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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쓰니 Szu Ni WEN, 〈나를 잊지 말아요〉: 타자의 목소리 혹은 타자로서 목소리REVIEW/Theater 2026. 6. 20. 09:42

원 쓰니 Szu Ni WEN, 〈나를 잊지 말아요〉ⓒ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하 상동). 원 쓰니 Szu Ni WEN의 〈나를 잊지 말아요〉는 모르타르 반죽으로 만든 벽돌을 비롯한 재료로써 쌓아올린 몇 개의 토대물들로부터 도시를 만들어 가는 공사 현장의 모습을 연출해 놓은 것에서 시작하는데, 이는 수직으로 부상하는 ‘기념비’라는 메타포가 관철되는 물리적인 하나의 출발점이 된다. 그것이 물화된 것으로 공허한 이념과 억지스러운 제도적 산물일 수 있음이 의심된 상황에서, 우뚝 선 살아있는 존재의 차원은 그것과 대비되면서 기념비의 의미를 갱신한다. 곧 렉처에 가까운 직접 발화 양식이 역할이 아닌 존재와 결부되는 지점에서 역시 기념비에 대한 이념이 생겨나는데, 예컨대 현재의 시간을 관통하고 있는 존재의 잠재성과 질문의 양상이 그것이다.
모든 질서는 경계를 내포하며 이는 기념비라는 물질로서 특정화된다. 거기에는 기념의 성질뿐만 아니라 애도와 기억의 재투사를 위한 역할 역시 자리하며, 공동체를 구획하고 그 공동체의 정체성에 대한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대부분 명칭과 시간, 이름들만이 가득할 뿐인데, 가령 그 물리적으로 한정된 자리에 누구의 이름을 집어넣어야 하는가는 기념비가 가진 한계와 형식적 차원의 성격을 모두 가로지른다.
〈나를 잊지 말아요〉는 초반, 세르비아 정교 가톨릭, 이슬람교를 각각 믿는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세 민족 간의 갈등에서 비롯되었던 보스니아 내전에서 상호 얽힘의 관계를 경유해, 중국의 지배 아래 있는 대만의 정체성을 드러내면서 시작되는데, 이는 대만인으로서 전쟁의 위험이 일상에 내재하는 부분과 한 국가의 정체성이 경계의 차원에서 위협받을 수 있음을 토로함에 앞서 이것이 국지적인 차원이 아니라, 전 지구적 차원에서 그것을 확장하기 위해 다른 세계사적 상황을 인용하기 위함이다.

전쟁에 대한 공포는 살려달라는 전쟁 포로의 뒤통수에 대고 총을 겨누었던, 화자의 아버지의 경험으로부터 예기되고, 정식적인 사법 절차를 거치지 않고 신고만으로 처형이 이뤄졌던 과도기적 상황들, 석양과 시신이 하나의 기호로 연합되는 트라우마의 감각 등이 병치되면서 마치 6.25 남북전쟁을 경험한 우리의 경험을 번역한 것 같은 인상을 주는데, 〈나를 잊지 말아요〉가 전제하는 바 역시 그 나라만의 예외적 시간성이 아닌, 동아시아적 차원에서 공통의 기억을 추적해 나가는 확장의 차원에서 역사를 되새기고 있음에서 그것이 더 특정되어 지시되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니까 과거의 기억이 현동화되는 지점은 감각으로서 기억과 지금 여기가 재설정된 장소에 대한 연대와 협력의 정신과 결부된다. 이는 직접적으로 필리핀의 러스 리그타스 Russ LIGTAS와 대만의 원 쓰니 Szu Ni WEN가 자신의 국가의 상황을 공유할 때 무대는 리프트 장치의 오르내림―말을 하는 이의 부상과 말을 듣는 이의 하강―으로써 그 둘을 기념비인 양 반영하는데, 곧 거대한 국가 차원에 예속되는 개인에게 가해지는 위협은 그 국가적 동요 안에서 발화하는 개인의 운동성으로 불안정하게 승화되는 지점을 남긴다.
공교롭게도 대만과 필리핀, 한국은 모두 일본의 식민지 시절을, 미군 기지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이는 ‘아시아’라는 하나의 이름이 서구와 상대적 개념으로 정의된 타자의 이름만이 아니라, 그 연장선상에서 근대의 공통된 경험의 차원에서 연대할 수 있음의 가능성을 타전하는 것으로 재의미화될 수 있음을 제안하는 듯 보이는데, 이는 과거의 기억에 대한 교류와 연대를 통해, 아시아의 복권이나 초아시아적 질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억에 대한 공통감각을 통한 아시아에의 평화를 향한 노력, 그리고 인류 차원의 확장적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 공통의 역사적 경험 직후, 백지영의 〈잊지 말아요〉를 노래방 버전 그대로 전유하는 부분은, 곧 아마도 한국의 노래방에서 경험했을 부분은, 공통의 비자립적, 타율적 외부로의 통치 경험에 대한 것을 개인의 정서적 차원으로 굴절시켜 드러낸다. 이때 적에 대한 개념보다는 공통의 연대 의식적 차원에서의 제안으로서 성격이 강한데, 이는 그것이 한국어를 경유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때 ‘나를 잊지 말아요’는 사라져가는 역사에의 타자의 외침이며, 그 말이 향하는 이, 그러나 그것을 듣지 못하는 이를 공통적으로 체현하는 존재의 범주에 이 세 개의 국가를 초대하고 접속게 하는 것 아닐까.
그것은 뒤이어 인용되는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 소감에서 ‘과거가 현재를 돕고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렸다는’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어떤 발화, 곧 과거를 기념비가 아니라 기억의 일환으로 지지해야 함을 의미한다. 기억은 당신―역사(의 타자)―을 ‘덜 외롭게 하는’ 것이며, ‘나를 잊지 말라는’ 타자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는 방법이다. 이처럼 윤리적 차원에서 국가를 가로지르는 공통의 토대를 만드는 과정에서, 국가 간의 문화적 참조점이 교차하는 지점이 생겨나는 건 인상적이다.
일종의 렉처 퍼포먼스에 가까운 〈나를 잊지 말아요〉는 무엇보다 현재 대만에 대한 문제의식을 전제로 한다. 대만이 중국과의 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 나아가 그것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대신 어느 정도 수용하는 내부적 관점의 차이에 대해서도 역시 불안과 두려움을 겪는 원 쓰니 개인의 정서는, 더 정확히 어떤 정동은 그 문제의식의 정합성보다 앞서 놓이며 잠재적 차원으로 놓이는데, 이는 현재보다 미래의 시점에 그것이 조응하기 때문이다.

곧 대만의 자율성을 찾을 수 있는 직접적 방안보다 또한 비판보다 사회적이고 인류적 차원의 문제의식으로 고취될 수 있는 차원을 기도한다고 할 때, 원쓰 니의 발화는 대만을 억압하는 중국에 대해 나는 찬성하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바틀비식 거부의 제스처에 한편으로는 가깝고,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의 타자와 같이 그 자신을 놓고 있는 것 아닐까. 곧 그것에 반대하는 나 자신의 암묵적이고 또한 비순응적인 말을 듣겠다는 것. 거꾸로 보면, 이 발화는 그 타자의 정동 자체를 향하므로, 거꾸로 중국에 대한 어떤 비판의 정합성 자체를 가리키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연대 자체의 의미가 절대적인 시간성을 필요로 한다고 할 때 아직 그 조건을 충족시키기에는 부족한 것처럼 보인다. 통시적 역사의 구조의 상동성을 확인했다면, 공시적 차원에서 이를 다시 접근할 때 각자는 문화의 전유가 아니라 그 문화를 가로질러 ‘정치적 무의식’의 근저에 도달해야 하는데, 아마도 그러한 분석 작업, 횡단의 행위에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어떤 정전을 찾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발화에 초점을 둔 렉처 퍼포먼스의 과정에서는, 다른 여느 작업과는 다르게, 드라마투르기가 직접적인 작용과 결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보인다. 물론 여기에는 공동의 리서치라고 하는 과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더 단단하고, 또한 효과적인 언어의 구성과 배치, 그리고 그 언어 자체를 정초하는 과정―그것이 드라마투르기의 영역이라고 한다면―에서 각자의 진술과 입장이 어떻게 역사에, 그리고 인류의 시간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에 대해 따로 또 같이 접근해 가야 하는 것―그것이 리서치 제반의 과정일 것이다.―이다. 그런 점에서 이는 지난하고도 입체적인 과정으로서, 진정한 상호 교차적인 작업의 일환일 것이다.

대만의 현재 상황이 한국의 관객으로서 우리에게 낯선 것이라면, 반면 광주의 기억은 그 바깥에서 접속되는 어떤 경로로서 희미하게 드러난다. 원쓰 니의 발화는 곧 내재적인 걸 공통의 차원으로 드러내야 하고, 희미한 걸 조심스럽게 접근해 들어가야 하는데, 이는 다른 존재를 가정하고 듣기와 같다. 그것은 번역이라는 과제를 후차적으로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내재적으로 안고 말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한국말을 어설프게나마 일관되게 구사하려는 리우 위첸 Yutsen LIU의 매개자로서 위상은 이 작품이 결코 어떤 국가에 귀속되지 않는 아시아적 차원에서의 말하기를 결코 어설픈 것이 아니라 대담하게 수행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연대로써 공통의 토대를 만드는, 또는 확장성을 가진 개별 국가의 토대를 상정하는 이 같은 작업은, 그 어색한 언어 전용의 형상이 역설적으로 그 시작의 첫걸음으로서 유의미함을 가리킨다. 부족함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시작임을, 더 정확히는 시작이어야 함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번역이 아니라, 번역에의 의지에 대한 지시이다. 반면, 이 과정에 대한 진술은 소거되었는데, 이 메시지에 대한 소구력은 생각보다 크지는 않은 듯 보인다. 그러니까 뚜렷한 발화의 너머에서, ‘가로지르는 언어’는 메타 작업으로서 소개되지 않은 과정에 대한 암묵적 진술을 전제한다, 어쩌면 그 발화가 가야 할 어떤 경로를 진술하는 측면에서 주요하게도.
기념비의 파고로부터 내려와 끊임없이 가설되는 도시 너머에서, 입장 시 받았던 돌 하나를 참여의 몫으로 남기고 끝나는 〈나를 잊지 말아요〉는, 그 돌이 평평한 모듈로서가 아닌 제각기 다른 작은 돌이라는 점에서, 관객의 역할은 염원의 탑을 쌓는 역할 모델의 가능성에 조금 더 가까워진다. 마지막과 함께 열린 문을 향해, 무한한 가능성, 또는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출구에 대한 지시를 통해, 이 손쉬운 해소―놓아버림―와 함께 오히려 현실은 이 염원 너머의 상대하기 힘든 불가능한 미션으로 부상한다.
김민관 편집장
2025.11.13.(목) / 11.15.(토) 시간 목 19:30, 토 16:30
예술극장 예술극장 극장2
연출 원 쓰니 Szu Ni WEN
드라마투르그 임인자
프로듀서로 인루 Yinru LO
무대/영상 디자인 장 후이밍 Huei Ming CHANG
사운드 디자인 장 타오 Tao CHIANG
소품 디자인 림 싱이 Xing Yee LIM
공동창작/퍼포머 러스 리그타스 Russ LIGTAS, 리우 위첸 Yutsen LIU, 원 쓰니 Szu Ni WEN
무대감독 텅 샹팅 Hsiang Ting TENG
무대조감독 량 홍위에 Hung Yue LIANG
음향감독 나인권(ACC), 정인범(ACC)'REVIEW > Theat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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