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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 타이틀 매치: 홍이현숙 VS 염지혜, 《돌과 밤》: 주름의 두 가지 양태 혹은 이념
    REVIEW/Visual arts 2026. 7. 2. 13:56

    홍이현숙, 〈지금 당신이 만지는 것-인수봉〉(2024. 단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31분 24초,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제작지원.)[사진 제공=서울시립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의 “타이틀 매치”라는 제도적 형식은 두 명의 주연을 링에 세우고, 하나의 전시를 둘의 차이로 분화시키며 구성하는데―접근 방식과 표현의 양태 모두 비교의 근거가 된다.―, 《돌과 밤》은 세대 차를 가진 두 여성 작가, 홍이현숙과 염지혜를 전면에 내세웠다. 각각 돌과 밤이라는 추상적이고도 간단한 명사가 그 둘에게 대입되고, 이 둘을 엮는 서사로 재앙(=밤)과 재앙에 덮힌 사물(=돌)이라는 하나의 장면이 만들어진다.

     

    전시의 지형을 그리기 위해, 두 작가는 공통의 토대를 글로써 유추해 나가는 방식을 택했는데, 그것은 주제 의식을 향한 작가의 고유한 언어를 노정하는, 그 둘의 상응점을 건져 올리는 방식에 가깝다. 그리고 이를 낭독함으로써 작가의 신체성을 전면에 드러내고―여기서 자신의 목소리를 매체로 활용하기도 했던 홍이현숙에 비해 주로 그것을 다른 신체성에 양도해 왔던 염지혜의 그것은 조금 더 특이한 것이다.―, 심미적 기호의 생산이 아닌, 전시가 곧 작가라는 자양분을 뿌리 삼았다는 점, 두 작가로 수렴하는 전시의 특성을 체현하는 퍼포먼스가 된다. 그것은 둘의 유기성을 시험하면서 전시의 성격을 규정한다.

     

    시간의 차이로 보자면, 1층의 홍이현숙 작가의 전시는 낮이라면, 2층의 염지혜 작가의 전시는 밤이다. 반면, 주요 작업은 모두 영상으로, 더 집중된 관람이 가능한 건 당연히 후자다. 두 작가 모두 두 개의 영상 작업이 주요한 축을 이룬다. 그리고 앞선 전시의 출발점으로서 글은 이 영상을 다시 설명하는 근거가 될 것이다.

     

    홍이현숙, 〈지금 당신이 만지는 것-인수봉〉(2024. 단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31분 24초, 광목천에 크레용 프로타주, 1100×155cm(6), 사운드, 10분,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제작지원.)은 영상, 회화, 사운드로 분화된다. 이는 “북한산 인수봉 대슬랩 부분에 가로 1.6m, 세로 11.25m의 광목천을 6줄로 늘어뜨리고 작가와 7명의 베테랑 등반가들이 클라이밍을 한 상태에서 아래로 내려오며 크레용을 활용해 바위 표면을 프로타주”함을 찍은 영상과 그 프로타주의 결과물, 그리고 인수봉 부근의 소리를 녹음한 것이다.

     

    〈아미동 비석마을〉( 2024. 2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13분 42초.) [사진 제공=서울시립미술관].

    영상은 회화를 찰라로 완성하는데, 이는 드론을 이용한 일종의 수평축상의 부감 쇼트로 자연의 일부로, 얼룩으로 그 설치가 드러나는 일정 시간만을 의미한다. 그 나머지는 프로세스의 룰 아래 자의적이고 잉여적인 차원으로 기록되는데, 이는 작업의 과정을 보여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촬영 감독인 최황 작가의 경우, 영상에 일부 포함되기도 하는데, 그때 떨어지는 해상도는 그의 존재가 곧 카메라임을 누설한다.

     

    작가가 등반가들을 직접 작가의 지위로 인도해 나가는 과정에서 그 자신도 작업에 참여하기 때문에 그는 영상 작가의 지위를 적어도 현장에서는 양도하는데, 따라서 이 기록 영상은 카메라맨의 시점에 따라 분화되며, 거기에 따르는 자의성은 전적으로 이 작업이 그 자체로 엄격한 서사의 지침과 그에 따른 이미지의 설계가 불충분하다기보다 의도될 필요가 없었음에 따른 산출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서사의 지위를 시간을 대체하는 파편적 이미지들의 봉합으로 양도함에 따라 (이 영상이 두 개의 영상 중 메인 자리를 양보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사실상 그 짧은 시간의 완성을 놓치거나 중요한 것으로 인지하지 못하고 넘어가게 될 것이다―반면, 〈지금 당신이 만지는 것-월출산 시루봉〉(2023)에서 작가의 내레이션은 통합된 서사의 체계를 구성한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회화(의 완성도)가 아닌, 퍼포먼스 자체의 시간인데, 그것이 기록 차원에서만 반영되고 증거 차원으로 옮겨지는 가운데, 재현의 증거들로 회화도 영상도 자리한다는 사실이다.

     

    이 퍼포먼스의 흥미로운 지점은 이 퍼포먼스가 작업을 완성하기 위한 것인 동시에 그 작업하고 있음을 촬영하기 위한 것임이 전제된다는 것인데, 비가 와서 촬영 장비를 구동할 수 없는 환경에서 그것이 드러난다. 퍼포머의 행위가 가까운 거리에서 이미지로 치환됨―대슬랩이 작업의 지지체이자 환경의 지지체가 된다는 지점―에 따라, 그 행위 자체의 심미성은 잘 부각되지 않고 대화를 하듯 가까운 관계로―‘카메라맨은 그 사이에 끼어 있다.’―, 그 행위 자체의 반복성에 마취되는 경험을 자아낸다. 작가의 신체를 미디엄 쇼트 정도의 크기를 목 아래에서 허벅지 정도까지로 구현할 때, 잘린 머리와 함께 손과 벽이 일체화되는 모습의 긴 시퀀스 역시 그러하다.

     

    2024 타이틀 매치: 홍이현숙 VS 염지혜, 《돌과 밤》전시 전경.[사진 제공=서울시립미술관](이하 상동).

    이 퍼포먼스와 퍼포먼스 행위로서 기록의 차원은 제도적 차원의 자본의 투여와 함께 푸르지크 매듭과 같이 클라이밍 기술의 역사, 그리고 드론과 같은 촬영 기술의 역사의 혼합된 결과물이다. 크레용으로 거대한 천을 쓸어내리는 일은 산에 자국을 남기지 않으면서 접촉하는 과정으로, 따라서 천은 물감의 방어막이고 동시에 돌의 표면에 따른 등가물이다. 하지만 그것이 억센 탓에 그리고 그보다 더 뻣뻣한 탓에 섬세한 탁본이 될 수는 없다. 따라서 기록은 프로타주가 탁본으로서 유격되는 거리를 비추는 것에 가깝다.

     

    이를 다큐멘터리 차원의 범주에 놓는다면, 〈아미동 비석마을〉(2024. 2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13분 42초.)의 경우, 영화에 가깝다. 홍이현숙의 퍼포먼스 역시 그 안에 편입된다. 홍이현숙의 시선은 일제강점기에 일본 하층민이 죽어 묻혔던 아미동 비석마을의 역사로부터, 피식민국 일본과의 관계를 계급적 차원에서 가로지르며 또한 성차적 차원에서 교차하며, 이분법적 이데올로기를 조금 더 복합적인 차원에서 조명하며, 역사의 다시 쓰기를 감행한다. 쓸쓸한 현재의 역사로 드러나는 빈 마을에는 오로지 카메라의 시선과 홍이현숙의 신체-행위만이 자리하며 영상의 불분명한 시간성과 대기를 불안정하게 조율한다.

     

    짧은 부감 쇼트로 마을을 훑는 첫 장면은 자연 마을 안 구석구석 존재의 단면을 비추는 것으로 이전되는데, 곧 지도에서 촉각적 표면으로의 이동과 잠식에는 홍이현숙의 문지름이 있다―핸드헬드의 카메라 방식 역시 촉각적이다. 그것은 이 영상의 한계, 곧 추상적 역사와 공허한 서사 사이에서 강력한 실체적 증거로 기능하면서 이를 상쇄한다. 가령 댓돌을 밟고 다니며 비석을 닦고 구둣솔로도 문지르는 등의 접촉 과정은, 땅 아래를 시신의 공간으로 설정하고 ‘뛰어다니기 때문에 당신을 볼 수 있다’라는 오래전 일본인의 내레이션-시점으로부터 의미화되는데, 바로 그 지점에서 역사는 현재적인 것으로 상기되고 바로 그 지점에서 퍼포먼스의 실재적인 공허함―빈 공간 안의 유령으로서 행위―이 하나의 서사로 견인된다. 그리고 그것이 이 작품의 전부이다.

     

    단순한 퍼포먼스의 실체, 그로써 강력한 진정성의 부산물로 자리하는 퍼포먼스의, 이전 홍이현숙의 그 같은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예외성을 띠는 이 작업은 영상의 완결적 차원에서 아직 본격적인 입구를 찾지는 못하는데, 퍼포먼스의 실재적임마저도 자칫 영상의 수려함과 드라마적 서사로부터 침몰될 수 있었던바, 또는 그것들로부터 (조응되지 못하고) 약분될 수 있었던바―이 퍼포먼스 외적인 차원은 이 영상의 단순함과 투박함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데, 그렇지만 더 순수하게 영상 차원에서는 아마추어적이었던 그래서 퍼포먼스의 진수를 그대로 투여할 수 있었던 바를 그로써 감쇄시키는 것이다.―, 가상의 서사를 실재로 치환하기 위해서는, 또 드라마를 초과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장치가 필요하다.

     

    구체적으로 동굴 아래 있는 듯한 일본인의 무대화된 공간이 이 마을의 외재적 차원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 주술의 효과가 신학적 차원에서 발현될 수 있으려면, 한국과 일본의 대등한 차원의 접촉이 상징적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둘의 만남이 필요하다. 그것은 물론 극복할 수 없는 시차를 동반하므로, 직접적일 수 없지만, 오직 접촉의 실재로써 보증되는 역사의 현재화라는 이념의 선상에서 그것은 분명 접촉의 효과를 동반해야 한다. 그리고 이는 가장 결정적인 장면, 모퉁이에서 빨래하는 홍이현숙과 배를 내민 채 기괴한 걸음 양식으로 유유히 그를 비켜 나며 지나가는 일본인, 곧 드디어 광을 낸 묘비로부터 깨어나 햇빛을 보게 된 존재, 그 둘의 교차됨으로 드러난다―여기서 신학적 차원은 드러나지 않지만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것에 있다.

     

    염지혜 작가는 신자유주의와 인류세의 전 지구적인 위협의 가장자리에서 홀로 번민하는 주체의 모습을 실존주의적 차원―그것은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 전개된다.―에서 형상화한다. 가면을 쓴 등장인물들이 나오는 〈마지막 밤〉의 전사는 〈한낮의 징후〉의 유년기 시절의 기억으로 이어진다―전시 구성상 전자에서 후자로 흐른다. 전자에는 명확한 참조 자료가 각인되는데, 이 자료상의 언어들이 엮이어 쓰이는, 이 언어들로부터 비롯되는 내레이션은 가스통 바슐라르의 『불의 정신분석』을 읽는 가면 쓴 주인공의 모습에서 체현되며, 이러한 모습은 다시 지의 탐구를 통해 인류의 위기를 깨닫고 회의하는 작가의 페르소나를 형상화한다―사실상 이 전체의 참조점이 되고 제목을 구성하는 건 주디스 버틀러가 『지금은 대체 어떤 세계인가』의 서문에서 “오늘이 이 세상의 마지막 밤이라면 어떡하나”?라는 존 던(John Donne)의 시구를 인용해 발화한 부분이다(곧 현재의 책 이전에 또 다른 책이 있었으며, 이러한 책의 횡단이라는 모티브는 영상과 동명의 책 염지혜의 『마지막 밤』의 구현으로 이어진다.)

     

    염지혜, 〈마지막 밤〉[사진 제공=서울시립미술관].

    〈마지막 밤〉에서 시선이 스밀 수 없는, 패인 주름으로 번역되는 이 변화되지 않는 마스크의 비가시적인 목소리, 성대가 패는 그 거친 목소리가 가리키는 비정서적 산출은, 일종의 낯설게 하기의 시각화로 최후의 인류의 시간과 그의 지적 탐구의 실존적 방황의 장소가 합성되는 어떤 섬에서 작위적인 것으로 입혀진다. 이 최후의 시간에 대한 감지, 석탄 광산에서 “가스 냄새를 감지”하는 어린 새의 무모한 희생이 전이된 형태로서, “지금은 대체 어떤 세계인가”라는 파국을 인지하는 자와 같은 선각자의 질문으로 변모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 “깨달은 자”의 공허이다. 이는 보통의 “깨닫는 자”의 희열이 감당할 수 없는 질문을 떠안은 자의 회의와 비탄으로 바뀌는 시대적 맥락을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이 공허의 표정을 감추는 것이 또한 이 마스크이기도 한데, 이 해골의 도상은 영화 〈프레데터〉(1987)의 괴물을 연상시키는 외모이지만, 책을 읽는 지적 면모에서 출발하며, 곧 오염되고 비정상화된 인류의 마지막 모습을 연기하기 위해 그 외양을 임시로 취한 것임을 은폐하지 않는다. 곧 이 외모 자체가 형용 모순적인 인류의 상황에 대한 메타포로서 ‘착용’됨으로써 다분히 두려움은 내재적인 것으로, 그리고 그의 우스꽝스러운 처지와 같은 자기 조소적인 것으로 전도된다. 또한 “지구는 열에서 시작했고 열에서 끝날 것이다”라는 문장과 같이, 그의 전신 복장은 열을 체감하는 피부로써 동시에 그 피부와 피부 사이의 열을 가두는 틈을 또한 상기시킨다.

     

    석탄 광산의 어린 새는 〈한낮의 징후〉에서 “망했다 / 망한 기분이다”라는 초반 대사에서처럼 세계로부터의 징후적인 것과 개체로 전유되는 느낌적인 느낌을 겹쳐 놓음으로써 또한 가정되는데, 이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나을 수 있는 것 같은 상황 속에서 무엇을 하는 게 나을까”라는 후반의 반문처럼 염세주의적 전제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안을 찾고자 하는 화자의 무력한 의지로 끝나는데, 이는 예술의 자기 지시적 탐문, 곧 세계의 몰락에 맞서 예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느냐의 물음, 일종의 예술의 효용론으로부터 작업이 시작됨을 드러낸다.

     

    염지혜, 〈한낮의 징후〉[사진 제공=서울시립미술관].

    이에 대한 희망적 해결이 〈한낮의 징후〉에서는 과거의 기억을 소급해 자연을 경유함으로써 그 실패를 지연시키며 최종적으로 승화시키는 것으로 나타난다면, 곧 도착적 시제를 통과한다면, 〈마지막 밤〉은 ‘마지막 밤’의 의식 혹은 퍼포먼스를 통해 다음날, 일종의 정지된 회화로서 연출된 마티에르를 품은 바다의 풍경을 넓게 조망하는 것으로써, 흐미 창법과 같은 소리와 함께, 종말의 서사라는 정념이 바다의 풍경과 연접되면서 ‘서사 이후’의 정념을 간직하는, 보존하는 장소로 환원시키며, 절망에서 구원을 암시한다. 과거로의 시차적 소급이든 장소로의 분리적 환원이든 승화는 임시 변통적인데, 그것은 〈마지막 밤〉의 처음이 “delay”를 명시한 것처럼 또 다른 이름에서 ‘지연’ 전략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둘이 보여주는 건 예술의 감지적 역량이 예술의 표현적 역량으로 전이되는 과정이다.

     

    여기서 〈마지막 밤〉에서 바니타스 정물의 전통을 연장하는 해골의 춤―이는 또한 수직적 선분으로 강조되는 움직임을 통해 기계 문명의 쉼 없는 가속과 그것의 탈진적 소진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곧 그것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전적으로 수행적으로 전유한다.―에 대응하는 건 〈한낮의 징후〉에서 개울가의 어린아이들의 놀이이며, 중요한 참조점으로 도입되는 엘 그레코의 그림은 여기서 의미적으로 징후적인 무엇을 표현한 작업의 참조점으로 나타나는 한편, 실제적으로는 전유되고 수행되는 것으로 바뀌는데, 곧 그의 그림이 그려진 복장을 입은 파란 가재와 그와 대비되는 붉은색 전신 타이즈와 주름 덩어리 얼굴의 두 퍼포머가 냇가에서 놀이하며 어린 시절의 유희와 그 정취를 드러내는 것이 그것이다―이는 또한 무념무상의 상태로서, “어릴 적 빗소리에 맞춰 노래를 불러지었던 것”처럼 이는 노스탤지어적 정취를 간직한다.

     

    마지막으로 〈마지막 밤〉의 마스크는 “오직 주름만이, 죽음만이 가속을 늦출 수 있다”는 발화에서 주름과 죽음 모두를 함축한 얼굴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주름은 촉각적인 지각의 표면인데, 앞서 해골 인형의 전신 타이즈에 검은색 선분들로 그어놓은 2차원의 표면과는 다른 것이다―이 주름은 목소리의 차원에서도 응결되는데, 전반부의 깊게 패는 그의 목소리로, 또 후반의 흐미 창법의 이중적 목소리의 겹침으로 구현된다.

     

    주름은 또한 죽음에 대한 성찰의 상태를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단순한 죽음의 도상과는 차이를 갖는다. 이 성찰은 죽음을 연기시키지는 않지만, 죽음을 맴돌면서 죽음에 어떤 깊이를 만든다. 그것이 곧 외적 강도로 나타난 것을 주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기이하게도 이 주름은 홍이현숙이 만지는 각종 돌들의 주름과 공명하며 전시의 상징적 모티브를 구축한다―시간이 접히는 주름이 밤이라면, 물질이 접히는 주름을 돌이라 할 수 있을까.

     

    김민관 편집장

     

    2024.12.05~2025.03.30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1층 프로젝트갤러리1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1층 전시실 1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2층 프로젝트갤러리2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2층 전시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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