게 강조되기 때문이다.
곧 그것은 가려 있으며,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서 강력한 발화의 흐름을 만든다. 또 하나의 결정적 장면인 것처럼 여겨지지만 꺼뜨려진 장면은 앞선 두 사람이 결국 서로를 마주한 채 겹쳐지는 장면, 곧 손을 잡아 허리를 뒤로 젖히며 (아마도 한쪽 허벅지 쪽을 대고) 서로를 지지체 삼아 평행한 이미지를 만드는 모습으로, 이는 우발적 관계의 결속이 일어나는 일종의 사건이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은 태연하게 펼쳐지며 우연적인 것에 그친다―필연적인 것의 개념 쌍을 만들지 않는다.
광택이 나는 검은색 글로시 자켓과 회색 바지, 검은 운동화로 공통되게 착장한 존재들은, 집단으로 연장되어 가는 와중에 백색소음의 일상 세계의 중첩된 레이어 안에 포함되게 된다. 그리고 다시 한 명만 무대에 남고, 나머지는 뒤돈 채 뛰어나오며, ‘좌우로 정렬’ 하는데, 이 일정한 질서적 배열로부터 집단의 미학이 발생한다. 가령 둘씩 마주하여 긴 열을 이룬 이후, 하수 뒤쪽에서 상수 앞쪽으로 사선의 경사를 그리는 배치에서, 일자가 하수 앞쪽으로 나아갈 때 이는 일정한 전체 무대 내 균형과 대비의 각도를 구현한다.
일 대 다의 대비는 처음 일자의 출현이 잠재적인 차원에서 어떤 가능성을 가진 것으로 되비쳐지게끔 한다. 사선으로 평행하게 여러 열을 이룬 존재들은 물결을 타듯 팔을 위에서 옆으로 뻗기도 하는데, 이러한 일련의 동작들은 매스 게임을 연상시키는 가운데, 다시 2열의 수평선을 이룰 때 아마도 가장 키가 큰 남자 무용수가 그 바깥/안쪽에서 격렬한 몸짓을 수행하기 시작하며 일 대 다의 구도를 다시 출현시킨다. 그가 하수에서 상수로 한 번 훑고 간 후, 멈춰 있던 집단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집단의 안무는 그러나 메스 게임의 현실적 스펙터클보다는 집단이라는 가상-환영적 질서를 향한 듯 보인다. 그것은 이미지의 자동 방식적 혹은 알고리즘적 산출이며, 이미지에 적합한, 이미지에 부착되는, 이미지에 맞춰 깎여나가는 어떤 움직임들이다. 그리고 조명이 앞으로 가해져 무대가 밝아지면서 채도와 명도가 모두 올라가며, 의상이 시각적으로 변용되는데, 이때 둘씩 짝을 이루게 되며 강렬한 에너지는 그 둘을 오가며 증폭되기보다 분배된다.
그리고 투명 플라스틱 커튼이 뒤쪽과 양 옆면으로 내려오는데, 이는 레이저 조명의 스크린이 된다. 타격음과 레이저가 그리는 선을 따라 잣는 분주한 존재의 손짓들 모두 그 이미지의 기입과 완전히 동조화되지는 않는데, 전자가 덜 더디다면, 후자는 조금 더 더딘 것이다. 레이저는 점점 평면을 그리기 시작하고, 공간을 횡과 종의 축으로 분할하며 횡단하기 시작한다.
그보다 특이한 건 선분 하나씩을 빠르게 이어 가며, 레이저가 사람의 형상을 빚어내는 것으로, 그것은 마구 산란되는 종잡을 수 없는, 주체할 수 없는 무용수 개체들의 에너지를 마치 신체가 하나씩 형성되어 구조화되며 단순한 표면을 이루는 것으로 은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레이저가 모두 꺼지고 남자 한 명이 꿈틀되는 형상으로 남는데, 이후 한 명씩의 등장이라는 평등한 배치를 구가한다. 이때 각 개인은 제자리에서의 집약된/강화된 발광적 몸짓들을 선보인다. 회전이나 뒤로 다리를 빠르게 차올려 한 바퀴 회전하는 등의 움직임, 그리고 팔을 정신없이 여기저기로 놀리며 격하게 발산하는 움직임 등이 그것인데, 그것들은 매우 짧은 구문으로, 어떤 몰입의 측면이 진전되기 이전에 다른 이의 침투로 배턴 패스를 한다. 이는 결과적으로 그 정도의 짧음으로는 소진되지 않을 테니, 모든 걸 쏟아낼 수 있어야 한다는 어떤 강령의 충실한 복제이다.
이 가장 긴 구간일 수밖에 없는 일자들의 나열 구간이 지나고 나서, 바텐이 내려오고, 사람들은 어둠 안에 있게 되며, 다시 집단적 양상의 움직임이 만들어진다. 이때 어깨를 좌우로 흔드는 앞 열의 뒤돈 퍼포머들 중 중앙에 위치한 남자의 무용수가 돋보이는데, 이는 다른 이들의 산만한 열기 아래 예외적으로 ‘리듬’을 그가 파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팔을 위로 뻗어 제의적 기호를 연출함은 신창호의 초기 작 〈No Comment〉(2002~)를 상기시키는데, 이는 원시적이고 집단적인 부족적 에너지를 전제한다.
반면, 〈our time〉은 어떤 동등함의 외양을 집단의 일체화된 표지가 아니라, 집단 내 개체성의 평등함으로 갈음하고자 한다. 그러니까 시간은 흘렀고, 세계는 바뀌었는데, 무엇보다 ‘더’ 많은, 최대한 많은 이들, 무대를 완전 채우는 집단의 수적 강화를 토대로 하는 작업에서는, 그것이 곧 물리적으로 절대적인 제한과 규칙이 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변용적 이행 역시, 집단의 물결이 상태적으로 온오프되는 정도, 또는 그 안에서 배치의 예각을 조정하는 정도, 그리고 배치의 순서를 조정하는 정도―일자들의 집산으로서 집단(예컨대 일자들의 나열은 그것이 모든 이로서 충족될 때 그침이 전제된다.)이거나 즉각적인 하나의 집단으로서 제시된다.―에 그치게 된다.
곧 계속 무언가가 바뀌지만, 구도는 거듭 반복되는 것이다. 아마도 시각적 차원에서 가장 큰 변화는 레이저도 바텐도 아닌, 점퍼를 벗어 티만 입은 소수의/예외적 존재들이 등장하며 집단에 섞이는 장면이 될 텐데, 이로써 거의 후반부에 이르게 된다. 크럼프 같기도 하지만, 사실 어떤 계통도, 질서도 없이 마구 휘둘러대며 ‘결정’되지 않는 움직임들은, 실은 이 집단의 차원이 무의식적으로나마 전제하는 게 좀비에 가까운 것 아닐까라는 추정에 이르게 한다. 곧 인간-부족에서 비인간-군중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대중 문화의 이미지, 그리고 개체화되는 삶의 근거와 이념 등이 자리할 것이다.
이 베이지색 슬리브를 입은 존재들은 처음 일자의 자유로움을 홀로들 추구하는 것 같다가 그 안의 경계 영역에 갇히는 이미지로 전도되게 된다. 그리고 일렬의 대열 안에 감싸이고, 집단 차원에서 양옆으로 왔다 갔다 하는 와중에, 막이 내리게 된다. 여기에는 아프리칸 타악 리듬이 체현되는바, 부족적 향수를 풍기지만, 그것은 갈등의 봉합이나 집단의 힘을 드러내거나 하는 여타의 서사가 구축되는 건 아니다. 반면, 정신없음의 움직임이 일정한 질서로 분화되는 지점에서, 일 대 다가 그런 대로 공존하고, 또 집단의 역학을 그런 대로 유지하는 그런 세계의 반복으로서는 적어도 충분한 것이다.
〈our time〉은 동등한 차원으로 적용되는 집단성을 투명한 원리와 규율로 내세운다. 이들이 나타내는 세계는 개체의 철저한 자율성을 근거로 하되 그 주체성의 차원이 진정한 것인지를 의문시하지는 않는 세계이기도 하다.
그것이 집단의 어떤 정체성이나 이념을 표상하지 않으면서, 곧 어떤 세계의 역학과 세계관 자체로 연장되지 않으면서 오로지 현재성의 차원만을 지닌다는 점에서 그것은 미결정적인 역사, 미분화되어 가는 반-역사를 현상한다고 하겠다.
그리고 〈our time〉은 이 ‘우리’라는 것을 어떤 외부와 (변증법적으로) 연결 짓지 않은 채 자족적이고도 확고하게 결정 짓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어떤 존재와 세계도 ‘은유’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 작업이 희미하게나마 오늘날의 어떤 증상을 보여주고 있는 건 아닐까. 개인을 존중한다는 일정한 규약에 대한 이행 조건 아래 모든 것이 보존되며 제한되는 자율적 사회의 단면으로서 말이다.김민관 편집장
안무: 신창호
출연: 강희수 권서현 김다현 김민솔 김민재 김민지A 김민지B 김소윤
문지은 박지유 서진환 서채원 송주연 안가인 안유하 안윤지 안진성 양정윤 양현석 오수민 오원경 이가영 이승연 이윤규 이윤아 이주영 이지은 장윤서 정건세 조인영 조정익 조민하 전유진 조연우 차지혁 최다현 태주완 홍서연 홍수진 황다아
조명: 김정화
음악: 조정익
영상: 김제민
무대: 이태양
의상: 최인숙
테크 코디네이터: 김동규
리허설 디렉터: 정하늘
협력 코디네이터: 민정원
작품길이: 6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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