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ODAFE 2026] Spark Place #2_조준홍, 이정은, 유하은, 김영웅: 시간의 이행에 대한 몇 가지 방식들REVIEW/Dance 2026. 6. 21. 23:50
조준홍, 〈The happening〉: 이행과 의지의 간극…
[MODAFE 2026] Spark Place #2ⓒHanfilm[사진 제공=(사)한국현대무용협회](이하 상동). 〈The happening〉은 의자와의 긴밀한 관계 맺기를 통해 2인무에 가까운 안무를 선보인다. 가령 의자를 두고 바닥을 미끄러지며 의자를 스쳐갈 때 멈춰 있는 의자는 굳건한 존재에 가까워지는데, 그것은 무심하고도 냉정하게 남자―조준홍―를 외면하거나 무시하는 것이다. 조준홍은 처음 하수 뒤쪽에서 의자를 잡고 의자 다리로 바닥을 찍으며 등장하는데, 이는 일종의 의자와 결합된 삼보일배와도 같다.
이를 무대 중앙 쪽으로 호를 그리며 이동, 순간 의자를 넘는데, 의자는 일종의 불협화음의 산물로, 그를 순순히 맞아주지 않는 사물로 나타난다. 앉을 때마다 비켜나가는 건 조준홍의 의식하지 않은 사전 행위가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던’ 존재의 직후의 행위로서 완성되는 것이다.
이 같은 자기 모순적 행위의 시차는 일종의 연극적, 마임적 차원에서 통용되는 제도적 규칙에 의해 해석될 수 있는데, 그것은 해석보다는 표현 역량에 따른 판단으로 갈음되는 부분이다. 곧 의자의 교묘한 사전 조작의 행위와 그 같은 속임수에 의해 순진하게 실패하는 인간의 행위라는 일련의 장면은, 실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구성되는 조준홍의 역량으로서 낙착된다.
또는 비의식적 행위의 어떤 정초와 그로 인한 의식적 행위의 실패라는 해석의 차원에 따르면, 사물을 존재화하지 않고서도 그러한 일련의 흐름이 성립될 수 있는데, 그럼에도 사물은 절대적인 매체로서 그로부터 분기하게 된다. 이때 발생하는 제목과 같은 ‘사건’을 일으키는 건 의자―순수한 비의식을 증명하는―인가, 아님 (무의식적) 의지인가.
〈The happening〉이 보여주는 건 채 의식하지 못함의 한 단면으로, 그에 따르면 착오와 실수는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어떤 환원적 결말이 아니라, 사후적으로 재접지되어 비로소 완성되는 인식의 기제에 따른 산물이라는 것이다.
곧 그가 그렇게 사전에 움직였었기 때문에 그는 실수할 수밖에 없었다라거나, 그가 사전에 움직임을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가 실수했다는 것이 교훈적인 차원으로의 환원이라면, 실질적으로 이 사건이 밝히는 건 그가 무언가 이상하다고 인지할 때에 그는 사전에 움직였음을 깨닫고, 그제야 이전의 시간이 사후적으로 앞서며 시간이 재정립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성찰적 차원이다.
조준홍은 의자 아래에서 상의를 벗어내고, 결국 의자에 앉아 옷 뒤집어서 함께 벗겨졌던 모자를 끄집어내는데, 그리고 고개를 숙여 매직으로 뭔가를 크게 크게 그린다. 모자는 의자와 마찬가지로 그가 다루기에 까다로운 대상인데, 그가 직전 벗어놓은 모자에 미끄러지는 것에서부터 의자-모자의 연쇄적 ‘공격’이 이어진다.
무엇보다 상수 뒤쪽에서 모자를 무대 통로로 던진 후 바로 하수 앞쪽으로 던져진 모자를 엎드린 자세로 슬라이딩하며 낚아채는 장면―이는 그 포착의 순간에 의해 이전 모자의 던져짐이 사후적인 것으로 재조정되는 어떤 착각의 종합을 향한다.―은, 모자가 매우 중요한 사물이면서 긴급한 사건의 소재가 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가 모자를 벗으며 쓴 건 명확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일종의 타원형의 동그라미 두 개와 호로, 일종의 웃는 얼굴이다. 이 같은 광대적 양상을 경유하는 희극적 의미의 기입은, 다소 공허한 현실에 대한 구멍마개로서는 부족한데, 오히려 그것을 공허한 행위 자체로서 증폭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것은 일상을 어찌 됐건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숙명에 대한 어떤 제스처일까. 무엇보다 〈The happening〉은 행위와 의식의 단락을 재조명하면서 오로지 행위와 움직임만으로 우리의 성찰적 기제, 일상의 한 단면에 숨은 철학적 의미를 공명해 낸다.
이정은, 〈Not to Do〉: 일자와 같은 이자의 근본적 움직임
〈Not to Do〉는 두 존재의 긴밀한 상호 연루된 관계의 움직임을 선보인다. 이는 최근 선보였던 김민서의 〈닳아 닮다〉와의 흥미로운 비교의 시각을 낳는데, 〈닳아 닮다〉가 두 사람의 허리께에 묶는 끈이라는 물리적 지지체를 통해 자연 일정한 엮임과 얽힘, 그 장력 바깥으로의 힘의 운용이 그와 함께 두드러져 나타났다면, 〈Not to Do〉는 그러한 지지체 없이 더 고정적이고 안정된 차원에서 둘의 얽힘을 표현해 낸다―오히려 그것이 없기 때문에 자율성의 추구 대신에 미적 정형성의 구성에 대한 단단함을 추구할 수 있게 된다.
모로 선 둘은, 김예은이 하수 쪽으로, 이정은이 상수 쪽으로 위치하며, 약간 사선의 비틀림이 자리하는데, 객석에서는 예컨대 그것이 하수 쪽의 연장이라면, 이정은이 그 앞쪽 김예은의 틈으로서, 후방 부대로서 자리한다고 기본적으로 감각됨이 조금 더 증폭될 것이다. 여기서 비틀린 신체의 굳건함이 이정은에게서 강력하고도 강렬하게 드러난다.
처음으로 돌아가 보면, 거의 둘이 평행하게 유선형의 움직임을 점진적으로 그리다가 마치 상대를 턱으로 쪼듯 고개를 순간 들이미는 두 단계의 반복된 중심 움직임에 이르기 전에도 역시 움직임은, 그러니까 움직임은 순서로는 김예은에서 이정은으로 ‘항상’ 먼저 작동했는데, 가장 처음의 움직임은 얼굴을 상대에게 들이미는 것으로서, 지향성과 관계의 차원이 채 명확하게 분화되기 전 상태이며―그것은 일자의 차이를 분별하고 인식하는 단계라 할 수 있다.―, 이는 상대와 맞춰 부드럽고 유연하게 접촉하며 흐름을 만드는 것과 상대를 밀어내는 과격한 행위의 차원으로 연장되는 셈이다.
이때 먼저 움직임을 제시하는 김예은에 비해 뒤따르는 움직임의 이정은이 그에 굴하거나 압박당하지 않는다는 것이 앞선 이정은의 굳건함에 대한 인상적 차원을 수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비틀림의 정면성에 기인해, 그 움직임이 김예은의 틈에서 은밀하고도 강력하게 밀고 들어옴이 인식되는 것이다. 곧 김예은의 ‘사전적’ 움직임은 이정은의 반향적 움직임이 갖는 결정적 차원에 이르러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이정은의 강고함은 그 둘의 움직임이 일종의 상호 규약에 의거한 놀이라고 해도 놀라운데, 왜냐하면 상대의 침입 혹은 침투는 그의 등으로부터 여전히 제어되지 않은 선조건으로서 이정은이 아닌 ‘우리’를 조여 오기 때문이다. 〈Not to Do〉는 작품 설명에서처럼 “출산과 커리어”를 직접 현상하는지는 의문이지만, 근원적으로 정초하는 움직임으로써 매우 인상 깊은 시간의 마디를 응축해 나간다고 하겠다.
유하은, 〈나의 무중력이야기〉: 상호 배면으로서 무중력
〈나의 무중력이야기〉는 세 존재―유하은, 정종웅, 최진솔―의 뒤엉킴의 다양한 변용적 사태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단위적 질서 차원에서의 일정한 행위가 단속적으로 일어남을 의미한다. 무중력은 상대에게 올라타는 행위로써 세 명이 겹쳐졌을 때 한 명이 빠져나가며 자리바꿈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처음 동작보다는 누운 한 명 위에 다른 한 명이 얹고 그 위에 나머지 한 명이 앉고 나서, 중간 존재가 빠지고 나서야 구조가 깨지며 그 중간적 존재의 효능이 두드러지게 되는 약간의 접촉을 경유한 ‘분리된’ 쌓아두기/겹치기를 통해 명확하게 드러난다.
곧 후자에서 일정한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마지막 존재가 허공에서 버티고 있음의 어떤 순간, 무중력이 감각되는데, 셋의 자리바꿈은 유동적 차원에서 서로 맞물린 채 갱신되어 나간다. 특히, 하수 아래쪽 뭉쳐짐에서 상수 위쪽 조형된 구조를 만드는 것으로 이행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셋의 그림자 같은 결착됨이 발생하는데, 곧 거리를 일정하게 유지하면서 곁을 지켜내는 것이 그것이다―이때 집단적 움직임의 구조체적 발생은 언뜻 유빈댄스의 집요하고도 유기적인 얽힘의 감각을 상기시키는 일면이 있다.
〈나의 무중력이야기〉는 쌓아감의 안무이며, 그것은 공간적 차원을 조명하기보다 오히려 시간적 차원에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관계의 이행적 측면을 담는다. 곧 그것이 “이야기”, 곧 시간의 차원이다. 반면 이는 “나”로서 한정되지 않는데, 곧 검은색 바지에 연갈색 얇은 와이셔츠를 공통되게 입은, 따라서 서로에 대한 명확한 구분을 유예하면서, 서로에 의해 지지되는, 셋의 엉킴과 그 공통의 토대 안에서 재정립되는 위치성 자체는 무중력을 공간적 차원에서 재의미화하면서 공통의 나, 혹은 나를 초과하는 나를 현상한다.
김영웅, 〈BABALIMAN〉: 한 변용적 인격의 초상
〈BABALIMAN〉은 제목과 같이 바바리코트를 입은 한 남자―김영웅―의 원맨쇼라 할 수 있는데, 극은 일종의 자신을 느와르적으로 상연하는 것에 가깝다. 곧 그는 무대에 서 있음을 인지하고 있고, 또 한편으로는 그 배역에 깊숙이 침잠되어 있다. 그는 하수 뒤쪽에서 헐레벌떡 뛰어오며 등장하는데, 중앙부에서 사선으로 내려오는 조명의 기울기가 그것을 체현한다. 그리고 등장 지점에서 상수 앞쪽을 잇는 직선의 공간을 따라 그는 앞에 이른다.
그의 행보는 정처 없고, 또 우발적이며 무대 전체를 휩쓸고 다닌다. 또한 과장되어 있는데, 이는 일견 그 부풀려진 과잉된 옷 자체에 기인하면서 또한 그 옷 자체로 인해 그렇게 표현된다. 이 원인이자 결과로서 버버리코트는 그 자체로서 극적 변용을 이루는데, 일종의 절대적인 상대로 변용하는 의례를 거쳐, 함께 춤추고 마침내 벗어젖히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소요된다. 상수 앞쪽에서 버버리코트 한 팔을 뻗쳐 그를 지근거리에서 마주하는, 김영웅‘에 더해지는’ 버버리코트 뒤편의 누군가와는 꽤 오랜 마주침의 지속이 있다.
이는 일종의 변용적 의식을 향한 절차처럼 감각되는데, 그 지속을 통해 마치 버버리코트 단면 자체가 김영웅을 초과하며 연장되어 의중을 알 수 없는 신비한 존재로서 유예되는 것으로 전도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김영웅으로부터, 김영웅으로 향하는 이 뒤집힘의 과정은 침묵과 숙고, 지연의 과정이며, 어떤 변성의식적 차원의 효과를 가져온다. 앞서 한숨을 쉬고, 멈춰서 얼굴을 씰룩거리고, 꿈틀대는 여러 동작은 그가 이성보다는 이성을 잃을 만치 어떤 제어 불가능한 감정적 사태에 처해 있음을 의미한다. 그는 대신 그것을 표현하기보다 상연한다.
처음 검은 장갑을 끼고 있던 그는 장갑을 벗은 한 손과 다른 맨손의 박수를 통해, 이질적인 신체 접촉의 감각을 더한 바 있다. 이는 이 버버리코트 반쪽의 다른 상대를 가정하는 움직임에서도 연장된다고 할 수 있는데, 버버리코트를 팔을 낀 채 벗겨낸 후, 양팔에 대롱대롱 매달린 옷과 함께 춤을 추기 시작할 때, 이제 분기되는 반쪽은 명확하게 나를 마주하는 것으로 변화하게 된다.
그는 무릎을 굽히고 모아서 앞쪽으로 뻗은 두 팔에 낀 옷과의 높이를 친한 것으로 일정 정도 조정하는데, 이는 동시에 그 바깥의 옷이 그를 둘러싸고 있다는 감각을 증폭한다. 곧 그 옷-존재에 의해 그는 감싸이고 조종당한다. 일종의 마임에 가까운 이 시간은 앞선 과잉의 상태를 합리적이고 유연하게 제2의 존재와 결합시킴으로써 그 힘을 안정화하면서 극적으로 고양시킨다.
〈BABALIMAN〉은 기이한, 알 수 없는 정동의 남자를 통해 우연하고도 유연한 차원에서 움직임들의 격발과 자의성, 그리고 마법적 전환의 차원 등을 의뭉스럽고도 무모하게 시도하는, 그리고 그를 통해 어떤 알 수 없는 인격체를 승인하는, 한 편의 소극과도 같다고 하겠다.김민관 편집장
'REVIEW > Danc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미숙, 〈거의 새로운 춤 1.5〉: 회고적이거나 긴박한 과거와의 시차 (0) 2026.06.21 마르코 다 실바 페레이아 Marco da Silva Ferreira, 〈카르카사 CARCAÇA〉: 혁명을 혹은 공동체를 체현하는 몸 (0) 2026.06.20 [제25회 서울국제즉흥춤축제] International Relay 즉흥 공연: 즉흥과 춤의 상관관계 (0) 2026.06.20 모든컴퍼니, 〈창조력〉: 상상력을 자유롭게 발현시키기 (0) 2026.06.19 안나 페어손, 〈산 짓기〉: 구조에 대한 실험 그리고 이념 (0) 2026.0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