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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셀린 송 작, 이래은 연출, 〈엔들링스〉: 하나의 힘일까, 또 다른 스테레오타입일까.
    REVIEW/Theater 2026. 6. 21. 23:49

    셀린 송 작, 이래은 연출, 〈엔들링스〉[사진 제공=두산아트센터](이하 상동).

    〈엔들링스〉는 만재도와 맨해튼 두 지역을 횡단하며 각각 세 해녀, 한솔, 고민, 순자, 그리고 하영을 만난다. 전자의 삶은 하영의 희곡으로 접혀 들어간다는 점에서 보면 픽션이지만, 후반 고민과 하영의 대화로부터 희곡은 그의 손을 벗어나 그의 삶을 포함하며, 삶과 희곡은 서로를 반영하는 것으로 나아간다―곧 픽션은 실재로 접혀 들어간다. 희곡은 그의 삶이고 삶은 그의 희곡인데, 오직 그 둘이 서로를 마주하는 가운데서만 이는 성립한다. 나아가 희곡은 삶의 반추를 통해 쓰이며, 삶은 희곡을 통해서만 구성되며 구제될 수 있다.

    마지막 부분에서, 한복을 입은 한솔과 하영은 한국의 역사적 전통을 체현하며, 엄마와 딸의 관계로 서 있다. (초반, 한솔에게 걸려온 전화상에서의 딸의 발신과 그 딸의 어렴풋한 정보, 곧 부동산 등 명확하지 않은 그 이야기로부터 하영은 희미하게 언급되었었고, 그의 실재하는 고민의 삶도 비추어졌었다. 희곡 바깥의 틈새, 그리고 희곡과 삶의 연결성을 드러내는 이 작은 단서의 조각은 이때 비로소 의미화된다.) 하영은 백인이자 동양인인 자신의 이중 정체성을 수용하며 그 희곡에 대한 권리를 수여함으로써 그를 존재화한다, 또는 존재 양식으로서 희곡의 존재를 수용함으로써 하영을 다독인다. 한솔의 말은 이와 같다. “넌 우리를 내주고 맞바꾸고 버리지. 하지만 난 네 거야. 그리고 넌 내 거야.”

    타자적 생명력은 ‘제주의 마지막 해녀’라는 미디어적 프레임 안의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방식을 경유하고 있으며, 그들 역시 미디어의 세계에 감응된 채 살아간다는 점에서 그들 스스로가 미디어의 일부가 되는 삶 역시 자연스러워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미디어에 스스로를 내어 준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앞서 이야기하자면, 하영에 의해 열리며 또한 열릴 수 있는 것이 된다, 동시에 그 열림은 그 자신 바깥의 이세계에 대한 이상향적 설정의 연장선상에서 도출된다. 

    곧 그들의 열어젖힘은 사실 시청자가 아닌 그를 향한 시선이며, 나아가 그를 대신할 그의 독자들을 향한 시선이며, 이는 구체적으로 작가가 현재 자신의 삶의 반대급부로 요청하는 현실로서 작가를 ‘품어줄’ 온정적 현실에 대한 정념이 투여된 것으로, 그들―특히 하영의 엄마인 한솔―의 시청자를 의식하며 바로 마주하는 발화의 속성으로 이는 관철될 수 있다. 마치 ‘그들이 우리를 향해 직접 말을 건다.’

     

    이들의 과잉된 발화 양상은 일정 정도 미디어적 공명 효과에 힘입은 것이지만, 또는 미디어적 매개를 통해서만 실재를 명시할 수 있다는 가정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그 기준은 작가의 현실, 작가가 마주할 독자의 세계를 작가를 통해 경유하게 되면서 한편으로 백인이 바라본 특이한 타자의 삶의 양식이라는 프레임에 의거하는 결과를 낳는다. 단상의 무대는 직접성을 띤 발화 양식을 구성하며, 이는 마치 매개를 거치지 않은 채, 동시에 그 매개의 시점을 유예하며 현장성을 구가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그들을 무대 위의 존재자들로 지켜본다면, 그들은 우리에게 아무 조건 없이 자신을 열어젖힌다. 그로써 연극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들의 삶에 대한 목격자가 되는 관객은 작가의 시점을 대리하며, 엔들링스, 곧 최후의 생존자들의 어떤 최후를 마주하게 된다. 기본적으로 두 개의 무대, 작가가 포함되지 않는 무대와 작가가 포함되는 무대, 그리고 마지막으로 두 무대가 연결되는 꿈의 메타포를 간직한 또 다른 무대가 희곡에서 자리한다면, 무대라는 양식성 안에서 이들의 위치를 재고하고 강화하는 것, 그럼으로써 발생하는 과잉의 표현 형식은 무엇보다 연출적인 부분이다. 

    ‘과잉’은 스테레오타입의 재현 형식을 재현하면서도 결국 주체적 발화 양식으로 이전되는 듯 보이는데, 달리 말해 캐릭터의 생명력의 고양은 그들 자신에 내속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들은 자기 환원적인 백인 정체성의 자아와 분열증적 자아를 가진 작가와는 달리, 주체의 심급을 구성하는 것으로 보인다. 곧 그러한 무대는 그 자신의 한 축을 열어젖히는 것이지만, 결국은 그 열어젖힘을 통해 백인과 동류의 시점에서 맞이하는 공통의 대안적 초상이 된다. 

    그들의 독자적 생명의 양식은 하영이 제어할 수 없는 부분이면서 그러한 이유로 그 제어할 수 없음의 상태로 그리는 것이며, 그 제어할 수 없음의 경계로부터 하영은 되돌아오게 된다. 이는 제어할 수 없는 것으로 그리는 것이라기보다 제어할 수 없는 것을 향해 그려나가는 것이며, 그로부터 이 작가의 이 작품에 대한 투여가 생성의 과정임을 지시한다. 곧 작가는 하영이라는 독립된 인물을 만들어낸다기보다 하영을 경유해 작가의 정체성을 구성한다.

    한편, 해녀의 원초적 생명력과 삶의 욕동은 죽음충동과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 표현의 과잉은 미디어와 백인의 시선에 의해 각각 과장되거나 타자의 산물로 여겨지는 (그래서 흥미로울 수 있는) 차원을 벗어나 그들 삶의 내재적 차원으로 수렴한다―곧 이들 삶의 알레고리로부터 도출되는 표현 양식에 대한 연출적 행위에 의거한다. 이는 실재적 표현이 아닌 실재에 대한 반영적 표현이다. 

    서로의 서로에 대한 지지체가 되어 주는 이 셋의 삶, 곧 세계가 이들 셋으로 구성된 특수한 공동체의 삶은 곧 셋의 죽음과 함께 닫히는 하나의 세계이며, 그들 각자가 또 그들을 하나의 생명체 집단으로 치환하는 가운데, 이 셋은 죽음과 삶의 경계를 끊임없이 의식하게 된다. 곧 그 죽음과 맞닿은 삶이란 죽음에 맞서는 깊은 바닷속이라는 숙명에 대한 수용과 죽음을 바라보는 나이에 대한 자각 속에서 이어지며, 다른 이들의 바깥에서의 실존을 상상할 수 없는 이들은, 그들 간에서 각자의 세계를 꾸려 간다. 가령 한솔에게서는 이들이 죽기 전까지 자신이 돌봐줘야 하는 사람들로 바라보고 그로부터 삶의 동력을 찾고자 한다면, 거꾸로 순자는 자신이 혼자 남겨졌을 때 삶에는 아무 의미가 없음을 상기하며 먼저 죽음을 받아들이려 한다. 그리고 고민은 언니의 보살핌을 받기 위해, 그리고 순자에게 보살핌을 주기 위해 살아야 한다. 

    〈엔들링스〉는 무대라는 환유 아래 펼쳐지며, 다시 그 무대를 구성하는 현실을 분별하며, 마지막으로 다시 무대로 통합된다. 곧 해녀들의 삶―만재도―에서, 하영의 현실―맨해튼―, 그리고 하영의 현실의 연장선상에서 백인 정체성의 삶에 대한 또 다른 극으로, 그리고 마침내 희곡의 기원적 시점으로 또는 희곡과 과거가 연결되는 하영과 고민의 꿈속의 무대―아마도 이어도일 것이다.―에서 완성된다. 

    백인 정체성의 발화는 해녀의 삶과 대구를 이루는, 그리고 하영(에 투사된 작가)의 또 한 축의 삶의 전제가 되는 세계의 관념을 보여주기 위한 무대이며, 그에 앞서 하영의 남편은 “백인 남편 (겸 극작가)”로 전시되며, 그 스스로가 무대인 동시에, 일종의 무대를 보는 무대에 대한 또 다른 심급을 구성한다. 하영의 첫 등장은 해녀들의 삶이 꺼진 사이에 나타난 낯선 이방인의 모습이며, 마찬가지로 하영의 맨해튼의 삶은 이 희곡을 쓰는 것의 스트레스와 높은 월세에 대한 압박을 받는 것이자 백인 사회 내에서 타자-아시아인의 정체성을 어떻게 회수하느냐의 차원―해녀의 삶은 그 연장선상에서 그 스스로로부터 타자성을 향하는 부분이다.―에서 역시 이방인의 실제적 양상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그는 타자화를 전적으로 구사하는 특권적 존재가 아니라, 타자화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이다. 

    처음부터 〈엔들링스〉는 무대 위에 무대가 나타나고 다시 또 다른 무대가 나타나는 식으로 자리했다. 하녀의 무대가 독립적으로 자리하듯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것이 하나의 무대일 뿐임을 알리듯 이들은 또 다른 무대에서의 유연한 변용을 겪는데, 이름 없는 이들, 스태프 역이자 코러스 기능을 하는 처음의 셋―그중 한 명이 하영의 현실로 통합됨에 따라 둘이 된다.―은 시간적으로도 그리고 공간적으로도 무대에 앞서 자리했고, 또 무대의 전환에 기능하며, 백인의 연극을 완성하는 데 기꺼이 동원된다. 

    이 백인의 연극은 모든 것을  하얀 것의 은유를 들어 처리한다. 따라서 하얀색은 모든 의미를 수거하는 한편, 거의 모든 의미로 분화하며, 백인 정체성을 궁구하게 한다―이는 “검은 피부”와 대구를 이루는 일종의 “하얀 가면”이다. 그것은 모호하고도 불투명한 것이며, 자기 의식적인, 자기 지시적인, 자족적인 세계의 모든 스펙트럼이다. 

    이 두 삶으로부터, 그 두 삶을 횡단하며 하영의 작가적 의식이 자리한다. 백인을 보며 백인을 위한 극을 쓰는 자신의 삶의 어떤 기원을 상정하며 하영은 모순과 역설의 경계 아래 타자적 생명력을 호출해 낸다. 그들의 말처럼 ‘바닷속엔 부동산’이 없지만, 그 바다는 그들을 통해 대리되거나 어쩌면 추체험될 수 있을 뿐이다. 순진무구함과 긍정적인 삶의 태도를 지닌 최후의 삶과 염증과 분리 의식을 느끼는 현재의 소수자의 삶은 그의 분열증적 삶과 문학으로 연장된다. 

    이 두 삶은 평행선상을 달리며 일종의 갈라파고스 섬의 실험군이자 대조군으로 제시되며, 그 안에 자리한 작가로부터 자기 지시성으로서 서사가 성립하는데, 소수자의 삶에 대한 자기의식이 자리하는 현재의 삶과 달리 최후의 삶에는 자기의식과는 독립적인 차원에서 독립적인 문학 형식으로 그것이 표현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작가의 의식이 투여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은, 오히려 어떤 외부의 충동만이 그의 삶을 거꾸로 추동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건 여성적인 것의 어떤 신화가 단지 재현될  수만 있을 뿐이며, 그것은 현재의 삶과 분열적 차원에서 어떤 잔여일 뿐이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가리키는 것 아닐까. 

    따라서 〈엔들링스〉를 보는 건 이 여성 신화적인 차원의 미디어적 프레임, 그리고 타자를 재현하고 구성하는 지식, 또는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차원에서 감행되는 타자화를 동원하는 행위, 그리고 타자화됨을 겪어내는 순진무구한 존재들의 양상으로부터 불편함을 끊임없이 겪게 되는 것과 같은데, 결국 이는 하영 자신의 내재적 비평의 이행으로서만 윤리적 심급을 정초할 수 있는 부분이다―그렇지 않다면, 그가 이방인으로서 타자라는 것은 그에 대한 해명과 변명에 머무를 뿐이다. 

    물론, 하영의 자기 너머의 차원을 향하는 시도는 자기의 불완전한 현재의 한계와 연관 지어 나타나며 그 반대급부로서 자기 초월적이고 또 온전한 삶으로 자리 잡는 것임을 추정하는 것 역시 가능하다. 그러나 전자를 통해 후자를 극복하거나 후자가 전자로 통합되거나 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그의 정체성은 그 사이에 있으며, 현실은 오직 하나의 현실로만 주어진다. 

    그의 문학이 자신의 타자성―백인과 비백인-아시아의 축―을 지각하고 돌파하기 위한 또는 그의 정체성을 (재)발명하려는 시도의 차원에서 또 다른 타자성―인간과 자연 혹은 전근대와 근대의 축―을 호출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일종의 원초적인 무의식을 발명해 내는 것과도 같다. 그것은 백인이 원주민에게서 자신의 익숙한 것을 다시 취하는, 타자성의 섭취를 통한 자기되기의 일환으로, 앞서 그가 해녀를 보듯 그를 지켜보는 백인의 시선을 해녀에 대한 시선에 재투사하는 것과 같다. 

    그는 타자가 아닌 그의 타자성으로서 존재들을 불러오며, 일종의 팔루스로서 “백인”이라는 기호를 재체현한다. 그가 자신을 해녀의 삶의 연장선상으로 위치시킬 때 그는 백인이 바라보는 타자의 자리로 소급되며 안정화된다. 자신은 자신의 역사적 특이성을 되찾고 정체화되며, 백인의 무의식적 타자의 자리를 형상화하고 충족시킬 근거를 마련한다. 이때 아시아적 타자의 형상이 주조된다. 

    따라서 소영이 자기 자신에게 쓰이는 아시아라는 프레임 너머의 백인 주체를 역으로 바라보는 시도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윤리적인 심급을 이룬다. 그것은 닫힌 공동체, ‘한 종의 마지막 생존 개체‘를 뜻하는 제목에서처럼 자족적인 공동체로서, 해녀들의 삶은 그 바깥의 세계로부터 자유로운 듯 보인다. 어쩌면 이들의 카메라 앞의 수행은 그것이 그들을 왜곡할 것이라는 우리의 인식을 깨뜨리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그 일상의 차원에서 공고하다. 

    여기서 자아의 효능감은 하영이 백인들의 세계에서 그들의 인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자아의 찌그러진 초상과는 대비를 이룬다. 어쩌면 거기에 구원의 요소가 있을 수 있는데, 곧 〈엔들링스〉는 백인의 시각적 충족을 위해, 그들의 자리를 수여하기 위해 예외의 자리를 선취하는 것일지도 모르는, 백인의 자리로부터 이탈되는 그 예외의 위치를 제3의 공간, 곧 완전히 다른 예외로의 비약을 통해, 예측할 수 없고 판단할 수 없는 횡단을 통해 전치시킴으로써 자신을 ‘전적으로’ 재배치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는 백인-비백인이라는 하나의 환상의 축을 전유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평평해지는 어떤 순간, 곧 생존의 차원만이 남는 인류의 마지막 순간이라는 종적 차원의 결말로 소급해 본다면, 그것은 연대의 차원으로 전이될 수 있지 않을까. 제목에서처럼 ’엔들링스‘는 단지 특정 해녀의 삶에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결국 한 개체, 인종, 국가를 뛰어넘어 우리가 맞이할 미래의 한 서사를 선취하기 위한 개념 아닐까. 


    곧 백인의 심급에서 타자로서 아시아인 소영의 위치가 그에게도 역시 타자인 해녀의 위치와 교차한다는 건 백인-소영/해녀의 이분법적 체계로 재구성되며, 확장된 아시아인의 스테레오타입을 만들기도 하지만, 해녀의 삶이 전적으로 다른 타자로 소영을 경유해 백인으로 연장될 때, 곧 도시가 갖는 자본주의의 영속한 발전주의 서사의 차원을 재고하는, 생존-멸망의 새로운 관념의 위치에서 그 둘이 연합, 교차하며, 백인/소영-해녀의 새로운 이분법적 체계에 다다를 때 ’엔들링스’는 하나의 진리적 수사로서 공동의, 공통의 미래를 예기하는 순간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가능성의 부분에서 〈엔들링스〉는 여전히 불안하고 모호하다. 

     

    김민관 편집장 

     

    2025.05.20 ~ 2025.06.07 화수목금 7시 30분 / 토일 3시

    Space111

     

    기획/제작 두산아트센터 대전예술의전당 제주아트센터
     셀린 송(Celine Song)
    번역 조은정 임지윤(PIC)
    연출 이래은
    드라마터그 김지혜
    윤색 전서아 *윤색 대본은 연습 과정에 사용됨
    출연 경지은 박옥출 백소정 양대은 이미라 이훤 홍윤희
    조연출 김태령 이은채
    프로덕션 무대감독 이효진


    무대/소품디자인 장호
    무대제작 에스테이지(s_TAGe, 대표 이윤중)
    제작팀장 정우상
    제작팀 김세진 권오준 이종민 차승호 정우근 임대환 정재현 박호준 이승윤
    작화팀 작화공간
    작화팀장 이남련
    작화팀 박지원 이재형 김유진 김용선 이정민
    소품제작 아이엠(im)


    조명디자인 신동선
    조명어시스턴트 김은빈
    조명오퍼레이터 전현식
    조명팀 전현식 홍주희 홍유진 원종욱 허정현 정하영


    음악/음향디자인 임서진 
    음향/영상오퍼레이터 김태령


    영상디자인 박영민 
    텍스트/자막해설 디자인 이청
    텍스트/자막해설 오퍼레이터 이수림
    영상제작 앨리스 스튜디오 프로젝트 (대표 방지현)


    의상 디자인 김미나
    의상제작 코스튬스토리
    의상 어시스턴트 백송이


    분장디자인 장경숙


    인형/오브제 제작 문재희


    움직임 디자인 이윤정


    액팅 코치 장재키 
    사투리 지도 손혜정 
    코미디 워크숍 김진아 안담 
    무대 크루 정지아


    접근성 기획/운영 플랫폼안녕(대표 이청)
    접근성매니저 이청
    터치투어 제작/운영 이청


    투어 프로덕션 운영 아트팟 (대표 오득영)
    투어 프로덕션 매니저 김명주 
    투어 프로덕션 무대감독 이지혜

    그래픽디자인 포인터스(Pointers)
    사진(프로필·설정·연습·공연) 만나 사진작업실(대표 김신중)
    사진(관객과의 대화) 스튜디오1024(대표 이재호) 
    영상(공연 실황) 헤즈스튜디오(대표 김선우)
    SNS콘텐츠제작 필루미에르(대표 이화승)
    인쇄 으뜸프로세스
    프로그램북 협력 에디터 김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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