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희윤, 이초록, 《핑킹가위 증후군》: 하나의 공간으로서 작품, 디자인 혹은 명명을 통한…REVIEW/Visual arts 2026. 7. 5. 14:13

양희윤, 이초록, 《핑킹가위 증후군》 포스터. 《핑킹가위 증후군》은 세운상가의 상품을 적재하는 공간인 10의 n승을 활용해, 여러 오브제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적재함으로써 가장 긴 면이 3미터 남짓인 윈도우 공간을 잡동사니 사물들의 우주로 ‘나열’하며 ‘디자인’한다. 두 명의 작가로 양희윤과 이초록이 각각 글과 디자인으로 참여했는데, 그 둘의 역할은 꽤 모호하게도 혼재되고 또 혼동된다.
우선 《핑킹가위 증후군》은 하나의 윈도우 공간 전체가 하나의 작품이며, 수많은 사물 배치로 이뤄진 이 하나의 작품을 일일이 나열한 캡션을 일종의 하나의 글로 볼 수 있는데, 일종의 서문 역할을 하는 또 다른 글에서 양희윤은 우리, 곧 양희윤과 이초록에 포함되는 최초의 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는 이 전시 제목이 탄생하는 순간이기도 하며, 동시에 이 두 주체의 작업, 나열 행위로서 글과 디자인이 가진 당위를 선언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초록의 작업실에서 핑킹가위 세트를 발견한 순간“, 양희윤은 “이미 여러 개의 가위를 가졌지만, 굳이 핑킹가위 세트를 산 그의 행위를 옹호하고 싶어”진다. 그 뒤로 둘에게서 전시명은 “일상에서 평범하게 쓰는 도구나 버려야 하는 물건을 관찰하고 그것만의 다름을 찾는 강박증”을 뜻하게 되었다. 그 이후 더 적극적으로 물건을 “사고 모으고” 그 물건뿐만 아니라 부대적인 자재들을 하나의 오브제로 인식하며, 그것들을. “자르고 붙이고 만들고 그”리는 행위를 통해 “비로소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소유는 끊임없는 소비의 기제, 충족되지 않는 갈망, 소비-수집을 통한 사물에 투사하는 자아의 욕동을 보여주는데, 결과적으로 이초록의 행위를 하나의 증상으로 발견하는 양희윤의 관점을 따라 ‘우리‘의 욕망은 ‘우리’의 행위로 이어지게 된다. 이 속에서 모호하게 되는 건 이초록의 본래적 욕망의 정체, 그리고 그것이 과연 증상이었는지의 여부인데, 이는 곧 양희윤과 ’우리’ 사이에 또 다른 간극은 무엇인지인 것이다.
아무튼 ‘우리’가 구성되고 나서 ‘우리‘의 행위로 연장되는 과정의 일부로서, 소비에 대한 모종의 합의와 공동의 규칙을 상정하는 행위를 추정할 수 있으며, 이는 곧 공동 적재의 순간들로 발현된다. 그 과정에서, 통상 작가의 행위는 레디메이드를 수집하고 일부 그 위에 덧붙이거나 가공하는 행위―그 결과물들은 다시 수집의 대상으로 전이된다.―로 대체되며, 이 두 행위는 동일선상(의 가치)에 놓이는 동시에 둘의 분별되지 않는 동시적 행위로 갈음되는 가운데, 작가의 행위는 디자인으로, 그리고 디자인에 대한 명명으로 분화하는 동시에 최종적으로 작업은 그 둘의 합성된 결과로 정의된다.
여기서 앞서 언급한 모호함은 작가의 작업에 대한 사물의 대체라는 작업의 결과, 곧 어디까지가 작가의 행위가 투여된 것인가에 있지 않고, 그 대체의 새로운 자리를 형성하는 글과 디자인이 어떻게 분기될 수 있는지에 있다. (공동으로) 수집된 것들의 나열은 일종의 디자인(적 과정)이며, 또한 거기에는 명명이 전제된다―명명은 사물의 (또 다른) 나열 행위이다. 무언가를 수집할 때 그것의 명명이 동반되는데, 그 두 행위가 각자로 정확하게 재단되어 분화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들을 최종 적재하는, 배치하는 행위 자체를 예외적으로 “디자인”으로 (특화시켜) 두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에 따라 배치-명명의 최종적 갈음을 “글”로 (마찬가지로 특화시켜) 두는 것이라면, 이는 다소 공동의 기반에 대한 비중을 도려내는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이 과정을 명시함으로써 디자인은 더 포괄적 의미를 띠게 되는 동시에 새롭게 정의된다. 그것은 작가의 행위 이후에 부산되는 요소가 아닌, 작업의 행위를 갈음하는 범주가 되며, 동시에 그 작업 자체이다.
다시 강조하면, 《핑킹가위 증후군》에서 캡션은 캡션을 쓰는 행위 자체의 특정함을 드러내며 캡션 자체가 곧 하나의 글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떤 사물들의 소유가 각자에게 귀속되지 않는다는 것, 전시가, 하나의 작품이 그 둘의 산물이라는 사실은 소유라는 개념이 그 전시를 보는 그 바깥의 시점에 의한 하나의 또 다른 소유로 변경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앞으로) 다시 다르게 소유해야 할 대상”이라는 서문의 말은 바로 이 지점에서 현재화된다.
김민관 편집장
2025-05-10 - 2025-05-31 관람시간 10:00-20:00 휴관일 일요일
10의 n승 세운상가
'REVIEW > Visual arts'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금시랑, 《뒤의 달 Black Moon》: 심연적 실재를 거스르기 혹은 뒤돌아서기 (0) 2026.07.05 2024 타이틀 매치: 홍이현숙 VS 염지혜, 《돌과 밤》: 주름의 두 가지 양태 혹은 이념 (0) 2026.07.02 신정균, 《예언과 시나리오》: 믿음의 체계 혹은 비틀림 (0) 2026.06.30 《영혼은 없고 껍데기만》에 대한 주석: 가상을 가설하는 것이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될 때 (0) 2026.06.26 김희천, 《스터디(Studies)》: 이미지의 잔여 혹은 내파된 시각체제 (0) 2026.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