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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회 서울국제즉흥춤축제] International Relay 즉흥 공연: 즉흥과 춤의 상관관계REVIEW/Dance 2026. 6. 20. 09:42
즉흥과 춤의 상관관계

제25회 서울국제즉흥춤축제 포스터. 즉흥 공연은 어떤 점에서 유의미한가. 또는 그것은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가. 25회를 맞은 서울국제즉흥춤축제에서 “즉흥춤”이라는 명명에서, ‘즉흥‘은 ‘춤’을 설명하는 또는 춤의 합목적성을 구성하는 수식어가 되는 듯 보인다. 춤은 즉발적이며 곧 예측과 계획의 논리에서 어긋나며, 거기에는 흥이라는 촉발의 작용이 있다. 곧 즉흥춤은 즉흥적으로 발생되는 춤, 자발적이고 능동적이며 동기 없이 생산되는 춤의 비의지적 양태를 춤이라는 보편의 순간으로 긍정한다. 거기에는 춤의 아키타입에 대한 정의가 전제된다.
무용이 아닌 춤, 라이브니스를 구가하는 수행성은 무용의 규칙과 콘셉트, 안무의 시야와 관점, 철학 너머에 임시적으로 실천되고 자리한다. 이는 무용 공연의 가치에 대립되기보다 변별적 가치를 갖는데, 무용 공연의 지난한 프로세스를 과감하게 단축시킨다는 점에서, 수월하게 무용계의 참여를, 그리고 다양한 협업의 차원을 수용하며 무용의 현장성을 비춰낸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흥미로운 무용수들 각자의 고유한 무늬들, 나아가 그 무늬의 색인들로서 가변적 시간의 총체성은 작품이 아닌 무용수와 무용수들의 관계 안에서 발생한다.
결과적으로 안무의 방법론이 한 축에서는 미시적 차원의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것이며, 그 움직임의 어떤 경로를 만드는 데 있어 즉흥적 생산 양식을 어느 정도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상정할 때, 즉흥춤은 즉흥 무용의 조각들을 내비치는 것일 수도 있다. 즉흥 공연에서 반드시 전제가 되는 건 음악으로 보이는데, 춤보다 앞서 등장하는 음악은 마치 춤의 발생 지점을 설명하는 기원적 축으로 성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여기서 ‘춤’은 음악적인 몸 자체라 할 수 있다.
음악으로부터 온 신체, 그리고 음악적 신체
우리가 목격하는 ‘춤’은 대부분 음악을 동반하는데, 곧 춤에 있어 ‘흥’은 음악적 영감의 신체적 발현의 상태인 것이다. 나아가 음악으로부터 물리적으로 인계되지 않더라도 음악을 추출하면서 구성되는 것 역시 가능하며, 이는 음악으로부터의 춤이라는 명제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실제 공연에서는 음악이 있고 춤이 있되, 그 음악이 절대적 생산 양식이지 않다는 건 중요한 부분이다. 곧 음악은 춤과 같이 가변적인 특징을 갖는데, 이는 그 음악이 완전히 구조적이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또한 춤과 적합한 형태로 변형되어 간다는 것―나아가 춤에 순전히 예속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음악 역시 즉흥성을 띤 연주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반대의 측면, 아마도 우리는 음악을 듣고 보면서 그 봄의 대상을 춤의 신체로 곧 이전하게 되겠지만, 여기서 음악이 춤의 조건이 되는 것, 그렇지만 그것은 결코 기능적이거나 비독립적인 차원만이 아니라는 것은 그 반대의 측면을 기약한다. 곧 음악(의 물리적 전제 조건)이 춤으로의 순전한 이행을 보장하지 않는 부분을 생각할 수 있다. 곧 춤이 음악을 내재적인 방식으로 수용하는 것이 절대적이라는 차원에서만 춤의 선제 조건으로서 음악이 성립할 수 있다.
우선 음악은 일종의 임시방편의 연주라는 것, 이로부터 즉흥춤의 음악적 조건을 생각해볼 수 있다. 곧 그것은 음악 작품과 유사하지만, 그것의 엄밀함과 완전성을 기약할 수는 없다. 여기서 음악은 곧 즉흥 연주라 할 수 있다. 그것이 무용으로 흐르지만, 그것은 다시 음악 스스로의 형식 안에서 그러하다. 곧 음악은 (자신만의/고유한) 음악적 신체를 갖는다. 여기서 앞선 음악적 신체로서 춤을 생각해 본다면, 음악은 신체에 내재적인 것은 아닌데, 통상 우리가 음악에 맞춰 어떤 춤을 춘다고 할 때 그 음악은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것, 익숙한 것이기 때문이다.
연주는 일의적이며, 즉흥춤과 마찬가지로 존재하지 않는, 존재하지 않았던 양식이다. 그것은 예측 불가능한 것이며, 예단할 수 없는 부분이다. 따라서 춤의 음악에 대한 적응과 적용이 필요하며, 어쩌면 음악은 일종의 사라지는 매개로서, 그 적응의 수월성을 높이고 적용의 적합성을 고려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수 있다. 그렇다면 음악적 신체는 음악과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그것이 춤에 대한 음악의 적합성을 최대한도로 고려해 도달한 어느 상태가 아니라는 전제 아래에서 말이다. 어쩌면 여기서 즉흥춤은 그 미끄러지는 틈새를 확인하는 데서부터 출발하는 것일지 모른다.
음악으로부터 추다
클라리넷 연주의 Michael Moore로부터 시작된, 그리고 Katie Duck, 남정호, 김원, 김윤정, 박호빈이 참여한 첫 번째 공연에서 음악과 춤의 상관관계는 가장 직접적이고 선명하게 드러난다. 음악은 보족적이고 배경적인 차원에서 존재하는 것 같지만, Moore의 신체는 일정 정도 중심을 차지하기도 하며 전체의 동등한 부분으로 자리한다. 춤이 자리하기 전 음악은 자신만의 형식을 쌓아 나가고 있었고,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차원에서 이후에도 연장되어야 한다. 완전한 자기 부정은 불가능하다.
일정한 간격의 호흡으로부터 그것은 신체성을 획득하고, 동시에 그 신체에 예속된다. 그것은 멜로디로서보다 어떤 물리적 타격과 실재감이 우선한다. 마치 그 음악 자체에 대한 신중한 듣기가 우선되어야 하는 것, 어쩌면 그 듣기의 신체만이 가능한 것일 거라는 것에 따라, 그 음악들 안에 존재하는 것, 그 존재하는 방식 자체를 찾는 것, 그리고 그 순간순간 그 틈에 대한 고려의 차원에서 생겨나는 틈을 보게 되는 것으로서 이 공연은 가장 뚜렷한 실체적 진실을 간직한다.
음악은 여러 존재의 춤의 다른, 일시적인, 동시적이거나 비동시적인 차원에서 접합부가 된다. 또는 음악은 춤으로 변용되는 동시에 춤을 통해 변용된다. 가장 첫 번째 음악과 조우한 Duck은 다른 이들이 음악의 전개 방식에 대한 전적인 고려와 판단 아래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어쩌면 수많은 일시적 기원‘들’을 보게 되는 것에서 기인하는―과 달리, 그 음악의 내재적 차원의 이행을 위한 뜸 들이기의 시간, 전략을 유일하게/온전히 가져가는 것처럼 보인다.
Duck이 음악을 듣는 신체이자 음악의 외부를 상정하지 않는 조건이라면, 다른 이들은 그리고 그 Duck과 Moore의 어둠 속 짧은 순간의 조우 이후에 Duck 역시, 음악 안에 있으며 동시에 음악의 외부로서 있다. 어쩌면 즉흥춤은 음악이 춤의 내재적인 조건이 되는 동시에 사라지며 기능하는 (통상의 무용 공연에서의) 음악의 실체를 충분히 전경화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전까지 그리고 이번 공연들을 포함해, 개인적으로 본 대부분의 즉흥춤은 이와 같은 내재적 합치 혹은 상응을 위한 듣기-수렴-명상의 어떤 상태를 유지하는 반면, 여러 몸들이 투여되는 무대가 될 때는 앞선 몸들의 리듬 자체로부터 즉각 몸을 생산하기도 했는데, 이는 전자가 곧 춤을 추동하기 위한 조건을 구성하는 최소한의 틈, 시간이 필요함을 반증한다면, 후자는 그 같은 선제조건을 대신할 다른 조건이 구성되었음을 반증할 것이다.
결정적 순간: 음악적 신체
일종의 목관악기류의 독특한 악기를 연주하는 Tamura Ryo와 흥얼거리는 Miri Lee는 한 쌍으로 걸어 나오는데, Ryo가 연주할 곳에 안착한 이후에도 Lee는 소리를 낸다. 튕기듯 내는 소리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시각의 자리를 음악의 연장으로 치환하기 위한 것이면서 동시에 그 음악이 있던 순전한 자리로부터 자율성을 획득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데, 곧 그의 소리는 그 음악과 조응하지 않고 그 음악 바깥에서 신체성을 보존한다. 음악의 잔영에서 출발한 신체는 그 음악으로부터 탈피하며 자신의 음악 안에서 (재)구성된다.
음악이자 대항 음악의 특색을 띠는 신체는 외부로부터 음악을 듣고 반응하기의 이상적 프로세스―춤의 선제조건으로서 음악―가 아닌, 신체의 내속되는 전 표현 단계의 음악이 곧 춤이 되는―표면적으로 함께 있는 음악은 그 둘을 완벽한 공존으로 혼동하는 조건이 된다.―, 따라서 음악을 안고 있는, 음악 안에 있는 신체의 가능성을 연장하는 이 신체는 외부의 음악을 음악적 신체로 구성하기 위한 동기로 차용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는 내재적인 하나의 음악으로부터 추는 이 춤이 단정하고 적확한 신체로 두드러져 보이는 이유일 것이다. 결국, 춤이 음악적 신체라고 하는 건 (어떤 음악들과 관계되고 상응되지만) 특정 음악으로 환원되지 않는, 자신만의 고유한 리듬을 지닌 신체―음악으로부터의 신체가 아닌, 음악으로서 신체―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차원에서 본다면.
김민관 편집장
2025년 5월 20(화) 19:30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90분 International Relay 즉흥 공연
Miri Lee & Tamura Ryo
Daniel Young
99 아트컴퍼니
Sylvain Meret & Maria Mavridou & 강은일(해금)
Katie Duck & 남정호 & 김원 & 김윤정 & 박호빈 & Michael Mo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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