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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 로런 무니(Lauren Mooney) & 제임스 예이트먼(James Yeatman), 연출 민새롬, 〈모어 라이프〉: 정신과 신체의 모호한 경계가 지시하는 과도기적 현재성REVIEW/Theater 2026. 6. 20. 09:42
역사를 가로지르는 무한한 신체의 정초

작 로런 무니(Lauren Mooney) & 제임스 예이트먼(James Yeatman), 연출 민새롬, 〈모어 라이프〉[사진 제공=두산아트센터](이하 상동). 〈모어 라이프〉는 메리 셸리(Mary Wollstonecraft Shelley, 1797~1851)의 소설 『프랑켄슈타인』(1818)을 모티브로 하는데, 이는 당시 작가가 살던 세계의 환경을 포괄하는 차원에서 그러하다. 곧 『프랑켄슈타인』의 모티브가 된 당대 과학적 조류였던 갈바니즘, 곧 동물에 전기 자극을 주고 생명을 재생하는 실험이 서사의 영도가 되는 것이 그것이다. 『프랑켄슈타인』에서 괴물을 만든 박사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2074년 미래에 인간 뇌를 하드웨어로 치환해 일종의 휴머노이드와 같은 다른 신체에 입혀 계속 삶을 살아가도록 만드는 기술 실험의 책임자인 빅터로 재창안된다면, 갈바니즘의 실험체, 살인자 조지 포스터 그 자신의 영혼은 빅터의 주요 실험체인 브리짓으로 이전되었음이 희미하게 암시된다.
『프랑켄슈타인』의 박사가 모티브 자체로 ‘기입’된다면, 서사의 전사, 곧 그 이전의 실제 역사에서 죽어서도 죽지 못하는 실험체로서 시신은 시간을 뛰어넘는, 서사적 횡단의 영속적 매개체로서 그야말로 ‘되살아나며’ 『프랑켄슈타인』 속 괴물의 진정한 자리를 차지한다. 곧 죽어도 죽지 않는 건 서사적 모티브 자체이다―하지만 그것이 서사를 실재의 차원으로 끌어낸다. 그러니까 〈모어 라이프〉는 『프랑켄슈타인』을 다시 쓰지만, 『프랑켄슈타인』을 하나의 역사(적 서사) 안에 재생함으로써 그러하다.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시대로, 『프랑켄슈타인』의 서사에 깃든 어두운/심원한 욕망으로 소급됨을 선택함으로써 말이다.
처음 역사적 전사는 다음과 같이 서술된다. 아내와 아이를 물에 빠뜨려 죽인 살인자 조지 포스터의 사형 집행이 이뤄지고, 살인자의 시신을 국가가 소유하던 당시 법을 연장해 그의 해부를 승인한다. 이는 당대 연구용 시신의 필요성과 결합되는데, 이에 따라 1803년 지오바니 알디니(Giovanni Aldini, 1762~1834)는 당시 갈바니즘이라는 과학적 조류에 근거해, 전기 충격을 통해 시신을 되살리는 실험을 공식적으로 인간에게 수행하게 된다.
앞선 암시의 부분, 조지 포스터의 영혼이 갈바니의 실제 전사라는 사실은 두 가지 질문을 동시에 낳는데, 과연 어떻게 그것이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곧 최초 하드웨어의 판본이 되는 것이 가능한지와 실제 인간의 기초적 토대로서 자리하는 게 현실적으로 유의미한지는 제시되지 않으며, 따라서 그 말 자체가 모호해지는데, 이 부분은 사실 서사 자체의 구멍이자 서사의 환상성을 그대로 전가한 것과 같은 환원적 서사의 한계를 보여준다―빅터가 서사의 메타적 층위에서 그 빅터일 수는 있지만, 그렇게 명명되(어 이유 없이 작동할 수 있)지만, 이는 그와 달리 역사의 비약 안에서, 서사의 연결 고리들 역시 휘발되는 가운데, 다만 희미한 모티브가 단지 희미하게 ‘강제’되어 그 봉합물의 솔기를 드러내는 부분이다.
이에 따라, 조지 포스터의 생명적 착시의 순간은 사후적으로 생명 발생의 차원을 예기하는 순간으로 재조정될 필요가 있다. 조지 포스터는 교수형을 통해 “사회적 처벌”을 그리고 시신을 훼손당함으로써 부활이 불가능해지는 “영적 처벌”을 받은 셈인데, 이는 전기 자극을 통해 한쪽 눈이 뜨이고 오른손이 튀어 오르는 결과에 따라 마치 그 죽음의 이전으로, 신체와 함께 영혼까지 되살림을 반복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판본을 전제하는 것과 같은 것이 되는 것이다―그러니까 앞선 질문으로 소급되는 질문, 그의 신체는 어떻게 시간을 비약해 보존될 수 있었는가.
물신화된 신체, 대체 가능한 영혼

시간을 ‘앞지르며 동시에 거슬러’ 가며 〈모어 라이프〉는 ‘전기를 완전히 정복’하게 된 미래의 시점에서, 인류가 “죽음 그 자체의 종말”을 맞게 됨을 기입한다. 이는 상징적인 존재로서 조지 포스터가 영구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됨으로의 전치를 끌어낸다고 하겠다. 여기서 〈모어 라이프〉는 시간을 기술하면서 그 시간이 기입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또는 기술한다. 그것은 시간을 역사적 차원으로 격상시키는 것이며, 우리의 사관에 의해 역사는 바뀔 수 있다는 어떤 희미한 암시 같은 걸 선사한다.
그와 동시에 우리가 여러 시간대를 옮겨 다니며 시간 여행을 하듯 그것에 개입하지 않고 그것을 비추어 본다라는 인상을 수여한다. 그리고 이는 마지막 서술의 차원에서 결말이 마지막 인간의 죽음으로서 명시되는 부분, 곧 그 유한한 신체를 소유한 인간을 대체한 또 다른 존재‘만’의 이후 시간이 서술되지 않고 곧바로 닫히는 부분으로써 어떤 진공적 세계 안에서 우리의 사유를 재정초하는 것, 일종의 사고 실험의 차원으로서 열린 결말을 낳는다.
여기서 마지막까지 남을 텅 빈 영혼의 신체들, 그 첫 번째 신체로서, 수많은 하드웨어 영혼을 갈아 끼우는 지지체로서 “인공신체”, 곧 로봇(이진경)이 그 기원으로서 자리한다. 이는 특정한 영혼의 필름을 수여받음으로써 일종의 우리가 아는 휴머노이드가 되는 셈이다. 〈모어 라이프〉의 무대는 무대를 거의 종축으로 가득 메우는 중앙 원판의 단상과 그 뒤 스크린이 투사되는 나무 막으로 크게 분별되는데, 이때 그 단상 위에서 단지 말을 시늉하는 로봇 너머로, 단상 바깥으로 네 모서리를 점한, 곧 그를 에워싼 네 명의 코러스가 거기에 마이크게 대고 말을 입힌다―이 역시 신기한 부분인데 기계에 도달하기 위해 또 다른 기계에 대한 매개가 필요하고 이는 결국 인간의 물신화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은 계속 수많은 존재(의 기억) 데이터가 들락날락하는 것을 가장 효율적으로 또는 수월하게 표현하기 위한 연극적 약속이지만, 그와 동시에 로봇의 인공적 생명력과 그것의 영혼 없음을 이념적으로 가시화하는 것이며, 동시에 ‘영혼의 목소리’라는 비유를 그야말로 물신적 차원의 환유로 바꿔 놓는다, 곧 영혼‘의’(영혼이 소유한) 목소리로. 하지만 더 명확한 중심의 차원이 신체 그 자체로서 로봇으로 현상되며, 반대로 영혼은 그 영속적 신체에 비하면 갈아 끼울 수 있는, 대체 가능한 사물로 낙착된다.
〈모어 라이프〉는 이 인간‘들’보다 기계의 육신 자체가 세계의 중심이 되는, 존재론적 고민을 처음으로 새롭게 하는 풍경을 결말로 가져가는데, 곧 결정적인 차원에서 인간은 소멸하며, 단지 영원한 육신 위에 얹힌 인간의 “뇌 데이터”만이 인간인 양 자리 잡고 살게 되는데, 그들의 내면 풍경을 제시하는 대신에, 그 인간의 결정적 전환의 순간을 목도하며, 곧 이전의 ‘인간’을 기억하는 동시에 그 이후를 그와 상관없이 변화 없는 상태로 살아간다. 인간으로서 역사는 끝났으며, 인간 이후의 인간이 새롭게 자리하는 그 사회는, 삶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더’ 배가된 삶의 차원으로 드러난다.
숭고한 것으로서 시간의 개념

로봇은 미학적 존재가 되며, 자연을 집요하고 강도 높게 관찰하고 체험하는데, 이때 그는 인간과는 달리 그것에서 공허함을 느끼기보다 반복과 차이를 무한한 연장의 차원에서 인식하고, 그것을 무엇보다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그는 그럼에도 죽지 않으며, 자연만큼 영속적인 존재가 된다. 이는 감각할 수 없는 차원의 이-존재에 증여된 시간이며, 그것은 따라서 숭고하면서도 기이하고 또한 가상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동시에 존재론적 차원의 다름에서 공감 가능한 것인지를 묻고, 인식론적 차원에서 그 감각의 범주를 묻는다. 여기서 진정 징후적인 건 무엇일까. 곧 인간의 영원하지 않은 몸이 극복되었을 때가 아니라 그것이 인간의 몸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고, 그것을 과잉으로서 계속 연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 영원한 시간이 인간을 경유하지 않고 로봇에게 구현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영원한 시간은 인간에게는 결코 주어질 수 없으며, 만일 그것이 실현된다면 그것은 진정 ‘비’인간적인 것이라는 것일까, 아님 그것을 뒤집어, 그 영원한 시간은 오직 비인간의 차원으로만 주어질 수 있다라는 것일까. 곧 후자는 우리에게 우리가 가진 협소한 세계에 대한 인식, 시간관 등에 대한 반성을 거꾸로 촉구하고 있는 것일까. 전자가 우리가 꿈꾸는 영원함이라는 것은 우리를 더 인간적인 무엇으로 바꿀 수 있다는 환상으로부터 깨어남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라면 말이다.
로봇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새로운 미학적 존재로서 거듭난다. 그것은 관계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세계 내 고독한 존재로서 자리하고, 그러면서도 쓸쓸함을 느끼는 것도 아니고, 마치 하나의 시간 자체로서 존재하는 듯 보인다. 그렇지만 그것은 물론 역사가 아니며, 역사 자체는 이제 무의미한 것이 된다. 무언가 더 특별할 것도, 달라질 것도 그로서는 없다. 오직 그가 죽지 않으며 모든 것이 달라질 뿐이라는 사실만이 그에게 의미 없이 남게 된다. 이 무한한 시간의 연장으로부터 〈모어 라이프〉는 무엇을 우리가 사유하기를 요청하는가.
그것은 그 로봇이 느끼지 않는, 느낄 필요가 없는, 느낄 수 없는 역설적인 시간의 차원으로부터 현실의 모든 것들을 괄호 치고 사유할 것을, 아마도 진정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를, 그리고 어떤 것도 실은 다 중요하지 않다는 허무주의적 감각을 부정하지도 인정하지도 않은 채 그것 안에서 되묻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그건 극적으로 상승되는 효과를 만드는 온건한 질문인지도 모르지만, 실은 하강하여 침잠하는 여백 위의 불순물 같은 것일지도 모르는데, 곧 이는 오히려 로봇과 인간, 그리고 미래의 예측할 수 없는 풍경을 로봇의 상상력 속에 환원시키는, 환원시킬 수밖에 없는 일종의 형용 모순적 현재의 상태를 적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곧 온갖 ChatGPT가 판을 치는 작금에서 AI의 ‘영혼’이 갖는 무한한 시간, 그리고 다다를 수 있는 세계는 이미 〈모어 라이프〉의 로봇을 초과하거나 그 로봇 자체를 의태하고 있지 않은가. 곧 이것이 〈모어 라이프〉가 역사적 원형으로서 그리고 서사적 원형으로서 “괴물”을 호출해 오고 재정립하려 하지만, 그것이 세계 속에서 가시화되고 작동하며 어떤 효과로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독립적인 차원으로 미궁과 같은 국면을 맞게 되는, 상상적이며, 열린 결말을 수여하는 것 아닐까, 인간, 곧 우리 바깥에서 말이다. 곧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세계의 크기로써 〈모어 라이프〉는 우리의 현재적 곤궁, 과도기적 세계의 진실을 징후적으로 드러낸다.
처음, 영혼들을 갈아 끼우며 그 ‘신체에 합당할’ 정신으로서 그것들을 연이어 테스트하던 장면들―그러니까 이는 로봇에 대한 인간의 종속을 나타내는 형식적 틀 자체로서가 아니고서는 어떤 의미도 없는 장면들의 연속이다.―로부터 “아무것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느낌”을 받게 된 인공신체의 어떤 경험은 이제 우리를 더 이상 지배하지 않을 수 있게 될까. 이 지점에서 또 하나의 모호함이 출현하는데, 곧 다루지 않은 문제가 발생하는데, 그러니까 몸을 적응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몸에 영혼을 적응시키는 것이 이 연구의 중핵으로서 목적인 것이다. 어쨌든 인공신체는 이제 새롭게 바뀐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 로봇이 받은 이물감은 신체와 완벽하게 혹은 ‘온전하게’ 연결되지 않은 그 정신의 차원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 아닐까.
로봇이 가진 신체 자체가 느끼는 정신의 가벼움, 부재 같은 것 말이다. 마지막 그의 사유 역시 정신의 연장이 아니라 육체의 연장으로 보이는 것과 같이, 마치 부속(적)으로 생각되던 신체 자체가 가지고 있던 사유, 그 몸으로 인해 고이고 발생하는 의식은 몸 그 자체를 사물적인 것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조정한다. 그러니까 연구소를 경유한 인간이 누락한 바는 이 로봇이 그 자체로 자율성을 지닌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신체 자체는 일정 부분 의식을 잠재한다라는 것이다.
두 개의 메타 서사

조지 포스터의 몸이 이 실험실에서 아마도 유일한 인공신체에 그의 영혼 데이터가 더해진 결과가 아니라 실은 그 (사실 영혼을 담고 있는) 그 몸 자체의 자리일 것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 곧 어떻게 인공신체가 조지 포스터의 육신일 수 있는 것일까라는 질문은 조지 포스터의 육신이 인공신체라는 사실이 주는 충격으로부터 자연 소급되는 질문은 아니다. 그러니까 그 충격의 효과는 조지 포스터와 현재와의 간극을 급격하게 소거하는 데서 오며, 그로부터 조지 포스터는 현재와 혼동되는 대상이 된다.
이는 실은 브리짓의 영혼이 아닌 존재임이 입증되는 어렴풋한 순간에 드러나는 바와 같지만,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곧 〈모어 라이프〉에서는 그 인공신체에 대한 어떤 언급도 나오지 않는데―어쩌면 〈모어 라이프〉는 그것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는데, 그것은 조지 포스터와 현재를 모호하게 뒤섞기 위함이다.―, 그러니까 조지 포스터의 영혼을 어떻게/굳이 인공신체에 집어넣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질문은 오히려 왜 조지 포스터의 몸이었는가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이 부분에서, 〈모어 라이프〉는 프랑켄슈타인의 메타 서사를 쓰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괴물”의 환상을 이루는 조지 포스터라는 역사적 존재이자 환상물의 원형적 실재가 건너오면서 곧 조지 포스터라는 실재가 그 인공신체에 ‘덮이는’ 순간, 그 존재는 자신의 전사를 누락하고 단지 ‘괴물’ 그 자체로 정의되게 된다. 그건 괴물로 오인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정의되는 것으로, (프랑켄슈타인의 서사를 제대로 쓰고 있지 못한 것으로,) 여기서 ‘괴물’은 불순한 것이고 제어되어야 하는 존재이지만, 그 인격은 기이하게도 그 이후로 연장되지 않고 인공신체 자체의 영혼으로 전환되며 소거된다. 이 부분에서도 누락과 모호함이 발생한다.
『프랑켄슈타인』을 함입하면서 그것의 메타 서사로서 기능하는 〈모어 라이프〉는 또 하나의 메타 서사를 갖고 있는데, 이는 리들리 스콧(Ridley Scott, 1937~)의 영화 〈블레이드 러너〉(1993)로, 그것은 자신, 곧 레플리칸트를 만든 타이렐 사의 회장을 찾아간 로이 배티가 그의 눈알을 손가락으로 깊숙하게 찔러 죽게 만드는 장면으로, 이는 곧 브리짓이 자신의 존재의 모호한 기원을 감지한 채 빅터에게 폭력성을 발휘하고 연구소를 빠져나가는 장면으로 전치된다고 할 수 있다.
이때 조지 포스터라는 기원의 전사는 ‘괴물’의 모티브 아래 (불완전한) 인공 기억을 이식한 일종의 휴머노이드 존재의 자기 자각이라는 또 다른 서사의 모티브를 합성하는 가운데 연장될 수 있다. 하지만 그 기억의 근거는 인공적인 것이 아니라 실재하던 것이며, 곧 몸에 보존된 것―“근육에 체화된 기억”―이며, 다만 인공적으로 ‘어떤 식으로든’ 보존되고 합성되었다고 다만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결정적으로 이 몸은 그들의 불완전한 기억과 신체와 다르며, 그것은 영구한 신체를 가진 채 현재를 기억으로 합성하는 것으로써 전사의 부족분이 갖는 비실재성과 균열, 모호함 따위에 구애받지 않은 존재로 거듭날 수 있게 된다.
〈모어 라이프〉는 이 이질적 존재의 다름을 윤리적 차원의 심급 아래 두는 것이 아니라, 윤리 자체를 정초하는 새로운 심급 자체로 둔다. 따라서 그의 절대적인 사유의 다름이 하나의 결말로서 제시된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어떤 다른 미래가 아니라, 미래가 불가능한, 이전의 시간이라는 관념이 끝난 모든 것이 일시적이며 영속적인 시간의 차원으로서, 따라서 좌표도, 방향도, 목적도, 이념도 없는 그런 시간이다. 그것은 오직 미학적 차원의 순수성의 효과로만 각인되는데, 그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무언가를 감상의 대상으로 두는 것이다. 그런데 이 최초의 미학적 인간의 모습을 재발명하는 건 (그것이 이미 낡은 인간의 미학적 토대에 대한 이미지로서) 무언가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AI와 몸의 상관관계 고찰하기

〈모어 라이프〉는 몇 가지 몸에 대한 메타 서사―갈바니즘으로써 영속한 신체와 인공 기억 삽입을 통한 신체―를 가져오면서 조지 포스터와 브리짓의 근본적인 혼동을 만든다. 그것은 몸이 정신을 어떻게 어떤 식으로 함축하는지를 정확히 정의 지을 수 없는 현재의 무능을 역설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일 수도 있다. 반대로, 정신―기억―이 몸과의 괴리를 느낄 때, 내 몸이 아님을 해소할 수 없을 때 그것은 정신의 상기 작용보다는 몸의 작용으로, 곧 숨이 턱 막혀 호흡이 달리면서 아무것도 발화할 수 없는 공황 상태의 몸으로 나타나는 지점에서는, 정신은 마치 몸을 초과해 과잉된 실재 자체가 되는 것 같다.
그러니까 그것은 몸과 정신의 상관관계를 규명하는 대신, 그 뇌 데이터라고 하는 것이 기억이든 의식이든 간에 어떤 것이라면, 그리고 어떤 그 자체의 텅 빈 사실은 이미 죽은 몸만이 있다면, 이 둘을 어떻게 횡단할지 어떻게 그 둘이 합성될 수 있을지를, 정의 내리는 게 아니라, 하나의 질문으로써 전개하며, 그로써 우리는 혼란을 겪으면서 그 미래를, 그리고 우리를 가늠할 수 없는 차원으로 두게 된다―하지만 그 미래는 앞서 말한 것처럼 심히 헛헛하고 동시에 숭고하다.
〈모어 라이프〉는 서사 자체보다는 서사화의 어떤 기제를 보여주며, 아직 정의되지 않은 차원에서의 우리를 사고 실험의 단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정신과 육체에 대한 인지 차원에서 과도기적 상황에 처해 있음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 그리고 그 마지막 메타 서사적 참조는 AI가 동반된 세계의 상황이다. 곧 브리짓은 우리의 익숙한 다른 버전이 아니라, 타자로서 우리에 대한, 우리에게 반향되는 새로운 버전으로, 그것은 우리와 대자적인 관계를 이룬다.
따라서 브리짓의 기이한 상상과 사유, 감각이 꽤 이물적인 것으로 느껴지는 것은, 사실 그 자체의 내용적 차원으로 인해서라기보다 그것이 (우리가 아닌) 그 ‘자신의’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곧 그것은 AI가 마침내 독립적인 신체를 획득하는 어떤 시점에 대한 상상 같은 것 아닐까1. AI가 우리의 곁을 이루면서 우리보다 더 진정한 차원에서 우리와 다르면서 또한 특별하면서 우리를 잠재하면서 우리를 벗어나는 지점을 아마도 기입할 것이라고 추정하는 시점으로부터 말이다.
김민관 편집장
일시: 2026년 4월 29일(수) ~ 5월 17일(일)
화수목금 7시 30분/토일 3시 (월 쉼) *5월 5일(화) 3시
장소: 두산아트센터 Space111
기획·제작: 두산아트센터작: 로런 무니 & 제임스 예이트먼(Lauren Mooney & James Yeatman)
번역: 김수아
연출: 민새롬
출연: 공지수 김용준 마두영 이윤재 이주영 이진경
무대디자인: 김종석
조명디자인: 이현규
영상디자인: 이수경
의상디자인: 도연
음악감독: 박승원
음향디자인: 권지휘
관람연령: 13세 이상
러닝타임: 150분(인터미션 15분) *예정
- 1. 가령 브리짓이 죽은 후 다비나(이주영)와 재결혼하여 살아가는 해리(이윤재), 그 둘의 가정에 브리짓이 들어올 때 처음 그는 인격체로서보다 마치 가사 로봇처럼 음식을 만드는 것처럼 보이는데, 곧 그의 시점이 아니라 그의 바깥에서 관찰되는 시점으로 묘사됨으로써 브리짓은 인간의 내재적인 측면이 아니라, 인간에게 더해지는 독립된 인공물처럼 그려지게 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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