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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정, 〈나는 여기에서 모든 것을 숨쉰다〉: 숨을 바라보는 법REVIEW/Dance 2026. 7. 5. 14:13

이윤정, 〈나는 여기에서 모든 것을 숨쉰다〉 ⓒ안초롱[사진 제공=서울시립 서서울미술관](이하 상동). 이윤정의 〈나는 여기에서 모든 것을 숨쉰다〉(이하 〈숨쉰다〉)는 제목이 가리키는 바와 같이, 숨의 가시화, 숨의 제어와 숨을 통한 신체 전반의 제어로써 숨의 언어를 보여준다. 여기서 숨은 숨을 다루는 테크닉 혹은 메소드인 동시에, 그것의 결과 자체이기도 하다. 지금 여기의 근거가 강조되는바, 그것을 채우는 건 숨으로 바뀌는 모든 것이다. 이 문장에는 두 개의 목적어가 자리하는데, “나”는 ‘숨을 쉰다’라면, 그 나머지의 것 혹은 그를 포함한 “모든 것”은 자율적으로 숨을 쉰다라기보다 타동적으로 숨을 쉬는 것이 된다. 그럼에도 ‘나’가 그 모든 것을 숨을 쉬게 한다
이윤정 안무가는 지난 〈아무도,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닌〉에 이어 이번 작업의 제목 역시, 언어를 내파하는, 언어가 교착되는 지점에서 움직임을 정의하고 있는데, 그것이 실제 나타나는 양상, 그것이 근원적인 차원의 움직임이라 한다면, 이는 언어 이전의, 더 정확히는 언어가 채 도착하기 전의 사태로부터 출발하는 것에서 오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근원적인’이라는 말은 물론 기원으로 소급해 간다는 것이 아니라, 그 기원을 새로운 차원으로 접근하고 다시 쓴다는 것에 가깝다. 그 “소리를 내는 통로로서 몸”은 ‘숨의 가시화’로 소급되는데, 이때 숨은 모두 우리가 일상에서 쉬고 있는 그 숨과 물론 ‘근원적으로’ 다른 것이다.
나는 어떻게 모든 것이 자율적으로 쉬는 숨을 숨 쉬게 할 수 있는가, 아니 숨 쉬는 모든 것이 될 수 있는가. 나는 어떻게 모든 ‘곳’에 편재할 수 있는가. 궁극적으로, “나”와 “모든 것”은 어떻게 숨 쉼을 하나의 근거로 소급하기 이전에, 하나의 토대 위에서 구성할 수 있는가. 이윤정은 공연이 시작되기 전―정시 이전에―에 관객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특정 관객에게 붙고 의탁하여 숨쉬기를 하는데, 이는 상대의 호흡과 동기화되는 과정이며,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그 숨이 결정적으로 인식되는 계기를 만드는 건 “나”에게 있다.
이윤정은 편안하게 숨을 쉬고, 또한 상대방에게 숨을 불어넣는 것으로 보이는데, 관객은 이를 듣거나 체험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이윤정은 상대방의 숨을 함입하고 변조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곧 나는 여기에서 모든 것을 ‘받아들여’ 숨을 쉬는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실질적으로 중요한 건 (숨을) 쉬는 것 말고 그사이의 또 다른 동사인데, 그것은 모든 것을 ‘나’와 연결하며, 모든 것을 또한 ‘숨을 쉬는 것’과 연결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윤정이 공연 내내 눈을 감고 있다는 건 무엇보다 중요한 전제인데, 그것은 적어도 ‘모든 것’을 하나의 차원으로 분별하(지 않)겠다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이윤정은 시각성을 소거한다기보다는 몸으로 이전시킴으로써, 곧 ‘바라보지 않는다.’라는, 숨에의 온전한 몰입을 위한, ‘부차적’ 차원의 동사로써 거꾸로 모든 것의 응시의 대상이 되는데, 그것은 모든 것을 제각각의 형상으로 취하지 않고, 그로부터 반응하지 않고, ’모든 것’에 대해 평등하겠다라는, 무심하겠다라는, 그보다는 상대하겠다라는 의식을 보여준다. 이윤정이 숨의 근거를 장소적으로, 국소적 차원으로 처리하다 이후 중앙에 서는 본격적인 등장부터는 제자리에서 거의 고정된 채 한두 바퀴 정도의 회전 반경을 그리는 것이 다인데, 이는 곧 그의 숨을 전면에서 바라볼 수 있는 관객의 범위가 매우 한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그가 눈을 감고 있다는 건, 그가 시각성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다는 건 그의 숨이 전면화되는 신체를 우리가 마주하고 있다는 지점에서, 그것이 그것을 보는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여기서 본다는 건 숨을 쉰다는 것에 더 가까운데, 그것이 형상이 아니라, 공간화되는, 배경화되는 그런 ‘겨우’ 어떤 형상에 가깝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것이 되는데, 거기에는 각자에게 기준 없이 그것이 ‘더’ 혹은 ‘덜’ 적용되기 때문이다.
아래로 가만히 내려가 있던 팔이 들려 고개와 반대 방향으로 뒤틀리기까지 숨은 거의 몸에 머물러 있다. 숨을 바꾸는 건, 트는 건 다른 신체 ‘조각’을 경유해서인데, 이 신체의 분절은 얼핏 숨을 분절하며 그 순간 숨이 신체로부터 붙들려 있었음을 가시화한다. 숨은 물리적인 것이 되는데, 곧 물질화되는데, 이때 숨은 변경되는 것, 하나의 신체 용기에 담겨 있음의 정도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진정 분절되는 것이다. 팔을 고개 바깥으로 비틀고/당기고 돌아올/틀 때 숨은 더디게 들어왔다 급격하게 나가는데, 이때 숨은 가시화되고 물질화된다. 곧 숨은 동작에 묶였다가 이탈하며 바깥의 대상이 된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은 사실상 숨의 전부인데, 이윤정은 이 숨을 일종의 소리라는 물질로 결정시킨다. 아마도 이것이 공연―이는 기존 공연의 문법에서 정의될 수 있‘었’던 공연이다. 하지만 그것이 퍼포먼스가 아니라는 규정은 아니다―에서 가장 첨예해지는 부분이기도 한데, 들이마실 때 숨이 가시화된다면, 내쉴 때 목소리가, 구음이 물질화된다. 숨이 그를 통과한다면, 다음 숨은 ‘그’를 빠져나온다. 거기에는 분절이 따르는데, 그러니까 음의 근원은 그 몸을 가리키지 않고, 그 기원을 알 수 없이 다른 곳을 향하는 듯 보이는 것이다. 소리가 신체를 벗어나 있는 이 아쿠마스틱한 효과는 결코 외화면이 아니며, 소리의 기원을 진정 탈은폐하는 것에서 온다.
사방으로 분포된 몇 개의 스피커로부터 약간의 소음도 섞여드는데, 그것은 (목)소리의 기원을 심각하게 혼동시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소리들을 단순히 편재하는 사물로 두는 것이 아니라 대위법적 화성으로 그 (목)소리에 합성되는 것을 더 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는 그 (목)소리를 의태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목)소리의 사물성을 더 결정화한다. ‘숨-소리’의 이 절합되는 이행은 두 단계의 변용적 몸짓을 구가하는데, 그 사이에 급격한 몸의 기울어짐이 있다. 곧 서 있던 몸을 아래로 하강하여 숨에의 긴장을 낮추는 반작용적 순간이 그것인데, 이는 다음 숨-소리의 더 극렬화된 버전의 마지막을 향한다.
팔꿈치를 뒤로 당기며 숨을 급격하게 끌어당겼다가, 내지르며 특유의 소리를 내는 이 피드백 루프는 급격한 차원으로 전화되어 있는데, 그것은 탈진의 물리적 차원을 형상화하며, 조금 확장해 보면, 이 ‘소진’이라는 이념―탈진될 것 같은 상태를 향해 가지만, 그것이 소멸이 아니라 어떤 잠재성의 용출로서 드러나는―을 서사적 차원으로 매개하는 건 조도의 매우 더딘 감축이다. 이미지는 거의 분자 단위로 해체되는데, 그것은 눈이 거의 감긴다는 것, 형상이 어렴풋해진다는 걸 의미한다―누인 이윤정의 몸은 그 어둠으로 녹아든다 또는 그 어둠이 배어든다. 그렇게 숨(의 형해화됨)이 가시화되는데, 어쩌면 숨이 더 명확해진다는 것이기도 하다.
모든 것은 숨 아래 있다. 숨 아래 모든 것이 잠긴다. 그렇게 숨으로 가라앉는 공간은 숨으로 국지화되는 사물로서 몸의 가시화, 두 번째 숨-소리로 옮겨간다. 가장 명확한 건 이제 그 소리이다. 소리로서 동기화되는 움직임이다. 자신의 몸을 풀무질하는 발성 기관으로 전화한 몸이다.
‘나는 여기에서 모든 것을 숨쉰다’, 모든 것은 (확장된) 세계이다. 형상과 배경이, 존재와 세계가 구분되지 않는 어떤 환경이다. 그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숨으로 함입한다. 모든 것이 제각각 숨 쉬는 것임을 기각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이 함께 숨 쉬는 것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김민관 편집장
라이브 퍼포먼스
2026. 3. 18.(수) 18:00
2026. 3. 19.(목) 18:00
크레딧
안무/퍼포먼스: 이윤정
드라마투르그: 김재리
조명 디자인: 김형연
사운드 디자인: 홍초선
의상 디자인: 정호진'REVIEW > Dance'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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