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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양구 작, 안경모 연출, 〈잔류시민〉: 실재-역사에 대한 환류 작용
    REVIEW/Theater 2026. 6. 22. 16:15

    실존적 주체의 각성

    이양구 작, 안경모 연출, 〈잔류시민〉[사진 제공=서울연극제](이하 상동).

    〈잔류시민〉은 6.25 전쟁 발발 이후, 인민군 치하에 있던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부역자 재판을 다룬다. 이는 9.28일 서울을 수복하고 나서 중공군의 개입에 따른 익년 1·4 후퇴까지 짧은 시기에 해당한다. 이때 ‘비상사태하의 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 조치령’에 의거한 일련의 재판은 ‘전쟁’에 비유될 만큼 무자비하고 폭력적인 면을 보였던바, 이에 깊은 고뇌에 빠졌던 실존 인물 유병진 판사의 회고록이 『잔류시민』의 주요한 출발점이 되며, 그의 회고록을 따라 그것을 개선하는 과정 전반이 주요한 줄기를 이룬다. 

    “단순 조력 행위”에 대해서도 “초중형”을 선고하던 당대 상황은, 극 마지막에 이르러, 실제 여러 사건의 병합된 선고를 하는 실제 법정을 여는 것으로써 현실화되는데―이때 15인의 피고인의 출석 응답은 입체적인 굴곡으로서 객석에 소위 얹어지며, 관객을 대리 체현하며, 또한 조도는 극명하게 높아진다.―, 판사 병호가 한 번 법정 휴정이란 뜸을 들인 후, 피고인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할 때, 그는 법정의 거리를 지우고 무대 앞까지 나와 극장을 흡사 법정으로 전유하는 가운데 무대는 현재화된다. 

    이때 그가 체현하는 건 시민 사회의 동시대성이며, 시민으로서 관객에 대한 겸허한 입장으로, 이는 역사를 재활성화하는 반성적 이성의 담화를 이룬다. 그런데 여기에는 변증법적 솔기 또는 간극이 있는데, 그의 아내 오수인의 직언과 그에 대한 병호의 어떤 성찰로서 뒤늦은 응답의 짧은 순간이 그것으로, 그가 재판장석에서 시민 사회로 ‘내려오는’ 절차는 상징적이고도 환유적 차원에서 정치를 구성한다. 그리고 15번째 피고인의 “최후 진술”에서 자신의 사형을 기꺼이 수용하겠다면서 다만 그와 동시에 자신의 갓난아이를 함께 사형시켜달라는 여자는 타자로서 객석을 가로지른다.

    반면, 그가 오수인에 대한 새로운 인식, 자신의 아내를 연약한 생명에 대한 자비와 연민을 가진 근원적 인간의 상징적 이미지로서 정초할 때, 그의 판결은 그 연장선상에서 법을 초과하거나 다소 모호하고도 신비한 이미지가 겹쳐진다. 거기에 해당하는 비유는 오수인의 생각과 오수인이라는 존재에 모두 해당되는데―곧 달과 달을 가리키는 손 모두를 가리키는데―, 인간 생명의 고귀함에 대한 오수인의 생각을 경유한 성찰 자체이거나 새삼 그러한 사고를 하는 인간이었음을 사후적으로 구성하는 변증법적 각성의 과정에서 존재 자체가 재고찰될 수 있음의 가능성을 오수인이 체현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수인을 통한 인식과 오수인에 대한 재인식의 두 지점에서, 병호의 사유는 후자의 ‘불성’을 가진 시민으로 연장되는 셈인데, 이때 사라지는 매개자가 될 것 같았던, 오수인은 마지막에 다시 자신의 존재를 기입한다. 그것은 서기와 독대하는 장면으로, 서기가 재판 과정을 보며 틈틈이 적어 온 수첩을 청해 받아보며 나누는 대화로 이뤄진다. 이때 “주문”과 “이유”가 대비되는 개념 쌍을 이루게 되는데, 판결 결과로서 주문과 그것에 정당성과 합목적성을 부여하는 이유는 전자만이 맹목적 차원에서 적용되는 시대 상황에서 그것과 분기되는 개념들로 재조정되고 있는 셈이다.  

    법 너머에서

    서기의 말은 조금 다른 가능성을 내포하는데, 이는 일정하고 독단적인 이유를 산출하는 주문의 비이성적 현재의 상황을, 기록의 차원으로 연장할 때 얻는 효과에서 기인한다. 곧 역사적 사실로서가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동시에 그것에 가려진 맥락, 선고가 아닌 주변부의 목소리에 대한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때 서기는 진정한/초재적 매개자의 역량을 구현하는 듯 보이는데, “주문”이 실은 “더 오래 남는 게” 아니라고 반문하고 있으며, 그에 따른 오수인의 응답은 그것이 곧 “이유”임을 재차 확인하고 있다. 

    그러니까 비합리적인 법의 현재에서 법의 일시적, 잘못된 차원을 쇄신하고, 들리지 않고 소거되었던 목소리가 현현할 것임을 그는 법 내재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역사라는 더 넓은 차원에서 희미하고도 명확하게 기입하는바, 그것이 곧 그 반문인 것이다. 그런데 이 희망적 바람의 표면적 정동은 역사로서의 내기이며, 역사에 대한 내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마지막 이미지가 덧붙는데, 그것은 죽은 자들, 곧 유령이 귀환하는 시간이다. 그것은 곧 무대의 기억으로서 고착인 동시에 잘못된 주문으로 인해 죽은 사람들을 물론 포함할 것이다. 

    막의 전환 구간의 무대 재배치 시간에 스태프로서 배우들은 일상의 시간을 벗어나서 흡사 신체를 강탈하러 온 적의 형상 혹은 은밀한 간첩의 형상으로 투여되는데―등장하지 않고 지시되는 인민군의 형상이 아닐까.―, 그 대상은 결국 무대 내 사물의 옮김이라는 점에서 위협적 자태가 긴급한 상황의 흐름 아래 용해되는 그 과정은 역설적으로 희극적이며 일정한 연극의 물리적 한계를 처리하는 데 겪는 한계점을 노출한다. 
    반면, 맨 처음과 끝은 조금 더 입체적으로, 다양한 역사의 한 존재들을 기억의 차원으로 고착~변용시키는데, 이때 폭격기 소음은 그 전체를 하나의 위급한-위태로운 상황으로 포집한다. 이는 이러한 전쟁 중의 혼돈은 곧 일상으로의 변전에서 그것을 지배하며, 마찬가지로 법의 현장에서도 연장됨을 보여주기 위한 마임 이미지적 안무이다. 

    어쨌든 무대의 재배치 과정 안에서, 마지막 법정 장면은 무대 시작 전의 이미지로 복구된 채 이뤄지며, 더 구체적으로는 하수 안쪽의 평상 위에 테이블을 올린 재판관석과 그 양쪽으로 모로 놓인 두 개의 테이블과 의자 들로써 법정이 재현된다. 재판관석 양 옆으로는 의자들이 무더기를 이루는데, 물론 그것은 무더기로 사형 선고를 받은 시민들의 시체더미를 상정할 것이다. 
    더 지배적인 것은 끊긴 다리의 환유―한강 다리를 끊고 도망간 이승만 정권을 직접 상기시킨다.―로서, 비계로 짠 기다란 직사각형 구조물 3개이다. 이는 하수 뒤쪽에서 앞쪽 중앙부로 이어지며 전반적으로 시선을 거스르는 또는 찌르는 하나와 그것과 교차되는, 그것 뒤로 상수 앞쪽에서 하수 뒤쪽으로 나란히 걸린 두 개이다. 


    이 움직이지 않는 구조물들이 현상될 때는 폭격기 소음과 함께 조명이 안쪽에서 밀려올 때인데, 이 소음과 함께 구조물의 무게가 (비로소) 현상된다. 사실 이 다리 구조물은 그것들이 노출한 전선과 같이 왜상의 흔적으로서 붕괴된 사회를 직접 노출하면서도 실은 영속하는 법의 뼈대를 상정하는 듯한데, 사실상 다리의 기능을 상실한 오브제가 분화하는 지점에서 적의 공격이 아니라 내부적 분열의 차원에서 응결되는 사회의 차원이 그로써 기입되는 것 아닐까, 곧 붕괴가 아니라 ‘분열’을 나타내는, 초재적 파지로서 드리워지는 그 존재의 현 상태가 말이다―예컨대, 마치 법은 분해되지 않고, 부러질 뿐이다. 


    법은 현실에 비추어 비판의 대상이 되어 새롭게 정초되고, 현실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잠재적/임시적 영토로 분화한다. 이는 현실을 반향하는 법, 그리고 현실을 부정하는 (의사-)법의 최종적인 구분 아래, 법의 진정한 정신을 논구하는 것과 같다. 이유가 아닌 주문만 남는 법의 현 상태를 가리킬 때 법이 의문에 붙여진다면, 법 내부의 틈새를 찾아 대안을 찾으려고 하는 병호에 의해서 법은 우회적이고 기능적인 차원으로 다시 적용되기에 이른다.

    반면, 형법의 “행위론”을 다루는 승호의 말에서 법은 현실에 대한 부정확한 단정을 논구하면서 비로소 명확해진다. 지난 날 선배의 모습으로 검사를 독대한 승호의 말은, 형법의 행위론이 말하는바, 앞선 인간의 비상사태와 같은 불가피한 상황에서의 부득이한 행위는 인간의 행위로서 규정할 수 없는 셈이므로 법으로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인데, 이는 검사의 엇나간 지금의 실행의 자리를 과거로 소급하면서, 사변적이고 추상적인 법의 근본적 원리를 새삼 환기하며 교육적 차원으로 부각된다. 

    죽음충동으로부터

    승호는 〈잔류시민〉에서 독특하고도 예외적인 인물인데, 그는 전 서울지방법원 판사였지만, 인민군 법원자치위원회 위원장을 맡은바, 죄의 상징성이 크며, 그리고 역시 그를 숨겨둔 대가로 사형 선고를 받고 재판에 임하며, 실제 사형 선고에 상응하는 진정한 충격 효과를 받기는 하지만, 또 다른 친구 판사에 의한 무죄 판결이 예견되었던 오수인과 달리, 사형에 처해지며, 그것은 거의 유일한 것이다. 

    그는 병호 이전에 판사의 권한과 위치에 대해 먼저 성찰하여 교훈을 주는 인물로 자리하는데, 판사는 자신이 심판의 입장에만 일방(향)적으로 있기 때문에, 정작 자신의 사형을 받아들일 적절한 준비나 항변의 근거를 마련할 수 없다는 말은 결정적이다. 이는 그의 무기력함의 표면 아래, 판사의 일반 시민으로서의 무력함의 위치에 자신을 기꺼이/헛헛하게 귀속시키는 말인데, 곧 그의 무기력(한 현 상태의 시민으로서 진동)은 그의 시민 됨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가운데 자조적인 것이 된다. 

    그는 분명 병호와는 다른 인물인데, 그는 진지하지만 농담도 구사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그 농담이 진정한 것을 가로지르기 때문이다. 그는 죽음충동에 입각한 인물로, ‘파괴된 세상’에서 단죄하거나 단죄되는 이분법적 논리의 세계의 질서에 더는 속하고 싶지 않은 인물이다. 병호는 그에 대해 “전쟁으로도 파괴할 수 없는 것들”―그것이 물론 (승호의) 생명이라면―을 이야기하고 법의 역할을, 법(으로)의 재건을 이야기하지만, 적어도 승호는 “나는 여기에 남은 게 아니야. 갈 곳이 없었을 뿐이지.”라고 직전에 먼저 말한 것처럼, 그와 이미 죽어간 이들을 분리 지을 수 없다. 

    그는 잔류시민이었고, 그들 모두에게 적어도 무죄가 아닌 죄를 적용할 수 없음을 이렇게 말한다, 마치 그의 죽음으로써. 아마도 이는 오수인을 통해 미리 언급되었는데, 그 역시 자신의 부역 행위에 대한 단죄를 막기 위해, 정치적으로 대리/위임 주체로서 사형 선고를 마땅히 내릴 병호의 역할을 스스로 거부할 것을 요청한다. 그러니까 자신에 대한 죽임당하지 않음의 은밀한 정치적 행위를 거두어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겠다는 이 말은, 병호를 냉정한 남편의 자리에 대한 시험에 들게 하는 대신, 그의 양심을 진정 일깨우는 효과가 된다. 

    오수인이 가정에서도 당신이 판사냐고 하며, 비판의 정석적 발화를 시전할 때, 페미니즘의 이념이 즉각 가동된다. 이런 말들이 병호에게 진정한 각성의 계기를 안겨 주었으리라고 보이지는 않는데, 오수인이 병호에게 이질감을 안기면서 분리되는 부분은 극 전반의 흐름에서는 다소 이물감으로 감각된다. 그러니까 그것을 경유한 병호의 주체적 갱신이 이뤄졌는지는 추적할 수 없는 것이다. 어쩌면 드라마적 결론은 중후반의 승호와 병호의 앞선 대화로, “자네는 살아 있다는 게 뭐라고 생각하나?”라는 승호의 이 질문은, 이 찢겨져 나간, 죽음충동 자체에 쌓여 있는 주체의 신음과 같은 것으로, 그것은 물론 대답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죽어 있음과 다름없는 승호의 상태를 과잉으로 또한 결여된 신체로써 표현하는 이 말은, 승호의 사실상 마지막 말로, 이후 승호의 죽음이 직접 등장하거나 언급되는 건 아니지만, 대신 오수인과 단 둘의 대화 속에서, 환상적으로 미리 출현한다. 오수인은 면회에서 포승줄이 묶인 승호에게 계속해서 대추를 입에 넣어주고 승호는 그것을 씹고 빤 뛰 그 씨를 번번이 뱉어 낸다. 이 대추는 승호와 오수인의 어렸을 적 친분을 드러내는 환유물이 되는데, 곧 대추나무가 많았던 동네 골목을 상기하는 한편, (시신 대신) 대추씨를 마당에 묻어 나무로 자라 그 마을로, 어린 시절의 강렬한 기억으로 돌아갈 수 있음을 염원한다. 

    민중의 형상 

    죽음은 오수인을 경유해 승호에게 도달한다. 이 둘은 공통적으로 죽음의 순간을 경험하고, 그 죽음으로부터 곧 오수인, 승호 각각 사형이 언어적으로 지시되며 이어 최종 발언의 기회를 주었을 때 숨이 턱 막혀 언어가 더는 불가능한 사태에 처하거나, 형장을 향함을 인지할 때 몸이 경직돼 고꾸라지는 신체적 증상으로 드러난다―이는 지문에 대한 비언어적 수행의 몫이다. 
    죽음은 대부분 형장으로 직접 이어지지 않고, 법적 언어의 형태에서 기입되거나 역사의 차원을 기입한 법적 문서로써 갈음된다면, 따라서 불특정한 다수라는 일차원적인 숫자를 넘어서지 못한다면, 둘에게는 그 죽음의 언어가 신체에 미치는 찰나적 효과로서 예외적으로 현상된다. 

    죽음은 오수인에게서처럼 목숨보다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거나 승호에게서처럼 삶의 의미를 상실한 것 같은, 또는 찾을 수 없다고 감각하는 것 같은 경우, 주체에게 귀속되는바, 죽음이 어떤 사유의 지점에서 결정되는 그 부분에서 현상될 때의 특정 주체의 부각은, (헛된 죽음의 역사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의미화하는 것이 가능한 지점을 찾으려는 작가의 윤리가 연장되는 부분이겠다.

    잔류하는 것들

    병호의 “전원 무죄”라는 선고는 전적으로 승화된 감동을 안기기보다 법의 실체적 가벼움과 역사적 혼란의 상황에 대한 자조를 불러오는 데 더 가까운데, 그것은 작품의 결말이 병호의 영웅화나 신성화 따위와는 상관이 없음을 의미한다. 오수인이 그가 다른 판사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한 것은 병호의 판사로서 윤리를 지키려는 과정 전체를 비하하거나 기각하는 것보다, 오히려 그 역시 죽음의 의무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권리를 ‘우연히’ 붙잡고 있음의 견지에서 살펴볼 수 있으며, 그것은 승호라는 평행 세계의 차원에서 충분히 참조될 수 있는 부분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의 행위가 물론 잘못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연한 일을 실천하는 것으로, 이를 법관으로서 어떤 특별한 성취나 시혜의 차원으로 여길 수는 없다는 것이다. 〈잔류시민〉의 마지막 법정 장면의 전원 무죄 판결은 고양되며 어떤 결말을 뚜렷하게 향한다기보다는 역사의 순간을 한 번 더 반복함으로써 역사 자체를 실재화하기 위해, 곧 역사의 시간으로 순순히 연장되기 위해, 공백의 시간이 도래하는 바와 같다. 오히려 승호의 암시적 죽음, 그리고 오수인의 마지막 일갈과 함께 이미 극은 종료되었으며, 죽음 이후에 극은 방향을 돌려 현실로 연장되는 것이다. 

    현재화는 언어도단의 역사에 대해 그 초점이 있으며, 이는 역사를 애도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 현재의 차원에서 반복될 수 있음을, 또한 우리의 문제일 수 있음을 일러주는 데 가깝다. 이때 병호의 권리 역시 시민됨의 질서 아래 동등하게 존재하며, 더 위의 존재가 아니라, 평등하게 하나의 세계 안에 서로를 마주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직접 건네주기 위해서, 이 장면은 진정 존재하며, 그래서 그 너머의 목소리들을 실제로 불러오기 위해, 곧 그것을 병호를 듣는 이로 재구성하기 위해 존재한다. 

    〈잔류시민〉은 필연적이게도 ‘우연히’ 서울에 남아 있는 시민들을 적(대)의 대상으로 삼아 마구 처벌하던 한 시대의 광기가 집약된 법을 톺아보면서, 법 역시 자의적이고, 또한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인간의 행위 조건을 유연하고 유동적으로 고려하며 인간의 행위를 고찰하는 가운데 법의 틈새를, 틈새로서 법을 찾아나가야 함을 전제하는 것으로 보인다. 

    역사야말로 ‘잔류’하며, 현재로 되돌아온다. 〈잔류시민〉은 시대의 분위기 속에서 마구 죽어 나갔던 사람들을 법정 현장을 경유해 되불러오며, 그것은 마지막 정욱의 꿈속 승호의 유령에서처럼 언어화되지 않지만 잔류된 것에 대한 어떤 감각으로 돌아온다. 이는 막간의 다른 스태프~배우들―이들은 적의 형상이거나 원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다.―과도, 처음과 끝에서 역사의 활인화 기법으로 모든 등장인물들이 특정 기억에 고착된 모습을 그리는 것과도 다르다. 

    승호는 그와 같은 모습으로 유령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곧 그 전에 향후 사회적으로 곤란한 대상이 될 승호의 시체를 병호와 수인은 안티고네 식으로 기꺼이 데려와 묻어주고자 하는 것이 언급되는데, 그러니까 실재는 곧 상징계를 거스르거나 그것 안에 기입되지 않는 것이 되며, 그 바깥으로, 그 경계를 횡단하려는 주체들에 의해 현상되는 것이다. 그러니 〈잔류시민〉의 수면 아래에는 사실 법과 역사의 공식적 이름 바깥으로 새어나간 실재에 대한 충동 같은 것이 잔류하고 있는 것 아닐까. 

    여성, 시민, 기록자

    〈잔류시민〉에서 여성적 주체의 반향은 중요한 심급을 차지하는데, 마지막 대단원의 재판 이전, 곧 승호-유령이 등장하기 전, 경자와 경숙 둘의 대화는 잔류한 시민들이 어떤 곤궁을 겪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줄 뿐 아니라, 법 자체를 향하지 않고 진정으로 갈등을 해소한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먼저 두 사람은 병호가 제안한 “현장 검증”에 증인 자격으로 참여하게 된다. 이 자리는 공소장에서 선거로 직행하는 법 집행의 타당성을 마련하고, 궁극적으로 그 관례를 검토하고 심문하기 위한 것으로, 과거를 단순하게 재현하지 않는 방식, 곧 과거를 비판적으로 고찰하며 그 틈을 찾아 새로운 미래를 여는 순간에 내기를 거는 것이며, 그 너머의 복기되지 않는 죽음을 사후적으로 추적하여 증명해 내는 것과 같다.

    경숙은 인민군 치하 여성동맹위원회에서 일한 전력이 있으며, 이로써 이웃집 여자인 경자에게서 그의 남편을 밀고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으며, 이에 인민군 부역 혐의를 인정받아 사형수 목록에 올라있던 상황으로, 두 사람을 현장으로 데려와 검증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경숙 역시 자신의 남편을 살리기 위해 부득이하게 인민군에 속하게 됐으며, 경자의 남편이 일제강점기 때 경찰로서 동포를 괴롭혔음이 시사되면서 지나간 두 시대상이 맞물리는 한편, 가족에 속박된 여성의 질박한 공통된 삶이 축출의 정치 아래 반목으로 갈라지게 됨을 역으로 추적할 수 있게 된다. 

    경숙이 현장에서 병호에게서 무죄 판결을 받고 경자와 둘만 남은 상황에서, 옥수수를 가져다 주러 온 병호의 아들 정욱으로부터, 경숙의 기지로 경자의 남편이 마루 밑에 숨어 살고 있었음을 어떤 경중을 따지지 못한 채 발설하게 된 사실을 끌어낸다. 이때 경자의 진실을 알게 됨의 허탈함과 분노, 원한 감정의 찌꺼기가 한 번에 밀려오는데, 이때 경숙은 경자를 다시 만류하며, 다시 그 남편이 왜정 때 자신들이 참고 살았던 것처럼 (일종의 체호프식으로) 참고 살아가라고 회유하고 경자는 이를 수긍한다. 

    매우 역동적인 정서의 흐름이, 그리고 이념과 폭압, 질곡의 역사에 대한 이미지가 이 짧은 관계 속에서 빠르게 흘러가는데, 경숙이 먼저, 그리고 경자가 그를 이어, 서로에 대한 원한 감정을 빠르게 소거하며 성숙한 주체로 이행함은 놀랍다. 그리고 이 둘의 쌓인 정서가 곧 더 심각한 갈등으로 흐를 수 있음을 걱정하며 그 자리를 잠시 머뭇거린 건 현장 검증을 따라 온 서기이며, 서기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주문과 이유 사이에서, 이유의 가치를 암시함으로써 일종의 역사에 대한 객관적 기록의 존재인 사관을 상기시킨다. 

    서기와 오수인의 대화로 재판의 여진을 다른 의미의 결정점으로 바꾼 것 역시 병호로의 의미 중심이 찍히지 않음을 의미한다. 곧 그의 실제 모델, 양심적 판사로 불리는 유병진이 남긴 책 『재판관의 고민』(신동운 편저, 법문사, 2008.)이 〈잔류시민〉의 주요한 모티브가 되었음에도, 이는 역사를 새롭게/다시 쓰기의 입장에서 시민을, 여성을, 역사에서 기록되지 않은 인물들을 주체로 기입하는 행위로 나아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역사를 재기입하는 어떤 방식, 또는 역사 자체를 재기입의 대상으로 바꾸어 갈 현재의 사람들로서 관객을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서기는 특정한 관객의 몫을 대리하는 이념의 산물이다―그는 연극과 현재의 경계에 있으며, ‘거의’ 연극의 바깥에 있다. 곧 이를 뒤집으면 그의 기록을 재생하는 것이 곧 〈잔류시민〉이다. 

    김민관 편집장 

     

    2026년 6월 6일(토) ~ 6월 14일(일) 화, 목, 금 19:30 | 수 15:00, 19:30 | 토 14:00, 18:00 | 일 15:00 (월 공연없음)

    대학로극장 쿼드

     

    출연 이종무, 정원조, 황은후, 백성철, 우범진, 이수진, 황규찬, 최정화, 김진희, 김태완

     

    창작진

    프로듀서 유인수

    연출 안경모

    작가 이양구

    무대디자인 도현진

    조명디자인 김영빈

    의상디자인 오수현

    분장디자인 이지연

    음악 윤현종

    무대감독 김방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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