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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페어손, 〈산 짓기〉: 구조에 대한 실험 그리고 이념REVIEW/Dance 2026. 6. 19. 20:58

안나 페어손, 〈산 짓기〉[사진 제공=옵/신 페스티벌](이하 상동). 안나 페어손의 〈산 짓기〉는 구조적으로 반복되는데, 이는 노이즈 사운드의 흐름과 조응되며, 현장에서 조율되는 사운드는 움직임에 어느 정도 마이너스 피드백으로 ‘적용’―전형적으로 무대의 퍼포머들을 보는 건 연주자이고, 그 반대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에 따라―되는데, 곧 움직임이 공간에 포화될 때 사운드는 그치고, 움직임이 서서히 잦아들어 장소에 고착될 때 사운드는 다시 활성화된다. 이는 공간 내 엔트로피의 총량 제한의 법칙 같은 것을 추정케 하는데, 프로시니엄 아치가 아닌 화이트 큐브에 가까운 공간인 ‘윈드밀’에서 열린 탓에 퍼포머들의 움직임은 평행한 차원으로 또 암전이 없는 가운데 투명하게 관객에게 도달한다.
이는 180분으로 고지된 긴 시간 동안 여러 차례 반복되는 공연에 대한 적당한 정도의 주의를 산만함과 뒤섞을 수 있는 환경을 제시한다. 곧 한쪽 벽면만을 비운 채 그것과 마주하는 기둥과 문이 있는 벽면에 붙은 소수의 관객과 대체로 나머지 마주하는 2개의 벽면에 붙은 관객 대다수는 언제든지 입장과 퇴장이 가능하고, 공연되고 있음의 차원을 망각하지 않고 자유롭게 있을 수 있다. 소수의 관객 무리에 섞인 문 옆에 남민오와 안무자 안나 페어손이 나란히 위치하고, 안나 페어손은 카운트다운 타이머를 작동시킨 노트북을 둘려 전면에 보여주고 있다.
마치 이와 같은 안무가의 투명하고도 최대한 절제된 위치는, 안무가의 그 지시 없이 자신들만의 자율적인 움직임과 작동, 구조체를 이루고 개별로 흩어지는 어떤 과정에서의 모의 테스트를 지켜본다는 감각을 갖게 하는데, 엄밀히 〈산 짓기〉는 시차와 오차, 간극을 수반하는 형식으로, 이는 엄밀히 즉흥에 토대를 두었다라는 지점에서가 아니라, 어떤 구조주의적 모형과 시뮬레이션 차원의 연습이 애초에 변수를 수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왔음을 보여주는 것에 가깝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산 짓기〉에는 개별적 움직임과 집단적 움직임이 있는데, 이는 물리적인 밀도 차에 의해 구분된다.
그러니까 둘은 이행의 흐름에 근거를 두며 상태의 변화로 나타나는 이 과정에서 전적으로 다른 것이 아닌데, 분자 구조가 빽빽해질 때 자연스레 어떤 접점이 활성화되는 것에 가까운 것이다. 이는 특별한 질서의 차원을 프로그래밍하고 있기도 한데, 무대 정면에 해당하는 비워진 벽면을 예컨대 하수 끄트머리부터 중앙부에 이르기까지 일렬로 통과해 가는 과정이 구조의 한 분기에서 클라이맥스의 순간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개별적 움직임이 곳곳에 놓인 돌을 표지로 삼아 그 위치를 감각하거나 그것과 긴밀하게 접촉하게 되는 순간으로 나타난다면, 또는 그 과정에서 엉키게 되거나 처음부터 엉킨 개체들로부터 출발하게 되거나 한다면, 그리고 이것들이 이행의 흐름 안에서 물리적으로 포화되는 것을 향하게 된다면, 그것과 달리 집단으로 서로를, 하나의 경로를 통과한다는 것은, 특별한 상징적 차원의 서사를 각색해 내게 하는데, 그것이 바로 개체들의 DNA에 ‘프로그래밍’된 명령이 될 것이다.
〈산 짓기〉의 독특한 지점은 이러한 서사적 각색이 가능한 지점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산의 입자 차원에서 돌들의 산포로부터 우선 시작된다. 그리고 이는 집단의 행렬을 이루었을 때는 그들 안에서 돌과 인접한 사물이 되거나 돌을 건너는 존재 양식의 실천을 구성하게 되는 것처럼 보이는데―또는 융기와 침식을 거듭하는 산의 이행적 흐름으로도 보인다.―, 이때 특별한 지점은 돌이거나 돌이 아닌 상태의 이진법적 차원은 뒤섞임의 긴밀한 질서 아래에서 반의 확률로 분기된다는 것이다.
곧 그것을 어떤 형태적 알레고리를 재현하지 않고 본다고 해도, 그 자리에서 교착되거나 그것을 넘어서려는 이행의 차원은 두 가지 역할에 대한 ‘집단적’ 배분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가 결속의 차원에 맞춰 두 개의 역할 중 하나로 분기된다는 것이다. 이는 0도에서 얼거나 녹는 상전이 현상의 분기가 어떤 징후도 보이지 않고 작동하는 것에 유사한데, 곧 두 가지 양태의 전혀 다른 변화가 그 전의 다른 이행의 조각 없이 일어난다. 하지만 이는 앞을 향해 ‘건설’해 가는 능동적 혹은 타동적 프로그래밍의 일환이라기보다는 패턴화된 몇 가지 움직임의 조건이 포화된, 100퍼센트의 밀도 아래에서 발현되는 것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적합할 듯 보인다―이로써 일종의 소비에트적 집단 체제의 재현적 체계로서의 해석을 대체하고자 한다.
여기에는 개체들이 만드는 집단으로서 정동이 부재하다는 사실, 그것이 전적으로 기계적이지만은 않지만, 관계의 어떤 특별한 의미도, 목표에 대한 뚜렷한 상도 또한 목표에 도달하고자 하는 어떤 의지의 차원도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연유하는 부분으로 보인다. 근본적으로 안무는 개체들의 고유성에 입각한 전적인 자유도와 우발적 관계의 허용, 그러면서도 그 관계의 측면을 개체의 고유한 자기 근거 이외의 서사로 발전시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을 듯 보이는데, 이는 이 개체들의 분자 구조적 흐름과 집단 체계 안에서의 분자적 이행의 차원이 모두 투명한 ‘관찰’―〈산 짓기〉는 제4의 벽을 걸어 놓고 진행된다.―의 일부로서 펼쳐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산 짓기〉는 재현의 차원에서 벗어나 일종의 시뮬레이션되고 있음의 감각을 안무가의 연장선상에서 가져갈 수 있는 것이다.
〈산 짓기〉가 어떤 서사에 대한 재현이 아님은, 그것이 재현적이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재현의 잠재성을 포함한다는 의미에 가깝다. 결과적으로 이는 서사적인 걸 검출하는 자의적 ‘판단’에 의해 서사적인 것이 발생하는 것을 배제하기보다 수용하는데, 그에 따라 주어진 것들은 서사적 잠재성의 조각들을 추적해 갈 수 있는 것으로 연장된다. 거기에는 집단 차원에서도 지속되는 개체 차원의 분명한 근거의 전제가 있고, 더 미소한 단위에서는 하나의 돌이 있는 것처럼, 존재의 사물화와 사물로서의 존재 모두 사물로부터 연장되는 존재라는 (은유가 아닌) 환유의 원리에 입각해서 펼쳐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무엇보다 돌을 놓고 펼치는 접촉 즉흥의 프로그램과 상응한다는 인상을 주는데, 이는 다시 이 열린 구조의 공간 아래, 캐릭터로서 존재할 수 없는 어떤 조건, 그러니까 고유한 퍼포머 자체의 몸들로 환원되는 조건이 이 모든 시간을 낳고 있다는 전제를 따른다면 아마도 그러할 것이다. 반면, 앞선 패턴의 측면에서, 돌이라는 조건을 경유해 사물(적 존재)화 또는 사물로부터 움직임을 끌어내는 전제조건으로부터 이 모든 것, 그리고 일종의 추상적인 캐릭터성까지 만들어졌다라는 걸 결코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돌은 그 위치의 차원에서 일종의 어포던스적 구성을 만들어 낸다. 가령 그 돌 위에 올라가서 덜컹거리는 몸이 되는 것이나, 돌을 휘감고 바닥에 눕게 되거나 하는 건 근본적으로 돌을 바꾸지 않고 관계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돌은 선-안무적이다. 산의 형상은 사물의 양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최소한의 파편이 재료 차원에서 전제되는바, 돌이 그것인 것이다. 반면, 돌을 들고 반경을 구성할 때는 돌이 더해진 무게만큼 자신의 존재가 감축되는 만큼 다른 궤적의 자의성을 허용하게 되는데, 이때 어포던스는 돌 자체의 형상에 있는 대신, 돌의 무게로부터 확장되는 내가 예측할 수 없는, 판단할 수 없는 가상의 제 3의 영역에서 구현된다.
처음에 가장 먼저 돌에 올라가 중심을 잡는 존재인 정나원은 공연의 이정표 같은 순간을 열어젖힌다. 다만 그것이 상징적 차원에서 서사로 본격 이행하지는 않는데, 그것은 〈산 짓기〉가 서사를 전적으로 지양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러한 예외적 순간이 오로지 역량의 차원에서 극대화된 순간이기 때문에 그러한데, 곧 정나원을 제외한 전형적인 무용수의 몸짓과 거리가 있는 이들이 자리를 찾아 나가고, 자신의 역할을 입고 자연스럽게 되는 어떤 과정이 그 역량의 차이를 고유한 것으로 수용하는 작품의 물리적, 윤리적 전제 조건으로 드러나는 가운데, 역량이 시간상의 차이로 연장되기 때문이다.
정나원의 마치 ‘깃발을 꽂는’ 행위는 상징성 차원에서 단 한 번만 수행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예외적 존재의 표상에게서만 선취될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른바 미션 클리어의 단계도 존재에 따른 격차가 있고, 그것이 시차적으로 전개되는 것은 각자의 차이를 수용하는 평등함을 빌린 하나의 방식으로 전제된다. 그리고 그것은 뒤늦게 다른 존재들로부터 도착한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자연스러운 전개이다.
여기서, 정나원의 ‘특별함’과 그 밖의 다른 무용수들의 ‘평범함’이 실상 작품 안에서 어떤 균열점을 예비하는가가 중요할 것인데, 그것은 자칫 개체로의 환원과 집단으로 분기되는 이 이행과 역전의 반복된 서사에서 차이를 가지되 동등한 차원에서 분자 구조를 이루어야 하는 작품의 전제가, 예외를 통해 근본적으로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앞선 중심 잡기의 일환으로 볼 수도 있는 그 움직임이 그가 중심된 표상으로 하나의 순간으로 등록되는 것으로 혼동하는 것과 함께 그 이후 개체들 사이에서 위계적 차원이 전제되되 그것이 또한 구체적으로 구현되지 않아 실패한 것으로 서사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산 짓기〉에서 서사는 재현적인 것보다는 잠재적인 것에서 온다. 곧 서사적인 걸 검출하는 자의적 ‘판단’에 의해 서사적인 것이 일어난 것이고, 그에 따라 놓이는 것은 서사적 잠재성의 조각들이다. 그리고 돌로 인한, 우연한 마주침과 미끄러짐과 과도한 결부로 인해 발생하는 존재의 비틀림은 미소하게나마 명징한 실존의 양상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것은 사전에 의도된 것이라기보다 의도 이후에 오는 것들이며, 유예됨으로서 의도이자 비로소 선취되는 의도 이후의 것들이다.
이 우연한 것들이 자성을 띤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군집으로서 형식은 공동체라는 이념을 단지 어렴풋하게 은유한다. 반면 군집이라는 형상은 자연의 연장으로서 인간을 분명하게 환유한다. 이 인간 집단은 헐겁게 인간을 품는다. 그것은 구조의 힘 대신에 개체의 본능이 가진 힘을 거꾸로 부각시키는 것일까. 돌과 인간의 결합, 산의 일부를, 토대를 가설하는 군집의 힘은 건축적 자아의 본능에 기초한 것일까. 그러나 그것은 어떻게 군집이라는 형상으로 이어지는 것일까. 〈산 짓기〉는 개체성의 충동을 집단의 역학적 자장 안에 새겨넣고자 한다. 그것은 진정 자유로운 것인가. 아님 하나의 이념에 대한 소구일까.
김민관 편집장2025.11.21.금 17:00 2025.11.22.토 13:00 2025.11.23.일 12:00
윈드밀
콘셉트 및 안무: 안나 페어손
음악: 남민오(MinOhrichar)
함께: 고윤지, 김나영, 이도경, 이원호, 장연우, 정나원, 정해령, 조윤아
‹산 짓기›는 다음의 지원을 통해 제작되었다: 단스 이 외스트, 콘스트 이 외스테르예틀란드, 베르크스타드 콘스트할, 시시에이피, 벨드, 레지온 웁살라 단스우트베클링, 클라이밋 히스토리스 아트 인터벤션스, 롱 라이프 버닝/ ICI CCN 몽펠리에, 단스이 베스테르보텐, 스웨덴 예술위원회 및 스웨덴연구소
특별 감사: 아그니에슈카 드우고셰프스카, 다르코 드라기체비치, 마리에 팔린, 리누스 그라테, 안나 그리프, 마리아 셰퍼, 안나 코크, 삼베스테르홀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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