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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메이크랩, 핍진한 미래에 대한 거리 두기 혹은 틈새: 〈뉴 빌리지〉(2025)와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2023)을 중심에 두고REVIEW/Visual arts 2026. 7. 6. 14:15

언메이크랩, 《올해의 작가상 2025》 전시 전경. ⓒ 언메이크랩. 언메이크랩의 영상들이 시작되는 장소는 모두 비어 있다. 그곳에 어떤 미래를 가설하기 위함이다. 〈뉴 빌리지〉(2025)에서 석양의 델타 위, 그리고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2023)에서의 불탄 산, 그리고 〈시시포스의 변수〉(2021)의 꼭대기가 그것으로, 이는 끊임없는 역설을 초래한다. 그것들은 일견 파국과 폐허에 대한 상상력과 연접해 있는 듯 보이는데, 〈시시포스의 변수〉에서 꼭대기에서 떨어지는 돌들은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에서 온갖 비인간, 인간 존재들에게 무차별적으로 가해지는 ‘신적 폭력’으로, 〈뉴 빌리지〉에서 도시 자체의 떨어짐으로 변주된다. 그리고 다시 쌓아 올릴 수 있는 건 인간을 경유한 언어, 이미지 따위를 데이터셋으로 다시 뭉쳐 인공지능 학습을 통해 재산출하는 것이다.
〈뉴 빌리지〉에서 자연의 텅 빈 땅 위의 붉음을 대체하는 건 “기술주의의 열망과 우리의 토건주의 이상이 결합”한 “선전 마을”로서, 똑같은 빨간색 지붕의 집들이 종과 횡으로 열을 맞춰 빽빽하게 들어선 대규모 스마트 시티의 이 건설은, 생태에 대한 신화와 기술에 대한 맹목이 ‘절합‘―이는 그 자체로 솔기 없는 매끈한 통합의 신화로 주조되는데, 가령 “생태와 기술의 최적화된 만남”이거나 생태와 기술이 “알고리즘 속에서 동등하게 결합”한 산물로 재포장된다.―된, 새로운 토마토 품종, “짭짤하고 달달한 맛”을 지닌 “솔티 스윗 토마토”로 브랜딩된다.
격자무늬 공간 안에서, 완벽한 구형의 이 토마토는 장애 없이 횡단 가능한 인공의, 이데아의 모빌리티를 구현하는 이미지로 표상된다. “땅이 없는 곳에서도 자라는” 이 토마토는 자연의 부재를 봉쇄하고 부인하며, 또한 완벽한 자연이라는 존재하지 않던 세계에 마침내 도달한다. “신경망이 토마토의 숙성이 아닌 시간의 방향을 학습”함으로써 “자동화된 도시 운영”의 모델을 구성한다. 여기에는 발전주의적 이상, 중단 없는 개발주의의 이념이 고스란히 연장되는데, 그렇게 미래는 낙관의 대상이 되고, “부정적인 역행 가능성과 다른 시간”을 표상하게 된다.
현실을 그대로 가져온 실사 화면의 인용은, 대규모 토마토 스파게티를 수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둘러싸고 만들고 있는 광경으로, 이는 이 발전주의의 서사가 현실에 대한 우스꽝스러운 짤과 대응되는, 이 끝없이 팽창하는 기괴한 세계의 시뮬레이션에 대한 거의 유일한 현실의 표지로서, 그 안에 소거된 인간 주체의 자리를 토마토에 대한 맹목적 군중의 실사 이미지로 봉합하는 셈이다. 그러니까 토마토로 점철된 이 세계의 서사에서 인간의 정념이나 의식이 개입되지 않는 부분을 채우는 건 평화롭고도 고양된 축제의 집단 표상으로부터 그것이 지닌 언캐니함을 새롭게 길어올리는 셈이다.

언메이크랩, 〈뉴-빌리지〉, 2025, 기록영상, 게임엔진, 단채널 비디오, 4K, 컬러, 사운드(스테레오), 24분. 작가 제공. ⓒ 언메이크랩. 차라리 여기에는 인간이 아닌 비인간 생명체가 투여되는데, 철새는 인간이 만든 거대한 모형 철새로 인해 떠나게 됐음을 주지하며 되돌아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가속되는 가상 시나리오는 도무지 어떤 결말을 가져올 수 있을지 모를, 그러니까 그 서사를 어떻게 해소해야 할지 모를 차원으로 기울어 가는데, 이때 그 간극에 들어서는 게, 꿰맨 흔적을 남기며 새롭게 시작되는 게 철새의 서사이며, 이 대형 모형의 철새는 스마트 도시에 대응한다. 그리고 그 땅은 다시 처음의 델타의 땅으로, 비어 있는, 인공이 들어선 자연이다.
처음 이 땅을 전유하는 버드 아이즈 뷰의 시선이 불완전하게 유동함은 이 철새의 시선을 따라갔던 셈으로, 이는 안정된 차원으로 도시를 조망하는, 그 이미지를 펼쳐놓는 인간-기계의 또 다른 버드 아이즈 뷰의 시선으로 전용된다. 결과적으로, 첨단의 미래를 향해 가며 자연과 기술을 결합하는 인간의 곤궁은, 기괴함을 더해 가며 어떤 종착지에 정확히 정박할 수 없는 지점에서의 서사의 곤궁으로 이어진다. 이때 철새의 시선이 체현한, 불안정한 이미지 질서, 곧 세계의 혼동 어린 시선은 미리 당도하며 징후적으로 자연의 이념을 표출하며 새로운 원점으로서 결말을 예비하고 있다고 보이는데, 이는 물론 사후적 차원에서 희미한 봉합의 근거를 이루는 정도쯤이다.
어쩌면 이 서사의 곤궁이 현실의 그것, 현실이 갖는 서사의 곤궁을 들여다보며 그것을 되비추고 되돌려주는 차원에서 용인되는 부분임은 분명하다. 따라서 언메이크랩은 의도적으로 서사를 매끈하게 결정짓지 않는데, 또한 시뮬레이션의 산출된 오류들을 다만 연합시킬 뿐인데, 다시 말해 그것을 초재하는 시선을, 역능을 의도적으로 발휘하지 않는데, 곧 그것은 현재의 한계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오히려 대안을 쉬이 용인하지 않으려는 어떤 태도에서 연유하는 것은 아닐까.
따라서 새로운 미래에 대한 가상은 오히려 현재의 핍진한 서사의 차원을 급격하게 가속하는 차원에서만 변주하는 것처럼 보이는데―각각의 절들은 덜컹거리며 나열되고 짧게 흥미를 이끌고 또한 어쩌면 ‘소비’되지만, 그것은 모두 비판을 위한 비판의 표식으로서 그러하다. 그리고 ‘나열’보다는 ‘수렴’의 방식을 택한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을 더 결정적인 작업으로 보고자 한다.―, 여기서 그것을 파생시키는 기계의 언어는 결국 인간의 언어를 ‘정직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전제로 소급되는 것이다.

언메이크랩, 《올해의 작가상 2025》 전시 전경. ⓒ 언메이크랩.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에는 일정한 내레이터의 발화가 자막으로 일관되게 처리되는데, 이는 주체를 예견하며, 그 발화는 마지막에 증폭되면서 현재에 대한 반성적 차원의 질문으로 자리 잡는다. 따라서 서사를 봉합하지 않으면서도 대안적 서사에 대한 지향점을 주체의 차원에서 내재적으로 위치시킴으로써 서사의 곤궁을 매듭짓는다. 이 지점은 결국 주체로의 승화 지점을 만들며, 세계의 내파를 주체로 체현해 내면서 고양의 효과를 만든다. 이 부분은 모호한 〈뉴 빌리지〉와의 차이를, 또한 극적 효과를 생산해 내는 부분이기도 하다.
곧 카나리아의 사진들을 통해 카나리아의 새로운 이미지를 생성시킬 때 “인간의 운동 범위와 지각의 범주 아래” 카나리아라는 이미지가 포박되어 있었음이 역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인간이 가진 시각 체계와 표준성을 드러”낸다. “야생의 시간”을 추적하며 야생의 존재들의 존배 방식을 포착하는 트레일 캠은 동물들이 캡처 이미지로 고정되는 과정에서, 기묘한 밈의 동향을 언급하는데, 곧 인간의 시각으로 고정되며 문화화되는 이 과정에서, 이 이미지들 역시 데이터 셋의 근거로 연장되고, 또한 자연사박물관의 “해부학적으로도 조형적으로도 이상”한 호랑이가 밈화되는 과정과 연결된다.
곧 박제는 “야생의 시간”을 “인간의 시간”으로 ‘인간의 이미지’로 인위적으로 분절한 것으로 정의되는데, 그것이 일종의 “해상도”를 높인 이미지라면, 네스호의 괴물이나 설인 같은 미지의 생명체에 대한 해상도 낮은 이미지가 통용되고 또한 한계였던 시기가 기술적으로 분절되면서 오늘날 그것을 대체하는 이미지로 트레일 캠의 기이한 이미지들의 자리가 또한 정의된다. 밈화된 이미지는 AI, 곧 암흑경을 경유해 재창출을 요청하지만, 사슴뿔에 비치볼이 걸린 그 이미지는 생성해 내지 못한다.

언메이크랩, 〈가정동물 신드롬〉, 2023, 부동산 전체 카메라 데이터셋, 생성적 공간 관리망, 단채널 비디오, 반복 재생, 종이에 프로젝션 매핑, 400 × 110 cm (3). 작가 제공. ⓒ 언메이크랩. “객체들 간의 뒤틀린 상관 관계만 존재하는 사진을 잔뜩 만들어” 내는데, 그것은 병치일 뿐만 아니라 조합인데, 암흑경은 단지 병치시킬 뿐인 것이다. 곧 비치볼만 두드러지게 이미지로 표상되거나 하며 사슴의 뿔 사이의 공간과 비치볼이 맞물리는 걸 상상하지 못한다. 이는 사슴뿔 위에 비치볼이 낀 우연한 사건적 발생의 이미지를 학습하지 못한 결과일까, 나아가 인간의 무한한 상상력이 아직 모두 이미지화되지 않았음을, 않을 것임을 반증하는 것일까.
기존의 것을 반복하는 기계의 미래 예측이 가리키는 미래는 거기에 진정 미래적인 것이 없다는 점에서 “비미래“와 같다. 이는 ‘닫힌’ 세계 내의 예측이며, 진정한 “외부”를, 차이를 허용하지 않는 미래로, 마지막 “아직 닫히지 않은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부르짖음은 그것들이 허용되는 걸 꿈꾸는 것과 같다. 미래가 과거에 의해 지워진―“중첩된”―, 이 현실로부터 궁구되는 “이것들(앞선 이미지들)이 속한 미래”와 “우리들이 속한 미래”는 결국 내재적인 우리의 한계로 수렴된다.
이와 대비되는 건 어릴 적 “미래감”인데, “올 여름은 즐거울 거야” 하며 초여름에 느끼던 즐거운 예감이 그것이다. 그것은 자연에 대한 본래적인 모습에 대한 믿음과 기대, 생래적 차원의 느낌인데, 그것은 예측 가능하지만, 차이와 새로움으로 체현될 것이기도 하다. 이는 역설적이지만, 인공지능 예측이 지닌 폐쇄 회로적 차원에 갇힌 화자의 답답함, 개인적으로 체현되는 그 부분에 대한 반동으로 주어진 무의식적 기억의 차원처럼 보이기도 한다. 반면, 미래는 그처럼 온당한 자연으로, 자연에 대한 인식으로 주어질 수 있을까.
오히려 그에 대한 회의와 부채감 등이 맞물리는데, 곧 이제 그 같은 미래감을 기대할 수 없는 시점에서의 일종의 노스탤지어적 감정으로 과거가 주어지는 것이다. 어떻게 닫히지 않는 세계로 접속할 수 있을까. 그것은 발전주의적 서사, 일방향적인 그 서사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인간의 비개입적 개입의 경로를 찾는 것으로써 가능해질까. 아마도 미래감은 어떤 이득이나 계산도, 특별한 개입도 없이 자연을 마주하는 인간의 어떤 태도를 뜻한다. 그것이 이상적이거나 순진한 것으로 자리잡는 이 시점에서 진정 필요한 것은 그것의 또 다른 반복일 것으로, 이는 인간 너머에서 자연과 재연결되기 혹은 재접지되기가 아닐까. 마치 자연이 인간 너머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곧 인간의 위에서 떨어지는 실재의 폭격인 것처럼 말이다.
김민관 편집장
올해의 작가상 2025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25. 8. 29. ~ 2026. 2. 1.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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